素月路에서

정호승

어느 봄날 소월로에서
김소월을 만났다는 한 소년이 있었다.

흰 고무신을 신고 국립중앙도서관 쪽으로
담배꽁초를 주우며 걸어가던 김소월이
소월시비가 어디 있느냐고 그 소년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소년은
일본놈들에게 몰매 맞아 실성한 아버지를 모시고
새벽 산책 나온 김소월을 또 만난 뒤
날마다 산유화를 외우며 소월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봄비가 4.4조로 내리던 날에는
비닐 우산을 들고 소월이 해방촌을 바라보며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울면서
술 취한 얼굴로 말했다고 한다.

또 어떤 날에는 죽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어느 여자와 얼굴을 가리고 밤늦게
소월이 남산여관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뒤 소월과 소년은
남산식물원 비둘기떼에 모이를 주며 놀다가
봄 안개 속으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는데
그 소년이 노인이 되어 다시 소월로에 와보니

정음사판 소월시집을 들고 소월은
피묻은 진달래 꽃잎을 뿌리며 여전히
해방촌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고 한다.

- 출전: <시집 『서울의 예수』, 1982>

▶ 정호승 프로필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등이 있다. 이밖에도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어른을 위한 동화 『연인』, 『항아리』, 『모닥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