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명(1965~ ), 「면도」 전문
벽 속에 그의 수염이 있다.
벽 속에 그의 얼굴이 있다.
벽 속에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다.
깎아내야 할 순간들이 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벽 속에 모든 것을 밀어넣는다.
밀어넣는 자신의 동작까지
남김없이 넣어버린다.
그리고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벽 속에 들어가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깎는다.
수염에 덮여 있는 얼굴을 깎는다.
얼굴에 섞여 있는
얼굴이 되지 못하는
얼굴
그 낯선 것은 얼마나 뒤늦게 떠오르는 것일까.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깎인 얼굴들이 세면대로 떨어진다.
뾰족한 얼굴들
새파란 얼굴들
어제보다 긴 얼굴을 달고
그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일까.
면도한 얼굴은 수직의 벽처럼 깨끗하고 매끈하다. 수염은 그 매끈한 직선에 저항하면서 자꾸 귀찮게 돋아난다.
벽을 더럽고 낯설게 만든다. 면도는 그런 일상의 수많은 일탈을 제거하거나 벽 속에 넣어 벽을 깨끗하고 매끈
하게 유지하는 행위다. 수염처럼 일상에 저항하는 ‘낯선 것’은 아주 천천히 자라지만, 깎으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진다.
김기택<시인>
김기택<시인>
번호 | 제목 | 글쓴이 | 조회 수 | 날짜 |
---|---|---|---|---|
공지 | 부활 - 친구야 너는 아니 (시:이해인) | 風文 | 53,446 | 2023.12.30 |
3930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새가 있는 언덕길에서 1~4) - 이해인 | 風文 | 281 | 2024.11.08 |
3929 | 사랑도 나무처럼 - 이해인 | 風文 | 223 | 2024.11.08 |
3928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김수영 | 風文 | 718 | 2024.11.08 |
3927 | 양지쪽 - 윤동주 | 風文 | 246 | 2024.11.08 |
3926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 6~9) - 이해인 | 風文 | 258 | 2024.11.06 |
3925 | 사랑과 침묵과 기도의 사순절에 - 이해인 | 風文 | 321 | 2024.11.06 |
3924 | 하...... 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 風文 | 243 | 2024.11.06 |
3923 | 산상 - 윤동주 | 風文 | 219 | 2024.11.06 |
3922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 1~5) - 이해인 | 風文 | 134 | 2024.11.04 |
3921 | 사랑 - 이해인 | 風文 | 207 | 2024.11.04 |
3920 | 파리와 더불어 - 김수영 | 風文 | 157 | 2024.11.04 |
3919 | 닭 - 윤동주 | 風文 | 179 | 2024.11.04 |
3918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흰구름 단상 18~21) - 이해인 | 風文 | 694 | 2024.11.01 |
3917 | 비 갠 아침 - 이해인 | 風文 | 641 | 2024.11.01 |
3916 | 미스터 리에게 - 김수영 | 風文 | 149 | 2024.11.01 |
3915 | 가슴 2 - 윤동주 | 風文 | 173 | 2024.11.01 |
3914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흰구름 단상 13~17) - 이해인 | 風文 | 710 | 2024.10.28 |
3913 | 비밀 - 이해인 | 風文 | 211 | 2024.10.28 |
3912 | 凍夜(동야) - 김수영 | 風文 | 242 | 2024.10.28 |
3911 | 가슴 1 - 윤동주 | 風文 | 172 | 2024.10.28 |
3910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흰구름 단상 7~12) - 이해인 | 風文 | 210 | 2024.10.25 |
3909 | 부르심 - 이해인 | 風文 | 199 | 2024.10.25 |
3908 | 싸리꽃 핀 벌판 - 김수영 | 風文 | 195 | 2024.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