이상희(1960~), '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세상을 빠져나가려는 중이야
쉬잇 내 말을 들어봐
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다.시.는.돌.아.오.지.않.는.다
다시 돌아와도 찾을 수 없도록
도와줘 데이지, 내 얼굴을 먹어줘
내 의자와 찻잔을, 이름과
구두를 삼키고 동그란 꽃봉오리를
단단히 오므려버려 숱한 풀꽃더미
사이로 숨어버려 새 주소에도
검은 새떼가 그림자를 떨어뜨렸어
포크레인이 앞산을 퍼먹으며
뿌리 없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창문을
열면, 녹슨 모래언덕이 무너질 듯
데이지, 그런데 난 돌아오고
싶을 거야 야수와 포옹할 미녀를 기다리며
끝없이 기나긴 불안의 끄나풀이 되고 말거야
도와줘 데이지. 돌아올 수 없도록
내 생의 사진들을 먹어줘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해 한 여자가. 세상을 빠져나가면서
또 한 여자가 세월에게 묻는다. 왜 떠나야만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말해 줄게. 도와줄게. 나를 찾을 수만 있다면.
꽁꽁 묶어둘 수 있다면, 그러고 나를 잊을 수 있다면.
젊은 영혼아 네가 그럴 수만 있다면.
박상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