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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1952 ̄),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거친 파도가 바위섬을 삼킬 듯이 몰아칠 때
세계의 집에서 지붕들이 고요히 벗겨지고
유리창들이 환상의 격투로 부서질 때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삶은 거기에서 발레리나, 발뒤꿈치를 힘껏 높여들고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춤추는 발레리나,
관절이 연결된 척추 마디에 삐걱거림의 꽃송이가
벙글어지듯 솟아나고
바알갛게 신음하는 복숭아뼈를 견디며
바닥을 차고 올라가는 하얀 높이로의 힘겨운 이행
발레리나의 춤이 그 연루된 뼈들의 고통을 잊을 때
꽃이 고통의 연루로 피어난다는 것을 잊을 수 있을 때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목 없는 닭이 어두운 구름을 앞질러 날아가는
새떼들을 쳐다보는 시선으로
주전자 입에서 펄펄 날아가는 흰 김을 바라볼 때
혁명은 힘겨운 척추뼈와 복사뼈 사이의 연루에 있고
목 없는 닭의 떨리는 눈 속에 있고
하얀 김이 펄펄 나며 하늘을 조금 밀어내고 있는
그 공기의 힘겨운 파장 속에 있고
환상이 상심과 더불어 솟구쳐 일어나고
사랑이 한번만 사랑일 때
혁명이 한번만 혁명일 때
주전자 뚜껑이 팔팔 끓어오르는 김의 힘에 밀려
딱, 하고 저절로 벗겨져 떨어질 때
고통이 빚어내는 에너지. 화가 고야(1746~1828)는 중병으로
말년에 청각을 잃는다. 전기 작품은 색채의 화려함, 생명의 율동, 관능이 넘친다. 말년의 작품들은 악마적 분위기, 광기, 허무, 폭력이 난무한다.
그러나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조명마저 어두운 전시실에서
그의 작품들은 전율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날아라. 고통의 에너지에 실린
우리의 육신이여.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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