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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30호
단기 4343. 4. 3 (음력 2. 1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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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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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 질투는 언제나 남을 쏘려다가 자신을 쏜다.(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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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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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뜰래기 벗곡!
‘몬뜰래기 벗곡’은 ‘홀랑 벗고’의 뜻이다. ‘몬뜰래기’는 ‘맨들락’과 함께 표준어 ‘홀랑’에 대응하는 제주도 고장말이다. ‘몬뜰래기’나 ‘맨들락’은 말꼴은 사뭇 달라 보이지만 그 말뿌리는 ‘홈이나 거친 데가 없이 부드럽고 반드럽다’는 뜻을 갖는 제주 고장말 ‘맨들락하다’의 어근 ‘맨들락’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몬뜰래기/맨들락’은 ‘자그마한 물체가 턱지거나 울퉁불퉁한 데가 없고 아주 동그스름하고 매끈한 모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맨들락하게? 정말?” “아암, 다들 맨들락 벗었어. 히야, 그 흰 알궁뎅이들, 둥글둥글한 것이 말여.”(<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 “이 밤 저 밤 자축 간이 되어가니 옷 몬뜰래기 벗어 두고 홑이불에 알몸 팽팽 감고…”(<자청비> 문충성)
‘홀랑’과 대응하는 또다른 고장말로는 ‘솔랑’과 ‘소실랑’을 들 수 있는데, ‘솔랑’은 경남과 전남, ‘소실랑’은 전남 지역에서 쓰는 말이다. ‘솔랑’은 ‘홀랑>솔랑’과 같은 소리의 변화를 겪은 것으로, 고장말에서 ‘ㅎ>ㅅ’과 같은 변화는 흔히 있는 일이다. “셋돈 안 물려고 맡긴 땅 솔랑 날아가지 않았소?”(<토지> 박경리) “불나서 치간이 소실랑 타져부렀다. 저렇고 소실랑 탈 때까장 사램이 안 배기드마(보이더만) 인자 몰레 오네.”(<겨레말큰사전>)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뜨더국’과 ‘마치다’
‘수제비’를 북녘에서는 ‘뜨더국’이라고 한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끓는 물에 조금씩 뜯어 넣어 익힌 음식이 수제비인데, 지난날 여름철에 농촌에서 머슴들이 풀베기할 때 간식으로 먹거나 하루 종일 벤 퇴비용 풀을 밤에 일꾼들과 함께 작두에 썰고 나서 쉴 때 옷소매로 땀을 훔쳐 가며 먹던 음식이다. 지금은 계절에 관계없이 별미로 찾는 음식이 되었다. 북녘에서 ‘뜨더국’이 쓰인 예로는 “낟알을 구해 오는 문제가 화제에 오른 다음날 아침 윤칠녀는 전에 없는 밀가루로 뜨더국을 끓이였고 잣나무 잎을 우려서 차물 대신 내놓았다.”(<백두산 기슭>, 4·15 문학창작단, 문예출판사, 1978년, 141쪽) 등이 있다. 이때 ‘낟알’은 ‘곡식’의 총칭이다.
‘마치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다”에서 보는 것처럼 ‘끝마치다’의 의미로 쓴다. 그러나 북녘에서는 이와 달리 “더러운 것을 묻히여 못쓰게 만들다”의 의미로 쓴다. 문맥에서는 “그러나 그이께서 흙 묻은 손을 비벼 터시며 내려오시자 박창우와 최승보는 나이 생각도 며느리, 딸들 앞이라는 생각도 다 잊어버리고 앞을 다투어 지붕 우로 올라갔다. ‘조심하십시오. 옷 마치겠습니다.’ 김성주 동지께서는 껄껄 웃으시며 어린애같이 덤비는 두 노인에게 말씀하시였다.”(<대지는 푸르다>, 4·15 문학창작단, 문예출판사, 1981년, 618쪽)와 같이 쓰인다.
전수태/고려대 전문교수
써라와 쓰라
‘써라’와 ‘쓰라’는 모두 명령을 나타낸다.‘써라’는 ‘쓰다’의 어간 ‘쓰-’에 어미 ‘-어라’가,‘쓰라’는 ‘-라’가 붙었다는 차이가 있다. 쓰이는 상황도 다르다.‘써라’는 말을 낮춰도 되는 상대에게 사용한다. 구어체에서 주로 쓴다.‘쓰라’는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책 등에서 쓴다. 요즈음에는 ‘쓰라’를 쓸 자리에 친근감의 표시로 ‘써라’를 쓰기도 한다.
새나 짐승의 어린 것을 이르는 말
어린 꿩은 꺼병이이고, 어린 소는 송아지, 어린 말은 망아지, 어린 개는 강아지다. 이렇게 새나 짐승의 새끼들은 또 다른 이름을 가졌다. 솜병아리는 알에서 갓 깬 병아리, 쌀강아지는 털이 짧고 부드러운 강아지, 금승말은 그해에 태어난 말, 능소니는 곰의 새끼, 개호주는 호랑이의 새끼, 동부레기는 뿔이 날 만한 나이의 송아지, 부룩소는 작은 수소다.
유혈목이, 새홀리기
"남산 제 모습 가꾸기 사업이 시작되고 10여 년이 흐르면서 서울 남산의 생태계가 살아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없었던 동물들이 눈에 띄고, 이들을 잡아먹고 사는 다른 동물들도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산식물원 부근에서는 '유혈목이'의 허물이 자주 발견되고, 앞을 스쳐가는 뱀 때문에 깜짝 놀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 외에도 멸종위기 동물인 '새홀리기'.말똥가리 등 맹금류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의 남산 생태계 부활 기사를 보면 잘못 표기한 동물 이름이 몇 개 등장한다. '유혈목이'는 유혈모기 또는 율모기로 표기하는 게 바르다(표준국어사전). 율모기는 알록달록한 꽃뱀을 말한다. 또한 '새홀리기'도 '새호리기'로 적는 게 맞다. 사전을 보면 호리다는 '매력으로 남을 유혹하여 정신을 흐리게 하다'라는 뜻이고 홀리다는 '유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다'란 뜻이어서 의미에 큰 차이가 없지만 새 명칭은 '새호리기'로 쓰게 돼 있다. 동식물의 이름은 전공한 사람이 아니면 자세히 알기 힘들므로 처음 보도 자료 등에서 정확히 표기할 필요가 있고, 사전에 나오는 명칭과 학계에서 쓰는 명칭이 다르다면 협의해 통일해야 할 것이다.
늘그막, 늙으막 / 늑수그레하다, 늙수그레하다
미국의 한 의학협회는 노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젠 늙었어, 그때 그 시절이 좋았지, '늙으막'에 그깟 일은 해서 뭣하나, 배울 만큼 배웠어…"라고 느끼는 것. 믿음과 희망만큼 젊어지고 의심과 절망만큼 늙는다는 말처럼 노화는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미국의 첫 여성 교수였던 애니 스미스 펙은 '늙으막'에 산에 매료돼 교수 자리를 박차고 등산가로 변신, 82세까지 활동했다" "그가 올림픽 통역원을 자청하고 나선 건 '늙으막'에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만들자는 소망 때문이었다"처럼 '늘그막'을 '늙으막'으로 쓰는 사람이 많다.
늙직하다.늙숙하다.늙다리 등과 같이 '늙다'에서 파생된 말이어서 '늙으막'이라고 적기 쉬우나 '늘그막'이 바른 표기다. 어간에 '-이'나 '-음' 이외의 모음으로 시작된 접미사가 붙어 다른 품사로 바뀐 말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혀 적지 않는다는 맞춤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꽤 늙어 보인다'는 뜻의 '늙수그레하다'도 많이 혼동하는 단어 중 하나다. 발음나는 대로 '늑수그레하다' 또는 '늑수구레하다'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늘그막'과 달리 원형을 밝혀 "그 나이치고는 늙수그레한걸"처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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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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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花鬪) - 최정례
슬레이트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뚝 또 뚝 떨어지구요 창에 기울은 오동꽃이 덩달아 지네요 종일 추녀물에 마당이 파이는 소리 나는 차배달 왔다가 아저씨와 화투를 치는데요 아저씨 화투는 건성이고 내 짧은 치마만 쳐다보네요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 나는 시큰둥 풍약이나 하구요 창 밖을 힐끗 보면 오동꽃이 또 하나 떨어지네요 집 생각이 나구요 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 비단과 금침과 황금 지붕을 생각하는데 비는 종일 슬레이트 지붕에 시끄럽구요 팔광을 기다리는데 흑싸리가 기울어 울고 있구요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쉬네요 이매조가 님이란 건 믿을 수가 없구요 아저씨는 늙은 건달이구요 나는 발랑 까진 아가씨구요 한심한 빗소리는 종일 그치지를 않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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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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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黃布) 마르던 날 - 이용한
산 그늘 깊은 이랑 옹골차게 여문 날을 정이 든 가난사를 바늘로 꿴 여울목엔 결 고운 저녁 햇살도 서늘하게 내리더니.
오르고 싶은만큼 낮춰 앉은 마음 가짐 겨울 산바람 휘듯 흰 바늘로 풀던 타래 공글려 막음한 끝으로 수문(水門) 하나 여실까
끝간데 짚어보며 耳順 밖에 물러 앉아 바랜 젊음 감쳐들면 골골이 백자빛 하늘 어머님 비워둔 가슴에 흰달 하나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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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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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현기영의 `순이삼촌
4월의 제주는 화사하다. 그 화사함은 노골적인 아부의 말처럼 나그네의 온몸을 간지럽힌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 불과 한시간 미만을 공중에 떠 있으면 이를 수 있는 섬 제주를 아득한 거리 너머의 땅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닥 자연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좁고도 너른 땅에서 오직 제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광과 물산은 자못 이국정취까지를 풍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때문인지 제주공항에 내려서는 나그네들은 평강공주를 지어미로 맞아들이는 바보 온달처럼 벙글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해 안달이다. 청춘남녀들이 4월을 즐겨 결혼의 철로 삼는 데에는 이 무렵의 제주가 뿜어내는 이런 화사함이 한몫 단단히 거들고 있을 법하다.
하지만 제주의 4월을 꽃 피는 화사함만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함덕 해수욕장의 은빛 모래사장, 유채꽃 만발한 북촌 마을의 옴팡밭, 물소리도 시원한 서귀포 정방폭포, 성산 일출봉의 깎아지른 절벽과 그림 같은 해안선, 아니 제주의 관문인 국제공항부터가 겉으로 보이는 화사함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피 흘리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고 있는 것을.
제주의 4월은 화사함을 구가하는 관광객들의 환성과 상처를 다독이는 내지인들의 한숨이 교차하며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한라산을 훑어내린 바람에 실린 그 기류는 제주 해협을 건너 한반도의 심장부로, 다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불어 불어 간다. 가며 외친다: 내 말 좀 들어줍서; 이 내 원통한 죽음을 제발이지 알아줍서.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에 신고접수된 피해자만도 1만명이 넘으며, 전체적으로 적어도 3만에서 많게는 6만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은 제주 4·3사건. 해방의 환희가 분단의 질곡으로 형질변경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이 사건은 해방공간의 모순과 지향을 축약해 보여줌으로써 민족사적 전형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또한 사건 발생 후 반세기가 가까워지도록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미루어짐으로써 겨레의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48년 4월3일 새벽 1시 제주 전역에서 무장 게릴라들이 경찰 지서와 우익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4·3의 봉홧불을 지펴올린 주체세력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48년 5·10 총선거에 대한 반대를 거사의 취지로 내세웠다. 오랜 이민족의 지배에서 풀려난 겨레가 독립국가의 꼴을 갖추기 전에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외세와 그에 빌붙은 분열주의자들은 반분된 땅덩어리나마 제 몫으로 차지하고자 혈안이 돼 있었다. 따라서 단독 선거 반대라는 4·3의 취지는 당시의 정세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민족적 정당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었다. 4·3은 또한 해방과 더불어 삼팔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에 대한 이 땅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의 표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운형 주도의 건국 준비위원회와 그 후신인 인민공화국이 독립국가 수립의 채비를 착착 다져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싸그리 무시하고 오히려 친일파와 민족분열주의자들을 두둔하고 나선 미군정의 처사는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의 그들의 본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음이다. 게다가 대흉년과 콜레라의 창궐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진 제주에서는 그나마 미곡정책 실패와 관리들의 횡포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포화지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47년 3월1일 제주 읍내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절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해 6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은 미군정 및 경찰과 민중들 사이의 관계를 화해 불능의 차원으로 몰고 감으로써 사실상 4·3의 도화선 노릇을 했다.
1978년에 발표된 현기영(55)씨의 중편 `순이 삼촌'은 30년 동안 묻혀있던 4·3의 진실을 거의 최초로 공론화한 문제적 소설이다. 비록 이 소설로 인해 작가 자신은 보안사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책도 발매 금지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이 작품이 지닌 문학사적·역사적 의의는 그로 인해 더한층 막중해졌다.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맞추어 고향인 제주 서촌 마을에 내려간 `나'를 화자로 내세운 소설은 30년 전 향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통해 4·3의 아픈 역사를 고발하고자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되기도 한 순이(順伊) 삼촌(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부른다)은 30년 전의 학살 현장에 서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인물이지만, 평생 그 사건으로 인한 충격을 떨쳐버리지 못하다가 그예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소설 `순이 삼촌'은 48년 음력 섣달 19일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사건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이날 아침 이 마을 어귀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진사건이 발생하자 군인 2개 소대 병력이 마을로 들이닥쳐 3백여동의 가옥을 불태우고 수백명의 양민을 학살한 것이다. 마을의 남정네들이 군·경에 학살당하거나 토벌대를 피해 입산함으로써 여자만 남게 되어 한동안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기도 한 북촌은 함덕 해수욕장과 지척 거리에 있는 전형적인 제주 마을이다. 검은 돌담과 샛노란 유채꽃, 기와지붕 가녘의 흰색 테두리와 옥빛 바닷물이 현란한 색채의 잔치를 연출하는 이 마을에서 반세기 전의 비명과 유혈을 떠올리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일주도로변의 북촌 초등학교 운동장은 어김없이 그날 마을사람들을 소집한 군대가 학살 대상자를 정하기 위해 군·경 가족을 가려내던 그 장소요, 웃자란 마늘 줄기들로 시퍼런 학교 뒤 옴팡밭은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던 바로 그 학살터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내 상상 속에서 나의 향리는 예나제나 죽은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삼십년 전 군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된 잿더미 모습 그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북촌이 비록 현기영씨의 고향은 아니지만, 소설 속 `나'의 목소리를 작가 현씨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바람에 날려오는 유채꽃의 비릿한 향내에서 죽은 자들의 시취(屍臭)를 맡고, 화산암의 거무튀튀한 색깔에서는 완벽하게 불타버린 반세기 전 제주도를 연상하게 된다고 현씨는 말했다.
“작가로서 내가 4·3에만 매달리는 것은 편협한 지방주의 때문이 아니라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문학적 전략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에 응축되어 있는 민족적·민중적 모순을 통해 보편성에의 요구에 응하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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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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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무지
어느 시골마을의 학교에서 선생이 학생들에게 라마의 이야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조는 것은 라마야나를 낭송할 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 때에는 어른들도 졸곤 했다. 그 이야기는 너무 많이 되풀이되어 들려졌기 때문에, 그 참뜻을 잃어버리고 새로움도 없었다. 선생은 그저 기계적으로 낭송할 뿐이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 선생 또한 졸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암기하고 있었고, 앵무새처럼 지저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 안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장학관이 시찰을 나온 것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났고 선생도 정신을 차렸다. 선생은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수업을 참관하고 있던 장학관이 말했다.
<당신이 라마야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학생들에게 라마에 대해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장학관은 학생들이 부러진 활이야기나 전투 이야기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간단하게 질문을 했다. <학생 여러분, 상카라의 활을 부러뜨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디 누가 말해 보겠습니까?> 한 소년이 손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그건 제가 부러뜨린게 아닙니다. 저는 보름 동안이나 결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것을 부러뜨렸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 이 일을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제일 먼저 추궁을 받는 것은 언제나 저이기 때문이죠>
이 말에 장학관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가 선생 쪽을 돌아보니 선생은 금방이라도 회초리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놈이 그 활을 부러뜨린 범인임이 분명합니다. 이 놈은 우리학교 학생들 중에서 가장 말썽 많고 못된 놈입니다> 선생은 그 소년을 향해 고함쳤다. <만약 네가 한 짓이 아니라면 왜 일어서서 네가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지?> 계속해서 선생이 장학관에게 말했다. <이 학생의 그럴싸한 얘기에 속지 마십시오>
장학관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듯싶어 그냥 교실을 나와 버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화가 나서, 교실에서 있었던 사건 모두를 교장에게 얘기하기 위해 곧장 교장실로 갔다. 그는 교장이 이 일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교장은 장학관에게 이 문제를 더이상 끌고 나가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교장은 말했다.
<누가 그 활을 부러뜨렸든 간에 이 문제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 학교는 두 달만에 처음으로 조용했습니다. 그 전에는 학생들이 많은 비품을 부수고 불사르는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을만큼 말썽을 피웠거든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오늘날 학생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대단히 곤란한 문제를 가져올 뿐입니다. 동맹휴학이나 단식투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장학관은 깜짝 놀랐다. 그는 학교 이사장에게 가서 오늘 일어났던 일을 모두 얘기했다. 교실에서는 라마야나가 가르쳐지고 있었고, 한 학생이 상카라의 활을 부러뜨린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말했고, 선생은 그 학생이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말했으며, 교장은 이 일을 추궁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고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할 우려가 있다면서 누구에게 책임이 있든 이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요청했다는 것 등 모두를 얘기했다. 말을 마친 장학관은 이 일에 대한 이사장의 견해를 물었다. 이사장은 교장의 방침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사장은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범인에 대해서는 신경쓰실 것 없습니다. 누가 그 활을 부러뜨렸든지 이사회에서 수리해 줄 것입니다. 원인을 캐느니보다 고치는게 낫습니다>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는데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자만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인간의 약점이다. 라마야나 가운데 상카라의 활이 부러진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어느 상카라일까>라고 물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나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지를 인정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함정이었다. 이 약점은 자멸적인 것임이 판명되었지만, 우리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 결과 자신들의 삶을 혼란시킨다. 우리가 자신들의 모든 문제에 주는 답은 전부 그 학생에 의해 주어진 답, 선생, 교장, 그리고 이사장에 의해 주어진 답과 같은 것이다. 질문을 이해하지 않고 대답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 이것은 분명한 자기기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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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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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나의 양복 변천사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밴 재킷에 회색 헤링본(역주:삼목잎 모양의 줄무늬를 짜넣은 무늬) 슈트였다. 셔츠는 흰색 버튼다운이었고, 넥타이는 검은색 니트. 아이비 전성 시절의 얘기다. 나는 헤링본이라는 무늬를 굉장히 좋아해서 맨 처음 양복을 산다면 이거여야만 된다고 늘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헤링본 양복이란 건 열여덟 살 난 남자에게는 별로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헤링본을 입으려면 역시 나름대로 연륜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로 구입한 양복은 결혼할 때 산, 은은한 올리브그린의 영국식 스타일 스리피스로, 이것은-본인이 말하긴 좀 뭣하지만-퍽 잘 어울렸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가 길고 지금보다 한결 말랐으며, 얼굴에서는 나름대로 굳은 결의 같은 걸 엿볼 수 있었다. 스물두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취직이란 걸 한 적이 없으므로 세 번째로 양복을 산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스물아홉 때 우연히 응모한 <군조>라는 문예지의 신인상에 당선(이라고 하나?)되어, 시상식에 나가기 위해 일부러 여름 양복을 산 게 세 번째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양복에 대한 동경,집착 같은 게 이미 말끔히 사라졌으므로 되도록이면 값싸고 적당히 질 좋은 것을 사려고 마음먹었었다. 그 당시에는 나도 꽤 잘난 척을 했던 터라, 문예지 신인상 시상식 같은 데 나가기 위해 촐싹대며 비싼 양복 따위를 살까 보냐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건방졌던 것 같다. 하긴 지금도 여전히 건방지긴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한테는 당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양복을 살까 하고 산책 겸 아오야마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자니, 옛날 밴 빌딩에서 도산 바겐세일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아니, 밴도 망해 버렸나,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옛날에 유행하던 스리 버튼의 면 양복을 팔고 있었다. 올리브그린으로 값은 1만 5,000엔, 굉장히 쌌다. 그걸 사가지고 돌아와서 세탁기에다 빨아 구깃구깃하게 만들어 낡은 테니스화를 신고 시상식에 나갔다.
지금 나의 양복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에는 한 벌의 양복밖에 없다. '폴 스튜어트'에서 산 검은 양복뿐이다. 이것은 순전히 관혼상제용으로, 아직 한 번밖에 입지 않았다. 앞으로도 양복을 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귀찮은 옷은 입지 않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값은 비싸지, 활동하긴 불편하지, 금방 스타일이 바뀌고, 드라이 클리닝 비도 든다. 간혹 양복을 입고 나가고 싶기도 하지만 두 시간 정도 걷다 보면, 아아 싫다, 이런 걸 입고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양복은 너무도 부자연스런 옷이다. 넥타이를 맬 필요가 있을 때는 전부 블레이저 코트로 한다. 나는 브룩스 브라더스의 블레이저 코트를 좋아해서 이래저래 여섯 벌이나 사고 말았다. 넥타이를 매는 건 두 달에 한 번 정도니 좀 너무 많이 산 감도 들지만, 옷값이란 게 거의 들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의 사치는 괜찮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더블 블레이저 코트를 입고 호텔 로비에 멍청히 서 있으면 플로어 매니저로 오해받는 일이 있다. 오사카의 로열 호텔에서는 세 번이나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이지 넌덜머리가 났다. "어이, ...실 준비는 다된 거야?"라는 말 따위. 그런 걸 알턱이 없잖은가?
양복 얘기와는 관계없지만, 나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다. 한번은 이케부쿠로의 도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아르바이트 종업원으로 착각을 했는지 높은 분인듯한 아저씨가 "이봐, 넌 왜 명찰을 안 달고 있는 거야!" 하고 야단을 쳤다. 하도 기가 막혀서 나도 얼떨결에 "옛!" 하고 있는 사이에 상대방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도부 백화점에 특별히 원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경험이다. 여담은 그만하고 양복 얘기로 돌아가자. 나 자신은 거의 양복을 입지 않지만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을 보는 건 또 그 나름대로 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역시 연륜이 쌓여야 하고, 철학도 필요할 것이다. 나는 둘 다 없으니까 좀처럼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을 수가 없다. 미국 화장품 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던 고 찰스 렙슨 회장은 일생 동안 다크블루 슈트만 입었다고 한다. 그는 빌 피올라반티라는 디자이너에게 약 200벌의 다크블루 슈트를 만들게 해서 그것을 차례대로 입었다고 하니까, 여기까지 이르면 이미 철학의 경지를 뛰어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에스콰이어>지에 따르면 다크블루라는 색깔은 일종의 권위와 힘을 두드러지게 해서,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열심히 뛰고 있다!'라는 인상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과연 당대에 렙슨 제국을 쌓아 올린 인물답게 색깔 감각이 뛰어났다. 그 얘기를 읽고부터는 거리에 나서면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크블루 슈트를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는 별로 없다. 확실히 다크블루 슈트를 세련되게 입기란 까다로운 일인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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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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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5장
새
4. 기러기
기러기는 인간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은 적으면서도 그 성질이나 특성으로 인해 우리의 삶과 정서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새이다. 황량한 가을 하늘에 무리지어 멀리 날아가는 기러기떼는 보는 이에게 저마다의 감흥과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지나간 이별을 생각하기도 하며, 때로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무상에 젖기도 한다. 이처럼 기러기는 순수한 슬픔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서 시, 시조, 가곡 등에서 그리움과 이별과 고독을 노래할 때 많이 등장하고 있는 소재 중의 하나이다. 기러기는 또한 가을에 오고 봄에 돌아가는 철새로서 가을을 알리는 새인 동시에 소식을 전해 주는 새로도 인식되어 왔으며, 암수의 의가 좋고 사랑이 지극한 새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혼례식 때 신랑이 신부집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목안)을 전하는 습속이 유래되었으며, 혼인예식을 일명 ‘전안례’라고도 한다.「규합총서」에서도 기러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추우면 북으로부터 남형양에 그치고 더우면 남으로부터 북안문에 돌아가니 신이요, 날면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답하니 예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이요,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자되 하나가 순경하고, 낮이 되면 갈대를 머금어 주살(살을 매어서 쏘는 화살)을 피하니 지혜가 있기 때문에 예폐하는 데 쓴다. 이와 같이 기러기는 사랑이 지극한 새, 가을과 같은 애잔한 슬픔을 주는 새,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다.
1) 사랑의 새
기러기는 암수의 의가 좋을 뿐만 아니라 짝이 죽으면 다른 짝을 구하지 않는 정절의 새이다. 이처럼 사랑이 지극하며, 또한 때를 알고 순서가 정연한 새로서 사람의 도리를 안다 하여 기러기 안자에 ‘사람 인’변을 쓰게 된 것이다. 때를 안다는 것은 봄에 갔다가 가을에 돌아오는 철새를 이르는 것이고, 순서가 정연하다는 것은 기러기의 행렬이 항상 선두를 중심으로 하여 ‘A’의 모양으로 가지런히 질서를 지켜 날아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남의 형제를 경칭할 때 기러기의 행렬과 같이 순서가 있고 의가 좋다 하여 안행이라 하고, 순서를 다른 말로 안서라고도 한다. 기러기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와 사랑이 깊고 정절을 지키는 새라 하여 혼례 때 사용된다. 신랑은 신부집에 이르러 혼례의 첫 의식으로 기러기를 바치는데, 원래는 산 기러기를 썼으나 구하기가 힘이 들고 번거로워서 나무로 만든 목기러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절차와 방법은 다음과 같다. 혼례식날 기러기를 든 기럭아비가 신랑의 앞에 서서 가게 되는데, 이 때 기럭아비는 첫 아들을 낳고 후덕하게 사는 사람을 택한다. 일행이 신부의 집에 이르면 신부의 아버지가 문 밖으로 나와서 신랑을 맞이하게 된다. 신랑은 기러기를 받아 머리를 왼쪽으로 가도록 안고 대청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꿇어앉은 뒤 기러기를 상 위에 내려놓으면 시자가 이를 받는다. 그 다음에 신랑이 재배를 하게 되는데, 절이 다 끝나기 전에 신부의 어머니나 여자하님이 기러기를 치마폭에 싸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가 예를 행한 뒤 후행이 돌아올 때 함께 시댁으로 가지고 오게 된다. 이 때의 기러기는 신랑과 신부 두 사람에게는 사랑의 언약을,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해로의 서약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사용된 것이다. 이옥이라는 문인이 지은 연대 미상의 다음 시에서 혼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신랑은 목을 쥐고 신부는 건치를 쥐었으니 그 기러기 날 때까지 두 정 그치지 않으리. 복 있는 손으로 홍사배 들어 낭군에 권하나니 합환주를 첫 번 잔에 아들 낳고 세 번 잔에 오래 사네.
이러한 기러기의 상징성으로 인하여, 홀로 된 외로운 신세를 “짝 잃은 기러기 같다”고 하며, 짝사랑하는 사람을 일컬어 ‘외기러기 짝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기러기는 사랑이 지극한 새이므로, ‘외기러기’라는 말은 하나의 상징어로서 사랑을 잃거나 홀로된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게 된 것이다.
2) 애수의 새
기러기는 까치, 제비 등과 같이 사람과 가까이 사는 새가 아니며, 우리의 실제 생활과는 먼 거리에 있는 새이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기러기만큼 우리에게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새는 드물 것이다. 봄과 여름에는 산과 들, 그리고 집 가까이에 온갖 새가 날아다니며 저마다 지저귀지만, 가을과 겨울철에는 새들의 활동이 둔한데 오직 기러기만이 서릿발치는 창공을 유유히 날아, 보는 이에게 감흥을 주게 된다. 또한 삭막한 겨울의 창공과 자연을 만끽하는 기리기야말로 만인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의 정서와 함께 어우러져 황량한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의 풍경은, 즐거움이나 기쁨보다는 사색적이고 애수에 젖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또한 그 울음소리가 매우 구성지고 처량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무심한 마음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특히 고향을 떠난 나그네, 이별의 슬픔을 가진 이들과 같이 고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감회가 더욱 진할 것이다. 기러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정서는 예로부터 시, 시조, 그림 등에서 풍부하게 표현되어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공감대를 이어 시, 가곡, 그림은 물론 동요나 삽화 등에서도 사색적이며 고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고려, 조선시대에 귀양을 떠난 선비들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고향을 그리는 그들의 적막한 심정을 읊은 시조 중에 기러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조선시대의 문인인 조명리가 지은 시조를 들어 본다.
기러기 다 날아가고 서리는 몇 번 온고 추야 김도길사 객수도 하도하다. 밤중만 만중월색이 고향 본 듯하여라.
또한 기러기는 이별의 슬픔에 노래되었다. 혼자 나는 외기러기를 보고 선인들은 자신의 외로운 처지로 여겼고, 구성지게 우는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더욱 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이정보의 시조에는 이런 이별의 감상이 잘 나타나 있다.
꿈에 임을 보러 베개에 지혀시니 반벽 잔등에 앙금 참도찰사 밤중만 외기러기 소리에 잠 못 이뤄하노라
다음으로는 늙음과 세월의 흐름을 한탄하는 탄로의 의미로 기러기가 많이 쓰이고 있다. 기러기떼가 날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벌써 가을이 오고 또 한 해가 멀지 않아 지나갈 것을 애석히 여기며 선인들은 자신의 늙어감을 탄식하였다. 서릿발 치고 달 밝은 가을밤에 애처롭게 우는 기러기 소리는 세월의 무상함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역시 이정보가 지은 시조 한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은한은 높아지고 기러기 우닐 적에 하룻밤 서릿김에 두 귀밑이 다 세거다. 경리(거울 속)에 백발쇠용을 혼자 슬퍼하노라.
이 외에도 동양화가 화조화에는 기러기와 갈대를 복합한 여안이 그 소재로 많이 쓰이고 있다. 갈대가 바람에 좌우로 쓰러지는 위에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는 모습은, 시정이 넘치고 계절감각을 강렬히 풍기는 사색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러한 여안문양이 고려시대의 동경에 나타나고 있어, 동경의 문양으로는 희귀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조에 오면서는 산수화의 화제와 백자, 목공예품, 자수 등에 이 갈대와 기러기의 운치있는 문양이 널리 쓰이고 있다.
3) 소식의 새
기러기는 예로부터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도 널리 인식되었다. 이는 기러기가 가을에 오고 봄에 돌아가는 철새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멀리 한나라의 고사에서부터이다. 한무제 때 소무라는 사람이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해상 무인처에서 억류되어 10년 간이나 고생을 하였는데, 기러기 다리에 백서를 매어 자기의 소식을 전해 마침내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는 줄거리이다. 이러한 고사와 관련하여 조황이 지은 시조가 있다.
북해상 찬바람에 울고 오는 저 기럭아. 이상코 견빙할 줄 네가 능히 알았고나. 사람이 만물영되어 저 지각이 없을쏘냐.
고전소설「적성의전」에서 성의는 기러기편에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다시 소식을 전했다는 내용이 있으며,「춘향전」의 이별요 중에는 “새벽서리 찬바람에 울다 가는 저 기러기, 한양성내 가거들랑 도련님께 이내 소식 전해주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달거리」라는 단가에서도 기러기를 소식의 새로 노래하고 있다.
“청천에 울고 가는 저 홍안 행여 소식 바랐더니 창망한 구름 밖에 처량한 빈 댓소리뿐이로다."
한편, 민화의 문자도중 ‘신’자를 그린 그림에서도 기러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신’이란 사람 사이의 언약과 규칙을 믿고 지키는 덕목으로, 서신이라 하면 믿음을 전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신자도에는 편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기러기와 청조가 입에 편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문자의 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기러기는 사람이 왕래하기 어려운 곳에 소식을 전해 주는 동물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기러기를 ‘신조’라 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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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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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붕어가 사는 길 - 외물
장주는 집이 가난하여 쌀을 꾸려고 감하후를 찾았다. 감하후가 말했다. "좋소, 내가 장차 읍금*을 거둘 텐데, 그때 3백금을 빌려주면 되겠소?" 장주가 화가 나서 말했다. "제가 어제 여기 올 때 중도에 부르는 자가 있어 돌아다보니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붕어가 있었습니다. 제가 '붕어야, 왜 그러느냐?'하고 물었더니, '저는 동해신의 신하입니다. 당신이 물 몇 되로 나를 살려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좋다. 나는 오와 월의 왕을 찾아 남으로 가는데, 서강*의 물로 너를 환영하도록 말해주겠다. 좋으냐?' 했더니 붕어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이 떨어져 거처할 곳조차 없소. 나는 몇 되의 물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소? 차라리 나를 건어물 가게에서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오.'"
* 읍금 : 자신의 영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 서강 : 양자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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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한번은 쌀을 꾸러 감하후(위문후)를 찾아갔다. 그의 청을 들은 문후는 이렇게 말했다.
"좋소, 이제 세금을 거두는 대로 3백 금을 꾸어주리다. 그러면 되지 않겠소?"
장자는 화가 나서 분연히 말했다.
"저는 어제 이곳에 오는 도중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길바닥의 물구덩이에서 붕어 한 마리가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붕어야, 왜 그러느냐?' '나는 동해신의 신하입니다. 몇 되의 물로 나를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나는 지금 오나라와 월나라의 임금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곳에 당도하면 양자강 물을 범람시켜서 너를 맞이하겠다. 그러면 되겠느냐?' '나는 지금 물이 떨어져서 거처할 곳마저 없는 몸이오. 단지 몇 되의 물만 있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텐데, 그렇게 말을 하는 거요? 차라리 이 다음에 나를 건어물 가게에서나 찾아보시구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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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딘의 줄타기
그의 금발인 머리 색깔에서 유래된 '브론딘'이라는 예명을 갖고 있던 진 프란코이스 그란뎃은 아주 대단한 모험꾼이었다. 1859년 그는 330m가 되는 나이에가라 폭포 양쪽에 8cm 두께의 로프를 수면으로부터 48m 높이에 건 다음 두 손에 쥔 1.2m의 막대기를 균형봉으로 삼아 자전거를 타고 이 줄을 건넜고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이 눈을 가리고 줄을 타기도 하였으며 어떤 날을 손수레를 밀면서 이 줄을 건너기도 하였다. 한번은 그가 장정 한 명을 등에 업고 이 줄을 건너겠다고 하자 수천 명의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이 이것을 구경하려고 모였는데 아무도 브론딘의 등에 업혀 줄을 건너겠다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그의 매니저를 업고 건넜는데 이 당시 그이 매니저가 어찌나 부들부들 떨던지 그 후 브론딘은 다시는 사람을 업고 건너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기를 즐기던 브론딘은 줄 위에서 재주를 넘기도 했으며 폭포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모자에 총을 쏴서 구멍을 내게 한 적도 있었지만,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모험은 프라이팬과 난로와 달걀을 가지고 줄을 탔던 일이다. 그가 그 취사 도구로 줄 한가운데에서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 먹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꿈꾸고 있던 모험은 달빛도 없는 야간에 밝은 불빛을 받고 있는 줄을 건너다 도중에 그 불을 완전히 끈 다음 칠흑같이 어두워진 상태에서 나머지 거리를 줄을 타고 건너는 것이었다.
1860년 9월 8일, 그 당시 미국을 방문중이던 영국 황태자가 참관하고 있는 가운데 이 브론딘의 재주가 펼쳐지게 되었다. 줄을 건너는 브론딘의 양 발목에는 고리가 달린 각반이 매어져 있었으며 그 고리는 줄에 끼워져 있었다. 황태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중간쯤 건너온 브론딘의 몸이 갑자기 줄에서 미끄러지며 물 속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듯하였다. 사람들의 비명 속에 기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관람객들은 모두 그가 줄에서 떨어져 죽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거꾸로 한 브론딘의 몸은 줄에 매달린 채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줄 위에 올라서는 것이 아닌가! 브론딘이 아무도 모르게 준비하고 있던 발목의 고리가 사람들의 눈에 보였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자세를 갖춘 브론딘은 유유히 줄 위를 걸어 캐나다 쪽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아프리카 정글 속의 재즈
음악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갖는다. 가락과 박자와 화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화성은 상당히 진보된 형태의 요소로서 지난 1,000년 사이에 음악에서 중요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락과 박자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생겼는데 그 시기는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믿어진다(약 5,000년 전). 인간 문화의 역사에 대해, 아니면 최소한 초기의 문화 형태에 대해 알고 싶으면 미개인들의 문명화 과정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세기말에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발견한 과학자들은 원시 문화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다. 음악에 있어 음의 높낮이는 단조롭다 싶을 만큼 간단하였다. 간단한 몇 개의 음률이 계속 바뀌어 가면서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박자는 현재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리만큼 발전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이 미개인들과 그들의 어린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2박자나 3박자를 동시에 잘 맞추었으며 3박자와 4박자도 역시 잘 맞추었다(3박이나 4박은 더욱 어려운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박자와 강약을 다루는 음악적 변화와 미묘함은 현대 재즈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 있다. 미국 흑인들이 재즈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절묘하고 능숙하게 박자를 다룰 줄 아는 성향은 자기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며 오랜 시간 동안 잠자고 있던 이 성향이 재즈 음악의 풍부한 박자 감각을 꽃피우려고 긴 잠을 깬 것이다. 아프리카 미개인들의 음악에서와 같이 재즈 음악에서도 타악기가 주도적 역할을 맡고 있다.
400명의 남편을 두었던 카헤나 여왕
베르베르 족에게는 여성 해방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유명한 여왕 카헤나는 이미 오래 전 400명의 남편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카헤나 여왕의 적수가 될 수 있는 테레사 본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국 여인이 있었다. 1922년 12월 19일, 25세의 이 여인은 적합한 이혼 절차를 밟지 않고 재혼을 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의 신원을 확인하던 경찰은 이 여인이 그 동안 수많은 중혼을 해오고 있다는 증거를 잡게 되었다. 결국 이 여인의 자백에 의하여 5년 전 첫번째 남편과 이혼한 이래 영국, 독일, 아프리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려 61명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 달에 한 명의 남편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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