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1941~ ) '끈' 전문
낡은 혁대가 끊어졌다
파충류 무늬가 박힌 가죽 허리띠
아버지의 유품을 오랫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던 셈이다
스무해 남짓 나의 허리를 버텨준 끈
행여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물에 빠지거나
땅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던 끈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의 허리띠를 남겨야 할
차례가 가까이 왔는가
앙증스럽게 작은 손이 옹알거리면서
끈자락을 만지작거린다
한 개의 끈을 붙들고 나온 이래로 우리는 삶을 묶거나 잡아매는 수많은 끈 속에서 살다 간다.
오래된 신발처럼 그 끈이 느슨해지고 마침내 닳을 때까지. 크고 작은 끈들이 쳐놓은 울타리를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지만, 끈은 또한 우리가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게 해준다.
끈질기게, 끈끈하게 이어져온 끈.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아기의 난만한 눈동자를 보라.
나는 당신으로부터 왔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희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