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1926-1956),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묻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이 시는 1956년에 쓰여졌다. 그 해 3월에 시인은 31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로 시작되는 시 '목마와 숙녀'와 함께 한때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졌다. 세월은 흘러 그대에게도, 잊혀질 그대 자신과
끝내 잊히지 않을 사랑이 다가올 것이다.
자신을 잃으면 사랑이 남고, 사랑을 잃으면 자신이 남는다.
박상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