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다가
시간 참 잘 간다. 하지만 지루한 것보단 낫다. 방금 출근한 듯 한데 금방 퇴근시간이 되고, 일주일이 삽시간에 가고, 한 달이 가고...... 그렇게 바쁜 일상이 이어지던 오늘 묘한 마음이 이는 시 한편을 감상했다. 아무렇지도, 별 느낌도 없는 시로 스윽 지나도 될 만했는데 더 이상 뒷장을 넘기지 못하고 이 시 한편 때문에 지금 이글을 쓰고 있다.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 정끝별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
심장이 요동치는 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가끔 속으로 ‘이거 대박이다!’하는 시를 만나면 참 기분이 좋다. 그러다 만난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저 시인을 모르는데 저 시인은 어떻게 나를 저리 잘도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면 민생고 통에 허우적대거나, 화장터에서 빻아준 뼈를 뿌린 날이나, 응급실에서 눈을 떴던 날이나, 좀먹듯 월세가 보증금을 다 깐 날이나 시를 썼다. 시는 쓰고 싶은데 아니, 써야하는데 시어는 떠오르지도 않고 술만 들이붓던 괴로운 날에도 그 괴로움을 시로 썼다.
하지만 쌀통에 쌀이 가득하고, 세금도 밀리지 않고, 전화나 전기 그리고 도시가스도 끊어지지 않고, 주머니에 소주 값이 넉넉하면 시를 쓰지 않는다. 남들은 행복해서 그 행복을 시로 쓰거나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며 나무나 꽃을 보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무너져야 시를 쓴다. 왜일까?
어떤 시는,
긍정적이고 행복감을 주는 시처럼 보여도 그 뒤엔 시인의 고통이 숨어있음을 눈치 채곤 한다. 그때 뭉클해진다. 웃고 있는 시를 쓰는 시인은 울고 있는 것임을 알 땐 가슴이 저려온다. 통닭 한 마리 들고 찾아가 술잔을 주고받고 싶다. 왜 그런 시를 썼는가를 묻지 않는 마주 앉은 심장끼리고 싶다.
할 일없는 놈팡이 같은 것들이 일해서 쌀이나 사먹지 쌀통에 쌀 없다고 울고 자빠져있다고들 해도 듣는 시인의 심연은 요동이 없다.
시인은 여울목이다. 잔잔히 흐르는 냇물을 받아 휘감고 젓고 흔들거리며 고통을 삼킨 후 다시 세상으로 잔잔히 흘려주는 혼탁한 세상 속 여과기다. 그 여과장치를 스스로 만들어 자신에게 내장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게다가 수시로 업그레이드 돼야하니 말이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팔면 좋겠다마는.
요즘에 굶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들 한다. 굶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르지. 그들을 찾아야 할 사람들은 독자들이다. 시인의 고통을 읽어줘야 시인은 배부르다.
끼적거린 지도 꽤나 오래 됐다. 쓰고 싶은 열정이 식어가던 오늘, 저 시 한편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오늘문득 : 2012.7.25.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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