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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 김수영
비가 그친 후 어느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드리는 것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있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자루의 부채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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