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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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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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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혼자 간직하되 용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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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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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법(3)
로마자 표기법은 표준 발음을 따라 적는 것이 원칙이지만, 예외도 있으므로 두 가지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
자음 사이에서 동화(소리 닮기)가 일어나는 경우에는 소리대로 적는다. ‘백마’의 발음은 [뱅마]이므로 ‘Baekma’가 아닌 ‘Baengma’로 적는다. 신문로[신문노]-Sinminno, 왕십리[왕심니]-Wangsimni, 별내[별래]-Byeollae, 신라[실라]-Silla. ‘ㄴ’이나 ‘ㄹ’이 덧나거나 구개음화가 되는 경우에도 소리대로 적는다. 학여울[항녀울]-Hangnyeoul, 알약[알략]-allyak, 해돋이[해도지]-haedoji.
격음화(거센소리되기)도 소리대로 적는 것이 원칙이다. 좋고[조코]-joko, 놓다[노타]-nota. 단 체언에서 ‘ㄱ, ㄷ, ㅂ’ 뒤에 ‘ㅎ’이 따를 때는 ‘ㅎ(h)’을 밝혀 적어야 한다. 묵호[무코]-Mukho, 집현전[지편전]-jiphyeinjeon.
경음화(된소리되기)는 로마자 표기에 반영하지 않는다. ‘팔당’은 [팔땅]으로 소리 나지만 ‘Palttang’으로 적지 않고 ‘Paldang’으로 적는다는 뜻이다. 경음화를 반영하면 ‘pkk, ltt, kss’와 같이 좀처럼 이어 나기 힘든 자음 셋이 나란히 적히게 되어 도리어 가독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합정[합쩡]-Hapjeong, 울산[울싼]-Ulsan.
‘jungang’은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준강’이 될 수도 있고 ‘중앙’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쓰는 사람의 의도와 달리 읽힐 수 있는 경우에는 음절 사이에 붙임표(-)를 쓰는 것을 허용한다. ‘준강’이라면 ‘jun-gang’과 같이 써서 ‘중앙’으로 읽히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붙임표를 쓰지 않아도 틀리는 것은 아니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국어 기본법, 문제없다
지난 11월 24일 국어 기본법이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었다. 2012년에 한 단체에서 낸 국어 기본법 위헌 소송에 대한 결론이 난 것이다.
쟁점의 핵심은 공문서를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는 제14조의 내용이다. 위헌 측의 주장은 공문서에 한자를 배제하고 한글을 전용하는 것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었는데, 헌법재판소는 국민들이 공문서에서 공적 생활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므로 국민 대부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정한 것이다. 당연한 결론이다.
쉬운 문자를 쓰는 것은 국민의 편의에도 도움이 되지만, 국가의 발전과도 직결된다. 새로운 외국 문명에 맞닥뜨려 황망하던 시절인 근대기에 고종 황제는 공문식을 모두 한글을 기본으로 하여 쓰도록 명하였고(1894년, 칙령 제1호 제14조),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한글로만 기사를 썼다. 이는 모두 쉬운 문자로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1883년)에서 한문만 쓰다가, 이후의 한성주보(1886년)에서 한문 전용, 국한문 혼용, 한글 전용의 기사를 나누어 싣게 된 것도 쉬운 문자가 가져다주는 이로움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특히 현대처럼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주고받는 사회에서 문자가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한글은 가볍게 달릴 수 있는 트랙과 같은 것이다. 물론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 지식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명한 교육 제도를 통해서 이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가능하다면 국민에게는 쉽고 편리하고, 국가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한글이라는 고유 문자를 쓰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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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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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서대문에서 - 천상병
지난날, 너 다녀간 바 있는 무수한 나뭇가지 사이로 빛은 가고 어둠이 보인다.
차가웁다. 죽어가는 자의 입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소슬하고,
한번도 정각을 말한 적없는 시계탑 침이 자정 가까이에서 졸고 있다.
계절은 가장 오래 기다린 자를 위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너 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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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나비 - 정지용
화구를 메고 산을 첩첩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풍이 이울고 봉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 우에 매점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삼동내-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었다
대촉 캔바스 위에는 목화송이 같은 한떨기 지난 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 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늘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ㅅ신이 나란히 놓인 채 연애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에 비린내가 끼치였다
박다태생 수수한 과부 흰 얼굴이사 회양 고성 사람들 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 바깥 주인된 화가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비 쌍을 지어 훨훨 청산을 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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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의 뜰안에 - 김수영
초봄의 뜰안에 들어오면
서편으로 난 난간문 밖의 풍경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황폐한 강변을
영혼보다도 더 새로운 해빙의 파편이
저멀리
흐른다
보석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냄새가 술취한
내 이마에 신약처럼 생긋하다
흐린 하늘에 이는 바람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데
옷을 벗어놓은 나의 정신은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은
고독은 신의 무재조와 사기라고
하여도 좋았다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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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띄우는 글 - 이해인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이상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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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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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31.돈으로 선물을 대신하지 말라
큰 부자는 자식이 없고 오직 상속자만 있을 뿐이다
유태의 격언에 '큰 부자에게는 자식이 없다. 오직 상속자가 있을 뿐이다'라는, 매우 냉정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 있다. 큰 부자는 싸늘하고 차가운 돈을 가득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가슴에 전해지고 나아가 자식들에게도 전염되어 따스한 마음이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가정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은 다만 부모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싸늘한' 돈의 상속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이 격언은 가르쳐주고 있다. 즉, 부모와 자식 사이에 금전문제가 개입되다 보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유태인들은 자녀나 다른 아이들에게 선물을 할 경우, 선물 대신 돈을 주는 짓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다. 선물 대신 돈을 준다는 것은 결국 '이 돈으로 무엇이든 네 마음대로 사 가져라'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무성의한 태도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애정이 부족하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가끔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이 돌아가면서, '자녀들에게 전해주세요'라며 돈을 놓고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나는, 아이들에게 '친절하신 분이 돈을 놓고 가셨다. 그분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라'고 말하며 돈을 나누어준다. 어떤 선물이든지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의미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부모와 자식간에 오가는 선물 역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인간적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돈이란 이런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19세기 중엽까지 유태인 중에는 손꼽히는 갑부였던 로스차일드가의 암셰르는, 반유태계 폭도들이 습격해 오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 많은 유태인에게서 돈을 얻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독일인은 다 합쳐야 4천만 명에 불과해. 그 정도의 금화는 내게도 있어. 우선 한 사람 당 1프로린씩 던져주지."
그러고는 손을 내미는 폭도들에게 돈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암셰르에게는 끝내 자식이 없었다. 만약 자식이 있었다면 그렇게 '모욕적'인 방법으로 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은 결코 애정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애정의 표시이어야 할 선물 대신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진정한 돈의 가치를 모른다
유태인은 돈에 인색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질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아닐까.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시대는 이미 유태인이 영국 땅에서 추방되고 난 후였다. 즉, 셰익스피어는 유태인에 대한 편견이 한창일 때 자라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갖고 있었던 유태인에 대한 편견, 다시 말해서 셰익스피어의 마음속에 '내재화'되어 있던 편견이 고리대금업자의 모습으로 유태인을 그리게 된 것이다. 즉 돈을 죄악시하는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두툼한 지갑은 별로 훌륭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빈 지갑은 나쁘다(유태인의 격언)'고 말하는 유태인을 상대적으로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으로 그린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유태의 격언 중에 '돈이란 무자비한 주인에게도 유익한 하인이 된다'는 말도 있다. 돈 자체는 따지고 보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주인이 되는 것도 하인이 되는 것도 그 돈을 쓰는 사람의 인간성, 즉 됨됨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이처럼 돈의 미묘한 성격에 대해 가르쳐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얘기로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다.
18세기까지 유태인에게는 아직 성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가 유태인들에게 성을 팔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은 좋은 성을 사기 위해서 많은 돈을 지불했으며, 나쁜 성은 싼값에 거래되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유신 때까지는 보통사람은 성이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 유태인들도 똑같은 처지였던 셈이다. 유신에 의해서 자유롭게 성을 선택하게 된 일본인들은 그나마 유태인들보다는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좋은 이름을 사기 위해서 많은 돈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보석이나 꽃의 이름은 매우 비쌌다. 로우젠탈(장미)이란 유태 이름은 비싼 돈을 지불하고 얻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개중에는 골드 브룸(황금꽃) 따위의 욕심을 부린 성도 있다. 한편, 싼 이름으로는 동물을 상징하는 윌프슨(늑대) 등이 있고, 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힌터게슈트(엉덩이) 따위의 별난 성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자녀들은 '로우젠탈보다는 윌프슨이 훨씬 좋게 들려요'라며 아주 재미있어 한다. 그러나 재미있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이야기의 본질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돈이란 사람에 따라서 여러모로 사용되지만, 로우젠탈 씨가 힌터게슈트 씨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훌륭하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아직 돈의 진짜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선물 대신 돈을 준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애초에 자녀들이 돈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돈은 결코 애정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애정의 표시이어야 할 선물 대신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32.음식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은 곧 신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지 먹기만 하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유태인들은 매일 식탁에서 하나님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식사는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행위이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매일 매일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식사 때마다 잊지 않고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루를 무사히 끝맺게 되었음을 저녁식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안식일인 금요일 저녁에는 세 시간 정도 걸려서 요리한 고기 등을 차려 놓고 역시 세 시간 동안 천천히 식사를 한다. 그리고 식후에는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동물과는 달라서 단지 먹는 것만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유태인은 믿고 있다. 요즈음에는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모든 식구가 함께 모여 식사할 기회가 적어졌고, 식사시간마저 매우 짧아져 식탁에 둘러앉아 얻는 즐거움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유태인 가정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먹는 식사만은 언제나 아기자기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화목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축제 역시 언제나 식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새해-유태력을 1월 1일인데, 보통은 9월-10월에 있다 - 첫날에 하는 식사는 다섯 시간이나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유월절 -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로서, 보통 3월-4월의 일주일 동안 계속되나 - 예는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이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다. 이때 나오는 고기 종류는 대개 세 시간 이상 걸려서 정성껏 장만한 것들이다. 이런 축제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삼촌, 사촌 등 가족 전원이 한 식탁에 둘러않아 즐겁게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하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나 전설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님을 축복하며 가족들 간의 굳은 유대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자녀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통을 접하며 자라고,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감사드리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인간답게 깨끗한 음식만 먹는다
식사를 천천히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과, 식탁에서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스스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 유태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간 신경을 쓰는 게 아니다.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인간답게 깨끗한 음식만 먹는 것'이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유태인들은 먹어도 되는 음식, 즉 청정한 음식물을 코우샤 푸드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많은 가정에서 엄격하게 그것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어떤 것이 코우샤 푸드인지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준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코우샤 푸드는 고기를 먹는 방법에서 일반적인 음식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유태인들은 동물은 식용으로 죽일 경우, 파가 고이지 않도록 단번에 죽이고 거꾸로 매달아서 피를 빼낸다. 그리고 피를 완전히 제가하기 위해 고기를 물에 담그고 소금을 뿌린 다음 30분 정도 놓아둔다. 소금이 남은 피를 말끔히 빨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손질이 끝난 고기라야만 먹는 것이 허용된다. 이것은 본디 성경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것인데, 노아의 홍수 때까지는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다음 방침을 바꾸어 인간이 육식하는 것을 허용했다. 단, 피가 섞인 고기는 먹지 말며 생식은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여졌다. 유태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가르침을 지키고 있다. 음식물에 대한 계율은 매우 까다로워서, 네 발을 가진 동물은 위가 두 개 이상 있어야 하고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것만을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가 하나인 돼지나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말은 먹지 못한다. 또한 물고기는 비늘이 있어야만 허용되기 때문에, 뱀장어나 미꾸라지를 먹어서는 안 된다. 식육조인 독수리도 못 먹는다. 그리고 새우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은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들은 음식물을 통해 '인간다움'을 자각한다
뉴욕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나의 큰딸아이가 텔레비전 광고에서 본 빵이 마음에 들어 스쿨버스 안에서 남자친구에게 그 빵을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남자친구는 '그 빵을 먹으면 너는 유태인이 아니야'라고 단언했다. 큰딸아이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빵은 라드(돼지기름)를 써서 구운 것이었다. 그 남자친구는 돼지가 코우샤 푸드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친구의 일곱 살된 딸아이가 요코하마로 소풍을 갔다오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나 백 엔 손해보았어."
친구는 영문을 몰라 자초지종을 물었다.
"친구들은 모두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데, 나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다른 것을 샀거든. 그런데 그 속에 조금만 새우가 들어 있지 뭐야. 그래서 아까웠지만 버렸어."
친구의 딸아이는 새우가 유태인에게 금지된 음식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태인들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음식물을 통해서 '유태인다움'뿐 아니라 '인간다움'을 배운다. 옛날에는 일본에서도 네 발 가진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지만, 요즈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코우샤 푸드는 우리 유태인들만의 종교적 계율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예로부터 먹는 행위 자체를 종교와 관련시킨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님을 축복하며 가족들 간의 굳은 유대관계를 재확인한다. 그럼으로써 자녀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통을 접하며 자라나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감사드리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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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하드리아누스의 '순행'
로마 황제들은 뜻밖에 여행을 많이 한다. 그것은 황제에게 부과된 책무-첫째는 안전보장, 둘째는 속주 통치, 셋째는 사회간접자본 정비-를 완수하려면 현지 사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황제가 나설 필요가 생겼을 때 현지에 가는 정도였고, 제국 전역을 돌면서 계획적으로 시찰하지는 않았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현지에 간 이상은 주변 지역의 통치를 감시하고 그 지방의 사회간접자본을 정비하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현지를 돌아보는 것은 황제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티베리우스만은 황제가 된 뒤 본국 이탈리아를 한번도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경우는 56세에 제위를 계승하기 전에 이미 선제 아우구스투스의 군사령관으로서 제국의 주요 지역을 거의 다 돌아다녔다. 또한 황제가 된 뒤에는 철저히 방위에만 힘썼기 때문에, 황제가 나설 필요가 없는 전쟁은 하지 않았다. 다키아족과 파르티아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트라야누스 황제조차도 군사 목적이 아닌 여행은 하지 않았다. 로마 황제들은 실무적인 목적을 갖지 않은 여행은 하지 않았다. 본국을 비우고 관광여행이라도 떠났다가는 원로원과 시민의 반발을 살 게 뻔했다. 네로 황제가 결정적으로 악평을 받게 된 것은 그에게 동경의 땅이었던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로마인에 맞서서 하드리아누스는 현지 시찰과 그것을 토대로 한 정비 정돈만을 목적으로 한 대여행을 감행한다. 규모에서는 어떤 황제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장기간의 광범위한 여행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유일하게 비교 대상 이 될 수 있지만, 카이사르의 여행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한 결과였다. 물론 카이사르는 다음 전쟁터로 가는 길에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경제적 권리를 평등화하는 따위의 작업(이것도 분명 속주 통치의 영역에 속한다)도 해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로마군 최고사령관인 황제가 군단 하나도 거느리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 일을 감행하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유일한 구원은 로마인이 현실적인 백성이라는 점이었다. 현실적인 백성인 만 큼, 성과가 있으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과가 눈에 보 일 때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당시의 로마인이라면 당장 알 수 있는 상징적인 그림과 문자를 새긴 통화를 발행하여, 자기가 순행하는 각지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러면 제국 서방에 사는 사람들도 새 은화나 동전을 손에 들고, 황제가 동방의 에페수스를 시찰한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보고서를 받는 원로원은 알고 있었겠지만, 수도나 본국 이탈리아 주민들도 새로 발행된 통화를 보고황제의 등정을 알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의도는 도나우강에 놓은 돌다리나 정복된 다키아를 상징하는 그림을 통화에 새긴 트라야누스와 마찬가지였다. 통화에 새겨진 그림이나 문자가 전쟁과는 무관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직접 쓴 『회고록』이 소실된 시대에 살면서도 하드리아누스의 여행 경로를 더듬어갈 수 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는 순행지에서 그곳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알면 당장 그 문제 해결에 착수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건설된 곳에는 그 사실을 기록한 기념비가 세워진다. 이런 고고학적 유물도 그의 경로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보통 황제의 순행이라면 표면적인 시찰과 밤마다 열리는 향연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지만, 이런 사료를 보면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은 그런 부류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지는 대부분 변경이나 외딴 벽지였다. 방위시설을 시찰하며 다니는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군단도 거느리지 않고, 황후를 동반한 것도 한번뿐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가 혼자 마음 내키는 대로 여행한 것은 아니다. 할 일없는 궁정인을 잔뜩 거느리고 유람을 다닌 것도 아니다. 건설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와 동행했다. 말상대 역할을 하는 시인을 데려간 적도 있다.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겨울이 아닌 한, 황제의 순행지를 나타낸 통화가 발행될 무렵이고 하드리아누스는 이미 다음 순행지로 이동해 있었다. 그야말로 'immensi laboris'(지칠 줄 모르는 일꾼) 그 자체였다.
해는 서기 121년으로 바뀌었다. 1월 24일은 하드리아누스의 생일이다. 마흔 한 살에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도 어느덧 마흔 다섯 살을 맞았다. 수도 로마에서는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경기대회가 열렸다. 황제도 여느 때의 생일과는 달리 그 해에는 모든 시민에게 하사금을 나누어주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붙어 있었다. 황제의 순행이 무사히 성공하기를 기원하여 그것을 미리 축하한다는 것이었다. 4월 21일은 로마의 건국기념일이다.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로마인들은 해마다 그 날을 성대하게 경축했다. 황제는 '최고제사장'토 겸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에서 토가 자락으로 머리를 가린 제사장 차림으로 엄숙하게 제의를 거행했다. 제의를 마친 황제는 수도로마에 베누스(비너스) 신전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시조인 로물루스는 베누스 여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드리아누스는 대여행을 앞두고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준비를 모두 끝냈다. 바꿔 말하면, 원로원과 시민이 황제에게 버림받은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손을 써두었다. 순행지는 제국의 서방 일대였다. 왜 동방이 아니라 서방에 먼저 손을 댔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제국의 동방은 파르티아 전쟁을 뒤처리할 때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일단 정비를 끝냈기 때문이다.
라인 강
수도 로마에서 아우렐리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여 오늘날의 남프랑스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들어간 뒤, 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리옹으로 간다. 로마 시대에 루그두눔(Lugdunum)이라고 불린 리옹은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의 수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시였다. 갈리아를 정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패배한 갈리아 부족들의 근거지를 그대로 남겨두었고, 카이사르의 이 방침을 답습한 황제들도 이런 도시와 도시 사이를 가도로 연결했기 때문에, 로마 시대에 번영한 갈리아 도시들 가운데 로마가 세운 도시는 극히 적다. 극히 적은 그 도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리옹이다. 리옹만은 처음부터 로마인이 세운 도시였고, 고대에는 파리보다 중요한 도시였다. 프랑스만 염두에 두면 파리의 입지조건이 더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로마 제국의 서방전역을 시야에 넣고 보면 리옹의 입지조건이 훨씬 낫다. 리옹은 이베리아 반도와도, 이탈리아 반도와도, 그리고 라인 강 전선과도 거의 같은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라인 강 연안의 스트라스부르에 주둔한 1개 군단을 제외하면, 남프랑스를 포함한 갈리아 전역에 1개 군단도 상주시키지 않은 로마가 유 독 리옹에만은 1개 대대를 상주시켰다. 그것은 로마가 제정으로 바뀐 뒤 황제가 관장하는 금화와 은화 주조소를 리옹에 설치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면, 동전 주조권은 원로원에 있었기 때문에 수도 로마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그거야 어쨌든, 기원전 1세기 중엽에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의 뒤처리는 정말 훌륭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200년 뒤인 서 기 2세기에도 갈리아 동쪽 끝에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라인 강 방위가 주목적인 1개 군단만 주둔시켰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교묘한 정 치는 경비도 절감해준다.
로마화의 우등생이라고 불리는 갈리아인만큼, 리옹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일도 간단히 끝났다. 갈리아 전역을 시찰할 필요도 없었다. 리옹에는 며칠 머물렀을 뿐, 곧장 라인 강 방위선을 향해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모젤 강변에 있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오늘날의 트리머)이었다 리옹에서 로마 가도를 따라 북상하면 디비오(오늘날의 디종)에 이르고, 다시 복상을 계속하면 모젤 강변에 이른다.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은 원래 트레베리족의 근거지였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도시화하여 벨기카 속주의 도읍으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는 라인 강 방위선의 책임자 전원을 이곳에 소집한 게 분명하다. 라인 강어귀에서 '게르마니아 방벽'까지 포함하는 라인 강 방위선은 북쪽의 베테라(오늘날의 크산텐)와 본나(오늘날의 본)에 기지를 둔 저지 게르마니아(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의 2개 군단, 모곤티아쿰-(오늘날의 마인츠)과 아르겐토라툼(오늘날의 스트라스부르)에 기지를 둔 고지 게르마니아(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2개 군단, 합해서 4개 군단이 방위를 맡고 있었다. '저지'와 '고지' 게르마니아속주의 두 총독과 그들 밑에서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 네 명, 그리고 각 기지에 근무하는 고위 장교들을 소집하기에는 이들 기지와 연결된 가도가 모두 합류하는 트리어가 가장 적합했다.
트리어 접견은 전선의 현황 보고로 채워졌을 게 분명하다. 접견이 끝난 뒤, 하드리아누스는 라인 강 연안의 마인츠로 갔다. 전선을 구석구석까지 시찰하기 위해서다. 야만족이 내습했다는 보고는 없었으니까, 트리어 접견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데리고 시찰하러 갔을 것이다. 자신의 담당 지역만 알고 있으면 자기 담당 지역도 제대로 방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인 강 방위선 시찰은 '게르마니아 방벽'부터 시작되었다. 시찰하면서 문제점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당장 대책이 세워지고, 곧바로 실행에 옮겨진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게르마니아 방벽'의 절반이 동쪽으로 30킬로미터쯤 확장된 것도 이때의 시찰이 낳은 성과였다. 그동안 하드리아누스는 병사용 막사에서 잠을 자고 병사들과 한솥밥을 먹는 생활을 계속했다. '게르마니아 방벽' 시찰을 끝낸 황제 일행은 다시 마인츠로 돌아가, 이번에는 라인 강을 따라서 저지 게르마니아 방위선을 시찰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는 서기 121년도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시찰은 하드리아누스가 제2차 다키아 전쟁 때 지휘한 적이 있는 제1군단의 기지인 본, 그 군단의 분견대 기지가 있는 노바이시움(오늘날의 노이스), 트라야누스가 편성한 제3군단이 주둔하는 크산텐에서 끝나지는 않았다. 라인 강어귀에 가까운 분견대 기지 노비오마구스(오늘날의 네이메헨)를 지나 강어귀에 '포룸 하드리아니' (하드리아누스 포룸)라고 명명한 도시까지 세우게 했으니, 정말 철저하다. 이 일대가 오늘날에는 네덜란드지만, 로마 시대에는 트라이에크툼(오늘날의 위트레흐트)을 포함하는 라인 강어귀까지 로마의 손이 뻗쳐 있었다. 덧붙여 말하면, 오늘날의 폴부르흐 아렌츠부르흐로 추정되는 '포룸 하드리아니'는 군단이나 그 일부가 주둔하는 기지가 아니다. 원주민 촌락에 자치권을 인정하여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당시의 '지방자치단체' (무니키피아)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자치권을 인정한 것은 하드리아누스다. 이 벽지의 외진 마을도 '하드리아누스 포룸'이라는 문명적인 이름을 받았으니까, 그 이름을 준 당사자인 하드리아누스가 포룸 하나라도 지어주었을 성싶지만, 그것은 고고학의 성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순행 첫해는 라인 강 방위선을 구석구석까지 시찰하는 데 보냈다. 하드리아누스는 타 전선에 염주처럼 늘어서 있는 기지들 가운데하나에서 겨울을 났다. 북유럽의 겨울은 혹독하다. 한겨울에는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밖에 나가기를 꺼린다. 그래도 이듬해 봉의 일정을 생각하면 되도록 강어귀 근처에서 겨울을 나고 싶었을 테니까, 한겨울의 두 달 정도는 군인들만 사는 군단기지보다 그 기지를 중심으로 군인과 민간인이 함께 사는 도시인 크산텐에서 보냈을지도 모른다
방위체제 재구축
라인 강 방위선 시찰에서 하드리아누스는 그 후 다른 지방을 순행할 때 실행한 일을 모두 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방위체제의 재구축이었다. 방위선을 이동시킨 것도, 군단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긴 것도 아니다. 각 기지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도로망에 손을 댄 것도 아니다. 다만 기능이 저하되거나 둔화된 것은 주저 없이 고치고, 필요하면 보강하여 현재 상태에 적합하도록 합리적으로 재구축했을 뿐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이 '사업'을 두고 어느 연구자는 '세이크업' (shake-up)으로 평가했다 굳이 번역하면 '쇄신' 이라고 할까? 로마사를 접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로마인들의 일관된 지속성이다. 아피아 가도가 그 전형이다. 아피우스가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가도를 건설하면, 그 뒤를 이은 사람은 카푸아에서 베네벤토까지, 그 다음사람은 베네벤토에서 타란토까지, 그 다음 사람은 타란토에서 브린디시까지 가도를 건설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아피아 가도였다. 완성된 뒤에도 로마인의 일관성은 지속된다. 아피아 가도 전체를 보수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플라미니아 가도전체를 보수한 아우구스투스를 필두로 하여 황제나 유력자들이 줄을 잇는다. 로마인들은 유지 ·보수도 신축 못지 않게 훌륭한 공공사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지를 지나기보다 되도록 빨리 해안으로 나가서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트라야누스가 베네벤토에서 아피아 가도와 갈라져 브린디시로 직행하는 아피아-트라야나 가도를 건설한 것이 좋은 예다. 최초의 로마식 가도이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간선도로라서 당시에도 이미 '가도의 여왕이라고 불린 아피아 가도에 대해서도 로마인들은 고칠 필요가 있을 때는 고치고 고칠 필요가 없을 때는 고치지 않는다는 태도로 대처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라면, 로마인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였다. 하드리아누스도 비록 출생지는 에스파냐지만 틀림없는 로마인이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가 라인 강 방위선을 '쇄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은 이 방위선을 맨 처음 확립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것을 정착시킨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아 방벽'을 구축하여 기능을 향상시킨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드리아누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실행하여 제국의 안전보장을 재구축했을까? 조직이 아무리 잘 만들어져 있어도, 그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인사에 많은 신경을 썼다.
'고지'와 '저지'로 나뉜 게르마니아속주의 두 총독은 모두 전략단위인 2개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이기도 했다. 전선의 속주는 군사 속주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총독은 군사와 민사를 양쪽 다 책임진다. 이 총독은 집정관까지는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법무관은 경험해야 했다. 군사밖에 모르는 사람은 군사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선의 속주는 통틀어 황제 속주라고 부르고 황제의 관할 아래 있었기 때문에, 총독 임명권과 해임권도 황제에게 있었다. 하드리아누스가 라인 강 방위선을 시찰할 당시의 두 총독은 선제 트라야누스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트라야누스의 안목이 뛰어났는지, 하드리아누스는 그들을 교체하지 않았다. 다른 지방을 순행할 때는 총독을 교체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해임이나 경질 같은 과감한 수단에는 호소하지 않는다. 원로원에 돌려보낸다는 명목으로 해임하고,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도록 추천해주고, 집정관을 지낸 뒤에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평화로운 원로원 속주 총독으로 보내 명예로운 경력'을 마치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제국의 안전보장을 최전선에서 담당하는 사람은 모두 하드리아누스에게 역량을 인정받은 이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군단장에 대한 인사권도 로마군 최고사령관인 황제에게 있다. 로마시민권을 가진 군단병 6천 명과 거의 같은 수의 속주민 보조병을 통솔하는 군단장은 원래 법무관 경험자가 맡아야 하지만,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을 수행한 트라야누스는 이 자격 조건을 갖추지 않았어도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면 군단장에 임명한 예가 적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는 역량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은 일단 해임하여 수도 로마로 돌려보내고, 황제 추천으로 당선시켜 법무관을 경험하게 한 뒤에 다시 전선으로 돌려보내는 방식을 취했다. 평시에는 역시 질서를 지켜야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1개 군단은 다음 페이지의 도표처럼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대대장은 모두 10명이다. 96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제1대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9명은 각각480명의 병사를 책임진다. 로마군에서 분견대라면 대대(코호르스)를 의미하기 때문에, 분견대 주둔지가 있으면 그 기지의 방위 책임은 대대장에게 있었다. 대대장 임명권은 군단장에게 있었지만, 군사적 역량보다 부하 병사들에게 인기있는 사람이 대대장에 임명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제정 시대에 들어오면서 군대의 목적이 방위 위주로 바뀌었기 때문에 생긴 경향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것을 바꾸었다. 병사들의 인망보다 군사적 역량에 중점을 두어 대대장을 임명하게 한 것이다. 원로원계급의 자제만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에 임명하는 특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제국의 지도자 예비군에게 처음부터 막중한 임무를 부과하여 실무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것을 몸소 체험한 하드리아누스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사관인데도 '로마 군단의 등뼈'라고 불린 백인대장이다. 공화정 시대의 유물로 여전히 백인대장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실제로는 제1대대의 160명을 제외하면 80명의 병사를 통솔한다. 요즘으로 치면 중사겠지만, 그렇게 번역할 수는 없다. 로마군에서는 백인대장의4분의 1은 비록 하사관이라도 군단장이나 사령관이 소집하는 작전회의에 참석할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대대장의 경우와는 달리 백인대장 인선에는 부하 병사들의 인망도 참고자료로 추가했다. 그 이유는 군단기지나 숙영지에서도 대대장에게는 장교용 숙소가 제공되는 반면 백인대장은 부하 병사들과 같은 숙소나 막사에서 함께 기거했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도 부하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하들한테 인기가 있어도 단지그것만으로 백인대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강건한 육체와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기질을 백인대장의 인선 기준으로 삼았다. 부하한테 상냥하기만 해서는 '로마 군단의 등뼈'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병인데, 이것도 무조건 지원자를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선발 기준은 엄격했고, 시험을 통과하면 당장 입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전통은 이미 옛날부터 지켜져왔지만, 얼마나 엄격하게 시행하느냐는 사령관이나 군단장에나 차이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가 작성한 교본이 전군에 배포된 뒤로는 그것이 로마군 전체의 통일된 기준으로 정착했다. 병역 지원자는 평상시에는 17세부터 21세, 비상시에는 30세까지라는 연령 제한으로 우선 걸러진다. 동시에 로마 시민권 유무가 확인된다. 나이가 기준에 맞아도 전과자나 노예상인은 제외되었다. 신체검사에서는 체격과 시력을 검사했는데, 키는 1미터 65센티미터를 넘어야 했다. 두뇌도 시험 대상이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인고 쓰는 능력과 계산 능력이 요구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이중 언어 체계를 고수했지만, 군대의 공용어는 라틴어였기 때문에 라틴어를 잘하면 그 만큼 유리해졌다. 이런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당장 입대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넉 달의 '수습기간 (probatio)이 있었다. 그동안 공동생활에 적합한지 여부를 시험한다. 무기를 다루는 훈련도 실시되었다.
'수습기간을 무사히 끝낸 사람에게만 입대가 허용된다. 소속 군단과 자기 이름이 새겨진 금속 표찰(signaculum)을 받아서 목에 걸고 황제에게 충성 서약(sacramentum)을 한 뒤에야 비로소 정식 군단병이 되는 것이다. 만기 제대까지의 복무기간은 군단병이 20년, 속주민보조병은 25년, 해군은 26년, 근위병은 16년으로 정해져 있었다. 만기 제대할 때는 지위에 따른 퇴직금이 지급되고, 보조병한테는 퇴직금 이외에 세습권인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이렇게 '질'을 중시할수록 그 '질'을 널리 제국 전역에서 찾는 경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후세 역사가들은 하드리아누스가 이 경향을 조장한 장본인이라고 비난한다. 로마군에서 로마색을 없애버리고 속주민의 군대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포르니 교수가 1963년에 발표한 <군단병의 채용>을 논거로 삼고 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도표가 실려 있다.
<군단병의 채용>에 수록되어 있는 표
아우구스투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네로, 베스파시아누스~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3세기 말
본국 이탈리아, 215,124, 83, 37
속주, 134, 136, 299, 2019
원서에는 각 속주별 숫자까지 상세히 기재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속주 출신 군단병의 총수만 기록했다. 또한 이것은 육군에만 한정된 숫자이고, 해군이나 근위대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숫자를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면 잘못을 범하게 된다.
(1) 로마 시대의 공문서가 모두 소실되어버린 이상, 참고할 수 있는 것은 고고학 조사로 발굴된 비문뿐이다. 따라서 아직도 지하에 잠들어 있거나 민가의 건축자재로 전용되어버렸거나 아니면 파괴되어 흙으로 돌아가버린 수많은 사료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2) 이 숫자는 1년마다 조사한 통계도 아니고, 해당 시기의 로마군전체를 합산한 것도 아니다.
(3) 로마 군단병의 총수와 만기 제대나 전사 또는 병사로 해마다 충원할 필요가 있었던 결원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것을 추측 자료로 삼을 수는 없다. 연구자들은 1개 군단에 해마다 생긴 결원을 240명 안팎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도표도 병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군단 및 군단병의 총수와 결원수(추정치)
아우구스투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네로, 베스파시아누스~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콤모두스
군단 총수, 25,28,30,28
군단병 총수(명), 150000, 168000, 180000, 168000
해마다 생긴 결원(명), 6000, 6720, 7200, 6720
요컨대 첫 번째 도표에 기록된 숫자는 전모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경향은 반영되어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로마 제국의 안전보장도 본국 이탈리아 출신자의 손에서 속주 출신자의 손으로 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번영하는 제국의 본국에 싸는 로마 시민에게는 굳이 병역에 지원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많이 열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는 병력의 주요 공급지였던 북이탈리아가 200년 뒤에는 그 지위를 도나우강 연안지역, 즉 오늘날의 발칸 지방에 빼앗겼다 본국 이탈리아보다 군단병 수가 적은 속주는 그리스인데, 이것도 그리스인이 통상이나 해운이나 건축미술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국 출신이 아닌 자가 로마군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대결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 후 이것은 로마군의 통상적인 형태가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로마군 기병들은 거의 다 과거의 적인 갈리아나 게르만 남자들이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때까지의 관습을 명확한 형태로 제도화하여, 로마인 군단병과 속주민 보조병이 로마군의 양대 요소가 되도록 결정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부터 트라야누스 황제까지의 시대를 경계로 하여 본국 출신 로마인과 속주 출신 로마인의 비율이 역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이후로는 그 차이가 점점 더 벌어져 갔을게 분명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속주민의 수가 늘어난 것도 그 원인의 하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선 군단에 근무할 때 친해진 현지 여자와 결혼하여, 만기 제대한 뒤에도 기지 주변에 정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둘째, 만기 제대할 때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규정된 보조병의 존재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권이니까 그 자식은 어엿한 로마 시민이고, 아버지가 군인이었으니까 자식이 로마군단에 지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본국 출신 병사와 속주 출신 병사의 비율이 역전된 것은 본국 출신자가 병역을 기피한 결과였다고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물며 속주 출신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가 연이어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태생보다 속주 태생을 골라 뽑은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혼다 소이치로가 한 말이 생각난다. 혼다의 정신만 계승해준다면 미국인이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누가 혼다 사장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로마인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특히 하드리아누스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어떻게 병사들에게 '로마인의 정신'을 주입시키려 했을까.
우선 실전 같은 맹훈련을 철저히 시켰다. 로마군의 훈련은 예로부터 지독하기로 유명했지만, 같은 군단병끼리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모의전투를 할 때도 양쪽 다 진지하게 싸운다. 훈련하다가 동료에게 상처를 입혀도 문책하지 않았다. 다만 훈련이 아닐 때 상처를 입히면, 휘하 병사들의 생살여탈권까지 갖고 있던 군단장에게 엄한 처벌을 받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날마다 맹훈련을 거듭할 바에는 차라리 병사를 그만두고 검투사로 전직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실행에 옮긴 사람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로마 군단에서 만기까지 복무하면 퇴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도중에 퇴역해도 몇 가지 특전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제5권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카이사르는 지방의회 의원의 자격 연령, 즉 피선거권 연령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었다.
(1) 병역 무경험자-30세 이상
(2) 군단 보병으로 병역을 경험한 자-23세 이상
(3) 기병 내지 백인대장으로 병역을 경험한 자-20세 이상
또한 카이사르는 선거권은 있지만 피선거권은 없는 사람까지도 명기했다. 범죄자, 위증자, 군단에서 탈영하거나 추방된 자, 검투사, 배우, 매춘업자등이 피선거권을 갖지 못하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한 이 법은 2세기 뒤인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도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완전군장을 갖추고 행군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훈련의 하나였다. 비상시가 아닌 한, 시속 5킬로미터로 30킬로미터 안팎을 행군하는 것이 하루 할당량이다. 게다가 각자 보름치 식량을 지참하도록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무기와 식기에 식량까지 합하면 짊어져야 하는 짐의 무게는 무려 40킬로그램이나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병사들의 행군을 시찰할 때, 말을 타기는커녕, 졸병들과 똑같은 군장을 갖추고 함께 행군했다고 한다. 로마의 전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고난을 견디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고, 그것은 일개 졸병도 황제도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정을 병사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하드리아누스가 집착한 훈련에는 크고 무거운 공성기를 다루는 법도 포함되어 있다. 로마 군단에는 이런 종류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자는 있지만, 이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병사는 없다.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군단병이 조작한다. 군단병이라면 누구나사용법에 익숙해져야 했다.
로마군의 그 병기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1859∼1941)가 복원하여 실험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궁' (arcus)이라고만 불린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은 50미터 앞의 표적에 명중했고, 이어서 발사된 화살은 표적에 꽂혀 있던 첫 번째 화살을 보기 좋게 둘로 갈랐다고 한다. 또한 '전갈 (scorpio)이라고 불린 투석, 투시기에서 발사된 60센티미터 길이의 강력한 화살은 340미터 떨어진 2센티미터 두께의 널빤지를 꿰뚫었다고 한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로마군이 사용한 각 병기의 사정거리도 계산하여 그림으로 설명해주었다. 이런 것을 보아도 로마군의 기계화가 그 시대의 어느 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는 주장은 옳은 것 같다. 병기 자체의 정밀도가 높을 뿐이니라, 모두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갈'은 백인대장이 지휘하는 1개 중대에 한 개씩 갖추어져 있었다. 기계화에 힘쓰는 것은 최고사령관인 황제의 책임이지만, 그 병기를 활용하는 것은 군단병의 책무라고 하드리아누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황제는 훈련중이 아닐 때에도 기지 안에서는 엄격한 생활을 하도록 병사들에게 요구했다. 기상, 식사, 취침 등 모든 일상생활이 나팔소리와 함께 이루어진다. 밤에 보초를 서는 동안 졸기라도 하면 당장 사형이다. 기지 안에는 로마식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열주 회랑도 금지되어 있다. 정원도 만들 수 없다. 로마에서는 침대 모양의 의자에 한쪽 팔꿈치를 괴고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는 것이 관례지만, 기지 안에서는 저녁에도 그런 식으로 식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동료의 물건을 훔치거나하면 당장 추방이다. 항변이나 반론은 허용되지만, 백인대장을 통해야했고, 무리를 지어 시위하는 것은 엄금되었다. 그리고 이유 없이, 또는 상관의 허가도 없이 기지를 떠나는 것도 엄벌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하드리아누스가 매사에 엄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지 내의 병원 시찰은 거르지 않았고, 전투 중에 다친 사람과 다른 병으로 쓰러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충분한 치료를 베풀 수 있도록 설비나 의료진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꼼꼼히 점검했다. 로마 군단에는 반드시 내과의사와 외과의사 및 간호사로 구성된 의료진이 딸려 있었고, 말이나 소를 치료하는 수의사까지 의료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단기지에 있는 병원은 그 주변에 사는 주민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 주민들도 어떤 식으로든 기지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인정상으로나 정략적으로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 같다. 군병원에만은 정원을 허락한 것도 하드리아누스답다. 정신력만 중시해서는 일단 유사시에 충분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을 들은 로마군이다 이런 면에서 하드리아누스의 시찰과 거기에 바탕을 둔 훈련은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철저했다.
군단장 밑에는 기지 운영을 담당하는 두 명의 고위 관리가 있다. 하나는 경리 책임자인 회계관, 또 하나는 운영을 책임지는 기지 장관이다 기지 장관의 주요 임무는 병기와 식량을 보충하고 저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선기지는 늘 적과 대치해 있다. 언제 적에게 포위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많은 병기와 식량을 비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대량의 재고를 끌어안고 있는 기지가 많았다. 재고가 너무 늘어나면 식량은 곰팡이가 슬거나 썩어서 결국 버릴 수밖에 없다. 병기도 녹이 슬어버려서 군단에 딸린 병기창에서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 병기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그런 의도는 없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군량 구입에 든 비용을 낭비하게 된다. 이것을 싫어한 하드리아누스는 군단기지와 군량 공급지, 그리고 이두 곳을 잇는 보급로의 조직화를 추진했다. 유통만 보장되면 여분의 식량까지 비축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 성과는 기지의 재고가 최소한으로 줄어드는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에서도 효율을 중시하는 하드리아누스의 사고방식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방위력 증강에도 나타나게 된다.
로마군은 주전력인 군단병 그것을 보완하는 보조병으로 나뉘어 있었다. 속주민을 조직한 것이 보조부대인데, 서기 69년까지는 같은 부족 출신의 병사들로 보조부대를 편성하고, 그 부족의 부족장 일족이 지휘를 맡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네로 황제의 죽음에 뒤이어 내전이 일어났을 때, 그 혼란을 틈탄 속주의 반란에서 주역을 맡은 것이 로마군 보조병이었다. 같은 부족 출신을 한 부대에 모아놓았기 때문에 무기를 들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쉬웠던 것이다. 여기에 질색한 로마는 내전을 해결하고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시대부터 속주민으로 편성되는 보조부대에 여러 부족 출신을 섞어놓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지휘관도 로마 군단의 고참 장교가 맡게 했다. 이렇게 되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이름만 보조병일 뿐 실제로는 정규병에 가까워진다. 만기 제대할 때는 퇴직금도 받고 게다가 로마 시민권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 경향을 더욱 조장했다.
평화를 통치이념으로 내건 하드리아누스는 평화를 유지하려면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믿었지만, 제국의 재정상 군단병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치세에는 2개 군단을 감축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보조병도 늘리고 싶지 않았다. 보조병이 군단병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에 어긋나기 때문이지만, 이제 정규 병력이 되었다고는 해도 보조병은 어디까지나 속주민이다. 제국의 안전보장을 맡고 있는 로마군 안에서 수적으로나마 속주민이 로마 시민을 능가해서는 안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누메루스'(numerus)라는 조직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누메루스'란 직역하면 '수'나 '수의 집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정말 즉물적인 이름이 붙여진 이 조직은 주변 지역의 속주민 지원자로 편성된다. 다만 정규 조직은 아니고 병역 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말하자면 계절 노동자 같은 병사들이다. 주요 임무는 망보기이고, 전투력까지는 기대하지 않으니까 훈련을 시킬 필요도 없다. 근무 기간에는 숙식을 보장하고 게다가 약간의 봉급까지 주기 때문에, 농한기의 농민이나 일시적 실업자에게도 편리한 제도였다. 파트타임 병사니까 만기 제대할 때 퇴직금을 지급할 필요도 없고, 로마 시민권을 줄 필요도 없다. 로마 시민의 수를 지나치게 늘리지 않고도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가난이 도화선이 되기 쉬운 반란의 불씨를 끄는 데에도 도움이 핀다. 파트타임 병사인 이 '누메루스'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라인 강과 도나우강 방위선과 브리타니아에서는 1개 군단에500명 안 밖의 규모로 활용된 모양이다. 군단병 6천 명, 보조병 6천 명에 500명이다. 군사력 증강이라기보다 보강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이l상이 '게르마니아 방벽'을 포함한 라인 강 방위선을 시찰하는 동안 하드리아누스가 시행한 일이다.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이만한 일을 해냈으니까, '게르마니아 방위군' (Exercitus Germanicus)이라고 새겨진 통화를 발행하는 정도는 당연히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의 순행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시찰 지역이 어디든, 반드시 해야할 일과 그 지역 나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병행하는 방식이었다 라인 강 전선에서는 새 방벽 건설을 기획할 필요가 없었지만, 다음 순행지인 브리타니아에서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는 식으로. 그리고 하드리아누스의 문제 해결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군단기지 내부의 책임체계를 명확히 한 것이다. 조직의 기능을 향상시키려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선결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직에는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당사자 자신이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종다양한 인간이 섞여 사는 게 인간 사회니까 이런 부류의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런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조직의 기능은 퇴화한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사태를 피하고 싶었다. 군단기지는 훗날 유럽의 주요 도시로 성장해간 것이 보여주듯 그 자체가 이미 로마 사회의 축소판이다. 의료시설이나 공중목욕탕은 물론, 양복점과 은행과 우체국도 있다. 군단기지에 없는 것은 병사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시설뿐이다. 로마군은 하사관 이하의 병사들이 군복무 중에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가 군복무 중에 태어난 사생아라도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 뒤에는 적출자로 인정되었다. 또한 로마 군단기지에는 무엇 때문인지 헌병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드리아누스는 군단기지의 구성원 수를 늘리지는 않았지만 줄이지도 않았다. 다만 각자의 책임 분담은 명확히 했다. 군단기지 요원별로 자세히 구분된 업무 할당표를 보고 있으면, 이래서는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거라고 통감하게 된다.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본국 이탈리아 태생보다 더 철저한 로마인이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기와 같은 속주 출신 병사들에게 뿌리깊이 심어주려고 애쓴 '로마인의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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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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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의 수업 - 이노구치 구니코/홍성숙 옮김
그것은 소학교 마지막 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브라질 상파울루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해의 사회과 과목은 세계사였는데, 그 일로 인해 어린 내마음은 우울했다. 우울이라는 마음의 상태를 정말로 알게 된 것은 아마 그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수업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서 공부할 즈음부터 나는 교과서의 맨 끝부분에 있는 어느 페이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 읽고 있었다. 수업이 르네상스 시대 부분에 이르렀을 때에는 인력거의 삽화와 버섯구름 사진이 실려 있는 그 페이지를 거의 암기해 버리고 말았다. 진주만이라는 커다란 표제가 붙은 그 페이지를 살며시 넘길 때마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 수업을 하실 날을 마음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슬프다든가 화가 난다든가 시시하다거나 안절부절못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에는 해당이 안 되는, 정말로 우울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첫째 일본에 관해서, 촌스런 인력거나 전투적인 사무라이의 나라라는 설명이 기묘하게 설명되었고, 바닥에서 잠을 자고 종이로 방과 방 사이를 칸을 질러 생활한다라고 쓴 표현도 쇼크였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일에는 그즈음의 나는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의 수업은 다르다. 그건 내게 있어서 최초의 진주만의 수업이었고, 더구나 나는 반에서 유일한 일본 아이로서 그 수업에 임해야만 했던 것이다. 교과서는 일본이 여하히 악마적인 세계 정복의 야심과 광기로 평화스런 미국을 경악하게 했나 하는 것을 심술궂은 투로 기술하고 있다. 촌스런 후진국 국민이 자유와 정의를 구현한 위대한 미국에 대해서 가소로운 도전을 했다는 이야기와 그리고 그 야망은 원자 폭탄에 의해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는 일들이 옛날이야기처럼 엮어져 있다. 그건 마치 선과 악의 대결이고, 세계의 구세주 대 악마의 서자가 대치하는 구도였다.
한 해도 마지막에 가까워졌고 제2차 세계 대전 이야기도 끝이 나고 말았다. 나는 은밀히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꾀병으로 어머니를 속여서 그 날 하루 학교를 쉬기로 하는 작전이다. 천식의 발작과 복통을 전날 밤부터 자신도 놀랄 만큼 대담한 연기로 꾸며 댔다. 양친에게 교과서를 보이고 부모들 세대에 대한 분노를 정면에서 터뜨린 다음 당당하게 학교를 쉬는 방법을 왠지 나는 택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나는 어린 값에는 이국(異國)에서 안간힘을 다해 부모를 감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꾀병을 연출한 데 대한 죄책감은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최후까지 마음에 걸려 좀처럼 잠들 수 없었던 것은 세계사 선생님의 일이었다. 그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 마법의 지팡이를 가지고 있어서, 수업이 시작되면 어느 틈엔가 교실 전체에 옛날 세계가 펄쳐져 갔다. 나는 그 선생님을 정말 좋아했다. 진주만의 수업을 빠지면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 그 해답은 끝내 찾아 내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어머니가 몇 번이나 깨우러 왔지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어머니는 빵죽을 쑤었는데 일어나련? 하고 물으러 왔다. 아플 때 어머니는 언제나 빵죽을 쑤어 주셨다. 어머니는 내 병을 믿어 주신 걸까……. 나는 그 약간 달착지근한 빵죽을 먹으면서 결국 스쿨 버스를 타고 가야지 마음먹었던 것이다.
세계사 교실로 들어간다. 잰 걸음으로 자기 자리를 향하는 나더러 “하이 쿠니코”라고 선생님은 말을 건네 주셨다. 그 밝은 목소리에 오히려 내 마음은 긴장했다. 수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을 못한다. 나는 마치 돌처럼 꼼짝도 않고 교과서의 그 페이지를 열어 놓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무나 긴장하여 내 주위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쓰고 계신다…… 일본의 석유 수입의 비율이다 ……아니 교과서에 그런 것이 써 있었나? …… 선생님의 음성이 내 귀에 되돌아 온다. 선생님은 일사천리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신다. 일본은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 발전하기 위해서 외국으로부터 자원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아무리 자원이 부족한 나라라도 무역을 통해 발전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러나 구미 각국은 아시아의 나라들이 지나치게 발전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일, 그것은 일본의 자원 수입을 곤란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던 일 …… 그런데 웬걸 미국은 실은 구라파 전재에 참전할 계기를 포착하려 하고 있었던 일 ……아니야! 교과서하고 전혀 틀린 것을 선생님은 이야기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단 한 사람의 학생을 위해 그 수업을 해 주신 것이었다. 반 친구들은 모두 그 날 수업의 내용이 교과서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더구나 평소에는 활발한 학생들 중 누구 한 사람 그것을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전쟁뿐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의 사건에는 반드시 복잡한 배경이 있다 ―― 그것을 단일 원인론으로 단정하여 결론지어 버리려는 것은 역사에 대한 폭력이다 ―― 라고 선생님은 수업을 끝냈다.
방을 나갈 때 선생님께 진심으로 무언가를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만 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전보다 더 나는 진주만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을 비난하는 화살의 정면에 서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은 내 안의 어린 부분이 구원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내 안에 다른 또 한 사람의 나를 발견한다. 이미 어린아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그 다른 또 한 사람의 나는 복잡한 국제 관계의 진상 해명과 그리고 평화 추구에 관계되는 일을 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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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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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5장 사랑과 고통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8월 3일자 편지는 사실 베토리의 7월 27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이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더 이상 도나토의 일도 자신의 불행한 처지도 입에 담고 있지 않다. 그가 지금 빠져 있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리차와의 육체 관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니콜로가 스스로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그러한 일이었다. 이는 감히 말하건대 그가 (군주론)을 쓰기 직전에 가졌던 거의 그런 정도의 열정이었다.
시골에서 나는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났다네. 그런데 그녀는 그 천성이나 됨됨이가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고귀해서 어떤 찬사와 사랑도 그녀에겐 그저 모자랄 분이라네... 내 나이 이제 거의 오십을 바라보네만, 뭐랄까 이글거리는 태양에도 끄덕없고 험한 길에도 지침이 없으며 밤의 어둠에도 놀라지 않는다고나 할까. 만사가 편안하게 느껴진다네. 난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기지. 때로는 나의 감정과는 다르고 심지어 반대되는 경우까지도 말이야. 내가 지금 커다란 고통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속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네. 그건 바로 그녀의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용모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고통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 세상의 어떤 것을 준다 해도 난 여기서 벗어나지 않겠네. 그래서 위대하고도 중차대한 문제 같은 것은 생각지 않기로 했네. 이제 더 이상 옛 역사를 읽는 것도 우리 시대의 사건들을 숙고하는 것도 즐겁지가 않다네. 이 모든 것이 감미로운 생각들로 바뀌어버린걸세...
마키아벨리를 이처럼 행복하게 만든 당사자는 시골의 이웃 여인이었다(니콜로 타파니의 여동생. 당시 그녀는 조반니라는 남자와 정혼하고 반지와 지참금까지 주고받은 사이였으나, 그가 별 이유 없이 로마로 가버리는 바람에 과부 아닌 과부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1514년 12월 4일자 편지와 본문 257-258쪽을 참고할 것-옮긴이). 그러나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서나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녀와 동행하여 험한 길을 마다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친구들이라면 그의 연애에 대한 충동과 그에 쏟는 열정이 어떤 것인지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힘들고 쓰라렸던 나날 뒤에 온 이러한 연애의 감정은 만년의 그를 사로잡았다. 궁중의 법복이여, 안녕! 알베르가초의 서재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대화를 나누던 고명한 이들의 그림자여, 안녕! 45세의 나이에 이르른 마키아벨리는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대해서도 (역사의 풍미)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다만 사랑의 시를 쓸 뿐이었다. (동안의 궁수여, 넌 수없이 쏴댔지...)
이러한 것 모두가 단지 허울분인 통상의 문학적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만사에 언제나 문학적 기교를 싫어했으며, 더욱이 사랑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우리는 이 시기에 그가 어떤 주요한 저술을 하고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는 이 편지의 진실성을 일부 확증해 준다. 물론 그것은 그의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리비우스 논고)를 채워놓은 자료들 중에서 시일이 확실한 것 어느 것도 이시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군주론) 역시 그가 다시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랑 사건이 그에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었으며, 적어도 해가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덕분에 그 절망의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비록 새 걱정이 생긴 셈이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가장 잔인했던 고통을 잊어버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격력한 사랑은 언제나 사람의 정신을 풍부하게 하는 법이다. 흔히 그렇듯이, 마키아벨리의 사랑 역시 곧 일에 대한 자극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때가 오면 힘을 발휘하리라는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 마치 홍수가 휩쓸고 간 들판에 기름진 흙이 쌓이듯이 말이다.
이 시기 동안에도 베토리와는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다. 이는 단지 우리가 당시 오고간 편지들의 흔적을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서기장이 시골집에서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그러한 사랑의 정열로 녹이고 있었던 12월 어느 날, 대사 친구로부터 온 한통의 편지는 그의 마음속에서 꺼져 가던 정치에 대한 불시를 되살려놓았다. 그는 앞서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하면서, 정치란 그에게 (고통 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것에 관해 논하지 않으리라고 언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조차 그러한 언약을 쉽사리 깨뜨려버렸다. 그가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친구는 어떤 문제를 던지고는, 분명히 말하되 바로 교황이 그 답을 읽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일을 그만든 지 이태가 지났지만 그렇다고 그 기술까지 잊어먹을 사람은 아니라는 점 정도는 내가 잘 아네.)
문제란 이런 것이었다. 즉 교황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교회의 교속 양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고, 프랑스 왕은 왕대로 베네치아와 한편에 서서 황제와 에스파냐 왕과 스위스에 대항하여 밀라노를 다시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교황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프랑스나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는다면, 또는 그냥 중립을 지킨다면, 교황에게 돌아올 이점과 위험은 어떤 것일까? 이 내기의 판돈은 베토리가 흘렸듯이 교황의 호의가 될 수도 있었다. 사실 다시 몸을 일으켜보겠다는 기대가 사랑에 대한 욕망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위의 교황 문제를 제기한 베토리의 편지와 서로 엇갈려 보내졌던, 니콜로 타파니란 사람의 일을 부탁하는 라틴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묵은 근심 거리에 대해 다시 얘기를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서는 좋은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는 12월 10일자 편지에서 평소의 지론과 성향에 따라 장문의 답장을 썼다. 그는 일단 중립안을 선택에서 배제한 뒤, 프랑스와의 동맹을 교황에게 권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 쪽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을 뿐 아니라, 프랑스 왕이 승리하는 것이 적이 승리하는 것보다 (그 파장은 덜해서 좀 더 견딜 만한 데) 반해, 설사 패배하더라도 그 후유증이 그리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언이 올바른 것이렀다는 사실은 뒤에 밝혀지게 된다. 이 편지를 보내고 난 뒤, 마키아벨리의 기다림은 다시 시작되었고 아울러 베토리와의 서신 교환도 곧 재개되었다. 이틀 사이에 두 통의 편지가 산탄드레아에서 로마 족으로 보내졌다. 타파니에 대한 아니 남편에 의해 버림받고는 혼인 문제를 이렇든 저렇든 해결하고 싶어하는 타파니의 여동생에 대한 부탁의 말을 담은 앞서의 편지는 제외하고도 말이다. 그녀 외에 누가 우리들의 서기장이 사랑한 연인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 시골에서 그들만큼 나를 살갑게 대해 주는 사람은 없다네)라는 말은 물론 타파니 일가를 부탁하면서 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부로 전체를 나타내는 일종의 제유법인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각졀히 그 가족 중 한 사람을 달콤하게 생각했던 것이리라. 내가 앞서 이틀 만에 보내졌다고 말한 두 통의 편지 중에서 한 통은 스타킹 한 켤레를 만드는 데 쓸 정도의 푸른색 털실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눈치 빠를 친구는 그것이 누구에게 소용되는지를 묻고 싶지 않아고 썼다. 그것을 짐작하기란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베토리의 12월 15일자 편지는 마키아벨리에게서 꺼져 가던 희망의 불꽃을 다시 소생시켰다. 왜냐하면, 베토리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답을 읽고 그것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프랑스 사절 건을 그에게 지시한 사람이 다름아닌 무소불위의 권력자 메디치 추기경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거리낌없이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장의 기다림과 조바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12월 20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중립을 지키는 문제와 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에 대한 교황의 우려에 대해 무언가 좀더 부언하고 싶다는 핑계 아래, 자신이 보낸 장문의 10일자 편지를 보총하는 역시 짧지 않은 편지를 다시 보냈다. 같은 날, 그는 베토리의 15일자 편지에 답하는 또 다른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피렌체에 관한 일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메디치 가에 봉사하고 싶다는 자신의 심정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내비치고 있다. 베토리는 이처럼 재촉을 받자,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즉 마키아벨리가 보낸 두 통의 편지 모두를 교황과 메디치 추기경과 비삐에나(메디치 가의 문인 베르나르도 도비치의 별칭이다. 그는 조반니가 교황이 되는 데 큰 역할의 한 덕분으로 추기경 직을 얻었다-옮긴이)가 보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글의 명석함에 놀라면서 그 판단이 옳다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토리는 곳. (자신은 친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외엔 아무런 말도 끌어내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결국 이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대신 이 초라한 서기장의 마음을 그의 여인을 위한 푸른색 털실로 달래려 하였다. 적어도 이같이 조그만 부탁의 경우에는 그는 (백년동안이나) (베토리는 그렇게 썼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말이다. 나로서는 이 보잘것없는 물건이 그에게 새로이 가해진 타격을 얼마나 완화시켜 줄 수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키아벨리는 지금까지 이런 일에 마음을 다잡아왔기 때문에, 곧 새로운 희망을 가슴 가득히 채울 수 있었다.
파올로 베토리는 당시 로마에 있었고, 대사인 그의 형과 함께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난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의논하곤 했다. 그는 12월말 피펜체로 돌아와 마키아벨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형에 비해 덜 신중하고 덜 이기적이면서도 더욱 온화한 성품을 가졌던 그는 짧은 시간 안에 훨씬 더 나은 성과를 얻어냈다. 당시 (메디치 군주들)은 자유 공화국 시절에 만들어졌다가 그들이 자유를 땅에 묻을 대 성급히 없애버렸던 민병대 조직을 다시 살려내기로 뜻을 모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사로의 경우처럼 큰 소리로 불러내지 않는 다음에야 민병대의 부활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나사로 Lazzaro는 성격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빠이다. 병으로 죽은 뒤, 예수가 큰소리로 부르자 부활하여 걸어나왔다는 이야기를 비유한 것. 요한복음 11장 43-44절 참조-옮긴이). 그들이 이 분제에 대해 마키아벨리의 의견을 물어왔다. 여기에 다름아닌 파울로 베토리가 힘을 썼으리라고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교황의 함대 제독은 어차피 같은 주친을 모시는 터라 피렌체의 입에 개입하게 마련이었고, 해군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물론 육군에 대해서도 간여할 권한이 있었다(파올로 베토리는 1513년 교황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되었다.-옮긴이).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마키아벨리를 바로 자신의 함대에 태워 리보르노까지 보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민병대에 관한 문제들을 마키아벨리와 상의했음은 물론이다. 그 조직을 만들고 움직였던 전임 서기장보다 그 일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관연 누구였겠는가?
우리는 당시 마키아벨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민병대 건에 관해 구두로 자문에 응한 후, 그것을 원래의 편제대로 다시 조직하는 문제를 최초로 논한 (민병대론 Ghiribizzi d'ordinanza)을 썼다. 해체된 지도 몇 년이 지난 민병대 문제에 그의 조언이 얼마만큼 소용에 닿았는지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정작 그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는 점뿐이다. 그것은 금방 사그라드는 또 한번의 짚불 같은 것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쯤으로 물러설 파올로 베토리가 아니었다. 당시 교황 레오네가 가문의 일원들이 지닌 야심을 채워주기 위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다기다변한 계획들 중에서도, 그때까지 대체로 그리 되리라고 보였던 것은 줄리아노가 파르마, 피아첸차, 모데나, 레초의 군주가 되는 길이었다. 줄리아노의 신임과 애정이 깊었던 파올로는 이 새로운 국가에서 틀림없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호의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던 마키아벨리 역시 나름대로의 몫을 얻게 될 것이었다. 1515년 정월 그믐 그가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우리에게 마치 볏을 세운 수탉처럼 꼿꼿하게 되살아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연인을 위해 쓴 시들을 보내고, 사랑과 눈물과 웃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사이의 편지들을 누가 보게 된다면, 내 소중한 친구여, 그것들간의 차이를 누가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크게 놀랄 것이네. 왜냐하면, 우리는 때로 중차대한 문제들만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고상하고 위대한 어떤 것을 담고 있지 못하면 결코 우리의 머리에 넣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이다가도, 장을 넘기면 어떻게 같은 사람이 그토록 경박하고 불안정하고 음탕하며, 그토록 덧없는 일에 빠져들 수 있는지 궁금해할 지경이기 때문일세. 이러한 행동거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칭찬 받을 일로 보이네. 우리의 모습이 변화무쌍한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지. 자연을 닮고자 하는 사람을 옥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가 이렇듯 들쭉날쭉한 내용의 편지들을 주고받아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 편지에서도 다음 장을 넘겨보면 알게 되겠지만 난 초지일관하겠네. 몸이나 잘 추스르게나.
그러면서 그는 다음 장에서 새로운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파올로의 입을 빌려 줄리아노에게 올리는 조언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일은 이제 해결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일에서조차 제안은 피렌체가 결정은 로마가 하는 상황에서, 이 일의 내용이 알려지자 죠황 비서인 피에로 아르딩겔리는 줄리아노에게 이렇게 썼다. (메디치 추기경께서는 어제 저에게 대인께서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휘하에 두시었는지 어떤지를 제가 아느냐고 은밀히 물어오셨습니다. 저는 그에 대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답하자, 추기경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 역시 그러리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피렌체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니, 그것이 그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는 파올로 베토리의 짓임이 분명하다. ... 나 대신 그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니콜로와는 일체 관계하지 말라고 충과더라는 말을 전하라.) 만약 그의 말이 이 분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꾸밈없이 표현되지 않았더라면, 미움의 감정이 그토록 깊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리라!
아마 미콜로는 파올로라는 은밀한 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이러한 공식적 반대에 대해 알지 못했던 듯하다. 만약 알았다면 그는 극도의 경악과 절망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물론 오래지 않아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리게 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모른다. 이와 같은 정보의 부족은 단지 사고로 문서들이 유실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든 모든 도움이 끊기다시피 한 상태에서 저 멀리 시골집에 틀어박혀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 그래서 잊으려 애쓰고 또 잊어버린 그런 때에 관해 말문을 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의 결핍은 오히려 마키아벨리에게서 바로 이 시기야말로 인생 역정의 최저점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에게는 그가 투르크에서 장사를 하는 생질 조반니 베르나치(조반니는 니콜로의 큰누나인 프리마베라의 아들임. 1500년 젊은 나이에 누나가 죽자, 외숙부인 니콜로는 생질인 조반니를 돌본 것으로 생각됨-옮긴이)에게 보낸 편지 몇 통이 남아 있다. 내용이 단순소박하고 주로 가내의 일을 담은 이 편지들의 일부는 마키아벨리의 인물 됨됨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느라 미처 돌아볼 틈이 없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무시해 왔던 점들은 이 책의 주를 통해 간단히 밝혀놓는 것으로 충분할 듯싶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갑작스레 이 편지들이 귀중한 것은 다른 사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울러 가엾은 서기장이 불행에 쫓기면서 더욱더 가족적 유대감에서 도피처를 찾으려는 듯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베토리처럼 신분과 운세에서는 위에 있지만 재능에서는 동류라고 그가 스스로 믿는 인물 앞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상투적인 가면, 즉 조롱하는가 하면 곧 거만해지고 이어 냉소적이 되었다가 때로는 궁중의 법복으로 몸을 감싸는 그러한 가면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질과 함께라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불행을 숨기지 않고 아무런 부끄럼 없이 모두 드러내 보였다. 그는 1515년 8월 18일, 생질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좀더 일찍 소식 전하지 않았다고 나나 다른 사람들을 고깝게 생각지는 말기 바란다. 그건 단지 시간이란 놈 때문이니까. 세월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 자신조차도 잊어먹게 만드는구나.)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1월 19일, 그는 다시 이렇게 썼다. (운명은 나에게 가족과 친구외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구나.)
그가 이러한 말들을 쓰고 있을 무렵, 피렌체는 교황 맞을 채비로 온통 시끌벅적한 상태였다. 최근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이 이탈리아의 상황을 또 한번 뒤집어놓았다. 마키아벨 리가 그 귀중한 조언을 로마로 보낸 지 얼마 후, 루이 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젊고 호전적인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밀라노를 되찾아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으나, 레오네의 우유부단함은 오히려 도를 더해 갔다. 이미 처음부터 마키아벨 리가 날카롭게 예측한 것처럼, 교황은 (눈앞의 이익이나 두려움, 또는 그 둘 모두 때문에) 그의 위대한 동향인이 자신 앞에다 펼쳐놓은 간단한 선택을 마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중립을 지킨다는 생각은 밀쳐둔 채, 에스파냐 왕과의 동맹을 갱신함으로써 나쁜 쪽을 택하고 말았다.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로 들어와 마리냐노에서 스위스 군을 격파하자, 교황은 그제서야 자신이 지는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조카인 로렌초 데 메디치와 피렌체 대사인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보좌를 받은 교황이 이중 정책 덕분으로 교황 군이 직접 그 전투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승리를 목격한 레오네는 비록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따랐더라면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지켰을 수도 있었음을 틀립었지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승리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피렌체를 빠져나가 볼로냐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국정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손에 있었다. 줄리아노(교황 레오네의 동생으로, 로렌초는 그의 조카임-옮긴이)는 그보다 나이도 더 많고 혈연적으로도 교황과 더 가까운 사이였지만 야심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국정을 다루는 솜씨가 떨어지는데다 병약해서 (그는 결국 이 때문에 8개월 후인 1516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로렌초는 1515년 5월 스스로 피렌체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첫 작전에서 피옴비노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이제는 시에나와 루카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레오네는 그로 하여금 우르비노를 공략하게 하여, 1516년 6월, 불과 며칠 만에 그곳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10월 8일, 로렌초는 교황의 서임에 의해 우리비노 공으로 책봉되었다. 이 젊은 군주에 대해서는 이미 그의 (술수가 발렌티노에 거의 버금간다)고 말들을 많이 해왔지만, 이 승리의 열기 속에서 말은 더욱 무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노, 2년 전 로렌초의 훌륭한 초상을 그려내었던 마키아벨 리가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줄리아노보다는 바로 그에게서 갑작스레 자신의 신군주상을 찾았다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과거 우르비노에서 침탈적인 보르자의 족적을 따라다닌 바 있었다. 이제 그는 더 많은 정복의 관경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새로운 환상들을 그에게 쏟아붓고, 그 훌륭한 헌사와 함께 (군주론)을 그에게 바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헌사에서, 자신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평소의 당당한 태도로 스스로의 재능에 하당한 자리를 재차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대인께서 앉아계신 높은 자리에서 가끔이나마 이렇듯 낮은 곳으로 눈길을 돌려보신다면, 제가 거대하고도 끊임없는 운명의 심술 아래서 얼마나 부당하게 쓰라림을 당하고 있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당시 프란체스코 베토리는 죽 로렌초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보좌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친구에 가까운 정도였다. 설사 그가 (친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처럼 매일같이 만나고 친분을 쌓는 사람에게 책 한 권 헌정하는 일쯤 돕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책을 바치기는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줄곧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마키아벨리의 불행한 처지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바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깊은 절망에 빠지든가, 아니면 헌정은 했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이 앞의 경우에 못지않는 실망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둘 중 하나였으리라, 만일 그 자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믿을 수 있다면, 그가 로렌초에게 책을 헌정하던 바로 그때, (동시에 누군가가 사냥개 한 쌍을 바쳤는데, 로렌초는 마키아벨리보다 개를 바치는 사람에게 더 고맙다는 얼굴로 더 친절히 대했고, 이에 분개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될지어다.) (군주론)을 로렌초에게 헌정한 때는 1515년 9월보다 이르지 않고, 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1516년 9월보다 늦지도 않다. 이 두 시기 사이인 2월 15일, 그는 생질은 베르나치에게 이렇게 썼다. (난 이제 나 자신에게나 가족이나 친구에게나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구나. 나의 쓰라린 운명이 그렇게 정해 버린 때문이지. 나는 나와 가족 모두의 건강 말고는 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구나. 아니 그것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편이 더 낫겠다. 나는 행운이 나를 찾아줄 때를 기다리고 있다. 오지 않는다면 참을 수밖에.) 같은 해인 1516년 10월, 그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파올로 베토리가 맡긴 보잘것없는 일을 수락하고 갤리선 전함편으로 리보르노에 갔다. 그는 10일에 도착하여 15일까지도 여전히 그곳에 머물렀다. 우리는 그 뒤로부터 다시 베르나치에게 다음의 편지를 쓴 1517년 6월 8일까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불운으로 인해 이처럼 시골에 박혀 있다보니, 어떤 때엔 한달 내내 과연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잊고 살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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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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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5. 지헤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돈
부자청년(The rich young man)
한 청년이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는 그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격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청년을 “그 계명을 다 지켰으니,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예수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고 말했다. 청년을 재산이 많았으므로 이 말을 듣자 풀이 죽어서 ‘베바지에 방귀새듯’ 슬그머니 가버렸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나는 분명히 말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매우 쉽다.”
돈이 인생의 전부인가?
어떤 부자가 풍성한 수확을 하였다. 그는 곡식을 쌓아놓을 큰 창고를 짓고 그 곳에 많은 곡식을 쌓아올렸다. 부자는 지금부터 편히 쉬면서 걱정없이 먹고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이 말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가져가면 쌓여 있는 재산이 누구에게 가겠느냐?’
사람의 생명이 전적으로 재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재산을 우리의 생명보다 더 중하게 여기며 사는 부자 청년과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런데 미국의 극작가인 유진 오닐(Eugine O'Neil, 1888 ~ 1953)은 노밸문학상 수상자(1936년)답게“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확신하나 항상 그 말이 맞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가끔 돈이 인생의 전부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인생 자체를 연극으로 보는 극작가로서 당연한 말이다.
돈은 힘이다(Money is power)
'지식은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고 한다. 하지만 지식이 힘이 아니라 ‘돈이 힘이다(Money is power)’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세계 정치와 힘의 본산인 백안관에서도 부정 거자금 모금이나, 지사 시절 토지거래에 부정이 있느니 해서 돈 때문에 물의 를 빚은 것을 보아도 자명하다. 확실히 돈은 힘이다.‘형제와 자매는 한 배에서 나온 한 핏줄이니 모든 일을 서로 협력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하지만 가끔은 형제끼리 그것도 자기들이 번 돈이 아닌 아버지 유산을 가지고 서로 많이 갖겠다고‘치고 받고’싸우게 하는 힘을 돈은 공급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두텁게 하고, 형과 아우가 화목하면 남편과 아내가 화합하여 집안을 살찌게 하는데 ‘돈의 힘’이 쓰여져야지 그 반대 경우에 쓰여지면 안 된다. 사람이 만들어낸 돈이 천륜을 해치는 힘을 발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돈은 악의 근원인가?
돈은 힘을 가졌건만, 이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돈을 사랑하는 것은 온갖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려고 열망하는 사람이 믿음을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고통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라고 신약성경의 디모데 전서는 가르치고 있다. 돈 자체는 만악의 아니다. 돈 때문에 나쁜 짓을 하거나 믿음을 버리는 행위가 그릇된 것이지 돈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말이다. 사실 돈이 아니라 게으른 것이 만악의 근원이다. ‘한 소쿠리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 팔베게를 하고 누워, 누추한 집에 살더라도 즐거움이 잇다’고 청빈을 몸소 실천한 공자도 사실을 돈을 만힝 벌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런데‘빨리 달린다 해서 경주에서 일등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서 언제나 생활비를 많이 내는 것도 아니며, 총명한 사람이라 해서 언제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고 지혜의 왕 솔로몬이 성경 전도서에서 말하였듯이, 공자 역시 지혜로운 사람이어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고, 돈에 대한 열등의식를 갖고 있었다. 논어 술어편을 보면, 공자는 “부를 구해서 될 일 같으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일을 하라고 해도 할 것이다“라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당시 봉건신분사회 체제에서 천한 직업이었던 마부 노릇을 하더라도 돈만 생기면 하겠다는 청부를 강조하였으니 그는 얼마나 솔직하고 인간적인 사람인가?
돈이 사람을 만드는가?
공자는 재력이 사람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졌다. 외설 시비로 말썽이 많았던 (차타레이 부인의 연인)의 저자 로렌스(D.H.Lowrence.1885~1930)는 1920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돈은 사람을 만든다. 원숭이도 사람으로 둔갑시킬 정도다’라고 썼다. 무지렁이 같은 사람도 ‘한탕’하여 돈을 벌면 신분의 수직상승을 일으키고, 그 주위에는 온갖 시정잡배들이‘떡고물’을 주워먹으려고 구름같이 몰려든다. 그래서 돈만 의지하는 사람은 돈이 떨어지면 하나뿐인 생명이 죽는 것과 같은 ‘수모’를 당하기 때문에 돈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더욱 더 숭배하는 배금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돈이 말해준다
돈이란 누구나 많이 갖고 싶어하지만 마음만 먹느다고 해서 돈을 벌 수는 없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C.Dickens.1812~1870)는 ‘돈이 돈을 낳는다’고 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벼대듯이 ‘돈이 돈을 버는데’, 돈 없고 거기다 배운 것까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 디킨스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우리는 돈이 돈을 번다는 사실과 돈만 가지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디킨스는 돈 버는 실질적 방법은 얼버무리고, 돈을 쓰는 방법만 강조를 하였다. 그런대 누가 돈에 대해 고담준론을 하더라도 돈은 무지무지하게 편리한 것이다. 돈만 가지면 이 세상에 없는‘중의 상투’도 구할 수 있고‘산 호랑이 눈썹’까지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 돈은 암말을 움직이게 한다고 하였다. 일을 하려 하지 않고 주인의 눈치만 보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암말에게 돈을 보여주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입에 거품을 품으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래서 ‘돈이 말해준다’은 말이 생겨났다. 돈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로서 말에 무게를 더해준다는 말이다. 그래서 빈털터리의 천 마디 말보다 돈 많은 사람의 한 마디가 더 권위가 있고 무게가 있어 보인다.
돈은 만국 공용오
돈이란 세계에서 통용되는 공통언어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돈의 유혹 앞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듯 쉽게 넘어간다. 뇌물을 받거나 축제과정에 문제가 있어 공직을 사임하고 집에서 ‘애를 보거나, 할 일이 없어 파리를 잡거나, 코를 후비고 있는 사람’‘큰집(법무부 직영 국립호텔)에서 강제로 수양 중인 사람’의 대부분은 바로 디 ‘돈’으로 인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사람들이다. 솔로몬 왕은“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재물은 사라지는 법이다. 독수리처럼 날개돋쳐 날아가 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지혜를 갖고 행동하지 않으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벌어놓은 돈은 모두 날아기 버리고‘집은 큰 집인데 작은 방 하나만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 어쩔 수 없이 도를 닦게 되는 신세가 되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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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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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2 - 윤삼현
소낙비 그친
아스팔트길
동동
구름이 내려와 떠 흐른다.
구름을 타고
붕붕
하늘 위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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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마을 - 황 베드로
파란 냄새가
매미를 울리고
파란 잎새가
여치를 키우느라
산숲은 온통 파란 지붕
나도
한여름 말매미 되어
파란 마을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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