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권(1940~ ) '누리장나무 잎사귀에는 낯선 길이 있다' 전문
봄날, 누리장나무 잎사귀에 오면
낯선 길이 하나 있다
누리장나무 잎사귀에 붙어 사는
민달팽이 한 마리
누리장나무 잎사귀 뒤에
제 몸 숨길 줄 알고
잎사귀 위에 올라와
젖은 몸 말릴 줄 안다
붉은 말똥가리 새끼
저 하늘에 떠도는 동안
꽃 피는 그 소리 움찔 놀라고
두 뿔에 감기는 구름
돌들로 감옥을 쌓고
말씀으로 예루살렘이 불타는
정든 유곽의 길을 지나
혁명(革命)의 길을 지나
봄날,
누리장나무 잎사귀에 오면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길이 하나 있다
민달팽이의 걸음을 따라 밭에서 한나절을 보낸 적이 있다.
이 잎사귀에서 저 잎사귀로 옮겨 앉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상춧잎 하나를 붙들고 몇 시간을 꾸물거렸다.
그런데 연하고 매끄러운 배를 밀며 지나간 자리마다 오솔길 같은
민달팽이의 길이 생겨났다. 제 몸에 다른 속도를 지녀보는 어려움
과 즐거움이 그 낯선 길 위에 있었다.
나희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