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나무 - 하수현
새벽 달빛 아래 공기는 녹녹하게 젖어 있었다
마당에 걸음을 처음 놓았을 때, 11월 빗물로
말갛게 씻은 나무는 내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늘 그렇듯이, 나는 그 속삭임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나무의 말은 언제나 쓸쓸하기 때문이다
밤은 점령군의 검은 군화, 혹은 그들의 장막이었다
옅은 달빛 아래에서 표표(表表)히 얼굴을 내미는 건
그 밤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 가슴은 강물이었다
나는 밤길을 나서며, 그래 바로 이런 것이야,
산다는 건 본래 이런 것이지, 하며 나를 향해
몇 마디 말을 던졌다 던진 말은 석류알처럼 눈물처럼
가슴의 수면(水面)을 한 번씩 치며 떨어졌다
삶이란 반드시 고독 위에서만 펼쳐지는 것임을
내 이미 오래 전에 다 보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