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팔다 - 유안진
모임에 갔더니 먼저 와서 웃고 떠드는 내가 있지 않는가
그는 나보다 더 잘 웃고 숫기도 좋아
내가 그의 못난 짝퉁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정신 차리고 끼어들어 인사를 해도 다들 본체만체
있는 내가 없는 내가 되어 버렸는데
눈길이 마주친 그는 얼른 외면해 버린다
팔 거라고는 그림자 밖에 없어서
그림자에게도 흰머리가 돋거나 주름살이 생기기 전에
얼른 팔아야 제값 받을 거 같고
팔고 나도 쉽게 또 생길 줄 알았지
햇빛 눈 부시는 날 빌딩을 지날 때나
네온 불빛 현란한 밤거리에서도
떼지어 나와서 따라다녔으니까
비 올 때나 어두운 곳에서는 안 보이다가도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한꺼번에 몰려나왔으니까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지
유령이 사 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대신 내가 유령이 될 줄은 더더욱 몰랐지
흉내내며 조롱하며 따라다니던 검은 감시자(監視者)가
썩어문드러진 고통의 얼룩이 내 넋인 줄 몰랐지
이럴 순 없다고 달려가자
그는 어느새 반대쪽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한 번 더 뒤돌아섰을 때는
출구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고작이었고
잘 가라고 흔들어대는 손들 사이로
한 번 더 눈길이 마주쳤던가
나는 이미 절반 너머 녹아버린 얼음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