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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59호
단기 4343 / 서기 2010. 6. 8 (음력 4. 2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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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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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가 많지 않은 자에게, 인생은 혜택을 베풀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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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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삘건색
‘삘건색’은 ‘빨간색’이다. ‘삘겋다’는 표준어 ‘뻘겋다’에 대응하는 고장말로, 주로 전라도와 충남 지역에서 쓴다. “허기넌 요분참에 아랫것덜 대가리에 전보담 삘건 물이 더 진허게 들고, 맘보도 솔찬허니(상당히) 변혔을 것이요.”(<태백산맥> 조정래) ‘삘겋다’의 또다른 고장말은 ‘삘건허다’와 ‘삘허다’인데, 모두 전라도에서 쓰인다. “그눔이 예수쟁이라서 그렇제 속이야 수박 속맹키로(속처럼) 삘건헌 것이 염상진이 눔허고 하나또 달븐 디가 웂는 놈이랑께요.”(<태백산맥> 조정래) “마침 거그 꺼멍 소 한 마리허고 삘헌(붉은) 소 한 마리가 가만히 엎대어 누워 있어.”(<혼불> 최명희)
전라도에서 ‘꺼멓다, 노랗다’ 등과 같이 빛깔을 나타내는 대부분의 어휘들은 ‘삘겋다’에서 볼 수 있듯이 ‘삘건허다, 삘허다’와 같이 단어의 꼴이 바뀌어 쓰인다. ‘파랗다’와 ‘노랗다’도 마찬가지다. ‘꺼멓다’는 ‘꺼먼허다, 껌허다’, ‘노랗다’는 ‘노란허다, 놀허다’와 같이 쓰이는데, ‘ㅎ’이 탈락하여 ‘꺼먼어다, 껌어다’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또한 단어의 꼴이 바뀌면서 뜻도 조금씩 바뀌었다. ‘노란허다’는 ‘좀 노랗다’, ‘놀허다’는 ‘꽤 노랗다’ 정도의 뜻 차이를 갖게 된다. “놀허니 색이 참 곱기도 혀잉.”(<겨레말>) “참에(참외)가 노란허니 참말로 맛나게 익었구먼!”(<겨레말>)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빼또칼’과 ‘총대가정’
어렸을 때 연필을 깎기 위하여 칼집이 있는 칼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일이 생각난다. 북녘에서는 주머니칼을 ‘빼또칼’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부른다. 문학작품에서는 “외진 데를 찾아서 두 필의 말을 끌고 가는 봉길이는 밋밋하게 비탈진 산언저리에 이르러 맞춤한 새초밭을 찾아냈다. 마른 풀을 뜯어 먹게 말들을 놓아 준 봉길이는 호주머니에서 칼집이 달린 빼또칼을 꺼내들고 새초를 베기 시작하였다. 말먹이 새초를 새로 마련함으로써 자기가 결코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배심이다.”(<백두산 기슭>, 4·15 문학창작단, 문예출판사, 1978년, 9쪽)와 같은 예가 보인다. 이 경우 ‘맞춤한’은 ‘알맞은’의 뜻이고, ‘새초밭’은 ‘풀이 새로 난 풀밭’이라는 뜻이다.
북녘에는 ‘총대가정’이라는 가정이 있다. 이는 “가족 전체 또는 부자나 형제, 남매가 군에 입대하여 복무하는 등 일가족 모두가 총대를 메고 나선 가정”이다. 북녘 신문에는 “이제 머지않아 우리 집의 막내딸도 초소로 떠나게 된다. 그러면 우리 가정도 총대가정으로 된다. 총대가정, 이 영예롭고 성스러운 부름 앞에 언제나 떳떳하게 살고 싶은 것이 자식들을 초소에 내세운 우리 부모들의 심정이다.”(<로동신문> 2002년 3월1일치) 등으로 쓰인다.
전수태/전 고려대 전문교수
의존명사 ‘채’
‘구두를 신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신을 신고 방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통상적인 격식에 어긋난다. 의존명사 ‘채’는 이처럼 통상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과 잘 어울린다. ‘이미 있는 상태 그대로 있다.’는 뜻을 가졌으니 뒤의 정황은 종종 일상과 거리를 둔다. ‘옷을 입은 채 물속으로 들어갔다.’
강술
흔히 ‘깡술’이라고 말하는 ‘강술’은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이다. 안주 없이 마시는 소주는 강소주다. 접두사 ‘강-’은 이처럼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이라는 뜻을 더한다. 또 ‘호된’ ‘심한’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강추위’는 눈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으면서 몹시 매운 추위다. 단순히 몹시 심한 추위를 뜻하는 ‘강(强)추위’와 다르다.
놈팽이
''백수''와 ''놈팽이''의 차이는 무얼까. ''백수(白手)''는 ''백수건달''과 같은 말로,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사람을 가리킨다. ''놈팽이'' 역시 직업 없이 빌빌거리며 노는 사람을 뜻하지만, 특히 그런 ''사내''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백수''는 평이한 말이고, ''놈팽이''는 비하하는 말인 셈이다. 그러나 ''놈팽이''는 없다. ''놈팡이''가 맞는 말(표준어)이다.
''놈팡이''는 부랑자를 뜻하는 독일어 ''룸펜(lumpen)''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영어에서도 ''lumpen''이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룸펜'' 발음이 어떻게 해서 ''놈팡이''에 이르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발음의 유사성을 따지면 ''놈팡이''가 ''룸펜''에서 온 말이라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놈팡이''란 말의 생성과 변천에 관한 구체적 기록이 없어 관련성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어원이야 어찌 됐건 ''놈팡이''는 ''놈''의 어감 때문에 기분 나쁘게 들리는 말이다. "놈팡이 신세가 됐다" "어디 놈팡이가 없기로서니 저런 녀석을 애인이라고 사귀느냐" "어떤 놈팡이와 살림을 차렸어"처럼 사내나 직업이 없는 사내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놈팽이''는 ''놈팡이''가 맞는 말이며,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아 두면 된다.
고슬고슬, 가슬가슬 / 찰지다, 차지다
입맛 없는 여름철, 한 끼 식사로 그만인 비빔밥. 그 유래에 대해선 다양한 설이 있지만 피란길, 12첩 수라상을 보충하기 위해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나물을 얹어 임금에게 올렸던 데서 비롯됐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썩썩 비벼 먹는 그 맛은 모든 게 부족하던 당시에 임금도 반했을 만하다.
비빔밥이나 김밥 등을 만들 때 "밥은 고슬고슬하게 지어야 한다"고 한다. 되지도, 질지도 않게 밥이 알맞게 됐을 경우 사용하는 이 표현을 간혹 "욕실엔 늘 고슬고슬한 수건이 걸려 있다" "고슬고슬하게 풀 먹인 삼베 이불"처럼 살결이나 물건의 거죽이 매끄럽지 않고 가칠하거나 빳빳한 모양을 나타낼 때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슬고슬하다''는 "따뜻한 물에 쌀을 안치면 말랑말랑하면서 고슬고슬한 밥을 지을 수 있다"와 같이 음식에 사용하는 표현으로 ''가슬가슬하다''와 구분해야 한다.
밥과 관련해 자주 혼동하는 말로 ''찰지다''도 있다. 반죽이나 밥.떡 등이 끈기가 많다는 뜻으로 "한국 사람은 대개 부드럽고 찰진 밥을 좋아한다"처럼 사용하지만 ''차지다''가 표준어다. "보온밥솥은 압력밥솥에 비해 차진 밥을 하기 힘들다"와 같이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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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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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설 - 유금옥
이 고장에서는 눈을 치우지 않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봄도 치우지 않습니다 지난 가을 요양 온 나는 그리움을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대관령 산비탈 작은 오두막 여기서 내려다보면, 눈 내린 마을이 하얀 도화지 한 장 같습니다 낡은 함석집들의 테두리와 우체국 마당의 자전거가 스케치 연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3월, 겨울이 긴 이 고장에서는 폭설이 자주 내리지만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여름도 가을도 치운 적이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도시처럼 눈을 포클레인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다만, 담뱃가게와 우체국 가는 길을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나도 山만한 그대를 몇 삽 밀쳐놓았을 뿐입니다
山 아래 조그만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면사무소 뒷마당,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포클레인 한 대가 보입니다 지지난해 들여놓은 녹슨 추억도 이 고장에서는 치우지 않고 그냥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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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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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2월 병아리 - 홍성란
삐-악 삐-악, 저것은 필시 생모를 찾는 소리
썰렁한 방 안 체온에 주린 어린 것이 시커먼 비닐봉지에 제 모습을 담는다
더러는 깨진 무릎도 혼자서 닦아 매고 쪼르르 공터에 모인 산번지 코흘리개들 고만한 서러움 끼리 햇살을 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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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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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의 소리 - 이원수
대낮에 온 세상이 잠이 들었네. 바람 한 점 없네. 논의 물도 죽은 듯 누워만 있네.
먼 먼 산에서 뻐꾸기 혼자 뻐꾹 뻐꾹, 그 소리뿐이네.
더운 김 푹푹 찌는 벼논 한가운데 땀에 젖은 작업복 등만 보이며 혼자서 허리 굽혀 논매는 아버지.
발자국 옮길 때마다 나는 찰부락 찰부락 물소리뿐이네.
도시락 쳐들고 아버지를 불러도 흘긋 한 번 돌아보고 논만 매시네.
뻐꾹 뻐꾹 먼 먼 산에서 뻐꾸기만 우네. 일하는 아버지의 물소리만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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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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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문재 - 수국은 한 송이 꽃이 아니다
여름 날은 헉헉하였다
오래 된 마음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 부풀어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시 '꽃은 빛의 그늘이다- 수국' 전문
수국이 필 때면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국 한 송이가 저마다 여러 개의 작은 꽃송이로 이루어진 꽃의 다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국은 그 커다란 꽃송이에 비해 화려하지 않다. 거개가 흰색이거나, 산수국일 때 연한 녹색 기운을 가질뿐이다. 색과 빛을, 향기와 모양을 되쏘지 않는 꽃. 되쏘기는커녕 색과 빛을, 향기와 모양을 받아들이는 꽃이 수국이다. 하얀 수국은 결혼했다가 일찍 홀로 된 누이를 떠올리게 한다. 첫사랑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는 매우 행복한 이야기지만, 들려주는 사람에게는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익히 체험했을 터이지만, 사랑 이야기는, 군인들의 무용담처럼 부풀려지기가 십상이다. 첫사랑 이야기 앞에서 알리바이와 물증을 추궁하는 청중이 어디 있겠는가. 나에게 첫사랑 이야기가 난감한 것은, 과연 무엇이 첫사랑인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겨우 말을 배우고 난 대여섯 살 시절부터 막 40대로 접어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하는 사랑은, 그것이 사랑의 범주 안에 든다면 모두 첫사랑이다. 수국 한 송이가 여러 개의 작은 꽃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말이다.
나는 최초의 여자를 사랑했다. 나는 만득이었다. 아버지가 쉰에 나를 나으신 것이다. 어머니는 마흔둘이셨다. 태어나서 내가 말을 배우고 사물과 사태를 인지하기 시작하던 때, 그러니까 최초의 기억이 만들어지던 무렵, 내 최초의 여자는 '늙으신' 어머니가 아니었다.(다른 글에서도 짧게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리집에 잠깐 세들었던 경상도 아가씨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 앞에는 검문소가 하나 있었다. 그 검문소는 해병대 관할이었는데, 어느 날 그 검문소 초소장이 우리집 건넌방에 세를 들었고, 며칠 뒤 아주 젊은 아가씨를 데려왔다. 내가 나중에 성인이 되어 생각해 보니, 그 헌병대장(우리는 초소장을 헌병대장이라고 불렀다)은 20대 후반이 채 안되었을 것이고, 그 아가씨는 갓 스무 살을 넘었을 것 같았다.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어야 하는 새카만 늙은 어머니에 비해 그녀는 키가 크고, 피부가 고왔으며, 얼굴이 갸름했다. 그 아가씨는 쌀을'쌀'이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살'이라고 했다. 그녀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은 바로 그 '살' 발음 때문이다. 여름철이면, 우리집 마당에는 아버지가 손수 만든 돗자리가 깔렸다. 저녁식사는 마당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졌으니,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끼여들었고, 저녁식사 자리는 이내 옛날이야기 자리로 바뀌었다. 전쟁과 피난 이야기가 대부분인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돗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잠들곤 했다. 그런 어느 여름 날 저녁이었다. 그 헌병대장은 근무가 끝나면 자주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그 아름다운 경상도 아가씨에게 손찌검을 했다. 어른들이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그 헌병대장은 꼭 권총탄 띠를 마루나 돗자리위에다 풀어놓고 건넌방으로 들어가 그 아가씨를 때렸다. 어른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나는 몰래 권총에다 손을 대고는 했다. 그때 그 권총은 얼마나 차가웠던가, 그 때 이미 나는 그 아가씨를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그 경상도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병대장이 술에 취해 손찌검을 한 다음 날이면, 그 아가씨는 나를 꼭 끌어안고 소리없이 흐느끼곤 했다. 나는 그 화선지 같은 아련한 품안에서, 이 여자가 내 어머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상상했다. 지금이야 그녀를 경상도 아가씨라고 표현하지만 그때 나는 아마 속으로 '엄마'라고 되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름다운 '엄마'를 괴롭히는 헌병대장에 대한 어린 나의 적의는 정당한 것이었다. 내가 어른들 몰래 그 무시무시한 권총에 손을 댔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헌병대장과 경상도 아가씨는 그해 여름 한 철만 살고 우리 집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젊고 예쁜 어머니'에 대한 나의 갈증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큰 형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다. 아침 일찍 비포장길을 달려 인천에 도착해,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예식장에 닿아야 했다. 부모님, 친척들과 함께 인천에서 고속버스를 탔는데, 유독 내 좌석만 따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나는 그 향기가 나는 곳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오른쪽 창밖만 바라보아야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나 되었을까. 그 '향기'가 나에게 뭔가를 내미는 것이었다. 왼손으로 겨우 받았다. 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껌을 결국 씹지 못했다. 버스가 서울역 앞에 내릴 때까지 나는 그 껌을 왼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털이었을까, 여우털이었을까. 얼굴 한 번 쳐다보지 못한 그녀는 털이 많은 옷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 쥔 껌 하나조차 벗겨 먹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럼을 많이 탔던 나는 버스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또 '젊고 예쁜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삽화를 떠올리다 보면, 나에게 첫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젊은 어머니에 대한 염원이었으니, 나는 그야말로 '젊은 여자 결핍 증후군'을 앓으며 성장했던 것이다. 수국의 작은 꽃잎 이야기는 계속된다.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그 시골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개교한 지 얼마되지 않은 그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나는 설레기도 했지만 두렵지 그지없었다. 낯선 여자가 준 껌하나 까먹지 못하는 놈이 망아지만한 여학생들과 어떻게 3년을 지낸단 말인가. 게다가 중학생 시절, 나는 키가 얼마나 작었던가. 나는 여학생들이 두려웠다. 대신 국어 선생님이나 영어 선생님, 또는 음악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 여선생님들은 인천에서 출.퇴근하던 나의' 젊은 어머니'들이었다. 시골에서 인천까지 버스로 통학하던 70년대 중반, 그 통학 버스 안은 나의 용광로였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던 그 통학길은 옹목 다섯 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프로이트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있던 나에게 몇몇 정류장은 위험지대였다. 그 정류장에서 그녀가 타는가, 타지 않는가를 놓고 그날 하루의 운을 따지곤 했다 그때 나에게는 서너명의 '애인'들이 있었다. 종점에서 함께 A여고 3학년생, 다리 건너에서 타는 B여고 2학년생, 목장에서 타는 C여고 3학 년생, 종점에서 타는 3학년생은 키가 작고 얼굴이 아담했고, 다리 건너에서 타는 2학년여고생은 지중해 여자처럼 늘씬했으며, 목장에서 타는 3학년 여고생은 피부가 검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그 세 여자 가운데 누구와도 말 한마디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아카시아가 만발한 5월의 주말이면, 목장에서부터 우리집이 있는 종점까지 서너 시간을 혼자 걸었을 뿐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몇 송이의 수국 꽃잎을 만난 적이 있다. 워낙 쑥맥이어서,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이 붉어지고 몸이 굳는 통에 대학 1학년 3월은 견디기 어려웠다. 입학 동기 남학생들에게도 말을 잘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축구를 잘하던 과 동기를 따라 문학회에 들어가고, 그 문학회에서 선배를 만나 연극부에 들어갈 떄까지도 나의 '젊은 여자 부재 증후군'은 '대인공포증'으로 변질되어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때 연극부는 나에게 새로운 ' 가족'이었다. 복학한 중문과 선배는 큰형처럼 보였고, 무용과나 국문과 여자 선배들은 또 '어머니'처럼 보였다. 학교에서 가까운 큰형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연극부실에서 먹고 잤다. 대학시절, 문학보다는 연극에 심취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늙으신 부모 밑에서 고아처럼 자라났던 성장기에 대한 보상심리 바로 그것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쉽게 결혼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시 쓰는 친구들과 함께 지금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 될 여자를 그야말로 죽도록 따라나녔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죽을 것 같았기 떄문이다. 잠시라도 보지 못하면, 연락이 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건 삶이 아니었다. 고문이고 지옥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사랑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편이다. 사랑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랑은 말하여지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사랑에 대하여 함구해야 한다. 묵언해야 한다. 거개의 사랑은 연애의 오역일 때가 많다. 사랑과 연애를 동일시하는 한 그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그리고 연애는 무분별한 소유욕,집착일 때가 많다. 연애를 보라, 그것은 거의 정신병이다. 다른 것 사랑하는 그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연애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다. 연애는 순수하다. 지독하다.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다. 삶의 전과정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자신이 아닌 그 무엇에 투신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연애 말고는 그리 많지 않다. 연애의 에너지가 잘못 풀려나갈 경우 광신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첫사랑은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 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투신은 신뢰의 관계로 성숙 할 때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신뢰의 다른 이름이다. 연애로 가지 못하는 첫사랑, 사랑으로 가지 못하는 첫사랑은모두 신뢰가 부족하기 떄문이다. 그 리고 그 신뢰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을 때,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 이것이 수국의 작은 꽃이파리들을 겪으면서 내가 터득한 깨달음이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수국 한 송이가 아니라, 수국 한 소망를 이루는 작은 꽃잎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의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시이다.
이문재 - 1957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을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이 있다. 제6회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동네 주간으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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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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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오, 하느님!
어떤 사람이 말을 사려고 목장으로 가서, 그 중 한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놈은 아주 아름답군요. 무슨 종입니까?" "팔로미노입니다." 목장 주인이 말했다. "저 말을 사겠소." 그런데 목장 주인이 그에게 한가지 주의를 주었다. "알려드릴 것이 있는데, 저 말은 교회의 전도사가 갖고 있던 것입니다. 말이 달리기를 원할 때는 하느님이라고, 멈추기를 원할 때는 아멘이라고 하십시오." "한번 시험해 보아도 될까요?"
그가 말에 올라타서 "하느님"하고 말했더니 말은 재빠리 달려서 즉시 산으로 질주해 올라갔다. 그는 "하느님, 하느님" 하고 계속 소리쳤고, 말은 정말로 빠른 속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가 낭떠러지의 끝에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포에 질려서 "워, 워!"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곧 그는 기억을 되살려서 "아멘"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말은 신기하게도 낭떠러지의 끝에서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 하느님!"
"하느님"이라고 말하라. 그러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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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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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사회 정의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지 마라. 도덕과는 거리가 먼 오렌지족 야타족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덕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몇몇 사람들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로 해서 세상 사람들을 비관적인 눈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한 사람의 잘못을 확대 해석해서 그가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잘못되었다고 몰아붙이거나, 한 사람의 잘못된 행위로 해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까지 똑같은 사람이라고 매도해 버리는 행위는 이미 정당성이 없다. 우리 사회를 비관적으로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희망적이다. 나쁜 짓 하며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착한 일 하며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고, 차가운 가슴으로 냉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고, 인색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인정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사회의 정의는 몇몇 그른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다수의 바른 사람들에 의해서 지켜져 나간다. 사회 정의를 해치는 몇몇 사람들의 그른 행위는 대다수 사람들의 옳은 정의에 심판받아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악은 선에 의해서 제자리로 돌아오고, 부정은 정에 의해서 제자리로 돌아오며, 거짓은 진실에 의해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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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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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정란 에세이 (지식인과 글쓰기)
지식인과 글쓰기
한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지식이란 건 무얼까? 지식은, 결국은 일종의 식사도구 같은 것이 아닐까? 삶이라는 스프를 떠먹는 숟가락, 삶은, 늘, 공허와 비형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고집불통의 엔트로피 덩어리에 불과하다. 어떤 무참한 세계 안으로의 물질적인 던져짐. '있음' 이라는 유형지 안으로 떠밀려 넣어진, 어떻게 해도 순수 추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박상륭의 표현을 빌리면, "망헐녀러" 불쌍한 영혼의, 불순한, 임의적인 형태, 레비스나의 어두운 목소리를 따라가면, 그 어떤 명민한 상상적 전략으로도 이 무참한 '있음' 자체를 지워버릴 수 없다. 가장 영웅적인 실존적 결정인 자살로도 그 '있음'이라는 '병균'은 죽여 없앨 수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것은 잠깐, 어떤 형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그 자체로는 흐물흐물한 카오스, 비실재성의 덩어리이다. 기껏 지식이라는 숟가락으로 우린 삶이라는 액체를 몇 모금 떠먹어볼 뿐이다. 나머지는… 도루묵이다(도루묵만 해도 제법 단단하지 않은가?).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너무 슬프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 그래도,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삶이라는 유기체적 액체를 어느 정도까지는 고형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래서 그걸 붙잡고, 당대를 통과할 수는 있다고. 운이 좋으면, 몇 세대씩 버티는 경우도 있다고. 그러면, 지식은 치즈 제조용 막대기인가? 우유를 자꾸 저어라. 또 저어라. 언젠가는 네가 형태를 가지게 되리라.
이 우유 떠먹기 또는 치즈 만들기의 구체적인 수단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인간은 카오스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로고스를 개발시켜 왔고, 그리고 로고스는 무엇보다도 말의 형태로 가장 잘 포획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이란 그렇게 생의 엔트로피를 줄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존재, 또다시 박상륭의 표현을 빌자면, 독룡앞에서 잡설을 늘어놓는 자이다. 그러나 본래의 무형이며 추상인 '말'은 '글쓰기'의 채널을 통과하면서 더욱더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다. 물론, 잃어버리는 것도 많다. 유형은 언제나 무형에 비해 덜 순수하며, 덜 자발적이며, 덜 천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탈근대 사회에 들어서, 문자 언어가 지구상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앞으로도 인류는 한참동안 더 문자 언어의 도움을 받을 것 같다. 미디어가 다양해졌을 뿐, 문자 언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지식인의 대사외적 역할이 중요해진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글쓰기 자체가 '독룡과의 싸움'인 계몽의 역할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점점 더 강력해지는 국가의 권력에 맞서서, 끊임없이 대중을 계몽하는 한편, 공공선의 지수를 높이기 위해서 '글쓰기'를 수단으로 권력자들의 횡포에 맞서왔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 싸움의 위상은 왕이 무너지면서 서서히 절정에 오르기 시작한다. 이후 지식인의 위상은 늘상 권력의 맞은편에 세워진다. 지식인이 권력자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걸 감당하기 싫으면 지식인으로서 근본적인 자격 미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언제나 본질적으로 비형태인 삶 앞에 맨몸으로 마주설 용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기왕에 존재하는 형태를 들고 허공으로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엔 '왕'의 시중을 들지 못해 안달인 지식인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대중의 상대적 무지를 이용해서 교언영색의 글쓰기로 진정한 계몽을 늘 가로막는 자들이 우리 지식인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왔다. 우리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집단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이유하지 못한 이상한 전근대적 탈근대 사회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개인성을 확보하고 자기 '말'로 말하지 못하는 배운 대로 혀짜래기소리나 하는 유치한 어린이로 남아 있게 만드는 데에 지식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보편적 수준에서 삶과 드잡이 하기보다 거대 언론에 얼굴을 내밀면서 '왕'과 눈맞추는 데 급급한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를 돈이나 좀 번 촌뜨기로 만들어가고 있다. 탈근대적 지수가 우리사회에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실들이 복잡한 문화적 함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의 옷으로 얼굴을 가린 권력은 여전히 문화의 가면 뒤에서 대중을 조소하면서 소프트한 문화의 진정제나 먹이면서 자기 몫을 챙기고 있다. 과거에 운동을 했던 인사들조차 언제 우리가 대중을 위해서 운동했더냐, 나만 왕자마마 되면 그만이지, 하는 식으로 얼른 팬시노동복으로 갈아입고 거대 언론에게 면죄부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런가? 이제 정말 '시대가 바뀐' 것일까?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지식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아니, 나는 참여는 이제부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정말로 전문적인 참여가 필요한 시대이다. 모든 것이 교묘하게 뒤틀려있는 탈근대적 상황 안에서 지식인들의 글쓰기는 더욱더 정교해지고, 더욱더 치열한 사유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무턱대고 길에 나서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무턱대고 길에 나서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정치적으로 정리되던 그런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매우 특화된 방식으로 각자 자기 자리에서 다시 독룡을 응시하는 눈빛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다. 게다가 혼자서 잘난 체하는 것으로 일을 갈무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시대도 아니다. 함께 해야 한다. 지식인들의 연대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계몽은 끝나지 않았다. 진정한 계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자판에 서투른 내 손가락 밑에서 '글쓰기'는 자꾸만 '글쑤기'로 변한다. 음, 알았음. 삶이여. 이 원초적인 죽이여. 그러나 네가 나를 너의 늪 안으로 완전히 끌어들이지는 못한다. 나는 잘못을 반성하는 자, 뒤늦게라도 '글쑤기'를 '글쓰기'로 교정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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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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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파한집 - 이인로(1152~1120)
고려 중기 문신 이인로가 쓴 최초의 시화 수필집. 이름난 문인들과 승려들의 시문을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씌어진 책으로, 고려 중기까지의 시의 역사를 조감하면서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는 물론, 시학의 근본문제까지 자세하게 논의 하고 있다. 아울러 고려 문화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죽림고회의 중심인물
이인로는 고려 의종 때 7대 80년 동안 국권을 장악했던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잃고 고승인 요일 밑에서 자랐다. 그의 가문은 그 자신도 자랑스럽게 여긴 쟁쟁한 문벌귀족이었으나, 그는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청년기에 무신정권의 공포정치를 피해 한때 승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환속하여 29세에는 문과시험에 장원급제한 뒤 문극겸의 천거로 하림원에 보직되어 14년간 근무했다. 당시의 이름난 선비인 오세재, 임춘,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과 죽림고회를 조직하고 시와 술을 즐겼다. 이는 중국 진대에 문학을 사랑하고 술과 거문고를 즐기면서 세상을 등지고 죽림에 모여서 청담을 나누었던 중국의 <죽림7현>을 흠모한 문학모임이었다. 그후 벼슬은 다소 높아졌으나 순탄치만은 않았다. 관직에 매력을 가졌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당시 집권층인 최씨 일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 아니었다. <고려사>에 "성격이 편협하고 급하여 크게 쓰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격적으로도 시대 흐름에 거슬린 듯하다. 이런 면에서 최씨 정권하에서 승승장구하던 이규보와는 대조적이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그는 인간관계를 인연의 결과로 보고 임금과 어진 재상의 만남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보아 "하늘이 내린 품성은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어, 물건에 따라 옮길 수 없다", "대개 초목은 그 토질이 맞지 않으면 그 품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또한 관직을 원하면서도 구걸하지 않고 시와 술로 자위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이인로는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이 이룩한 문학이 지속되고 더욱 세련되기를 바랐다. 특히 예종 때 군신이 함께 어울려 시를 주고 받으며 풍류를 즐기던 일을 두고두고 동경하면서 자기 시대에도 그 기풍이 재현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의 생각에는 의종 때가 문인들의 황금기였던 반면, 명종 때의 문학은 암흑가로 여겨졌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종을 찬양하고 그 시대를 그리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점 쇠약해지는 문학을 보존하기 위해 틈틈이 모은 시들과 문인들의 동향을 기록해 나갔다. 그러한 노력의 결정이 <파한집>으로 나타났다. 이런 면에서 <파한집>은 그의 문학적 고백을 담고 당시 문단의 증언을 엮은 단편집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국문학사상에서는 "수필적 평론집으로선 맨 최초의 것"으로 규정하면서 "13세기 고려 문단에 혜성처럼 빛나는 평론집의 효시"라고 평가하고 있다.
무신정권하의 문인들
1170년 정중부에 의해 무신의 난이 일어나서 많은 문인들이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란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문인들은 현실을 도피하여 문학에 몰두하다 보니, 오히려 문학이 더욱 풍부할 수 있었다. 현실도피가 문학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는 오세재, 임춘, 이인로 등의 경우를 보면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죽림고회
무신정권의 공포 속에서 제도권의 안락함보다는 자연 속에서 시문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가치를 찾고자 한 시문 숭상자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세재가 좌장격이고, 이인로가 대변자 노릇을 했으며 임춘은 가장 불우한 삶을 살았다. 특히 오세재는 이인로가 <파한집>에서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다고 표현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했다. 평생을 백성들의 고충에 공감하고 집권층의 방자와 횡포에 비판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의 문학생활을 계속한 듯하다. 50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문제가 되어 관리로 등용되지 못하고, 정권으로 부터 거부당했다. 그후 비참한 모습으로 경주에서 객사하게 된다. 30대에 요절한 임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신란으로 전가족이 타격을 입었고, 과거에 몇번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자신을 잃거나 수치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에서의 문장과 자신의 문학세계의 지향점이 다를 뿐, 오히려 후자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춘의 생각은 문학수업이란 모름지기 고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지, 자구 놀림에 지나지 않는 과거시험의 글이란 <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인로는 관직에 재직한 점에서 다소 다르나, 출세지향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가 오세재를 천거한 점, 임춘을 위해 유문집을 편찬하는 등 불우한 동료문인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가진 것도 이런 맥락이다.
관직지향파
반면 당시 <계관시인>과 같은 존재였던 이규보는 최충헌 정권에 접근하여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함께 만날 때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입신출세에 너무 집착하여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규보의 천거로 중용된 최자 역시 집권자들의 구미에 맞는 문학활동을 했다. 시문숭상파들의 보수적인 태도와는 달리 새로운 시의식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고려인의 삶을 보여주는 최초의 시화집
<파한집>은 시화를 모은 책이다. 시를 짓는 데 따르는 일화에다 시평을 곁들이고 이따금 작가론이나 문학일반론까지 곁들여 전에 볼 수 없었던 책을 구성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수필이다. 문학용어로는 <패관문학>이라 하는데, 일정한 체계를 갖추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써모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산만한 감도 없지 않으나, 자세히 음미해보면 문학에 대한 그의 일관된 주장을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서문이 없고, 정여령이라는 사람이 자기 고향의 경치를 그린 그림을 보고 즉석에서 아주 짜임새 있는 시를 지어 당대의 명사들을 감탄케 했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그 다음에 명성 높은 송나라 승려 혜홍의 작품에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을 했다고 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자기가 시를 지은 사연을 늘어놓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시에 관한 일화를 쓰고 작품을 소개하고 평을 했다. 상중하 3권으로 엮어져 있는데 구체적으로 나누면 상권 25화, 중권 25화, 하권 33화, 도합 83화가 된다. 시문그림글씨역사인물지리풍물에 대하여 두루 기록하여 시로 연결시켰다. 이 책에는 자작시(13화)가 많이 들어 있다. 이중 파한집 상권에 나오는 한 부분을 부담없이 읽어보자.
청학동과 도화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북 쪽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계속 잇닿아 전라도 남원에 이르렀는데, 10여 고을에 걸쳐 수천 리 길이 서리고 얽혀 열흘에서 한 달정도는 걸려야 그 산 경계선에 닿을 수 있다. 옛 전설에,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너무 좁아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이다. 기다시피하여 수십 리쯤 들어가면 비로소 넓은 곳이 나타난다. 주위는 모두 기름진 밭과 땅으로 되어 있어 씨 뿌려 농사짓기에 알맞고, 우거진 숲속에는 푸른 학이 살고 있어서 청학동이라고 부르고, 대개 이곳은 옛날 현실도피적인 선비들이 살던 곳으로 아직도 가시덤불속 빈터에 허물어진 담과 무너진 웅덩이가 더러 남아 있다."고 전한다. 오래 전 나는 사촌형인 최상국과 함께 세상의 인연을 끊고 은둔생활로 일생을 보낼 뜻이 있어서 이 청학동을 찾기로 약속했다. 두세 마리의 소에 소지품을 넣은 대바구니를 싣고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으려 했다. 마침내 화엄사를 거쳐 화개현의 신흥사에 묵게 되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었다. 온갖 바위가 다투어 솟고 골짜기마다 맑은 물이 소리내며 흘렀다. 대나무 울타리를 한 집들도 복숭아꽃, 살구꽃에 어리어 정말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청학동이라는 마을은 끝내 찾지 못하여 하는수없이 바윗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새기고 돌아오고 말았다.
두류산은 드높이 구름 위에 높이 솟고 온갖 바위와 골짜기는 회계산(중국의 명산)처럼 아름답구나. 지팡이에 의지하여 청학동을 찾으려 했으나 속절없는 원숭이 울음소리만 숲속에 들리네 누각은 희미한데 삼산(중국의 산이름)은 안 보이고 이끼 낀 바위에 글씨 넉자만 희미하구나 묻노니 선경이 어디메뇨 물에 떠가는 꽃잎이 사람만 어지럽히네.
어제는 우연히 도연명의 문집을 읽다가 <도화원기>가 눈에 띄어 여러 번 외어보았다. "진나라 때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골짜기의 물길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발견한다. 숲 끝은 강상류에서 끝났고 그 곳에는 산이 있었다. 산에는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속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을 따라들어갔다. 그러자 탁 트인 평화로운 낙원이 펼쳐졌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기쁨에 찬 얼굴로 살고 있었는데 진나라때 난리를 피에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도 살기가 좋아 500여년의 세월 동안 바깥 세상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어부는 며칠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고 <바깥 세상에 나가서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고 돌아온다. 어부의 보고를 받은 읍의 태수는 어부가 표시해둔 길을 따라 찾아 보았으나 실패했고, 그후 유자기라는 사람도 시도해보았으나 찾지 못했다."(파한집에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필자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좀더 덧붙였음). 이것은 그가 지은 <도화원기>의 요지다. 후세 사람들은 이걸 미화하여 단청색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원이란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신선이 타는 수레인 우거표륜을 타고 갈 수 있는 곳으로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그 기록을 잘못 읽은 까닭이다. 도화원은 진실로 청학동과 다름없는 것이다. 어치 유자기 같은 선비를 데리고 가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상이 <파한집>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청학은 선인들이 타고 다니는 수레를 말하는데 이 글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도화원>이나 지리산의 <청학동>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임을 내세운 글로, 무신정권하의 선비들의 은둔적인 풍조를 엿볼 수 있다. 아마 청학동은 고려 때부터 우리 나라의 이상향으로 알려진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 고향은 중국의 무릉도원, 유럽의 아틀란티스, 아메리카의 엘도라도와는 달리 전쟁의 화를 피하고 굶주림을 면하는 가난한 이상향이었던 듯하다. 이밖에도 경주의 옛 풍속을 기술하고 평양의 산하와 인물을 묘사하며, 수도인 개경의 궁궐사원 들의 풍물을 기록하고 있어, 고려문화의 일반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그리고 또 내용 중에는 시와는 별관계가 없는 역사상의 빠진 일들을 기록하고 있어 역사연구에도 도움을 주는 책이다.
복고주의적 문학관이 담긴 패관 문학집
우리 나라 역대의 우수한 문인들의 시가와 작품들을 정리하여 남기지 않는다면 잊혀져 후세에 전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이인로가 엮은 이 책은 일종의 패관문학집이다. 여기서 <패관>이란 중국 한나라 때 일반에 떠도는 민담을 수집하여 민심을 파악하고자 파견한 관리를 말하는데, 이들에 의해 기록된 문학을 패관문학이라 한다. <파한집>은 우리 나라 최초의 시화집으로 신라와 고려에 걸쳐 여러 풍속과 일화를 담고 있어 문학적 가치가 높다. 한편 그의 문학세계는 선명한 회화성을 통하여 탈속의 경지를 모색했으며, 문은 중국 한유의 고문을 따랐고, 시는 소식(소동파)를 숭상했다. 그는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용사>를 소중하게 여겼다. 용사란 과거 명문의 표현이나. 관련사실을 자신의 의도대로 재활용하는 창작방식이다. 즉 문학의 고전적인 규범과 가치를 배우되 혁신할 줄 알아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다. 그러기에 문학수련의 가장 좋은 방법은 옛사람의 명문을 읽어서 자기것으로 하는 데 있다고 했다. 특히 그는 소식을 계승하고자 했는데, 소식이 썼던 말, 소식과 관련된 고사를 우선적으로 택하면서 자기 작품을 장식했다.
그는 "세상일 중에서 빈부나 귀천으로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는 것이 오직 문장뿐이다. 대개 완성된 문장은 해와 달이 하늘을 곱게 하고 구름과 안개가 공주에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 같다"고 말하여 예술지향주의적인 신념을 표현했다. 그는 해와 달처럼 아름다운 표현은 과거의 고전적인 명문에 이미 구현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충실하게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사람들은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감히 경망스럽게 손을 놀리지 않고, 반드시 갈고 닦은 공을 더한 다음에야 광채가 생기도록 해서 무지개처럼 천고에 빛날 수 있었다"는 말 속에 이인로의 충고가 요약되어 있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함부로 시를 써내는 태도를 배격했다. 오랫동안 수련을 쌓으며 애써 갈고 닦아야 한다면서 글자 한자 한자를 안배하기에 밤낮으로 힘을 다한 사람, 한 해 동안 시 세 편만을 써서 줄곧 고치기만 한 사람의 경우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이인로가 고인을 본받는 것이 최선임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고인이 이르지 못한 데서 신의를 창출해 묘한 경지에 이르는"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가능하므로 실현가능한 차선책을 택해 용사를 정묘하게 해 고인의 표현을 가져와서 새로운 효과가 나게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문을 닫아 걸고 황산곡, 소동파 두 문집을 읽은 연후라야 시어가 힘차게 되고 시운이 뚜렷해져서 작시의 삼매에 들게 되었다."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을 저술하여 한국문학사에 본격적인 비평문학의 길을 연 그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자기 나름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무지개처럼 영롱한 표현을 이룩해, 현실을 떠나지 않고서도 문학 속에다가 은거할 곳을 마련했다. <파한집>이 나온 이후로 곧 뒤이어 최자가 이를 보완하여 <보한집>을 저술했다. 그후 순수한 시화집은 아니지만 이제현의 <낙옹비설>이 나왔고, 조선의 서거정의 <동인시화>가 시화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붙이고 나왔는데 그 이후로는 많은 시화집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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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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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사랑
한 대의 리무진이 정신병원 앞에 멈춰서고 곧이어 귀족풍의 한 신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 신사는 수위에게 물었다.
"이곳이 정신 이상자들을 위한 요양소인가요?" "그렇습니다." "스스로 청해서 이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습니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마는 도대체 왜 그러시죠?" "음, 난 얼마 전 내가 옛날에 쓴 연애 편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나는 지금 내 자신이 미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 그대가 소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광기, 열병, 일종의 화학적 노이로제일 뿐,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조정하려 한다. 그것은 정치일 뿐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욕이지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히 그대를 지옥으로 인도하고 그대를 더욱더 불행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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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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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7. 춘추 5패, 열국의 각축전
춘추시대에 관련된 중국의 고사성어에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춘추시대 각국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야말로 와신상담하지 않고서는 도시국가간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바로 이 시기였다. 춘추 초기에 100~180개 정도였던 도시국가가 말기에는 10여 개의 국가로 정리되었다. 기록에 남겨진 전쟁의 횟수만도 1,200회가 넘는다. 이때 각국은 그때 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었는데, 그 회맹의 대표자를 패자라고 불렀다. 춘추시대에는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가 있어 이를 춘추 5패라고 부른다. 춘추 5패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최초의 패자가 된 사람이 제나라의 환공이다. 이때는 초나라가 남방에서 흥기, 강성해져서 중원을 위협하고 있었다. 중원 제국은 동방의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 각국의 동맹이 이루어졌다. 그는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제 환공은 이 연맹에서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이민족을 물리친다." 즉, 존왕양이의 구호를 내걸었다. 춘추시대에 이미 주왕실은 하나의 소국에 다름아니었으나, 주왕실을 존중한다는 명분이 제후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만큼 아직 주왕실의 권위는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제도의 잔재는 전국시기에 이르면 깨끗이 사라지고, 양육강식, 오로지 실력만이 인정받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각국은 춘추시대에도 독자적인 주권 영토국가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춘추좌전)에 의하면, 소국 송의 재상 화원은 통행증 없이 송나라의 영토를 통과했던 대국 초의 사신을 사형에 처했다. (사기)에 의하면, 오나라와 초나라는 국경에 서 있는 뽕나무의 소유에 관한 양국 주민의 시비가 원인이 되어 대병력전을 치르기도 했다.
춘추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대한 나라 둘을 든다면 그것은 역시 중원을 대표하는 진나라와 양자강 유역에서 새로이 성장한 초나라를 들 수 있다. 실로, 진나라가 한, 위, 조 3국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53년, 혹은 주왕실이 이를 공인한 403년을 기점으로 춘추와 전국시기를 가르는 것이다. 춘추 5패로 진의 문공과 초의 장왕이 있다. 초는 더 남족의 신흥국 오와 월의 약진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는데, 오의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월왕 구천 등이 역시 춘추 5패로 거론된다. 오와 월은 보병 중심의 새로운 전법을 터득하고 일찍이 철기의 기술을 습득하여 강성해졌다. 오와 월이 소유했다는 명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근래에 발굴된 무덤에서 유명한 월왕 구천의 검이 실제로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천 4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칼날은 지극히 날카롭기 이를 데 없고 날 밑의 양면에는 남색 유리와 터키석이 상감되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칼의 몸통은 다이아몬드 무늬의 선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대의 공예가도 어떻게 칼날 부분에 이러한 무늬를 넣을 수 있었는지 감탄할 뿐이다. 오왕 합려는 즉위 후 9년간 국력을 키워 초를 공격했는데,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이김으로써 초를 위기에 빠뜨리는 등 강성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월왕 구천과의 싸움에서 손가락을 부상당한 후 이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그가 강소성의 해용산에 묻힐 때 1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으며, 묘안에는 3천 자루의 명검이 함께 묻혔다고 한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와신', 즉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면서 고통을 상기하고 국력을 키워, 회계산의 전투에서 월왕 구천 의 굴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구천은 부차에게 뇌물과 미녀를 보내어 마음을 안심시키고, '상담', 즉 쓸개의 쓴맛을 매일 보면서 스스로에게 회계산의 굴욕을 상기시켜 결국은 부차를 물리쳤다.
각국이 패자로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 각 패자의 뒤에는 훌륭한 재상들이 있다. 제나라 환공에게는 '관포지교'의 아름다운 우정을 남긴 관중과 포숙이 있었고, 오나라 합려와 부차에게는 오자서가 있었으며, 월왕 구천에게는 범리가 있었다. 부차는 구천에게 패하고 자결할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 이유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패하여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환공은 포숙으로부터 관중의 인물됨을 듣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과거지사까지 과감하게 묻어버리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는 용단을 내렸다. 각국의 군주들은 기존의 명문귀족들의 세력을 억압하고 세력기반이 없는 평민출신의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하여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꾀했으며, 저마다 부국강병에 힘써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빈번한 전쟁 속에서도 과학기술은 더욱 발전하고, 통일 국가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훌륭한 사상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철기의 보급과 함께 전국시대에 더욱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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