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녹원(鹿苑)의 여명
폐허행(廢墟行) - 오상순
길고 긴 세월은 무심히도 흘러갔다.
오래 이방에서 방랑하던 나그네의 고단하고 무거운 몸을 끄을고 나는 돌아왔다. 옛 집 옛 고향에.
옛 고향은 다른나라 사람의 마을이 되었고
이전 나의 집에는 아도보도 못하던 사람이 장사를 하고 있다. 옛날 면영(面影)이 다 바뀌여 변해 버린 가운데도 옛날 우리집 뜰앞에 버드나무 하나만은 모양은 물론 많이 변하였으나, 여전히 그저 서서있다. 오래 돌아오지 아니하는 옛 주인 그리워 바라고 고대하는 듯이.
오~ 버드나무 ! 우리 버드나무 ! 나의동무 !
나와 같이 자라나던 옛친구 ! 나와 같이 웃고 나와 같이 울고 발거벗고 나하고 소꼽질 하고 장난하던 동무 ! 내가 너의 등에 올라타고 말렁질하던 동무 너를 타고서 아무리 꺼덕거려도 달아나 주지 않는다고 심술 부리며 트집하던 <나>는 지금 다시 너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때 나는 너의 연약한 팔가지에 매달려 집적일때 너는 아프다고 울었지. 나는 잊지 않고 지금도 어제 같이 생각난다.
너의 잔등이는 나의 어릴때의 눈물 콧물도 많이 받았고 너의 뱃가죽에는 개천 속에 번쩍이는 사금파리 혹은 유리조각을 주어다가 네가 아파한 줄도 모르고 핏덩이 같은 고사리손으로, 글자 아닌 글자, 그림 아닌 그림, 말 아닌 말을 그리며 새기었다. 그때에 너는 참 인고(忍苦) 하였다. 너는 실로 어린 나의 원시적 창조욕의 표현을 위한 나의 고마운 수난자이었다.
오 그러나 그 상처 그 흔적은 제몸이 장성함을 따라자라나 가다가는, 무심한 바람 혹은 비의 힘으로 묵은 옷갈아 입을 적마다 조금씩 달라져서 드디어는 불가지의 비밀 속에 감추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너하고 씨름도 많이했다. 벌거숭이로 땀 흘려가며. 아 그때 우리가 흘리어 떨어트리던 땀은 바로 너의 발밑에 노래하며 쉬지않고 흘러가는 맑은 냇물속의 붕어가 받아먹었지 아마.
그동안 너도 나도 많이 변했다. 너는 같은곳에 가만히 서서 점잖이 변하여 있는 동안 나는 이리저리 이동하여 돌아다니며 변하였을 따름이다.
네가 지금 서있는 그곳에 너의 어린뿌리를 손수 친히 심으고 북도다 주던 할아버지!
나를 앉아 주고 업어 주시던 우리 할아버지는 이미 땅 속에 돌아가셨구나 !
오 그리고, 나와 팔씨름 하던 너의 옛날 팔은 모르는 사람의 톱날에 끊어져 버렸구나 !
그리고 너의 터는 사람의 살내음 같은 향내나는 황토 대신에, 세멘트로 희게 발라졌고 자유롭던 너의 몸뚱이는 축망속에 갇혀구나 !
오, 너는, 멀고 먼 나라 나라를 표랑(漂浪)하여 헤매이다가 고향을 그리워 돌아온 피곤하고 고독한 여객의 유일한 희망과 포옹과 위안의 원천일 것이다.
오, 그러나 나는 슬퍼한다. 너와 나를 위하여 통곡한다. 그윽하게도 아름다운 곡선의 리듬에 떠(浮) 멋있게도 흐르는 듯이 축축늘어져 가벼운 미풍에 보조 맞추어 춤추던 너의 가지가지(枝)는 이해없는 모르는 이방 사람의 손에 유린(蹂躪)을 받고 거친 환경에 외로이 서 있는 너의 모양 !
길고 긴 세월의 익지 못하고 낯설은 이역의 나그네 길위에서 있던 나의 신세도 이해 못 받고 동정 없기에 너보다 나을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으로 나는 너를 찾아 돌아왔다. 옛 나라의 오랜 역사와 사건과 그 운명을 한가지 하는 버들아 ! 옛 고향집의 융체(隆替)와 성쇠를 말하는 나의 어렸을 때의 벗아 ! 아픔의 경험을 가진이라야 아픔에 앓는 이를 이해하며 살필 수가 있는 것이다.
옛날 동무야 용서하라 ! 나의 불순의 죄를 용서하라 ! 내가 이제 너의 몸으로 기어올라가 굴거진 너의 목을 얼싸안고 오래간만에 이전과는 의미 다른 눈물 흘리먀 너에게 흥분에 숙(熟)한 나의 입을 대임은, 잊을 수 없는 옛날의 깊은 추억과 아직 생명의식의 분열 작용이 생기기 이전의 혼일 순진하던 무의식적의 어린 숙(熟)정을 못잊음으로새라, 나의 생명은 어느 의미로는 그동안 성장하고 발전하였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나의 내면적 불순과 사기는 가릴수없는 엄숙한 진정 사실이다. 그는 너 자신도 응당 느꼈을 것이다.
이전에 천진하고 난만하던 때에 생명의 피와 열에 김서리는 맨발이 너의 살에 닿을적에-그때에는 너의 몸의 넘치는 생명과 생기는 나의 맨발을 스미여 나의 핏줄을 따라 전신에 자유로왔을 것이 의심없다. 과민해 쇠못 박은 가죽신이 너의 가슴에 닿을 적과 비교감이 었떠하냐. 나는 이제 너의 가슴에 눈물까지 뿌렸음은 사실이나 일종의 무서운 격리감-너와 나 사이에-의 고통을 견딜 수 없다. 오 두려운 비극!
어찌하면 좋을가 ! 오----어찌하면 좋을가 !
오~ 벗아, 옛 동무야 ! 나는 다시 한 번 발가벗고 맨 몸으로 너의 상한 가슴 싸안으련다 !
버들 ! 오----버들 !
너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동양 예술의 상징 !
조선의 사람과 자연의 혈맥을 통하여
영원히 유구히 흘러가는 선의 예술의 상징 !
목숨은 짧다, 그러나 예술은 유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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