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 / 시인
그때 명동엔 닫힌 문이 없었다. 땅 한 평에 기천만원을 호가하는 가게의 주인들과 상인들도 자본의 족쇄에 묶여 있던 노예들이 아니었다. 넥타이를 맨, 선글라스를 쓴 늘씬한 각선미의 여인들도 모두 자신의 불온함을 벗어던진 채 함께 노래하고 함께 그 눈 따가운 페파포그를 향해 걸었다. 그때 명동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지 않았고 그저 '우리'라고 불렀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 아니었다. 명동성당 철거민들이 라면을 끓이던 그 때절은 천막 그늘 밑에선 노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 서면 노래보다 더 먼저 가슴이 더워오던 지상의 한 中心이 보였다. 그 비좁은 대지 위에 발 딛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성스러워져 스스로의 부끄러움과 비겁함을 털어낼 수 있었으며 남몰래, 정말 남몰래 모두를 껴안고 세계 속에 내 육신을 소신 공양하고 싶어졌다. 그날 우리 모두는 영원한 미래의 기획자들이요 새로운 시간의 씨앗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살인과 살육으로 이어진 권좌, 아니 그 문화가 되어버린 삶의 양식을, 그 비참이 지어 올린 모든 천한 죄를 씨어내리기 위해 피를 흘린 제의와 제의의 날들을 통해 들끓는 비참과 욕망에서 스스로가 구원되는 헌신의 시간을 체험하고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새로운 시간의 지평에 사는 자들, 그들은 자신이 익혀야 할 사람의 규범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 출처: 시집 『아파트 사이로 수평선을 본다』, 1999, 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