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깨물기에 관한 다섯 가지 견딤의 방식 - 정원숙
1. 사랑의 방식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근대적인 방식이다. 누군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는 과거 진행형이다. 중간중간 이야
기가 끊어지고 그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는다. 처음의 이야기는
이별에 관한 것이지만 끝을 맺는 이야기는 사랑이 시작되는 어느
지점의 뜨거운 회고를 담고 있다. 처음 그의 눈동자는 단호하게
차갑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말에선 이별이 언제 찾아오기나 했냐는
듯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사랑은 이별 뒤에 더욱
간절해지고 그 간절함으로 다시 사랑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평생을 통해 배우는 사랑의 방식이 아닐까
2. 열병의 방식
어릴 적 맞았던 예방주사는 열병이 오기 전 그 열병을 이기기
위한 대처 방식이었다. 주사 맞은 자국이 발갛게 부풀어오르고
밤새 고열에 휩싸이기도 했다. 사춘기 때 겪은 열병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내 몸 속을 흐르는 피를 내가 직접 목격한
다는 처절함. 젖몽우리가 마악 움터오던 가슴팍을 내보이며 알게
되었던 내 열병의 실체. 그 열병보다 더욱 두려웠던 것은 내 여리
디여린 정신이 재가 되어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어떤
열병도 내 생을 빨리 지나쳐 가주기를 얼마나 바라며 살았던가
그리하여 잃은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게 열병은 사랑도 오르가슴도
아니었다. 다만 불청객일 뿐이었다.
3. 촛불의 방식
촛불을 켜놓고 글을 쓴 적 있는가 촛불을 켜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본 적 있는가 수없이 많은 날들을 나는
그렇게 태워 날려버렸다. 어떤 때는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잔 적도 있다.살아도 살아지지 않는 날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목숨일 수밖에 없는, 그런 생도 있다. 그때마다 촛불은
온몸을 태우며 다그쳤다. 스스로를 활활 불붙일 수 없다면 너는
이미 버려진 인형이다. 숨 쉬지 않는 죽은 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 촛불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부터
촛불의 생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4. 재災의 방식
나는 잿빛을 좋아했다. 검은 색도 흰색도 아닌 빛. 그러나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잿빛이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 빛인지
알게 되었다.그때 나는 갠지스의 가트에 서서 한 여인의 주검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유채색이었던 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잿빛으로 변해 바스라져갔다.그것은 죽음의
빛이었다. 천상의 빛이었다. 그 빛이 더러운 갠지스강을 성
스러운 강으로 바꾸고 있었다.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내 삶의 방식이 일순간 재가 되어 허물어져 내렸다.
훨훨 날아올라 하늘 꼭대기에 올라앉는 영혼들이 그 속에 살고
있었다.그 빛 너머 또 다른 영혼의 집이 있었다. 그 집을 짓기
위해 우리는 이 생을 힘겹게 견디고 있는 것이 아닐까
5. 불멸의 방식
어릴 적 나는 ‘불멸’을 새라는 의미로 알고 있었다. 새는
죽어도 영원히 살고 살아 있으면서도 하늘 가장 높은 자리에
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불멸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도 나는
불멸을 꿈꾸지 않았다. 영원히 산다고 해서 행복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오히려 불멸하지 않음으로 해서 인간은 더욱 불멸에
가까워질 수 있다.불멸은 새의 다른 지명이다.매일밤 내 방에는
불멸의 새가 찾아온다. 나는 그 새를 가슴에 품고 내 영혼이
재가 되는 날까지 피의 글을 쓸 수 있을까 불멸의 새가 될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며 마침내 스스로 불멸을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