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虛)의 장(章) - 구상
제군(諸君)!
이 소식을 알자면
먼저, 마음을 욕망의 덮개와
불안의 밑이 없는 항아리로
비워놓게!
그럴 양이면 아롱진 바람들과
고름 낀 인업(因業)들이
민들레 마른 꽃술인 양 스러져
흩어질걸세.
애증(愛憎)의 동아줄도 풀어질걸세.
선악의 철창도 열어질걸세.
신화의 망루(望樓)도 무너질걸세.
마침내 그대는 화평(和平)으로
해방된다는 말일세.
제군(諸君)!
허(虛)란 실상 실유(實有) 그것일세.
어둠에서 빛으로
불에서 물로
진창에서 꽃밭으로
식료(食料)에서 변통(便痛)으로
바람에서 돌 속으로
사람에게서 짐승에게로
물고기에서 땅벌레에게로
죄수(罪囚)의 눈빛에서 간수(看守)의 눈빛으로
여왕(女王)에게서 걸인(乞人)에게로
시(詩)에서 과학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봄 여울에 눈 녹아 흐르듯 흐르며
또한 동양화의 여백(餘白)같이 본래(本來) 있어
생사(生死)와 명멸(明滅)을 낳고
시간과 공간을 채워서
남음이 없지.
그래서 허(虛)는 존재(存在)와 생성(生成)을
혼연(渾然)케 하고
운명과 자유를 병존(竝存)케 하며
모든 실존(實存)의 개가(凱歌)를 울려
저 허허(虛虛)한 창공(蒼空)을 스스로의 안에서
대응(對應)시키는 조화(造化) 속일세.
제군(諸君)! 그러나 이 경지는
막다른 심연(深淵)의 축복에서
드맑은 정상(頂上)에 이르른
생(生)의 화해(和解)된 인지(認知)라는 것을
납득(納得)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