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오로지 한 빛깔의 위하여 - 노명순
나무가 세월을 녹이고 있다
상처를 끓이고 있다
찢기고 짓밟힌 이 세상 모든 핏빛 아픔을
한껏 불러내어
가슴 한 솥에 넣고
푹푹 색깔을 달이고 있다
초록 잎사귀의 춤을 빛내주었던
바람과 구름과 고운새의 지저귐들
돌아서면 아쉬웠던 이 모든 그리움은 죽여야 한다
씨앗을 낳아주는 어머니의 진통도 잊고
밤인지 낮인지 분간없이 세월을 껴안고 짓물러
끓이고 삭혀야 한다
가을의 한 색깔을 위해
이름 모를 산길
산 모퉁이 막 돌자, 바로, 거기, 골짜기에
방금 새로운 색깔로 태어난 듯한 대여섯 그루의
눈부신 샛빨간 단풍나무
가을 햇살 아래
몇억 년 전, 어느 별의 몸 속에서 끓던 용암이 폭발한 듯
오로지 한 빛깔로 징하게
천지 사방에 열꽃으로 춤추는 샛빨간 단풍나무
상처 순도 100% 빨강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