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를 읽노라면 문득 황인숙 시인의「강」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당신이 직접/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강가에서는 우리/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과 박철은 각각의 시에서 고통과 상처의 치유방식에 대해 논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맺음과 이 지상 위에 기쁠 것 하나 없는, 그리하여 때론 미쳐 버릴 것 같은 현실의 배면에 우리가 지금 몸소 살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황인숙은 고통과 상처의 현실에 직면했을 때 이를 치유하기 위해 타인에게 그 고통의 흔적을 토로하기보다는 죽음보다 더 무거운 침묵으로 도도히 흐르고 있는 강을 찾아가라고 권한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 견뎌내야 한다는 것, 홀로 태어났기에 고독과 상처 그리고 죽음의 그 순간도 홀로 견뎌야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또한 내가 지금 외로울 때 그 누구도 지금 똑같은 고통의 질량으로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니, 저 홀로 강의 침묵으로 견뎌내라고 주문한다. 그에 비하면 박철은 좀더 대타적이며, 적극적인 형식으로 슬픔의 해소방법을 권한다. 자신의 슬픔을 핸드마이크를 들고 스피커가 찢어지도록 타인의 단잠을 깨우며 지상 위로 까발릴 때 그것은 어느새 희망이 되고 만다는 생각의 일단을 보여준다. 슬픔이 제 스스로 친구가 되게끔 어깨동무하고, 골방이 아닌 광장에서 껴안아보고, 뒹굴고, 꽹과리 놋쇠를 두드리듯 서로 즐기며 더불어 이야기하고 노래할 때 나에게 다가온 비극적 딜레마는 머잖아 끝장나리라고 그는 설파한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동년배 두 시인의 상처의 치유방식, 고통과 절망의 해결방식이 어찌 보면 확연히 다른 듯도 보인다. 그러나 저 스스로가 지금 슬프고 미쳐버릴 것 같은 고통의 현실에 처해 있음을 알고, 깨달은 순간 바로 그러한 확신은 결국 자기 의지에 의해 치유될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박철과 황인숙, 두 시인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고통과 상처를 감당하는 방법― 골방 구석에 앉아 넋 놓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강에게 달려가거나 혹은 탑골공원 벤치 뒷자리에서 자신의 처한 슬픔과 상처를 이야기할 때 그 치유의 길은 반드시 열릴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을 이 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시인/ 이승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