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4. 어제의 짐-고요한 마음-의사소통-성취-단련-침묵-진리와 실재
우리가 흔히 사는 삶 속에서는 고독이 거의 없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조차도 우리의 삶은 그 많은 영향, 그 많은 지식, 그 많은 체험의 많은 기억들, 그다지도 많은 불만, 불행, 갈등들로 붐비는 나머지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무디어지고, 무감각해지고, 단조롭게 반복되는 틀에 박힌 일 속에서 기능하게 된다. 우리는 도대체 홀로인가? 아니면 우리는 어제의 모든 짐들을 짊어지고 있는가? 무척 근사한 얘기가 있는데, 두 수도사가 마을에서 마을로 다니다가 강 둑에서 울며 앉아 있는 한 아가씨를 만났다. 그래서 그중 한 수도사가 그녀에게 가서 <자매여, 왜 울고 있읍니까> 하고 말한다. 그녀는 <강 건너 저 집 보이시지요? 저는 오늘 새벽에 저 강을 걸어서 건너왔는데, 지금은 물이 불어서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배도 없구요> 하고 말한다. 수도사는 <아, 그거 전혀 걱정할 거 없어요> 말하고는, 그녀를 안아 올려 강을 건너가서 그쪽 강변에 내려 놓는다. 그러고 나서 두 수도사는 계속 길을 간다.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 다른 수도사가 <우리는 여자와 절대로 접촉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대가 한 일은 무서운 죄이다. 여자를 만지면서 그대는 쾌락이나 흥분을 느끼지 않았는가?>하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수도사가 대답했다. <나는 두 시간 전에 그녀를 내려 놓았다. 그대는 아직도 그녀를 짊어지고 오는구나, 그렇지 않은가?> 그게 우리가 하는 바이다. 우리는 언제나 짐을 지고 다닌다-우리는 짐들에 대해서 결코 무심해지지 못하며, 그것을 어디에 놔둔 채 잊어비리지 못한다. 오직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완전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해결할 때에만-즉 그것을 다음 날이나 다음 순간으로 옮겨오지 않을 때에만-고독이 있다. 그러면, 우리가 붐비는 집 속에 살거나 버스 속에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고독을 지닌다. 그리고 그 고독은 새로운 마음, 천진한 마음을 암시한다.
내적 고독과 내적 공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고, 가고, 기능하고, 나는 자유를 뜻하기 때문이다. 미덕이 자유가 있을 때에만 꽃피듯이 선은 공간 속에서만 꽃필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내적으로 우리는 자유롭지 않으며 따라서 거기엔 공간이 없다. 자기 자신 속에 이 광대한 공간이 없이는 어떤 값진 미덕이나 성질도 기능하고 자라나지 못한다. 그리고 공간과 침묵이 필요한 까닭은 마음이 외롭고, 영향받지 않고, 훈련되지 않고, 무수히 잡다한 경험들로 차 있지 않을 때에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침묵할 때에만 명징할 수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동양에 있어서의 명상의 오롯한 목적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가져오는데 있다-즉 생각을 통어하는 것인데, 이것은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되풀이하는 것과 같으며 그런 상태에서 그의 문제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초를 놓지 않고, 즉 공포로부터 해방되고, 슬픔, 불안 및 그가 그 자신에게 놓은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어떻게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의사소통이 가장 어려운 것중의 하나이다. 우리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가-즉 내가 사용하는 말들을 당신이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두 사람, 즉 당신과 내가 한 순간 늦게나 한순간 빠르게가 아니라 동시에 강렬하고 같은 수준에서 서로 만나야 한다는 걸 뜻하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이 읽으면서 당신 자신의 지식, 쾌락 혹은 견해에 따라 설명하거나,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일 때 그러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내가 보기에 인생에서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는 이르고 성취하고, 얻으려고 하는 그 끊임없는 싸움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얻고 성취하도록 훈련된다-바로 뇌세포들 자체가 육체적 안전을 위해 그런 성취의 패턴을 만들어 내고 요구하는데 그러나 심리적 안정은 그 성취의 영역 속에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관계, 태도, 활동들에서 안전을 바라지만, 이미 보았듯이, 실은 안전 같은 것은 없다. 어떤 관계에 있어서나 어떤 형태의 안전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심리적으로는 영구적인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은 삶에 대해 완전히 다른 접근을 하게 한다. 물론 외적 안전-집, 옷, 음식-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외적 안전은 심리적 안전을 위한 요구에 의해 파괴되었다. 공간과 침묵은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는데 필요하지만, 그러나 사리를 위해 그다지도 끊임없이 활동적인 마음이 어떻게 평온할 수 있는가? 마음을 닦고, 통어하고,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런 고행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지 못한다-그건 마음을 무디게 할 따름이다. 분명히 고요한 마음을 갖고자 하는 이상을 다만 좇는 것은 값없는 일인 것이, 당신이 마음을 강압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좁아지고 정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통제도, 억압과 마찬가지로, 오직 갈등을 낳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통제와 외적 수련은 길이 아니며, 수련이 부족한 삶도 값이 없다.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사회의 요구에 의해 외적으로 훈련되어 있고, 가족에 의해, 우리 자신의 고통에 의해,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의해, 어떤 이데올로기가 사실적 패턴에 순응하는 것에 의해 외적으로 훈련되어 있으며-그리고 그런 형태의 훈련이 가장 무딘 것이다. 훈련(수련)은 통제 없이, 억압 없이, 어떤 형태의 공포도 없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떻게 이런 단련이 있게 되는가? 훈련이 먼저 있고 나서 자유가 있는게 아니다. 자유는 끝이 아니라 맨처음에 있는 것이다. 이 자유를 이해하는 것이-이것이 훈련에 순응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인데-훈련 자체이다. 배우는 행위 바로 그것이 단련이며(단련 discipline이라는 말의 근본 의미가 배운다는 것이다) 배우는 행위 자체가 명징성이 된다. 통제, 억압 및 방종의 본질과 구조 전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의력이 요청된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단련을 부과해서는 안되며, 배우는 행위 바로 그것이 그것 자체의 단련-그 속에는 억압이 없는-을 가져온다. 권위(우리는 지금 법적 권위가 아니라 심리적 권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를 부정하기 위해서는-모든 종교 조직, 전통 및 체험의 권위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왜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복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다시 말해서 그걸 실제로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연구하기 위해서는 비난, 정당화, 의견 및 수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권위를 수락할 수 없으면서도 그걸 연구한다-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권위의 전심리적 구조를 우리들 자신 속에서 연구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검토)하고 있을 때 우리는 전구조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며, 또 우리가 부정할 때, 바로 그 부정이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빛이다. 지금까지 갑지다고 여겨온 모든 것, 즉 외적 훈련, 영도력, 관념론 같은 것들에 대한 거부가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연구행위 그것은 훈련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거부이며, 그리고 바로 그 거부가 긍정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요에로 인도하는 것이 통제가 아님을 안다. 또한 마음이 어떤 대상, 즉 그것에 빠지는 나머지 그것 속에서 스스로를(마음을) 잃어버리는 그런 대상을 가질 때도 그 마음은 고요하지 않다. 그것은 아이에게 재미 있는 장난감을 주는 것과 같다. 즉 그는 아주 조용해지지만, 그러나 그 장난감을 치워버리고는 다시 시끄러운 장난질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열중케 하는 장난감들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매우 조용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떤 형태의 활동-과학적, 문학적 활동이나 또는 어떤 종류의 활동이든지간에-에 헌신할 때, 그 장난감은 다만 그를 흡수할 뿐이며 그가 정말 조용한 것은아니다.
우리가 오직 알고 있는 고요는 소음이 멈출 때의 고요, 생각이 멈출 때의 고요뿐인데-그러나 그것은 고요가 아니다. 고요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처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이 고요는 고요한 마음의 산물이 아니며, 뇌세포-그 전구조를 알고 <제발 좀 조용히 해>라고 말하는 뇌세포의 산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뇌세포 자신들이 고요를 만드는데, 그것은 고요가 아니다. 또 고요는 주의력-그 속에서는 관찰자가 관찰되는 것이 되는-의 소산도 아니다. 그렇다면 마찰이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고요가 아니다. 당신은 그 고요가 무엇인지에 대해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을 비교하고, 설명하고, 가져다가 묻어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는 것이며, 그리고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는 것에 대해, 마음의 상처와 감언이설에 대해, 당신이 만든 모든 이미지와 체험들에 대해 매일 죽을 때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매일 죽음으로써 뇌세포들 자신이 새로와지고, 젊어지고, 순진해질 때에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천진성, 그 새로움, 그 유연함과 부드러움이라는 성질은 사랑을 낳지 않는다-그것은 아름다움이나 고요의 성질이 아니다.
소음이 끝남으로써 생기는 고요가 아닌 고요는 다만 작은 시작일 따름이다. 그것은 거대하고 광대하고 넓은 바다가 가려고, 측량할 길 없고 영원한 상태에로 가려고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당신이 의식의 전구조와 쾌락, 슬픔, 절망의 의미를 이해했을 때에만, 그리고 뇌세포 자신들이 조용해졌을 때에만 당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 말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럴 때 아마도 당신은 아무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없고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없는 신비와 만나게 될는지 모른다. 살아 았는 마음은 고요한 마음이며, 살아 있는 마음은 아무 중심도 없고 따라서 아무 공간이나 시간도 없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무한하고, 또 그것이 유일한 진리이며, 그것이 유일한 실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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