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 - 김광규
불혹의 나이를 앞두고 늦된 첫 시집을 냈으니까, 돌이켜 보면, 결
코 조숙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졸시 「내가 내일 죽게 된다면」을 이미 삼십 대 후반에 쓴
것 또한 사실이다
그 후 삼십여 년을 더 살아, 환갑을 넘기고, 정년퇴직도 했다. 이제
진짜 '유서'를 준비해야 할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하지만 몇 해째
벼르지만 하면서,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저 백지 앞에서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온갖 기억과 상념 속에 잠
길 뿐이다.
그렇다면 시쓰기가 유서 작성보다 쉬웠단 말인가.
유서보다는 차라리 시를 몇 편이라도 더 남겨야 하지 않을지......
어쩌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깨끗하지 않을까.
한 글자도 기록하지 않은 백지를 과연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