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해변 - 함기석
하늘에서 누군가 물조리개로 빛을 뿌린다
해변은 땀에 젖은 흑인의 등처럼 반짝거린다
바다의 잇몸을 뚫고 수면으로 나온 흰 이빨 같은 섬들
물결따라 햇빛알갱이들 아름답게 너울거리고
바다는 한 꺼풀 한 꺼풀 하얀 속살을 벗겨 뭍으로 보낸다
해변에 한 노인이 서 있다
바다의 주름진 이마를 만지며
해저에 사는 눈 없는 물고기들의 일생을 생각한다
피었다 진 꽃자리처럼 노인의 눈은 쓸쓸하고 그늘이 깊다
바다의 유치원에서 어린 물고기들 뛰놀고
소녀가 나비 다라 방파제 꽃길을 뛰어간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모래밭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맨발을 바라본다
고독과 고통 속에서 보낸 수십 년의 시간과
진흙 길들이 스민 아픈 발을 바라본다
쉬지 않고 걷고 걸어 이 마지막 해변까지 데려다 준
상처투성이 착한 발을 미안하게 바라본다
보드랍게 발등을 어루만져 주는 바다의 하얀 손가락들
노인은 모래밭에 바다가 쓰는 참회의 시를 가슴으로 듣는다
부서지며 사라지는 물로 된 말들
말들이 만드는 무수한 모래구멍과 생의 아픈 물거품들
울분과 분노의 나날들, 증오 때문에 한 사람을 죽이고
두 여인을 폐인으로 만들었던 뼈아픈 기억들
시린 하늘에서 내려온 전깃줄 같은 빛줄기가 노인의 목을 옥죈다
노인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방울 하나 발등으로 떨어진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본다
작은 배가 한 척 해안으로 밀려온다
삐거삐걱 노를 저으며 누군가 저음의 노래를 부른다
노인은 젖은 눈을 여미고 노 젖는 자의 얼굴을 본다
어부차림을 한 죽음이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만 이 배를 타고 가시지요?
배는 노인을 태우고 소리 없이 나아간다
천천히 자궁을 빠져나가듯 수평선 너머 내생으로 나아간다
배가 그리는 물결 파문들, 바다 저편 침묵으로 퍼져
방파제 끝에서 소녀가 손을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