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1968~) '고요' 전문
시간을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의 아삭거리는 속살에 닿는 칼이 있다
시간의 초침과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는 칼이 있다
시간의 녹슨 껍질을 결대로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이 제 속에 놓여 있어 물기 어린 칼이 있다
가끔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칼이 있다
그때마다 그물처럼 퍼덕거리는 시간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풍경과 풍경 사이…. 그 모든 사이에 시간이 머문다.
오랫동안 나는 시간은 머무는 것이라 생각했다. 머무는 시간과 시간 사
이에 인간의 욕망이 덧칠해지면서 지상 위에 포연과 상처와 슬픔들이
쌓여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싸움과 고통들 사이 사이에 시인과
화가, 자비심에 찬 철학자와 음악가.성직자들의 꿈이 가끔 버무려져 사
랑의 빛이 반짝, 빛나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시를 읽어가는 동안 젊은
시인의 상상력이 옆구리를 꾹 찌르고 들어온다. 모든 시간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고. 칼은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고, 그물 속의 물고
기처럼 퍼덕이며 튀어오른다고…. 그런 시간만이 버팅기며 생의 언덕을
오를 수 있다고…. 그런데 그렇게 언덕에 오른 시간들의 칼은 누가 또
감싸주지? 젊은 시인은 나직하게 대답한다. 고요…. 문틈의 아침 햇살
속에서 그를 느낄 때가 있다.
곽재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