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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70호
단기 4343 / 서기 2010. 7. 20 (음력 6. 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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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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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오월문학상
오월 문학상은 이 땅의 민중이 주체가 되어 반외세, 반독재, 구국투쟁의 횃불을 치켜드는데 성스러운 토대가 된 역사의 분수령인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계승합니다. 숭고한 자주 민주 통일에의 의지를 이어받아 1980년 5월의 역사적 의의를 문학으로 계승, 승화함으로써 새로운 민족문학 창조에 기여할 민족문학인을 양성하여 이 땅의 변혁운동에 복무하고자 합니다.
오월문학상 모집부문 시 (5편 이상) - 당선작 100만원, 가작 각 35만원 소설 (원고지 70매 이상) - 당선작 100만원, 가작 각 35만원
오월문학상 대상 및 주제 - 대상 : 제한없음 - 주제 : 제한없음
오월문학상 일정 - 원고마감 : 2010년 9월 10일까지 - 발표 : 2010년 9월 20일 (당선자 서신 연락) - 시상식 : 추후결정
응모요령 - 등기우편 사용 : 응모작품명, 소속, 연락처, 성명 등을 한 장의 양식에 넣을 것, 반드시 파일(CD)도 동봉할 것, (전화번호와 E-mail 반드시 기재할 것) - 전자우편 사용 : ybpress@hanmail.net 으로 위 양식과 동일하게 첨부파일로 보낼 것.
- 겉봉에 “오월문학상 - 응모작품”이라고 적을 것 - 보낼 곳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300번지 전남대학교 제1학생회관 309호 용봉편집위원회 우.500-757 E-mail: ybpress@hanmail.net
기타 - 응모된 작품은 반환되지 않음 - 문의전화 062-530-0593 / 010-5669-0912
3. 주최 전남대학교 용봉교지편집위원회/ 사단법인 광주전남 민족문학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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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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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우리 인간의 불행한 특권이다. 우리에게 흘리기 쉬운 눈물을 준 신들은 눈물을 흘리는 더 많은 원인을 주었다. -W.호이트 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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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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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일부 명사 앞에 붙어 ‘묵은’, ‘낡은’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로 ‘구-’가 있다. ‘구세대, 구제도, 구시가지’ 등으로 쓰인다. 이 말은 한자 ‘舊’에서 온 말로서 ‘신’(新)과 맞선다. 따라서 ‘신세대, 신제도, 신시가지’ 등의 말도 있다.
“탈냉전과 함께 이념적 경직의 마술에서 깨어나고 구소련 외교문서의 대규모 공개에 힘입어…” 6·25 전쟁의 성격을 다룬 중앙 일간지 칼럼에서 잘라온 구절이다.
지금은 몰락하고 없는 ‘소련’을 ‘구소련’이라고 했다. 접두사 ‘구-’와 ‘신-’의 맞섬으로 보면 ‘구소련’은 ‘신소련’이라는 짝을 갖지 못한다. 소련이 몰락하고 다시 소련이 생겨났다면 ‘구소련’과 ‘신소련’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소련은 몰락한 소련 그것뿐이다. 접두사 ‘구-’와 ‘신-’이 맞서지 못하고 어느 한쪽만 있는 말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멸망한 고려와 조선은 그냥 고려이고 조선이지, ‘구고려’, ‘구조선’은 이상하지 않은가.
‘신한국’이라는 짝을 갖지 못한 ‘구한국’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구한국은 1897년 10월12일부터 1910년 8월29일까지의 이 땅의 국호인 ‘대한제국’의 다른 호칭으로 흔히 ‘구한말’이라고도 한다. 대한제국을 ‘구한국’이라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신한국’이라는 말을 품고 있다.
일부 사전은 ‘구’(舊)를 관형사로 올려 ‘지난날의’, ‘지금은 없는’으로 풀이하고 있다. 굳이 이 뜻에 맞추어 ‘지난날의 소련’이란 뜻으로 쓰려면 ‘구 소련’으로 띄어 써야 할 것이다.
우재욱/시인
깜빡이
필자는 다른 글에서 비교적 근래에 만들어진 우리말 중에서 가장 멋진 말로 ‘삐삐’와 ‘깜빡이’를 든 일이 있다. 삐삐는 휴대전화에 밀려 거의 사라졌지만, 그 이름만은 휴대전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핸드폰, 모바일폰, 휴대폰’ 등으로 불리는 휴대전화는 불행하게도 ‘삐삐’와 같은 좋은 이름을 얻지 못했다.
“오른쪽 깜박이와 왼쪽 깜박이를 번갈아 켜면 중도인가.” 중앙 일간지에 실린 칼럼의 한 구절이다.
깜빡이는 자동차의 방향 지시등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불빛이나 별빛 따위가 잠깐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모양, 또는 밝아졌다 어두워지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부사 ‘깜빡’에 접미사 ‘-이’가 이어진 말이다. ‘깜박’과 ‘깜빡’은 느낌의 차이만 있을 뿐 의미로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깜빡’이 ‘깜박’보다 센 느낌을 줄 뿐이다. 사전은 느낌의 차이를 인정해 두 말을 함께 실어놓았다. 그러나 자동차의 방향 지시등을 이르는 말로는 ‘깜빡이’만 실어놓았다. 어떤 사전은 ‘깜박이’를 ‘깜빡이’의 잘못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문 칼럼에서는 ‘깜박이’로 썼다. 사전적으로만 보면 잘못 쓴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사 ‘깜박’과 ‘깜빡’의 골라 씀은 자의적이다. 그러나 여기에 접미사 ‘-이’를 붙여 명사로 쓸 때에는 ‘깜빡이’로 통일한다는 것이 사전의 의도이겠으나, 언중에게 ‘깜박이’와 ‘깜빡이’ 중 하나를 골라 쓸 수 있을 정도의 권리는 있지 않을까.
우재욱/시인
나룻
‘나룻이 긴 농부는 소녀 편을 한번 훑어보고는….’(황순원 ‘소나기’) 여기서 ‘나룻’을 알아차리는 층은 많지 않다. ‘나룻’은 ‘구레나룻’의 ‘나룻’이다. 수염을 일컫는 우리 고유어지만 화석화된 말이 됐다. 국어사전과 이전 소설에서나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제 ‘구레나룻’에서 ‘나룻’을 따로 떼어 수염의 의미를 연상하기는 어려운 일이 됐다.
어미 ‘-디’
‘쓰디쓰다´는 ‘몹시 쓰다´, ‘차디차다´는 ‘매우 차다´는 말이다. 형용사 ‘쓰다´, ‘차다´의 어간에 붙은 연결 어미 ‘-디´가 ‘몹시, 매우´ 등의 뜻을 갖게 했다. ‘-디´는 ‘-디-은´의 구성으로 쓰여 형용사 어간을 반복하게 한다. 그러면서 그 뜻을 강조하는 어미 구실을 한다. ‘깊디깊다, 넓디넓다, 높디높다, 좁디좁다, 푸르디푸르다, 희디희다´
영계(young鷄?)
보양식으로 땀 좀 흘리고 났더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한결 투명해진 햇살이 아직 따갑기는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시흥(詩興)이 절로 난다. 예년보다 삼계탕 매출이 늘어난 식당 주인의 얼굴엔 미소가 흐르고, 더위에 늘어졌던 사람들의 걸음걸이에도 힘이 붙는다. 삼계탕을 먹고 난 후 재료로 쓰인 ''영계''를 놓고 한참 입씨름이 벌어졌다. 한쪽에서 ''영계''의 어원 분석을 재빨리 했다. ''어리다.젊다''라는 뜻의 영어 영(young)에 닭''을 뜻하는 한자어 계(鷄)가 합성됐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나이 어린 이성(異性)''을 ''영계''라 하고 ''나이 든 사람''을 노계라 일컫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느냐며 제법 힐문도 했다.
''영계''는 ''연계(軟鷄)''에서 비롯했다. 병아리보다 조금 큰 어린 닭을 뜻하는 말로 약계(藥鷄) 또는 약병아리라고도 한다. 이렇게 아직 덜 자란 닭을 삼계탕 재료로 쓰다 보니 고기가 부드러우며 구수한 맛이 강하다. 표준발음법에 따르면 ''연계''는 [연:계/연:게]로 발음된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발음한 ''영계''도 이미 굳어진 단어로 인정해 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된장녀
'된장녀' 논쟁이 한창이다. '된장녀'는 원래 서양 문화를 추종하고 서양 남자라면 맥을 못 추는 한국 여성을 비난하는 말로 출발했다. 그러던 것이 점차 허영심이 가득 찬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그러나 '된장녀'는 실체가 불분명하다.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신다고 합리적 소비 능력이 부족하다 할 수 없으며, 명품 가방을 걸쳤다고 다 허영에 휩싸인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싸잡는다면 '된장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 이처럼 저마다 '된장녀' 논쟁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가치를 판단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된장녀'라는 이름 자체에 있다. '된장'이 무엇인가. 김치와 함께 우리 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유의 전통 음식이다. 하지만 '된장녀'에서 '된장'은 다르다. '된장녀' 논쟁에서 '된장'은 어쩔 수 없는 토종임을 전제하거나 미국 '버터'에 대비되는 듯한 상징적 이미지를 풍긴다. 그 이미지는 '된장'을 지저분하거나 냄새 나는 것으로 비하하는 것이다. 사치와 허영이 문제라면 '사치녀'나 '허영녀'라 해도 될 것을 하필이면 고유 음식인 된장에 스스로 좋지 않은 이미지를 부여하고 불특정 다수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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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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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선墨線 - 박완호
열여섯 무렵, 목수였던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와서도 금세 먼 길을 나서 기라도 할 것처럼 연장주머니를 꽁꽁 묶어 부엌문 옆에 세워두곤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미쳐 동여매지 못한 주머니가 문바람에 엎어져 연장들이 내장처럼 바닥에 쏟아졌는데, 급하게 그것들을 주워 담다 그만 손바닥에 먹줄로 줄 하나를 긋고 말았습니다
그 줄에 발 묶인 아버지는 내 나이 서른둘이 지나도록 집을 나서지 못하 다, 그해 여름, 편지 한장만을 남겨두고는 때 이른 낙엽이 되어 백곡 산자 락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비누칠에도 지워지지 않던 그 선이 여태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가 그 손 으로 몸을 만질 때마다 내 몸 여기저기에 묵선들을 그어 온 것일까요 해가 바뀔 때마다 내 몸엔 줄이 자꾸 늘어갑니다
아이와 함께 몸을 씻다 문득 쳐다 본 거울 속에는 한 손에 먹줄을 든 아버지가 아이 몰래 내 이마에 황홀을 새겨 놓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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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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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사에서 - 김석철
원력(願力)이 스미었나 기슭의 푸른 기운
솔향에 귀를 씻고 합장으로 모은 일념
적멸 속 우담바라 핀 그 깊이를 헤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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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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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우는 밤 - 김영일
또로 또로 또로 귀뚜라미 우는 밤.
가만히 책을 보면 책 속에 귀뚜라미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귀뚜라미 소리만 듣는다.
또로 또로 또로 멀리 멀리 동무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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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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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양선희 - 나를 이끈 손
너는 캄캄할 때, 온다. 한 길로 가는 마음 같은 줄을 타고,
오래 고름을 짜낸 생에 경계 없는 길을 들인다.
삶의 노래 내 안에 물결치고
노화하며 내 몸 울음 재우는 집이 된다.
- 시 '사랑아'전문
사랑에 대한 정의는 무수히 많다. 어떤 이는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이는 인간의 주성분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이는 외투보다 추위를 더 잘 막아 주는 것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우리 인생의 훌륭한 선생이 바로 사랑이라 했다. 인생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내린 사랑의 정의 중에서 청소년기의 내가 매혹당했던 것은 '사랑은 더 넓은 곳으로 나를 불러 내는 것'이라는 정의어이다. 릴케의 글을 읽다가 발견한 사랑에 대한 부분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문장이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줄곧 나는 릴케식의 정의로 사랑을 재단했다.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불러내어, 내가 사랑을 하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하고, 경이로운 느낌들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의심없이 믿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사랑에 빠졌을 때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불러낸 것은 내가 사랑을 느낀 그 존재 자체일 수도 있지만, 그 존재를 사랑하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드넓은 세계로 불러낸 것은 내가 사랑을 느낀 그 존재 자체일 수도 있지만, 그 존재를 사랑하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드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내어주는 것은 역시 사랑의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즐거이 사랑의 손에 이끌려 새로운 세계를 맛보곤 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내가 새롭게 느끼는 감정들 속에는 늘 신비로움과 환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쓰디쓴 맛들과 견디기 힘들어 생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인 고통과 슬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세계로 나를 불러내는 사랑의 감정들을 사랑했다.
릴케식의 사랑의 정의에 어울리는 나의 첫사랑을 만난 것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날 기념으로 어머니에 대해 썼던 산문이 교무실 앞 복도에 게시됐던 이후부터, 글을 쓰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던 나는 중학교 때부터는 밤을 새워 쓴 시를 '새농민' 이란 잡지의 독자란에 투고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농협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잡지를 손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어린이 새농민'을 두고도 굳이 성인 잡지인 그 책의 독자란에 글을 보냈던 이유는 아버지께서 농촌의 대다수 어른들이 보는 그 잡지에 활자화되어 있는 글을 보는 일을 큰 기쁨과 자랑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거의 매달 시를 써서 '새농민'에 보내곤 했었다. 잡지가 그다지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지금보다는 순수한 시대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새농민'에 내 시가 실리면 그 시를 읽는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편지가 오곤 했었는데, '시골 소녀'라는 제목의 시가 수록됐을 때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은 분량의 편지가 날아와 답장을 보낼 편지와 보내지 않을 편지를 분류해서 두 개의 라면 상자에 나누어 담았었다. 그런데 답장을 보낼 편지들이 담긴 바로 그 상자에 들어 있던 편지의 발신인 중 한명이 바로 나의 첫사랑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M의 편지를, 답장을 보낼 편지로 분류했던 것은 그의 편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멋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편지들은 자신이 읽은 내 시에 대한 느낌과 시를 쓴 나에 대한 여러 방면의 추측, 혹은 자기를 소개한 내용들로 여러 장의 편지지가 채워져 있었지만 그의 편지는 봉투부터 달랐다. 나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위해서였는지 편지 봉투에는 발신인의 주소가 없었고, 편지지도 그 시대의 흔히 쓰던 양면돼지가 아니라 백지였다. 백지의 5분의 4정도를 여백으로 둔 하단에 '위의 여백에 나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라는 정성을 다한 펜글씨가 깨끗하게 적혀 있었고, 뒷장에는 그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편지의 형식이 워낙 개성적이었던 탓에 그 주소는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었다.
M의 첫 편지에 오래 마음을 빼앗겼던 나는 곧장 답장을 썼다. 그때 나는 주로 여러 종류의 말린 꽃잎을 붙여 꾸민 종이를 편지지로 사용했었다. 그의 두 번째 편지를 통해 나는 그가 서울대학교에 낙방하여 재수를 하고 있는 수험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성인잡지에 시를 투고했었기 때문에 내게 편지를 보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자기 또래의 성인으로 여겼듯이,M역시 막연하게나마 나를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곧 여고생이 될 신분이라는 것을 금방 밝히지는 않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더 있고 난 다음에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힐 참이었다. 문학적이고 섬세한 문장의 그의 편지를 서너 통 받아 읽은 뒤 그가 편지교류를 계속해도 좋을 사람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린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힌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이후에 온 그의 편지는 높임말이 예삿말로 바뀌었고, 미지의 또래 여인을 대하듯 하던 문체는 여동생을 대한 듯한 친근한 문체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그보다 한참 손아래라는 것을 밝힌 이상 나 역시 그때부터는 그를 'M씨'하는 호칭 대신 '오빠'라 불렀고, 서로의 사진을 주고 받으며 환 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한발 내려왔다. 그 뒤에 그는 내게 '세상에는마음으로 봐야 될 것이 더 많다'는 편지와 함께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선물했고, 나는 그에게 손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베갯잇을 보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는 내가 보낸 선물의 용도를 몰랐었다고 한다. 그의 대학진학과 아버지의 임종이 맞물려 있었던 터라 장남이던 그가 원하던 대학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그가 주거하던 지방대학의 행정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가 대학생이 된 후에도 편지를 통한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쓴 형이상학적인 시들을 들려 주기도 하고, 괴테며 릴케, 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조르주 상드, 버지니아 울프, 키에르 케고르 같은 사람들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식구들이 밥을 먹는 동안에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손전등을 켜 들고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를 즐기던 나였지만, 우리 나라 작가들이 아닌 외국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은 거의 그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며 막스 뭘러의 '독일인의 사랑',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여자의 일생',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같은 책들을 떨리는 가슴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늘 내게 '책 속에 모든 길이 있다'라고 말했기에 대학진학의 압박을 받지 않은 여고시절을 보냈던 나는 그가 권하는 책을 읽고, 사색하고, 시를 쓰고, 거의 매일 그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는 일들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곤 했다. 편지를 통해 그는 자신이 나보다 먼저 알게 된 삶의 다양한 표정을 나에게 보여 주었고, 깊고 맑은 지혜의 샘물을 길어 내 목을 축여 주었고, 나는 그가 나에게 주는 것들을 내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 시절의 내가 뿌리도 잘 내리지 못한 한 그루의 어린 나무였다면, 그의 존재는 나무가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하고 꿈을 키우며 푸르게 자라게 하는 영양분 많은 흙이며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햇살이었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보다 박식하고 나보다 시를 잘 쓰고.....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월해 보인 그를 나는 숭배했다. '나는 언제쯤 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읽고, 쓰면서 마음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애썼다. 한창 이성에 눈을 돌릴 시절이었지만 나의 마음은 늘 그를 향해 있었다. 태양이 되고 싶어 태양만을 보며 자라는 해바라기처럼. 그는 내 삶의 지주였고, 내 영혼의 지배자였고 나를 키우는 영양제였다. 그러나 내 영혼의 키가 조금 자랐다 싶으면 그의 영혼의 키는 언제나 나보다 더 훤칠하게 자라 있어서 나를 안타깝게 했고, 나를 더 열심히 살게 만들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부드럽고 향그러운 흙과 같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든 황무지같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든 그 가슴에 사랑이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들어 뿌리를 내리면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생기가 도는 표정이나 정감이 넘치는 말씨, 약간 들뜬 듯한 행동뿐 아니라 사물이나 대상을 보는 시선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사랑의 씨앗이 눈을 떠 껍질을 깨고 떡잎을 내밀 때쯤이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그 보배로운 선물을 준 존재를 닮으려고도 한다. 서로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라고는 알고 있으나 동질성을 지니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즐겨 마시는 차를 따라 즐기고, 그 사람이 즐겨 가는 장소를 따라 즐거이 찾고, 그 사람의 취향까지도 닮으려는 헛되지만 예쁜 노력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M을 만났던 시절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오직 같은 하늘 아래 그의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희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닮으려고 했었다. 그는 자신이 염세주의자라고 했었다. 그런 단어를 그로부터 처음 들은 나는 사전을 펼쳐보고서야 세계나 인생을 가치가 없는 것이나 무의미한 것,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보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염세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 나는 낙천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동안 그가 보내온 편지들을 통해 나름대로 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 또한 지나친 염세주의자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그렇게 평가한 이상 나도 염세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해야만 될 것 같은 유치한 생각을 했었다. 외적으로 나타난 그 징후는 우선 옷을 살 때 유채색보다는 무채색을, 채도가 높은 것보다는 채도가 낮은 것을, 새 느낌을 주는 옷보다는 누가 몇 번 입었다 벗어둔 듯한 헌옷을 고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적으로 나타난 그 징후가 있다면 그것은 우선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순간도 꿈을 버린 적이 없었던 지난날들을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이율배반적인 것이었겠으나, 나는 그의 생각처럼 미래는 없으니 늘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야 된다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M은 그렇게 청소년기의 내 인생의 표정을 바꾸어 놓았고,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한 존재였던 것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 주고받는 편지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키우기에는 알맞은 형식이든가? 그 시절 M과 내가 주고받은 편지는 때로는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을 빌려 썼지만 대부분은 일기 형식이었다. 일기라는 것은 자기내면을 비추는 은밀한 거울이라면, 그 거울에 비친 고백의 얼굴 같은 것을 함께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벽이 없는 가까운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M과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 풍경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서로 근친과도 같은 친근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지 않고 현실에서 자주 만났더라면 서로에 대한 환상이 쉽게 깨져 오랜 만남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상도와 충청도란 지리적인 거리는 우리를 그런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도 서로를 신비의 베일에서 벗어나게 할 날이 찾아왔다. 지금은 소설가가 되어 서울에 살로 있는 6촌 언니가 한 명 있는데, 그림을 잘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처럼 예쁘게 꾸미고 다니던 그 언니는 일찍 결혼을 해서 딸 쌍둥이를 낳았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언니의 시가 쪽 친척이 M이 사는 도시에 살고 있었고, 언니가 혼자 그곳에 갈 일이 생겼는데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가기가 힘들다며 나에게 동행을 부탁해 왔던 것이다.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기꺼이 언니를 따라나섰다. 그 도시에 도착한 나는 저녁 무렵에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내가 있는 곳과 가까운 장소인 석유창고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 도시가 초행이었던 나는 끝내 약속장소를 찾지 못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낯선 거리를 헤매다가 서점에 들러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서로 만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는 내게 폴발레리의 시집을 한 권 사서 읽으라는 권유로 만나지 못한 첫 만남을 위로해 주었다. 그 이후에 나는 그의 얼굴을 길거리의 벽보에서나 볼 수 있었다. 운동권에 투신해 어두운 한 시대를 밝히는 데 한 줄기 빛이라도 더하고자 했던 그는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도피생활을 하느라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뜸해졌던 어느 날 그는 내게 마지막 편지라고 단언한 한 통의 편지를 보내 왔다. 그때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상경해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자신의 처지 때문에 나와의 만남을 계속하면 나를 세속적인 형태의 불행에 빠뜨릴 것 같다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 그 편지를 읽으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눈물과 한숨에 젖은 나날을 오래 지속하던 나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가 내게 보냈던 수백통의 편지를 한 장 한 장 불에 태웠다. 그의 존재는 그렇게 한줌의 재로 남게 된 것이다.
결혼을 두고 흔히 '새로 태어나는 것' 이라고들 한다. '가정'을 갖고 나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활의 태도 등이 '가정'을 갖지 않고 떠돌 때와는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기 이전의 사람들이 뿌리 없이, 혹은 헛뿌리만 내리고 환상 속을 붕붕 떠다닌다면 결혼은 그들을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결혼과 함께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결혼 이전에는 나를 넓은 세계로 불러내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믿었었지만, 사랑은 그렇게 한 가지 표정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수만 가지의 변화무쌍하고 신비로운 표정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오늘까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끈 사랑의 손길들에게, 그러나 축복을.....
양선희 - 1960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여 1984년 서울예전 문창과를 졸업했다. 1987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했음며,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집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일기를 구기다'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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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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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텅빔
언젠가 나는 인도에서 아주 부유한 사람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기 집에서 가장 좋다는 방을 내주었는데, 그 방은 가구들 때문에 매우 난잡했다. 그 방은 무수한 가구들로 꾸며져 있어서 실제로 방은 없었고 드나들기조차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그 방이 마음에 드십니까?" 나는 말했다. "도대체 방은 없군요. 좋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럭저럭 들어갔다 나왔다 하지요. 이건 방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는 가구들과 현대적인 가구들을 많이 수집해 놓고 있었다. 전축, 텔레비젼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방은 없었다. 방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로 그런 가구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무엇이 부족한 게 있습니까? 텔레비젼도 있고 전화도 있고 라디오, 전축도 있어요. 없는 게 뭐지요? 제게 말씀해 주시면 곧 주문하도록 하지요." 나는 말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가구 명세서에 지나지 않는 거요. 방은 사면의 벽 안에 있는 빈 공간이지요."
그 방이라는 말은 곧 텅 빔을 의미한다. 만약에 가구를 모두 치워 버린다면 그 사람은 방안에 들어왔을 때 방이 비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방은 곧 라디오, 전축, 텔레비젼 등등의 이러저러한 가구들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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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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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삶의 향기
행복은 너무 비어 있어도 너무 가득 차 있어도 들어오지 않는다. 너무 빈 곳에는 한숨 때문에 행복이 달아나고 너무 가득 찬 곳에는 투정 때문에 행복이 달아난다. 물통을 너무 가득히 채워 놓지 말아야 한다. 물통이 가득 차서 더 채울 곳이 없어지면 삶의 향기는 끊긴다. 삶의 향기는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가 아니라 채우는 과정에서 더 많이 나온다. 물을 길으러 가면서 길가에 핀 들꽃의 냄새도 맡아 보고, 한가하게 놀고 있는 강아지와 신경전도 벌여 보고, 우물가에서 이웃과 정다운 대화도 나눌 때 삶의 향기는 듬뿍 피어난다. 많은 이들이 물통이 가득 차야만 삶의 향기가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물통이 빨리 차서 몸이 편안히 쉬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을 길으러 다닐 때는 힘들어 물통이 빨리 찼으면 하고 바라지만 막상 물통이 가득 차 버리면 그 때부터 삶은 무료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편안할 것만 같았던 몸은 왠지 나른해지고 게을러져 오히려 삶의 향기가 끊기고 만다. 삶의 향기가 끊임없이 피어나기를 바란다면 물통을 늘 비워 두어 물을 길으러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없애 버리지 말아야 한다. 물통이 이미 채워져 있다면 힘이 없어 물을 길으러 다니지 못하는 옆집 할머니에게도 좀 나누어 주고ㅡ 몸이 아파 누워 있는 사람에게도 좀 나누어 주어 비워야 한다. 비워진 물통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물을 길으러 다닐 때 삶의 향기도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다.
욕심
대통령 자리도 채우지 못하는 욕심. 돈도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한다.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태연히 놓아 버릴 수 있는 내 조그만 마음뿐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욕심이 수그러지지 않는 것은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달래지 못하기 떄문이다.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얻기 위해 매달리고 집착하는 그 마음이 욕심을 기하 급수적으로 늘려 놓는다. 있는 자가 더 벌려고 하고, 권력자가 더 높은 권력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그것이 부족하기 떄문이 아니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욕심나는 것을 얻어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것은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아서 욕심을 더욱더 고조시킬 뿐이다. 욕심의 근원지는 내 조그만 마음이다. 마음을 달래는 것만이 욕심을 잠재우는 유일한 수단이다. 마음을 달래면 운동화를 신고 있어도 행복해지지만 마음을 달래지 않으면 구두를 신고 있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우리를 고통의 명예에서 구해 내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것을 놓아 버리는 마음(만족)이다.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해 주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역시 그것을 놓아 버리는 마음(만족)이다. 욕심을 버리고 놓아 버릴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얻게 된다. 욕심을 부려 한 송이 꽃을 꺾으면 그 꽃만 내 꽃이 되지만 욕심을 버리고 꽃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꽃이 내 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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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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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진 중권 에세이 (뮤즈의 복수)
바벨의 언어
우리가 사는 세계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저마다 자기의 견해와 자기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이 견해와 이해관계에 따라 개인들은 다른 사람과 뭉치기도하고 대립하기도 한다. 여기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한다. 바로 이 갈등이 있기에 우리가 매일 보는 연속극이 심심하지 않다. 영화가 재미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소설이 재미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나아가 아침마다 펼쳐드는 일간신문이 재미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전체 사회 성원들의 견해와 이해관계가 전적으로 일치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당히 무료할 것이다.
네로와 평민
앞에서 나는 예술적 '허구'로서의 갈등과 우리가 신문에서 읽는 '현실'의 갈등을 같은 층위에 올려놓았다. 사실은 말하자면 나는 '허구'보다는 '현실'의 갈등이 더 재미있다. 즉 우리 사회에서 신문만큼 더 극적이고 재미있는 것은 없다. 신문으로 읽는 우리 현실은 종종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어 그 어떤 예술적 허구보다 더 극적인 사건들로 차고 넘치는 우리 사회에선 아예 기사거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신문이 재미있다.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9시 뉴스>가 제일 재미있다. 우리 나라에서 예술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어느 예술적 상상력도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그 엄청난 일들의 스케일을 따라잡지 못할 게다. 가령 할리우드적 상상력이라도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백주에 멀쩡한 백화점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3백 명의 사망자를 낸다는 시나리오를 생각해낼 수는 없을 게다. 또 어느 시나리오 작가가 정지상태의 버스가 다리 위에서 강물로 잠수하는 기상천외한 모티브를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또 정치가들이 하는 뻔뻔한 농담. 언론은 또 어떻고? 탈세한 사람을 잡아넣었더니 피켓을 들고 "언론탄압 중지"하라며 갑자기 민주화 투쟁을 한다. 이 압도적인 우스움 앞에서 코미디언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우리 사회는 거대한 코미디다. 그게 솔직한 나의 인상이다.
이 현실의 희비극. 순전히 미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신문을 읽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다. 로마 시내에 불을 질러놓고 그 불길의 아름다음을 바라보며 시를 읊는 네로 황제가 된 기분으로 본다면. 그런데 한가지 조그만 문제가 있다. 즉 현실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자 사이에는 거대한 존재론적 장벽이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그 장대한 희비극의 스펙터클을 여유 있게 음미하고 신문을 덮는 순간, 나는 다시 느긋한 유미주의 황제의 입장에서 목숨을 부지하려고 불길에 휩싸인 로마시내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가련한 로마평민의 주제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을 읽는 나의 즐거움은 항상 그 뒤로 서글픔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벨의 언어
이런 접근방법이 있을 수 있다. 즉, 우리 신문을 세계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황색신문으로 만드는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의 원인을 의사소통의 구조에서 찾는 것 말이다. 성경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원래 인간은 천지창조 이래로 단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불현듯 인간들이 신에 도전하기 위해 탑을 쌓는다. 그러자 신이 화기 나서 인간들의 언어를 분열시킨다. 그 결과 인간들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탑은 무너진다. 그후 사람들은 말이 통하는 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하여 세계에는 여러 개의 언어가 존재하게 되었다. 백화점과 다리가 저절로 주저앉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 무론 거기에는 뭔가 끈적끈적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백화점과 다리가 주저앉은 것은 그 건조물을 짓는 데에 참여한 여러 직종의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실패했다는 얘기다. 독일에 있을 때의 일. 거기에서는 한국의 신문이 며칠 늦게 배달된다. 재미있게도 내가 받아 본 신문 한쪽 구석엔 "안전진단의 결과 성수대교가 위험"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날 저녁 텔레비젼을 틀었더니 '코레아'라는 나라에서 다리가 무너졌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이 기괴한 동시성의 체험. 위험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다리는 기어이 무너져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의사소통의 교란, 대제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게 건축만의 일인가? 전 세계를 제패할 듯 거드름을 피우던 우리 경제는 결국 IMF라는 국민경제 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흔히 "총체적 부실"이라 불리는 이 해체현상 역시 경제활동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의사소통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의사소통은 지금 기능장애를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아름다운" 한국어는 유감스럽게도 바벨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바벨의 언어로 거대한 바벨탑을 쌓고 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대감금과 대탈주
우리의 언어사용은 부실하다. 우리에게는 한 낱말이 가진 다양한 의미를 세심하게 분간하여 사용하는 버릇이 없다. 그런 노력 자체를 귀찮아한다. 언어는 세계관의 반영. 언어사용의 부정확성은 그대로 인간의 행동양식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선 모든 것이 "대충대충" 이루어진다. 유럽의 경우에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아주 치밀한 의미의 조탁과정을 거쳤다. 가령 합리주의 시대의 유럽에서는 "명석판명"이라는 데카르트의 인식이상에 따라, 모든 낱말의 개념을 일의적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열정이 얼마나 광적이었던지, 시까지도 오류의 근원으로 매도할 정도였다(시어에서는 단 하나의 낱말이 동시에 여러 의미를 띤다. 시 텍스트를 순수 논리학자의 눈으로 본다면, 사실 시 속의 문장들은 '애매구의 오류'에 불과하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가진 언어습관의 정확성과 논리성. 그것은 명석 판명함에 대한 이런 광적일 정서의 집착으로 낱말의 의미를 백과사전이라는 감옥 속에 체계적으로 수록하는 대감금의 드라마를 통해 가는 했던 것이다. 물론 이 계몽과 합리주의의 폭력은 (언어의 시적 사용을 우습게 보는 데서 드러나 듯이) 모든 인간적 가치의 계량화, 수단화, 도구화라는 비인간성을 낳는다. 얼마 전 한국을 휩쓸고 지나간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합리주의적 광기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나라에선 포스트모더니즘이 의미를 갖기 위한 전제조건, 즉 합리주의적 대감금의 드라마가 없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외려 포스트모던이 우리의 언어습관이 가진 전근대성, 즉 불명확성과 부정확성에 대한 철학적 축복이 되어버렸다. 포스트모던이 안티모던이 된 것이다.
낱말의 의미를 꼼꼼히 따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과거의 전통사회에선 굳이 이런 게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고도로 분화되고 조직화된 체계 속의 의사소통이 과거 농경시대의 단순한 언어습관에 따라 이루어질 수는 없다.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언어습관 사이의 간극. 원래 인습이 변화는 기술의 발전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법. 더구나 서구에서 몇백 년에 걸쳐 이룬 것을 우리는 짧은 시간에 압축해야 한다. 그러니 이런 간극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오직 기술의 발전만 쫓을 뿐, 한참 낙후된 우리의 언어습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최첨단 원자력 발전소의 파이프를 '땜질' 하는 어처구니 일이 생기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게다. 우리가 흔히 "총체적 부실"이라 부르는 문제는 이미 우리의 부정확한 언어습관 속에 그 뿌리가 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의미하고,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의미의 대탈주. 우리의 언어는 바벨의 언어다.
한국적 오류론
그 언어로 용케도 우리는 어영부영 의사소통을 계속해 나간다. 여러 가지 불상사가 발생해도 이 정도나마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의미론적 문제에 이어, 이제 우리의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통사론적 문제로 넘어가자.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발생하는 몇 가지 교란요인을 발견했다. 논리학에는 '오류론'이라는 분야가 있다. 흔히 논쟁이나 대화에서 우리들을 현혹시키는 오류 논증들의 리스트를 제시하는 것이 이 분야의 과제이다. 내가 요즘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런 문제다. 각 나라와 민족마다 특수성이 있어, 의사소통에서 즐겨 사용되는 오류 논증의 종류가 서로 다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즉 그 나라의 의사소통에서 즐겨 사용되는 오류논증을 통해 그 사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대인논증이 즐겨 사용된다. 말하자면 특정인의 인격, 사생활, 과거를 집중 공격함으로써 그 사람의 발언을 반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격자가 하는 말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성질이 나쁜 사람의 말이 항상 틀린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이 한 진술의 진리치는 서로 아무 관계도 없다. 따라서 한 사람의 도덕성을 들어 그 사람의 견해를 반박하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 오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사소통과정에선 이 오류논증이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특정 문제를 논하던 대화는 결국 쌍방간의 인신공격으로 비화한다. 왜 그럴까? 어쩌면 이는 구체적인 문제보다는 한 사람의 인격적 도덕성을 더 즐겨 논하던 봉건적 담론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논점일탈의 오류다. 가령 상대방의 표현의 사소한 실수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이를 빌미로 정작 논의해야할 문제로부터 논쟁의 초점을 사소한 부분으로 옮겨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휘말려 들면 결국 논쟁은 실마리를 잃고 거대한 미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이런 논법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대화의 당사자는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그 결과 말이 험해지기 시작한다. 어쨌든 이는 우리의 의사소통이 크든 작든 정치성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논쟁을 통해 자기의 견해를 더 정치하게 다듬고 상대방과 함께 더 합리적인 견해에 도달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일단은 상대를 이기고 보아야겠다는 승부욕이 더 강하다는 얘기다. 이는 원래 정치가들 사이의 담론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 고약한 담론의 형태가 우리 사회에선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자가 주로 상대를 공격할 때 자주 사용된다면, 후자는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때 도망가는 방어책의 일환으로 주로 사용된다. 어느 경우든 이 두 가지 오류논증은 한국사회가 지나치게 인격적인 사회이며, 그러면서도 이 인격자들이 비열하게 제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는 모순적 내지 위선적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쨌든 대인 논증이든, 논점일탈의 오류든, 논의해야 할 사항은 논의되지 않고 그대로 남게 된다는 데에서는 한 가지다. 이것들은 우리의 의사소통을 선로에서 벗어나 벌판을 헤매게 만든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두 가지 오류논증이 우리의 합리적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 즉 우리의 언어를 졸지에 바벨의 언어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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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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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시골 사람
시골 사람이 처음으로 도시에 올라왔다. 그런데 역의 개찰구에서 누군가 그의 발을 밟았다. 그리고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 그는 호텔로 갔는데 출입구에서 누군가 그에게 부딪치고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극장으로 갔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거의 그를 때리다시피 하고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시골 사람은 생각했다. '이거 참 멋있군. 이런 속임수는 예전에 미처 몰랐던 것인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누군가에게 행하고는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구나.' 그래서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후려치고는 말했다.
"미안합니다."
- 그대는 무엇을 행하든 알고서 행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대의 발을 밟는다면, 그것은 그가 알면서 밟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를 깨어 있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 그는 그대를 깨우기 위해서 그대의 발을 밟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장소가 혼잡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어떤 설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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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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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18. 사마천, (사기)저술을 위해 태어나다
중국인들을 다른 민족과 비교할 때,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최초의 통사인 (사기)이래 그들은 왕조가 교체할 때마다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써서 후세에 남기는 작업을 2천년간 계속해왔다. 중국 사서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기)가 탄생하기 이전의 그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역사기록을 남겨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했고, 역사 기록자인 사관은 객관성을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겼다. (춘추좌씨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나라 대부 최저라는 사람이 군주를 살해하고 그 아우를 임금으로 세웠다. 제나라 태사가 이를 기록하자, 격분한 최저는 그를 살해했다. 죽은 태사의 뒤를 이은 그 아우가 역시 똑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최저는 다시 그를 죽였다. 그러나 또 하나 남은 동생이 태사가 되어 다시 이를 기록했다. 이에 이르러서는 최저도 어쩔 수 없어 기록의 말살을 단념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지방에 있던 다른 사관이 태사가 차례로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록판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기록이 지켜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지방으로 돌아갔다.
사마천 필생의 업적인 (사기). '사기'라는 명칭은 삼국시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고, 사마천 자신은 (태사공서)라고 불렀다. (사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사기)에 기록된 1천년 전의 은대 계보가 갑골문자의 발굴을 통해 정확히 확인된 바와 같다. 그는 (사기)를 저술하면서 객관적 자료와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역사가로서의 엄정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기)가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며 각국어로 번역, 널리 애독되고 있는 까닭은 유려하고 생돔감있는 문장 속에 무수한 인간 군상의 인생역정이 깊이있게 서술되고 있기 대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왕에서 서민까지, 성자에서 악인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편견없이 등장시키고 있다. 그는 이 책에 빠져드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이들 개성적 인물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에 주목, 역사란 어떻게 창조되는가, 인간이란 참으로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사기)는 본기, 서, 세가, 열전의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총 13권 중 열전이 7권을 차지,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사마천에 의해서 새로이 창안된 이 새로운 역사 서술 체제, 즉 기전체는 이후 중국 정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본기는 황제 이후의 역대 제왕, 세가는 제후, 열전은 그외의 인간 군상에 대한 전기다. 표는 유동하는 역사적 사실을 상호연관시켜 일람하기 위한 바둑판식의 연표이며, 서는 사회문화의 기초가 되는 역법, 천문, 법, 예법, 경제, 치수 등에 대한 제도사다. 사마천은 대대로 주의 사관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을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류를 관리하는 직에 있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고 사서편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어릴적부터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전국 각지의 주요 사적지를 직접 답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 인물들의 체험담 등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후 낭주의 직에 올라 무제를 수행, 사자로서 출장을 거듭하게 되니,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죽고, 사마천이 태사령의 직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의 집필을 결심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시, 서, 춘추, 전국책등과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각종 서적, 상소문, 국가의 포고문 등을 섭렵,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쳐왔다. 명장 이릉을 단죄하는 무제 앞에서 모든 중신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사마천이 홀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릉은 5천의 병사로 10만의 흉노 기병과 대적, 흉노1만명을 살상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천하의 사마천이 옥에 갇혀 옥리만 보면 공포감에 죄어드는 비참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당시에 사형을 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50만 전의 막대한 벌금을 내는 것, 아니면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것도 넉넉치 못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스스로 궁형을 선택했다. 이때의 그의 심경은 뒷날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극형을 받으면서도 태연스럽게 부끄러운 빛조차 띠지 않았던 것은 이 저술을 미완성으로 긑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책을 완성하여 명산에 소장하고 각지의 지식인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저의 수치도 충분히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설령 이 몸이 산산조각난다 한들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2년 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다. 그가 무제의 측근에 봉직, 중서령의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그것은 그가 환관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이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연결시켜나갔다. 무려 10여 년간의 산고 끝에 (사기)가 완성되었으니, 그때가 기원전 97년. 탁월한 재능과 예리한 관찰력, 거기에 인생의 가혹한 체험을 겪은 사마천에 의해 (사기)는 불멸의 역사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사마천은 마치 (사기)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기)가 씌어진 시기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사기는 진정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무제 시기의 문화적 상징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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