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빈 들에서 - 고진하
오래전 나는 빈 들의 시인이었다
노래하는 집시처럼 새빨간 혓바닥만 살아
젊음을 탕진하고 있을 때
신(神)은 나를 빈 들로, 텅 빈 들로 내몰았다
야생의 초록 골짜기를 헤매다
빈 들에 초막 몇 채를 세웠고
이슬과 구름의 관(冠)을 쓴 굴뚝들도 세웠다 어느 날
외딴 산모롱이 돌아가다
돌연 만난 꽃, 고독한 두루미를 닮은
두루미천남성을 사랑했고, 코브라의 머리를
쏙 빼닮은 그 흰 꽃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목이 긴
아버지가 물려준 가난과 고독은 형벌이 아니었고
형벌이기도 했다 털 빠진 황구 떼 컹컹컹 몰려다니는
빈 들을 떠돌며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머무르는 곳 말고
어디 따로 낙원(樂園)을 예약한 적이 없었다
허허로운 빈 들의 보초 허수아비 흔들리듯
항상 흔들리는 곳이 내 시의 경작지였다 이젠
늦가을 빈 들의 말씀을 받아 적고 또 받아 적어온
내 안의 필경사가 누구인지 어렴풋하지만 죽음의 눈꺼풀이
내 눈을 감기기까지 나는 그를 계시하진 못하리라
불타는 볏가리, 빈 들이 키우는 침묵, 별들의 실종, 향기로운
들꽃의 신비, 이따위에 도무지 무관심한, 반인반수(半人半獸) 무리의
창궐, 하지만 그들을 피해 갈 에움길을 찾기는 틀렸다 오늘도
나는 무죄한 생명이 떼죽음 당하는 땅에서 허수아비 같은 늙은이들을
보았다 지구의 빈 들에 무심코 절망을 삽질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