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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31호
단기 4343. 4. 7 (음력 2. 2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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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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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장 신인상 작품 공모
저희 계간 ≪문장≫에서는 역량 있는 신인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제12회 신인상 작품을 널리 공모합니다. 치열한 문학 정신으로 훌륭한 작가의 길을 걸어 갈 신인들의 많은 응모를 기대합니다.
모집 부문 : 시 3편 이상 시조 3편 이상 수필 2편 이상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동시 3편 이상 동화 1편 이상 (200자 원고지 30매 내외
원고 마감 : 2010년 5월 10일
심사 및 발표 : ≪문장≫에 심사평과 함께 발표하고 수록함 1회 당선으로 기성 문인으로 대우하고, 당선자에게는 소정의 고료를 지급하며 작품 활동을 적극 지원합니다.
보낼 곳 : 110-999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오피시아 1406호 도서출판 북랜드 700-442 대구 중구 남산2동 228-6 계간 ≪문장≫ 편집실 <문의 02-732-4574, 053-252-9114>
참고 사항 응모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원고 첫 장에 <신인상 응모작>이라 명기하고, 주소, 이름, 연락처, 이메일을 기입해 주십시오. 필명일 경우 반드시 본명을 밝혀야 합니다. 응모 원고는 필히 우편으로 보내야 합니다. 작품의 수준이 본사가 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는 당선작을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계간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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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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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구원의 손을 주지 않았더라면 지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에 파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 리처드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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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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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덴
따뜻하게 입는 서양 옷감 가운데 골 지게 짠, 우단과 비슷한 감촉의 옷감을 흔히 ‘골덴’이라고 한다. 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코르덴’이 맞는 것이라 하고, ‘코르덴’을 찾아보면 ‘코디드 벨베틴’(corded velveteen)이라는 영어에서 변형된 말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코디드 벨베틴’을 세 글자 정도로 짧게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고 일본이었다. ‘코르덴’을 일본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루텐’(コ─ルてん)이 나오고 그 원어로 골이 진 면벨벳이라는 뜻의 ‘코디드 벨베틴’이 제시되어 있다. 즉 일본의 변형 외래어 ‘고루텐’이 우리에게 전해져서 ‘골덴’이 된 것이며, ‘코르덴’은 ‘고루텐’을 좀더 서양말스럽게 고친 것이다.
우리 백과사전들을 찾아보면 코르텐을 다른 말로 ‘코듀로이’(corduroy)라고 하며 이는 프랑스말 ‘코르드-뒤-루아’(corde-du-roi)에서 유래되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코듀로이’는 영어인데 일본말 ‘고듀로이’(コ─デュロイ)에 이끌린 것으로 보이고, ‘코더로이’가 우리 표기법에 맞다.
한편 ‘코듀로이’가 프랑스말 ‘코르드-뒤-루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에 반론이 있다. 이 설은 옛 프랑스 왕실에서 이 천을 자주 이용하였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실은 프랑스말에서 이런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지나침은 못미친꼴(과유불급)
<논어> ‘선진편’에 자공이 물었다. “사와 상은 어느 쪽이 어집니까?” 공자 왈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또 묻기를 “그러면 사가 낫다는 말씀입니까?” 공자 왈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 본이름은 단목사. 자공이라 함은 그의 다른 이름이다. 사 또한 공자의 제자로서 본이름은 전손사. 다른 이름은 자장이라고 한다. 상 역시 공자의 제자. 본이름은 복상. 다른 이름은 자하다.
자공이 자장과 자하 가운데 어느 쪽이 뛰어났는지를 물은 것이다. 이 경우의 ‘어짊’은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인품·인물의 낫고 못 미침을 물은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므로 공자가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모자란다고 대답한 것이다. 다른 자리에서 공자는 자장에 관해서 “사는 벽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벽’이라고 함은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말.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적극적이기는 하나 지나친 버릇이 있었을 것이다.
자하는 공자에게서 “그대, 군자의 선비가 되어라. 소인의 선비가 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있다. 좀 사삭스럽고 인물로서 그릇이 모자란 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함부로 낫고 못함을 가리기 어렵다. “지나침은 못 미친 꼴”(과유불급)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함부로 평하기 어렵다는 가르침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벌이다와 벌리다
일을 시작하거나 펼쳐 놓을 때 ‘벌이다’를 쓴다.‘사업을 벌였다.’,‘잔치를 벌였다.’ 물건을 늘어놓는 일도 ‘벌이다’이다.‘사과 배 등 과일을 벌여 놓았다.’ 전쟁이나 말다툼 등도 ‘벌이는’ 것이다. 벌리다는 둘 사이를 넓히거나 멀게 하는 일이다.‘가랑이를 벌리다.’ 오므라진 것을 펴지거나 열리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두 손을 벌렸다.’
옴니암니
똑같은 이(齒)인데 자질구레하게 어금니 앞니 따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캐고 드는 모양을 이르는 말이 됐다.‘꼬치꼬치’ ‘시시콜콜’과 비슷하다. 더 확장돼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이래저래 드는 비용을 뜻하기도 한다. 옴니는 어금니, 암니는 앞니를 가리킨다.‘옴니’의 ‘옴’은 어미를 뜻하는 ‘엄’이 변한 말이다.‘옴니암니 따지고 들다.’
살찌다, 살지다
사람에게는 살이 많은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물이나 과일은 다르다. 소.돼지 등은 살을 많이 찌워야 값이 올라간다. 과일도 토실토실 살이 많이 붙어 있어야 좋다. 이렇게 살이 많을 때 '살찐 사람' '살찐 소' '살찐 과일'처럼 모두 '살찌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살찌다'와 '살지다'는 '살이 많다'는 의미를 가진 동의어 같지만 '살찌다'는 사람에게, '살지다'는 동식물에 주로 사용한다. "살찐 암소" "살찌고 싱싱한 물고기" "살찐 과일"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살진 암소" "살지고 싱싱한 물고기" "살진 과일"이라고 해야 한다.
'살지다'는 이렇게 '동물이나 과일이 살이 많고 튼실하다'는 의미 외에도 "살진 옥토"에서와 같이 '땅이 기름지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물이 오르고 살진 뿌리"에서처럼 식물의 뿌리가 살이 많고 튼실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살찌다'와 '살지다'는 단어의 성격을 나타내는 품사도 다르다. '살찌다'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이고, '살지다'는 상태나 형태 등을 나타내는 형용사다. 따라서 '살지다'의 경우 진행형으로 쓸 수 없다. 즉 "요즘 너무 살쪄서 걱정이야"라는 표현은 가능해도 "요즘 너무 살지고 있어 걱정이야"라고는 할 수 없다.
영어 남발
5.31 지방선거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각종 행사.홍보물 등으로 유권자의 관심과 투표를 유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거리에는 'Pride 5.31'이라 적힌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렸다. 선관위의 노력은 높이 평가하지만 선거 구호가 'Pride 5.31'이라는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가 민주시민의 자부심이라는 의미에서 'Pride 5.31'이란 구호를 창안한 모양이지만 우리의 선거 구호로는 부적절하다. 혹여 외국인이 보라고 'Pride 5.31'이라 적어 놓았다면 유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하는 우리 선거에서 이런 영어 구호가 등장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영어권 국가의 선거 구호로나 어울리는 말이다. 차량 스티커 'Beautiful day 5월 31일'에 이르면 더욱 기가 막힌다. 'Beautiful day' 글자가 스티커 면적의 2/3 이상을 차지해 영어만 선명하게 보인다. 도대체 누가 보라고 만든 스티커인가. 외국인을 위한 홍보물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말을 업신여기고 영어를 숭상하는 처사로밖에 볼 수 없다. 일반 기업체의 광고도 아니고 정부 부처인 선관위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선거 구호가 꼭 이래야만 하는가. 영어가 이미 공용어라도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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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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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가 길을 낸다 - 채필녀
내가 스무살이었을 때, 한껏 차리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나를 쳐다보며 더할 수 없이 흐뭇한 미소를 퍼부었다 마치 젖과 꿀로 만든 향유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듯 했다
내가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나서면 동네 사람들이 에구, 이것아 고곳이 다 보인다, 고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엄마 는 나를 나무랄 줄 몰랐다 아마 내 고곳조차도 자랑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앞에도 산, 뒤에도 산, 너머에도 산, 속에 감추어진 우리 동네는 하루 몇차례 다니는 완행버스가 고작이었고 구멍 가게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남주기 아깝다며 어여쁜 처녀 하나를 공유하려 했던 그 시절로부터 십수년,
동네 앞으로 길이 나고 다들 서울로, 더러 미국으로 동남 아로 드나들며 눈에도 길이 나고 이젠 아무도 내 치마를, 치마속을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늙거나 죽고 엄마는 병들어 멍하니 쳐다보는 눈에서는 더이상 젖과 꿀이 흐르 지 않는다
생각이 지독한 날은 동네 앞 느티나무가 날 쳐다보는 것 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동네 사람들에게나 내게나 거목 이었던 나무는 애초에 길을 알고 있었을까 물끄러미 쳐다 보는 잎새가 나에게 난 길로 떨어져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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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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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하루방 - 이용한
얼룩진 그리움은 무념으로 빗장 걸고 유배지 검은 속살 베어물고 서 있구나 웃음은 배냇짓인가 가슴으로 쏟는 각혈.
이어도 그 소망 땅에 음란의 씨 묻어 놓고 수평선 벌건 젖가슴 꿈에서나 더듬다가 파도가 휘몰아 감기면 섬을 안고 울었다.
병이 된 서러운 맘 바람에도 띄워 보며 전생의 탯줄 물고 가부좌로 버틴 일월 농익은 오욕의 정이 반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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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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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이태준의 `해방 전후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 `그날이 오면' 첫연).
소설 <상록수>의 저자이기도 한 심훈(1901~36)의 시 `그날이 오면'은 일제 통치의 전기간을 통틀어 조국 해방에의 의지를 가장 절절하게 노래한 시편에 속한다.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옥살이를 겪고 일시적일망정 상하이로 망명까지 했던 그의 이력은 이 시의 진정성과 절박함을 담보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주제의 선명함을 미학적 고려에 앞세우는 데서도 느낄 수 있는 그 절박함은 역으로 `그날'의 요원함에 대한 뼈저린 회한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마침내, 그날은, 왔다. 심훈이 보지 못한, 아니 윤동주와 이육사와 한용운이 끝끝내 살아서 보지 못한 그날은 늙은 히로히토의 침통한 항복선언과 함께 문득 현실이 되었다. 심훈과 윤동주와 이육사와 한용운은 그날을 만난 기쁨에 죽지 못하고, 죽어서야 그날을 맞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한으로 남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그날을 맞이한 이들에게 1945년 8월15일은 새로운 가능성과 의욕의 이름이었다. 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민족의 지배 아래 신음해온 겨레붙이들로서는 이제야말로 누구의 간섭과 훼방도 받음이 없이 제출물로 근대화라는 역사의 신작로를 활보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상허 이태준(1904~?)의 중편 <해방 전후>는 반성과 희망이 교차하는 민족사의 갈림길을 배경으로 작가 자신의 행적과 사유를 기록한 자전소설이자 보고문학이다. 해방 전과 후에 정확히 절반씩의 분량을 할애한 소설의 전반부에서 주인공인 소설가 `현'은 일본 관헌의 압력에 못이겨 대동아전기(大東亞戰記)의 번역에 손을 빌려준 일을 두고 괴로워하다가 강원도 어느 산읍에 처박혀 낚시질 따위로 세월을 기다린다. 이곳에서 그는 향교의 직원(直員)으로 있는 전통 선비 `김직원'을 만나 시국담을 주고받으며 울분을 나누기도 한다. 일제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서는 의견이 일치했던 두 사람은 그러나 막상 해방과 함께 그 적이 사라지자 현격한 견해의 차이를 내비친다. 철저한 근왕주의자인 김직원과 반봉건 근대화론자인 현은 해방 조국의 미래 설계를 놓고 갈라서게 되는 것이다. 새 나라의 국체에 관한 견해 차이는 해방정국 최대의 쟁점이었던 신탁통치에 대한 평가로도 이어진다. 김직원의 완강한 반대 입장을 “비실제적인 환상이나 감상”으로 치부하면서 신탁통치야말로 “가장 과학적이요 세계사적인 확실한 견해”라고 믿는 현의 생각이그것을 보여준다. 소설 속의 현이 다름아닌 작가 이태준 자신의 가탁임을 상기할 때, 그가 당시 남로당을 필두로 한 좌파의 노선을 좇아 찬탁 쪽에 섰다는 사실은 마땅한 설명을 기다리는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0년대에 카프의 계급문학에 반발해 순수문학 그룹인 구인회를 결성했던 현/이태준이 해방 직후 좌익 문인단체인 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맡고 이듬해에는 마침내 월북을 택하기에까지 이른 것은 또 어찌된 일일까. 그가 물론 궁극적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숙청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소설 속에서 그에 대한 충분하고 납득할 만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소설 마지막 문단에서 보이는 막연한 희망과 활기가 당시 그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바람이 아직 차나 어딘지 부드러운 벌써 봄바람이다. 현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회관으로 내려왔다. 친구들은 `프로예맹'과의 합동도 끝나고 이번엔 `전국문학자대회' 준비로 바쁘고들 있었다.”
이것을 비슷한 무렵에 발표되었고 해방공간이라는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채만식의 단편 <역려>의 마지막 문장들과 비교해 보자.
“비는 오고. 다음 차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차를 우리는 음산한 정거장에서 민망히 기다려야 하였다.”
해방이라는 동일한 조건을 받아 놓고 이태준이 보이는 낙관과 채만식이 내비치는 주저와 회의 사이에는 얼마나 너른 간격이 가로놓여 있는가. 그 두 가지 태도의 차이가 결국 이태준의 월북과 채만식의 낙향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았으리라. <해방 전후>의 전반부에서 현이 마음의 평화를 찾아 숨어든 곳은 경기도 이천군 안협면, 지금은 휴전선 북쪽이다. 이태준의 고향인 강원도 철원군 산명리 역시 휴전선 너머에 있으며 그가 어린시절을 보낸 철원군 율이리는 남방한계선 남쪽의 민통선 안에 자리잡고 있다. 상허와 <고향 전후>의 자취를 좇는 여정은 따라서 분단현실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해방기를 그린 소설의 무대가 바로 분단의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해방이 약속했던 기회와 희망이 거꾸로 분단이라는 위기와 질곡으로 뒤바뀌어 버린 민족사의 역설을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휴전선 이남에서 안협과 산명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은 구철원으로 알려진 민통선 안쪽이다. 옛 철원군 노동당사와 월정리역, 철의 삼각 전망대, 샘통 철새도래지 등이 있는 이 일대는 일반인들로서는 전적관에서 주관하는 안보관광을 신청해야만 둘러볼 수가 있다. 민통선 출입을 관할하는 제5검문소를 지나 불과 1백m 정도만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그 유명한 노동당사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전쟁의 이빨에 모질게 할퀴여 뼈대만 남은 이 삼층 건물의 벽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다녀 간 사람들이 남긴 낙서의 사이사이에 Cpt Stephens, 1SGReese 따위의 미군들 이름이 보이는가 하면, `서태지 만세'와 `북조선사회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가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당사에서 철새도래지와 옛 철원역터를 지나 월정리역과 철의 삼각지 전망대에 이르는 길의 좌우로는 철원평야의 광활한 논과 밭이 펼쳐진다. 자세히 보면 무너져내린 가옥과 건물의 흔적이 논과 밭 사이에 숨은 그림처럼 새겨져 있다. 수시로 나타나는 도로봉쇄용 낙석과 지뢰 주의 표지판을 지나쳐 가던 길은 휴전선 남방한계선에 가로막히는데, 그곳이 철의삼각지 전망대와 월정리역이다.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에 눈을 대면 시야 왼편으로 나타나는 백마고지 너머로 <해방 전후>의 무대인 안협이 아련히 보이는 듯도 하다. 군인들의 간헐적인 구호와 대남·대북방송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오는 가운데 외출을 나온 일단의 병사들이 무리지어 기념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전망대와 역 주변에서는 무력대치의 긴박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어김없는 분단의 현장. 민족의 완전한 해방은 여전히 유예되고 있으며, 전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철원 노동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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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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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장수의 비결
뮬라 나스루딘이 백 살이 되었다. 신문기자들이 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몰려왔다. 그가 그 도시에서는 처음으로 탄생 백 주년을 맞은 시민이었던 것이다. 기자들은 그에게 장수의 비결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장수의 비결입니다>
그때 옆방에서 무엇인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문기자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뮬라가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일 겁니다. 아버지가 또 술에 취해서 하녀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뮬라의 아버지는 틀림없이 120세는 넘었을 것이다. 뮬라는 <나는 독신생활을 했고,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소>라고 장수의 비결을 말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뛰어 다니며, 술에 취해 여자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성을 탐닉할 수도 있고 독신을 즐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차이도 초래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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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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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나는 이발소가 좋다
최근의 젊은 남성들은 대부분 유니섹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는 것 같지만, 나는 전부터 이발소 쪽을 좋아했다. 개성 없는 헤어스타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용실에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여자들 옆에서 여자 미용사가 머리를 깎고 감겨 주는 것이 아무래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리를 잔뜩 말고 있거나, 얼굴 면도를 하거나, 머리에 건조기를 뒤집어쓰고 얼빠진 얼굴로 주간지를 읽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점이 오래 전부터 꽤나 신경에 거슬려서 한번은 여자 몇 사람을 붙잡고 "미용실 옆자리에 남자가 있으면 싫지 않아요?" 하고 물어 봤더니, 그녀들 역시 한결같이 "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줄곧 남녀 공학을 다녔으므로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지만, 머리카락을 자를 때에 한해서는 역시 남녀가 따로따로인 쪽이 편하다. 그래서 꽈배기 과자 같은 기둥이 서 있는 동네 이발소를 죽 다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미의 문제지, "모름지기 남자란 모두 이발소에 가야 한다"라고 확고하게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발소가 붐벼서 곤란해질 것이다. 미용실에 가는 사람은 계속 미용실을 이용해 주었으면 한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의 단골 이발소는 센다가야에 있다. 나는 지금 후지사와에 살고 있으므로 두 달에 세 번 꼴로 오다큐센의 로맨스 카를 타고 센다가야까지 머리를 깎으러 간다. 이래저래 가는 데만도 한 시간 반은 걸리니까 한가하다면 한가한 거고, 유별나다면 유별난 것이다. 후지사와에 살기 전에는 나라시노에서 살았는데, 그때도 역시 한 시간 반씩 걸려 지금의 이발소에 다녔다. 소부센 쾌속보다는 오다큐 로맨스 카 쪽이 운치도 있고, 값도 싸고, 애플 티도 마실 수 있으므로 나로서는 이쪽이 훨씬 편하다. 나라시노 전에는 센다가야의 이발소 근처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그럭저럭 8년째 단골인 셈이다.
어째서 그렇게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면서도 이발소만큼은 끈질기게 바꾸지 않는가 하면, 새로운 이발소에 가는 게 너무나 귀찮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발소에 가면 여러 가지 사항들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해야만 한다. 우선 나는 회사원이 아니니까 그다지 단정한 머리형을 할 필요가 없고, 3주에 한 번은 머리를 깎으니까 그렇게 짧게 깎을 필요도 없다는 기본 방침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는 세부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귀 위는 어느 정도 길이로 하고, 가르마는 어디쯤에 있으며, 수염은 깎지 말고, 매일 머리를 감으니까 샴푸는 대충 한 번이면 되고, 헤어 리퀴드는 필요 없다고 설명을 하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지쳐서 축 늘어지게 된다. 게다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설명한 대로 깎아 준다는 보장도 없다. 아니, 그렇게 깎아 주지 않는다. 특히 지방 소도시의 경우에는 더욱 심해서 대개는 군인 아저씨처럼 바싹 잘라 놓는데, 그러면 4~5일은 뿌루퉁해서 집에 틀어박히게 된다. 이런 일은 몹시 난처하다. 그런 점에서 단골 이발소는 문을 밀고 들어가 "안녕하세요" 하고 의자에 털썩 앉기만 하면 잠에 빠져 있어도 언제나처럼 알아서 말끔하게 다듬어 준다. 이렇게 편할 데가 있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이발소는 첫째, 이발사가 자주 바뀌지 않아야 한다. 종종 갈 때마다 이발사의 얼굴이 바뀌는 가게가 있는데 이래서는 이쪽도 마음이 놓이지 않고, 그때마다 다시 설명을 새로 해야 하므로 단골 이발소에 다니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사람이 들락날락하지 않는 이발소는 나름대로 분위기란 게 있고 솜씨도 안정돼 있다. 이것은 초밥집 주방장도 마찬가지다. 둘째로는 쓸데없이 자꾸 말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 전혀 얘기를 안 하는 것도 따분하지만, 나는 이발소에서는 멍청하게 있는 것을 퍽 좋아하므로 너무 말을 시키면 피곤해진다. "이젠 봄이군요", "따뜻해졌죠"라든가 "꽃구경은 하셨습니까?", "아뇨, 바빠서요"정도가 이상적이다. 내가 가는 이발소의 아저씨 중에는 조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가끔 경주 이야기를 짤막하게 하곤 한다. 셋째는 품위 없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 놓지 말아야 한다. 요즘에는 오후 시간대에 주부들을 상대로 한 야한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서, 그걸 듣고 있으면 정말이지 피곤하다. "우리 남편은요, 내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항상 뒤에서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 거예요. 그렇지만 저도 그게 싫진 않아서..." 하고 떠들어대면 머리 속이 어지러워진다. 요즘 주부들은 모두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사실은 NHK FM의 <한낮의 클래식>같은 프로그램이 백 뮤직으로 흐르는 게 이상적이지만, 뭐 이발소에서 브람스를 듣는 것도 약간은 속물 같으니까, NHK 제1방송쯤이 바람직하겠다. NHK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발소 정도에서밖에 들을 수 없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꽤 재미도 있다. 듣다 보면 적어도 '세상은 넓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퍼시 페이시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푸른 산맥>은 아오야마 미용실에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오전 열한시 반쯤에 하는 소설 낭독도 이발소 의자에 앉아 듣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금은 더욱 멀어져서 가는 데만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여전히 같은 이발소에 다니고 있다. 퍼시 페이시스의 <푸른 산맥>은 중간에 썩 훌륭한 포 버스의 응수가 있기도 하여, 상당한 열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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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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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6장
호랑이
한국을 소개하는「한국문화의 뿌리」를 저술한 코벨박사는 담배 피우는 호랑이 사진을 책의 표지로 선정하고,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소개하였다. 코벨은 우리 민족과 호랑이와의 관계, 그리고 한국인의 여유와 해학을 잘 이해하여 그 그림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되는 옛날 이야기의 서두에서부터 서울올림픽대회의 마스코트 호돌이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가까운 존재로 느껴지는 동물이다. 창경원을 찾지 않으면 실제 모습을 보기 어려운 동물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맹수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고 우호적이며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호랑이에게 부여해온 의미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설화와 이야기, 그림과 조각 등의 미술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동물은 호랑이와 용이다. 용이 상상의 동물인 점을 고려하면, 실제의 동물 중에서는 호랑이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임을 알 수 있다.「주역」에서 호랑이의 방위를 지칭하는 인방도 만주와 우리나라를 지목하는 동북방이며, 우리나라의 지도가 호랑이의 도양하려는 모습으로 형성된 것 등도 우리 민족과 호랑이와의 특별한 인연을 말해 주는 듯하다. 그리고 호랑이가 우리 민족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속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호랑이 보고 창구멍 막기 .호랑이에게 개를 꾸어 준다 .호랑이 코에 붙은 것도 떼어 먹는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 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갈 줄 알면 누가 산에 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호랑이도 새끼가 열이면 스라소니를 낳는다.
우리 민족이 본 호랑이에 대한 관념의 변천과정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민족의 지혜와 여유와 해학이 깃들어 있다. 즉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야성의 포악함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에 직접, 간접적으로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는 존재,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호랑이를 산신으로 모셔 제를 지내는 등 호랑이가 노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편을 취하였다. 호랑이를 이처럼 강력하고 신령한 존재로 상정한 뒤에는 이러한 힘에 의지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호랑이의 역할을 의로운 존재로 설정하고, 호랑이의 용맹성과 강력한 힘이 인간을 괴롭히는 각종 잡귀와 사된 것을 물리쳐 주기를 소망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편에 선 정의의 사자, 벽사의 주재자로서의 위치를 굳힌 호랑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친숙한 관계로까지 발전되었다. 가장 용맹한 맹수의 왕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물리고, 곶감 이야기에 놀라 황급히 도망가는 어수룩한 호랑이를 탄생시킴으로써 호랑이는 우리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사납고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에 가장 가깝고 친근한 관계로 만들어 버린 우리 민족의 예지와 해학이 놀랍지 않은가?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보아도 현대의 전위적인 미술품을 제외하고는 호랑이와 같은 사나운 맹수에게 담배를 물린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호랑이에 대한 이와 같은 관념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민속과 유형, 무형의 산물이 표출되었다. 실로 호랑이와 관련된 우리의 문화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용, 학, 사슴, 거북 등과 같은 동물이 우리 민족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도 비교적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에 반하여, 호랑이는 매우 다중적 성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호랑이의 존재가 그만큼 강력하고 두려운 것이었으며, 그에 대해 표출된 우리 민족의 갈등의 반영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호랑이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부여한 의미를 관념상의 변천과정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1. 호랑이에 대한 관념의 출발 : 맹수로서의 호랑이
호랑이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동물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국으로,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한반도와 만주, 중국의 동부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산중 혹은 인근마을에서 부딪힌 가장 무서운 맹수가 바로 호랑이였다. 단군신화에 보면 곰과 호랑이는 모두 인간으로 화하길 원한다. 그러나 동국 속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뛰쳐나와 맹수로 머무는 호랑이의 모습에서도 얼마나 다루기 힘든 야성의 맹수인가가 잘 나타나고 있다. 호랑이가 인간에게 끼친 민폐는 매우 심하여, 호랑이가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환난을 일컬어 ‘호환’이라는 말까지 생겼다.「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헌강왕 11년(885년) 2월에 호랑이가 궁궐마당에까지 뛰어들었다고 하였으니, 호랑이의 피해가 나라 전체에 걸쳐 매우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규경이 저술한「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우리나라에 호환이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날이 어두워지면 함부로 나다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호랑이를 산군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에서도 도당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때 음식이 불결하거나 부정한 음식을 바치는 등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내어 울부짖고 마을에 내려와 사람이나 가축을 물어 갔다는 기록이 남아 전한다. 이처럼 살아있는 호랑이가 신으로 받들어지고 제사까지 받아먹는 풍속은「후한서」동이전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민간에서는 호랑이에게 부모, 자식, 남편 등을 잃은 가족이 그 원수를 갚고 시신을 찾아오는 등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오륜행실도」에는 고려 때 수원에 살았던 최누백의 이야기가 나온다. 누백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범에게 물려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호랑이를 죽이고 그 뼈와 살을 꺼내 장사를 지낸 효자로 유명하였다.「삼강행실도」에는 호랑이와 싸워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오는 금지박호도, 아버지의 시신을 뺏는 연수겁호도, 호랑이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권씨부토도, 호랑이에게 물려간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소사자서도 등 수많은 이야기가 전하다. 또한 정초의 풍속에서 정월의 첫 호랑이날, 특히 산골 부녀자들은 바깥 출입을 꺼렸다. 그 이유는 이 날에 여자가 외출하여 남의 집에서 용변을 보면, 그 집의 가족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 호랑이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면 호랑이가 나타난다 하여 ‘산신령님’, ‘산군님’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이처럼 호랑이는 두려운 존재였고, 호환은 언제나 온 나라의 근심거리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적극적으로 호랑이를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숙종 때 편찬된「수료집록」에 의하면, 인명을 살상하는 악호를 잡는 사람에게 금포 20필을 상으로 내리고, 두 마리 이상 잡는 자에게는 20필을 추가로 지급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영조 때 편찬된「속신보수교집록」에는 호랑이를 잡은 변장이나 수령에게도 상을 내려야 한다고 거론된 기사가 보인다. 이 외에도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로부터 국도상정의 어명을 받고 한양의 지형을 살펴보니, 외백호격인 관악산 서봉 호암산의 산세가 호랑이가 북쪽을 향하여 곧 뛰어들 듯 위급하고 위태한 형상이었다. 이에 호랑이 머리맡에 호암사라는 절을 짓고 마주 보이는 상도동에 사자암을 지어 기세를 누르고 견제하였다고 한다. 또한 호형의 거센 산세를 염려하여 삼정산의 복부에 도성을 향해 예배하는 얼빠진 모습의 호랑이를 배치, 호환을 물리치고자 하였다고 한다. 특히 호환이 심하였던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호랑이에 의한 피해를 방지하고자 범굿을 행하였다. 이 굿에서는 한지에다 호랑이의 얼굴과 몸뚱이를 그린 호탈을 쓴 사람이 호랑이의 역할을 하면서 굿의식을 행한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여러 과정을 거친 후 마지막에는 호랑이가 사람의 손에 죽고 가죽까지 벗겨지게 된다. 이처럼 호랑이가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악호로 설정된 데에는 산간지방에서의 현실적인 피해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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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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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붙잡힌 신귀 - 외물
송원공이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머리를 푼 사람이 아문을 엿보며 말했다. "나는 재로의 못에서 왔소. 나는 청강*을 위해 하백이 있는 곳으로 심부름을 가던 중이었는데, 고기잡이 여저가 나를 잡았소." 원공이 잠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점쟁이가 말했다. "이는 신귀입니다." 원공이 물었다. "고기잡이 중에 여저란 자가 있느냐?" "있습니다." 원공이 말했다. "여저를 조회에 들게 해라." 다음날 여저가 조회하자 원공이 물었다. "어떤 고기를 잡았느냐?" 여저가 대답했다. "제 그물에 흰 거북이 잡혔는데, 그 둘레가 다섯 자였습니다." 원공이 말했다. "너의 거북을 바쳐라." 거북이 도착하자 원공은 이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망설이다가 마음에 의심이 생겨 점을 쳤다. 점괘는 이러했다. "거북을 죽여 그것으로 점을 치면 좋다." 이에 거북을 도려내 72번을 점쳤으나 틀린 괘가 없었다. 중니는 말했다. "신귀는 능히 원공의 꿈에까지 나타날 수 있었으나 여저의 그물을 피하지 못했고, 그 지혜는 능히 72번을 찔러 틀린 괘가 없었으나 창자를 도려내는 환을 피하지 못했다. 이처럼 지혜도 궁한 곳이 있고, 신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비록 높은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만사람이 도모할 수가 있다. 고기는 그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다새*를 두려워한다. 작은 지혜를 버려야 큰 지혜가 생겨나며, 착한 것을 버려야 착해질 수 있다. 갓난아이가 스승 없이도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할 줄 아는 사람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청강 : 양자강의 신. * 사다새 : 물고기를 잡아먹는 큰 물새로 '펠리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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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송원공은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한 남자가 내전 뒷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원공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꿈이었다.
"나는 재로라는 못에서 왔소. 청강의 사자로서 황하신에게 가던 도중 여저라는 어부에게 붙잡히고 말았소."
원공이 이 꿈을 해몽하도록 시켰더니 그것을 신통력을 가진 거북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원공이 물었다.
"어부 가운데 여저란 자가 있느냐?" "있습니다." "그를 데려오도록 해라."
이튿날 여저가 조정에 들어오자 원공은 곧 그를 불러 물었다.
"요즘 이상한 고기를 잡은 일이 업느냐?" "있습니다. 흰 거북을 산채로 잡았사온데, 직경이 다섯 자나 됩니다."
원공은 여저에게 그 거북을 바치도록 명령했다. 이윽고 거북을 본 원공은 그것을 살려줄 것인지 죽일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점을 치도록 했다.
"거북을 죽여 그것으로 점을 치는 데 쓰면 좋다."
원공은 그 점괘에 따라 거북을 죽여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그 껍질로 72번이나 점을 쳤으나 단 한번도 틀린 일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중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 거북은 원공의 꿈에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은 있으면서도 어부의 그물을 피하지는 못했다. 또 72번이나 점을 쳐서 한 번도 틀린 일이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껍질을 벗기는 화를 면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때로는 궁지에 빠지는 수가 있고, 아무리 신통력을 가졌어도 그것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투철한 지혜와 능력을 가진 것이라도 많은 사람의 지혜와 힘 앞에는 견뎌내지를 못한다. 고기는 물새에게 잡아먹힐까봐 두려워할 뿐, 어부의 그물을 경계하지는 않는다. 작은 지혜란 이런 것이다. 인간도 작은 지혜를 버리고 나서야 큰 지혜를 얻게 되며, 착한 일을 하려는 노력을 버려야만 착해지게 된다. 갓난아이는 특별히 말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없어도 말을 배운다. 이렇게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앎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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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하인의 위치에 머물렀던 작곡가들의 지위
18세기에 중부 유럽의 여러 국가의 왕실에서는 카펠마이스터라고 불리는 직분의 사람들을 고용하였다. 이 직위는 궁중 악장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교회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의 역할은 우선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오르간을 연주하고 예배를 위한 음악을 준비하거나 때로는 작곡까지 하여야 했다. 세속적인 순서도 맡아야 했는데 그 왕실이 어떤 나라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연주회가 되기도 했고 제례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하이든은 헝가리의 에스테루하지 왕자의 궁중악장이었다. 모차르트는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콜로레도에게 고용되었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도 몇 군데의 그런 왕실에서 일을 하였었다.
그 당시의 소공자들은 음악가들을 시종으로 거느렸는데 그의 경제적인 능력이나 음악적 기호에 따라 거느리는 사람의 수는 마음대로였다. 이런 음악하는 시종들의 우두머리가 카펠마이스터이다. 그의 임무는 필요한 때에 맞추어 적절한 음악을 제공하는 것이다. 훌륭한 카펠마이스터는 음악을 연주하고 지휘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주인의 기호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음악을 작곡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작곡가는 수준작을 만들기 위해서 일상 생활고 격리되어 1년이라든가, 혹은 그 어떤 여가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작가가 잘 묘사하였듯이 "이 카펠마이스터들은 새벽에 일어나 새 곡을 작곡하고 낮 동안에 연습하였다가 저녁에 공연을 했다." 카펠마이스터를 포함하여 이 음악가들의 위치는 하인의 신분이었다. 하인의 복장을 하고 하인방에서 자고 하인의 상에서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시간은 엄하게 감시를 받았다. 헝가리 소공자와 하이든 사이에 맺어진 구두 계약에 따르면 그 소공자는 하이든의 음악인으로서의 임무보다는 의식을 치르는 일과 규율에 엄격해야 한다는 등의 문제에 더 신경을 쓴 것 같다. 모차르트는 그런 하인의 지위에 대해 굴욕감을 느꼈던 표시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실제로 그는 주교에게 반항함으로써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층계 아래로 발길질을 당했다.
만일 이 음악가들이 어떤 의미에서 철창에 갇힌 죄수와 같다고 해도 하이든과 같은 천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창을 부수고 나올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마이클 브레넷의 말을 빌리자면, 베토벤은 "많은 독일의 음악가들이 주인에게 완전히 얽매여 그들을 물질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또 다른 노예임을 확인시켜주는 그 명예를 단연코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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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화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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