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16. 완전한 혁명-종교적인 마음-에너지-정열
우리가 지금까지 이 책에서 관심을 가져온 것은 우리 자신 속에, 따라서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는 사회와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혁명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현존하는) 사회는 끝없는 공격전-그것이 방어적인 것이든 공격적인 것이든-이 있는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정신 자체 속의 하나의 혁명, 하나의 변화이다. 낡은 머리는 인간의 관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낡은 두뇌는 아시아적이고, 유럽적이고, 미국적이고, 아프리카적이며, 그래서 우리가 자문하고 있는 것은 뇌세포들 자체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그러면 우리들 자신을 한결 더 잘 이해하게 된 지금,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 물어 보자. 인간이 이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냉혹한 세계에서, 즉 더욱 더 능률적이며 따라서 더욱 더 냉혹한 세계에서 정상적인 나날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가-그의 외적 관계들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사고, 감정, 행동, 반응의 전역에서 혁명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한가?
매일같이 우리는 세계에서 인간의 폭력의 결과로 일어나는 경악할만한 일들을 보거나 읽는다. 당신은 <나는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든가 <어떻게 나는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만일 당신 자신이 폭력적이지 않고, 정말 매일매일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즉 경쟁적이지 않고, 야심이 없으며, 질투(선망)하지 않는 삶-적대감을 만들어내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불이 타오르는 불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중심적 행동에 의해, 우리의 편견, 우리의 증오, 우리의 민족주의에 의해 이 세계를 현재의 혼돈 상태로 만들었으며, 우리가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속의 무질서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쪼개어 조각내놨으며, 만일 우리들 자신이 부서지고, 조각나면 우리의 세계와의 관계 또한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행동하면, 우리가 완전하게 행동하면, 우리의 세계와의 관계는 엄청난 혁명을 겪게 된다. 어떻든 값있는 운동이면 어떤 것이든지, 깊은 뜻을 지닌 행동이면 어떤 것이든지, 우리들 각자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 나는 나의 세계와의 관계의 본질과 구조를 알아야 하며-그리고 바로 그 아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나는 어떤 다른 특성을 가져오게 되며, 그 특성이 내 생각에는 종교적인 마음의 특성이다. 종교적인 마음은 종교를 믿는 마음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당신은 종교적이지 못하면서도 힌두교도나 회교도, 기독교도나 불교도일 수 있다. 종교적인 마음은 전혀 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체험할 수도 없다. 진리는 당신의 쾌락이나 고통에 의해 좌우(지시)되는 어떤 것이 아니며, 또 힌두교도나 혹은 다른 어떤 종교의 신자라는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인 마음은 공포가 없는 마음의 상태이며 따라서 아무 신앙도 없는 상태이며 다만 그냥 있는 것-참으로 있는 것 What actually is이다.
종교적인 마음 속에는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바 침묵의 상태-즉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알아차림의 소산인 침묵의 상태가 들어 있으며, 이것이 명상자가 완전히 없는 명상이다. 그런 침묵 속에 갈등 없는 에너지의 상태가 있다. 에너지는 행동이며 운동이다. 모든 행동은 운동이며 모든 행동은 에너지이다. 모든 욕망은 에너지이다. 모든 정조는 에너지이다. 모든 삶은 에너지이다. 모든 생명은 에너지이다. 만일 그 에너지가 아무 모순 없이, 아무 마찰 없이, 아무 갈등 없이 넘쳐 흐르게 놔둔다면, 그 에너지는 한이 없고 끝이 없을 것이다. 마찰이 없을 때 에너지에는 경계가 없다. 에너지에 한계를 주는 것은 마찰이다. 그런데, 한번 이 사실을 알았다면, 왜 인간은 항상 에너지에 마찰을 있게 하는가? 왜 그는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에 마찰을 만들어내는가? 순수 에너지, 한계 없는 에너지는 그에게 있어서 한갓 관념인가? 그것은 리얼리티를 갖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완전한 혁명을 가져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살피고, 보고, 행동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들 속에-그것이 남편과 아내, 사람과 사람, 한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 한 나라와 다른 나라, 한 이데올로기와 다른 이데올로기 등 어떤 종류의 관계이든지-그 속에 마찰이 있는 한, 즉 어떤 형태이든 내적 갈등이나 외적 마찰-그것이 아무리 미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이 있는 한, 거기엔 에너지의 낭비가 있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있는 한 그것은 마찰을 낳고 따라서 에너지의 낭비가 있게 된다. 그 에너지는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일 때, 즉 시간의 간격이 전혀 없을 때 그 최고점에 모인다. 그러면 동기 없는 에너지가 있게 되며 그리고 그것 자신의 행동의 통로를 찾을 터인데, 왜냐하면 그때는 <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혼란을 이해하려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며, <나는 이해해야 된다>는 느낌은 발견을 위한 활력을 가져온다. 그러나 찾아내는 것, 탐구하는 것은 시간을 암시하며, 그리고,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점차적으로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다. 시간은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늙었든 젊었든지 간에 삶의 전과정이 다른 차원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은 지금이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와 반대되는 것을 찾는 것도 길이 아니며, 어떤 체계, 선생, 철학자 혹은 성직자에 의해 부과된 인위적 훈련도 길이 아니다-그것들은 모두 너무 유치하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여러 세기의 무거운 제약을 즉각적으로 깨뜨릴 수 있으며 또 하나의 제약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지 자문한다-즉 자유롭게 되어서, 마음이 전혀 새롭고, 민감하고, 살아 있고, 느껴 알고, 강렬하고, 능력 있을 수 있는지 자문한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그외의 다른 문제가 없는데, 왜냐하면 마음이 새로와지면 그것은 어떤 문제도 다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할 유일한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는다. 우리는 남의 말을 듣고 싶어한다. 우리는 정신구조에 있어서 가장 이상한 일중의 하나는, 우리가 수천년 동안의 프로파갠더의 결과이기 때문에, 모두들 남의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질문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것인데 비해, 우리는 남에 의해 인정되고 확증된 생각을 갖고 싶어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아주 가치가 없다. 당신은 이 책을 덮는 순간 이것을 잊을 것이고 아니면 어떤 구절을 기억하고 되씹어 보거나 또는 여기서 읽은 것과 다른 책에서 읽은 것을 비교해 볼 터이지만-그러나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을 똑바로 마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전부이다-즉 당신의 삶, 당신 자신, 당신의 왜소함, 당신의 경박함, 당신의 잔인함, 당신의 폭력, 당신의 탐욕, 당신의 야심, 당신의 일상적 괴로움과 끝없는 슬픔-그것이 당신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며, 당신 이외에 땅과 하늘의 아무도 당신을 그것으로부터 구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나날의 삶, 나날의 활동 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을 볼 때-즉 당신이 펜을 집어 들고, 말하고 드라이브하러 나가고, 혼자 숲 속을 걷고 있을 때-당신은 한 숨에, 한눈에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아주 쉽게 알 수 있는가?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알 때, 당신은 인간의 노력, 기만, 위선, 탐색의 전구조를 이해하게 된다. 그럴려면 당신은 당신이 존재를 통털어 스스로에 대해 엄청나게 정직해야 한다. 당신이 당신의 원칙들에 따라 행동할 때 당신은 부정직한 것인데 왜냐하면 당신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할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관념(이상)을 갖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관념, 신념, 원칙들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은 완전히 부정적이고, 완전히 고요하고, 생각도 없고 두려움도 없으면서 비상하게, 정열적으로 살아 있을 수 있는가?
더 이상 애쓸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종교적인 마음이며, 그런 상태 속에서 당신은 진리 혹은 리얼리티 혹은 은총 혹은 신 혹은 아름다움 혹은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초대될 수 없다. 그 매우 간단한 사실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것은 초대될 수 없고, 찾아 얻을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마음은 너무 어리석고, 너무 작고, 당신의 정서는 너무 가짜(겉치레)이고, 당신의 생활 방식은 너무 혼란돼 있는 나머지 위에서 말한 거대한 것은 당신의 작은 집, 짓밟히고 모욕된 삶의 작은 구석에 초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걸 초대할 수 없다. 초대하려면 당신이 그것을 알아야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모른다. 누가 그걸 말하든지 간에, 그가 <나는 안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알지 못한다. 당신이 그걸 발견했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그걸 발견 못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걸 체험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걸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당신의 친구와 적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자문할 것이다. 즉 초대 없이, 기다림 없이, 찾거나 탐색하는 일 없이 그것을 만나는 게 가능한가-즉 당신이 창문을 열어 놓았을 때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처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바람을 초대할 수 없으며, 다만 창문을 열어놓아야 하는데, 이것은 당신이 기다리는 상태에 있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기만이다. 그것은 당신이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생각(사고)이다.
당신은 왜 인간이 그런 것(위에서 말해오고 있는 진리, 리얼리티, 사랑, 은총, 아름다움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어떤 것-역자)을 갖고 있지 못한지 자문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아이를 낳고, 성관계와 유연함을 가지며, 교우, 우애, 동료의식 속에서 어떤 것을 더불어 나누는 특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갖고 있지 못하다-왜 그들은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한가? 당신이 지저분한 거리를 혼자 걷고 있을 때, 버스에 앉아 있을 때, 혹은 휴일에 바닷가를 걷거나 수많은 새, 나무, 시내, 맹수들이 있는 숲속을 걷고 있을 때, 느긋하게 의문을 품어본 일이 있는가-즉 수만년 동안 살아온 인간이 왜 이것을, 이 비상하게도 시들지 않는 꽃을 못얻었는지 물어본 일이 있는가? 왜 그다지 능력 있고, 그렇게 영리하고, 그렇게 교활하고, 그렇게 경쟁적이며, 그렇게 놀라운 과학기술을 갖고 있고, 우주에 가고 땅밑으로 바다 밑으로 가고, 또 비상한 전자두뇌를 만들어낸 인간인 당신이-왜 문제되고 있는 그 한 가지는 얻지 못했는가? 당신의 마음이 왜 공허한가 하는 문제와 당신이 진지하게 부딪쳐 본 일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 질문을 당신 자신에게 물었을 때 당신의 대답은 어떤 것인지-즉 어떤 얼버무림이나 교활함 없는 솔직한 대답은 어떤 것인지? 그 질문을 묻고 그것의 절박함을 문제삼는 데 있어서 당신의 대답은 당신의 강렬함에 따라 나옴직하다. 그러나 당신은 강렬하지도 않고 절박하지도 않은데, 왜냐하면 당신은 에너지, 정열로서의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그리고 정열 없이 당신은 아무 진리도 발견할 수 없는데-그 정열이란 그 뒤에 맹렬함을 갖고 있는 정열이요, 아무 숨겨진 바램이 없는 정열이다. 정열은 말하자면 무서운 것인데 왜냐하면 당신이 정열을 갖고 있을 때 당신은 그것이 당신을 어디로 데리고 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포가 그 이유가 아닐까-즉 사랑이라는 성질이 당신 속에 결핍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알아내기 위한 그 정열의 힘을 당신이 못갖고 있는 이유, 당신의 가슴 속에 그 불꽃이 없는 이유가 공포 아닐까?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의 마음과 가슴을 아주 면밀히 성찰한다면, 당신은 왜 당신이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한가를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걸 갖고 있지 못한 까닭을 찾아내는데 있어서 정열적이라면, 당신은 그게 거기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가장 높은 형태의 정열인 완전한 부정을 통해서만 그것, 즉 사랑은 존재하게 된다. 겸손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사랑을 심어 키울 수 없다. 겸손은 자만이 완전히 끝날 때 존재한다-그러면 당신은 겸손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될 것이다. 겸손하다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텅빈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 참으로 있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주고 당신의 가슴, 당신의 신경, 당신의 눈, 당신의 전존재를 줄 때, 그리고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완전히, 전적으로 부정할 때-추악한 것과 잔인한 것에 대한 바로 그 거부 속에 그것과 다른 것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가 침묵한다는 걸 아는 사람, 그가 사랑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이며 침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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