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 유종인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깊이 눌러 써대는 저 필력(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꺽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이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꽂아 쓰자고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지라진 미루나무 독필(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초서체(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굴뚝 필봉(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유종인 시집"교우록"[문학과지성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