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넘어지는 술병의 입구 - 정운희
담장은 가파르고
안쪽의 불빛은 순조롭다
어둠은 한결같이 친절해서
나이를 기록하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아요
캄캄할수록 명랑하게 날아다니는 손
취한 테이블에선 술병들이 별처럼 쏟아지고
나는 복제된 인형처럼
비행기도 탈 수 있어요
울지 않는 사과처럼
오래도록 허공을 바라보듯이
붉은 지붕 밑이거나
노란색의 담벼락들
마주보며 자라는 처녀들을 보고
즐거운 손뼉이라 할 수 있나
느린 체온과 가벼운 공기 사이에서
알록달록한 씨앗을 풀어놓고
고장 난 시간이라 우물거리며 가방에 넣을 수 있나
봉인된 계절이 오고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씨앗이 품고 있는 우주의 형태이거나 경로에 대해 토로한 적 없다
견고한 어둠속 처녀들은
밤을 양수처럼 사용하지만
죽어가거나 살려고 하는 소리들은 멀리 간다
개입된 구름의 목록이나 바람의 결은
거짓말처럼 가벼워서
물속에서 조차 가라앉지 않는다
새로운 계보를 작성하는 노을의 무늬는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