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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궁궐의 뒷간 - 홍순민 (가톨릭대 강사)
서울의 궁궐들
왕조사회에서 제도를 완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공간적 터전이 되는 도읍이 있어야 하고, 도읍이 있어야 하고, 도읍이 제 형태를 갖추려면 도성과 궁성으로 보호되는 궁궐이 있어야 한다. 궁궐은 일차적으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자 주권자인 국왕의 주거 공간이었다. 그러나 궁궐의 더 큰 의미는 그곳이 국왕의 사적인 주거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거의 모든 공적인 활동, 통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데 있다. 궁궐은 '왕의 존엄을 드러내고 정령을 내는 곳'이었다. 따라서 궁궐은 그 당시 최고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나라의 큰 힘을 기울여 지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왕이 사는 곳이라고 하여 무턱대고 크고 화려하게 짓지는 않았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왕조체제에서 모든 정치, 행정 행위의 최종 결정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 귀결되었다. 법제적으로는 관료들은 국왕의 결정에 따라 위임된 업무를 분장하는 형식이었다. 국왕이 궁궐을 벗어나는 일은 전시하의 비상적인 행차라든가, 능행, 종묘나 왕실 사당을 참배하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매우 드물었다. 따라서 국왕의 정상적인 통치 행위는 대부분 궁궐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궁궐은 국왕만이 아니라 국왕을 만나서 정치적인 논의를 하고, 집행 결과를 검토하고 보고하는 관원들의 활동 공간이요, 국가의 최고 관부였다.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자 법궁은 경복궁이었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년) 9월에 완공되어, 그 해 말에 태조를 비롯한 왕실이 그곳으로 입어하였다. 그 기간은 새 왕조 조선의 기틀을 잡기 위한 기초 작업이 진행된 시기였고, 경복궁 입어는 그 작업이 일단락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 제2의 궁궐이자, 법궁 경복궁에 대하여 이궁으로 조성된 궁궐이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은 1404년(태종4년) 10월 태종이 영건을 결정하여 이듬해 10월 완공되었다. 창경궁은 1482년(성종13년) 12월에 수강궁을 수리하라고 성종이 명을 내림으로써 영건도기 시작하여 1490년(성종 15년(\) 9월에 영건공사가 일단 끝났다. 수강궁은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으로 나앉은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다. 창경궁은 독립된 궁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창덕궁에 붙어 하나의 궁역을 이루면서 창덕궁에 부족한 주거 생활 기능을 보완하는 구실을 하였다. 성종 대에 창경궁이 조영됨으로써 경복궁이 법궁이 되고 창덕궁 및 창경궁이 이궁이 되는 법궁-이궁 양월체제가 완성되었다. 이후 임진왜란까지 약 100여 년간 이러한 양궐체제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서울에 들어오면서 왜군에 의해 궁궐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 1604년(선조 37년)에 종묘와 함께 궁궐을 중건하는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선조 말년에는 인력과 물자 부족으로 중건 사업이 지지부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중단 상태에 있는 공사를 다시 추진하여 즉위년인 1608년 5월말에는 종묘가 완공되었고, 1609년 말에는 창덕궁이 거의 완공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 입어를 꺼리다가 결국 1615년(광해군 7년) 4월에 가서야 창덕궁으로 입어하였고, 인접한 창경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광해군은 그 밖에도 경덕궁과 인경궁 등 새 궁궐을 영건하는 사업을 크게 벌였다. 인조는 반정의 결과 경운궁에서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인조 연간에는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이 다수 소실되었던 바, 이 두 궁궐을 보수하는 데 광해군 때에 영건한 인경궁의 자재를 헐어다 사용하였다. 이로써 1647년(인조 25년) 무렵에는 경복궁은 빈 궁궐터로 남고 창덕궁 및 창경궁이 하나의 궁역 곧 동궐로 인식되면서 법궁이 되고, 서궐, 곧 경덕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양궐체제가 정립되어 이후 조선후기 내내 유지되었다. 한편 경덕궁은 영조 연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종이 즉위한 후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신정황후의 명으로 1865년(고종 2년) 4월에 경복궁 중건이 발의되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경복궁 중건 공사는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주도하여 진척되었고, 1868년(고종 5년) 7월 고종은 경복궁으로 입어하였다. 중건된 경복궁은 과거의 법궁 지위를 되찾게 되었고, 동궐 곧 창덕궁 및 창경궁이 이궁이 되는 임란 이전의 양궐체제로 환원하였으며 서궐-경희궁은 국왕이 입어하지 않는 빈궁궐이 되었다.
궁궐에서 하는 일
궁궐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1908년 무렵 작성된 <궁궐지>라는 자료에 따르면 당시 확인되는 경복궁의 총 규모가 9,240여 간,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한 동궐의 건물 규모는 총 6,200여 간에 달했다. 조선시대 규모가 큰 양반 집을 흔히 99간 집이라고 하는 것과 대조해 보면 궁궐은 그런 집이 어림잡아 50-70여 채가 들어서 있는 셈이다. 건물 규모로만 보면 꽤 큰 마을을 넘어 작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궁궐의 건물들은 물론 일정한 제도에 따라 질서 있게 자리잡고 있다. 궁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제도와 질서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궁궐은 지엄한 곳이기 때문에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도록 궁성이라고 하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담에는 요소 요소에 문이 나 있다. 그 중에 정문은 대개 남쪽으로 나 있고, 그 정문 앞에는 나라의 주요 관청들이 늘어서 있게 마련이다. 이곳을 궐외각사라 한다. 궁성문을 들어서서 외부에서 들어온 신하들과 왕이 만나는 공간을 외전이라 한다. 외전의 중심을 이루며 공식 행사를 치르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법전이라 하며, 왕과 신하들이 공식 회의를 하는 건물, 다시 말하자면 왕의 공식적인 집무실을 편전이라 한다. 외전에서 더 궁궐 내부로 들어가 배치되어 있는, 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공간이 내전이다. 내전에는 왕이 일상적으로 기거하며 신하들을 개별적으로 만나는 건물이 있는데 이를 왕의 연거지소라 한다.
내전에서도 가장 깊은 곳, 궁궐의 가장 은밀한 중심 지역에는 왕비가 기거하며 내명부를 다스리는 등 공식 업무를 보는 건물이 있는데 이를 중전 또는 중궁전이라 한다. 궁궐 정문과 외전, 내전은 대개는 궁궐의 중심 축에 배치되어 있다. 내전과 외전의 주변, 주로 서편에는 궁궐에 들어와 왕을 자주 만나면서 활동하는 관원들의 공간이 있는데 이를 궐내각사라고 한다. 궐내각사에는 대신들이 왕을 만나거나 만나고 나와서 모이는 건물인 빈청,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머무는 대청,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인사 업무를 처리하는 정청, 왕과 함께 경연을 하는 등 학문 적인 자문을 하는 홍문관, 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승정원, 왕실 문서 및 일반서적을 관리하고 학문 연구, 감찰 기능 등을 가지고 있던 규장각,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예문관, 역사를 기록하는 춘추관, 왕과 왕실의 약을 조제하는 내의원, 그리고 사옹원을 비롯하여 왕실과 궁궐의 각종 살림을 맡아보는 여러 관청들, 내병조를 비롯하여 왕과 궁궐을 호위하는 각종 군사관계 관청 등 수많은 관청들이 있다. 내전 및 외전의 동쪽에는 세자의 집이 배치되는데 그래서 이를 동궁, 또는 춘궁이라고 한다. 동궁 부근에는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세자를 호위하는 자익위사 등이 배치된다. 내전 뒤편으로는 국왕의 가족과 그들을 시중드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주거 공간이며, 그 뒤에는 금원, 후원, 북원 등으로 불렀던 휴식을 위한 원유가 배치된다.
수많은 궁궐의 건물들은 제각각 기 기능과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규모가 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 품격이랄까 위상도 달리하였다. 각 건물들은 대개 이름을 갖는데 이름 끝에는 대체로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 등의 글자를 붙였다. 전은 왕이나 왕비 또는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이 사는 집에 붙는 이름이고, 그 다음 단계의 건물이 당이다. 이를테면 왕은 당에도 기거하지만 세자는 전에는 기거할 수 없었다. 합이나 각은 전과 당보다 격이 한 층 떨어지는 건물로서 그것을 보조하는 경우가 많다. 재나 헌은 대체로 왕실 가족의 주거 공간이거나, 관원들의 업무 공간에 붙는 이름이다. 루는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높이 지은 마루이거나 혹은 이층집인 경우 이층을 가리킨다. 이층을 루라 할 때 일층은 각이라고 따로 이름이 붙는다. 정은 경치좋은 곳에 지은 작은 휴식 공간이다. '전당합각재헌루정'이 엄격한 법칙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 순서대로 건물들의 위산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궁궐 건물들 가운데는 '전당합각재헌루정'처럼 번듯한 이름을 갖는 건물들 외에도 이름이 없는 부속 건물들도 적지 않았고, 본채를 이루는 주요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이나 건물과 건물을 잇는 통로인 월랑과 복도, 궁궐을 나누는 담장에 있는 문들, 또 창고와 같은 건물들이 많았다. 또 연못, 섬, 개울, 다리, 수문, 대, 단, 샘, 내, 논, 우물, 장독대 등 건조물들도 다양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전간들과 각종 건조물들은 궁궐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삶과 활동이 매우 다채로웠음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 현상인 배설을 위한 시설, 뒷간을 살펴보는 것은 궁궐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궁궐의 뒷간
"루브르나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에 들어오기 전에 볼일을 미리 보도록 되어 있었다. 정원에 늘어서 있던 수많은 조각들은 소변을 보는 데 적합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폴 임이라는 호사가적인 취미를 갖고 있는 미국인 심리학자의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프랑스 왕이나 왕족들은 똥오줌을 누지 않고 살았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여전히 지울 수 없다. 이에 대해 와타히키 히로시라는 일본인 교사는 다음과 같이 보충 설명을 해 준다.
"한때 베르사이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17세기 중엽부터 상류계급의 침실에는 대소변을 담는 병과 목욕용 통을 두었다. 지금도 호텔 등에서 욕조와 변기가 나란히 있는 구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두 이야기를 종합 정리하면 결국 프랑스의 궁전에는 독립 건물이나 혹은 건물의 일부 시설물로서는 화장실이 설치되지 않았고, 병이나 통과 같은 이동용 변기를 사용하였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당시 일반 가정에도 화장실이 없어서 집집마다 병에 오물을 모아 아침이 되면 창에서 도로에 쏟아 버렸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한 휴대품이 파라솔이고, 길바닥의 똥들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해서 개발된 신발이 하이힐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공중 화장실이 단 하나밖에 없어서 그 앞에는 언제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하니 프랑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화장실에 인색한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우리 나라 궁궐에도 화장실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꽤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우리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민가에도 뒷간은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는 속담이 있듯이 평민 주택에서는 뒷간을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마당가에 지었다. 냄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또 위생상의 필요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터가 널찍하고 남녀간의 내외 구별이 상대적으로 덜 엄격한 평민 주택에서는 그럴 수 있었지만, 남녀의 활동 공간이 엄격히 구별되어 있는 양반 주택, 특히 도회지의 양반 주택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양반 주택에서는 여성 전용의 안 뒷간과 남성 전용의 바깥 뒷간을 따로 두었다. 안 뒷간은 주로 안채에서 떨어진 눈에 안 띄는 곳, 안 행랑의 일부나 또는 독립된 건물로 두었고, 바깥 뒷간은 사랑체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 행랑이나 대문밖에 따로 두었다. 바깥 뒷간은 주인과 손님이 쓰는 뒷간과 아랫사람들이 쓰는 뒷간으로 구분하여 두 개를 두기도 하였다.
개인집들이 이럴진대 우리 나라 궁궐에 뒷간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아마 이는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고위 신분의 인물들은 뒷간에 가지 않고 이동식 변기를 썼던 사실이 와전된 결과일 것이다. 궁중 용어로 똥을 '매우'라고 한다. 한자로는 매화라고 쓰고, 궁궐에서는 용어를 특수하게 쓰는 예에 따라 '매우'라고 발음한다. 왕의 이동식 변기를 '매우틀'이라고 한다. 매우틀은 세 쪽은 막히고 한 쪽은 터져 있는 'ㄷ'자 모양의 나무로 된 의자식 좌변기이다. 앉는 부분은 빨간 우단으로 덮였고, 그 틀 아래에 구리로 된 그릇을 두어 이곳에 대소변을 받게 되어 있었다. 매우틀은 복이나인이 담당한다. 복이나인이 미리 매우틀 속에 매추라 하여 여물을 잘게 썬 것을 뿌려서 가져오면 그 위에 용변을 본다. 왕의 측근 나인이 그 위에 다시 매추를 뿌리고 덮어서 가져간다. 필요한 경우에는 내의원으로 가져가 검사함으로써 왕의 건강을 살피는 자료로 삼았다.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 일을 제 손으로 하지 않는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왕은 이렇듯 기본 생리 현상조차도 아랫사람들의 시중을 받아 해결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뒷간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궁궐에는 왕과 왕비만 사는 것이 아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기거하였고, 또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며 활동했다. 궁궐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왕이나 왕비, 또는 전 왕비 정도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매우틀을 썼을 리는 없다. 또 매우틀을 쓰는 경우라 하더라도 매우틀에 용변을 본 다음에는 그 대소변을 처리할 곳이 있어야 했다. 만약 그 많은 사람이 활동하는 공간에 뒷간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데서나 적당히 알아서 용변을 본다면 얼마나 더럽고 냄새는 또 어떠하겠는가. 또 똥 마려운 당사자의 근심은 어떠하겠는가. 일단 으슥한 곳에 배설을 하고 나면 시원하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매번 그래야 한다면 그 고통은 얼마나 심했겠는가. 낯선 거리, 건물들마다 뒷간에 자물쇠를 꼭꼭 걸어 잠가 놓은 곳에서 뒤가 급할 때의 그 근심 고통을 생각해 보라. 절에 가 보면 뒷간에 '해우소'라는 편액을 달아 놓은 곳이 많다. 근심을 해결하는 곳, 참 절묘한 이름이다.
우리말에 뒷간을 가리키는 말은 참 많다. 요즈음에는 변소라는 말도 잘 쓰지 않고 주로 화장실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서각, 정방, 청측, 청방, 청혼, 측간, 측실, 측청, 혼측, 혼헌, 회치실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궁궐 내인들은 '측간'외에 곁말로 '급한 데', '부정한 데', '작은 집'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측간이 무척 멀어서 젊은 내인들은 혼자 가지 못하고 둘씩 셋씩 모여서 같이 갔다는 것이다. 내인들이 뒷간을 가리키는 저희들만의 용어를 쓰고, 그 사용 행태에 어떤 관행이 형성되어 있었다면 이는 궁궐에 뒷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궁궐에 뒷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를 살펴보자. 앞서 말한 <궁궐지>와 함께 작성된, 크고 상세한 도면인 <북궐도형>과 <동궐도형>은 그 당시 궁궐의 모습을 좀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경복궁에는 뒷간이 28군데나 있었으며, 그 규모를 모두 합하면 51.5간이었다. 동궐에는 21군데, 36간 정도의 뒷간이 있었다. 뒷간은 대개 1간이었으나, 큰 것은 7간에 달했다. 한 간 짜리 집이란 네 개의 기둥으로 된 가장 작은 건물이다. 주택으로서 가장 작은 것을 흔히 '초가 삼간'이라 하는데 비해 뒷간이 7간이라면 화장실치고는 제법 큰 건물이다. 궁궐의 뒷간은 뚝 떨어진 별채로 짓거나, 본채를 둘러싸고 있는 행각의 일부에 설치하였다. 행각의 일부라 하더라도 본채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 행각의 출입문 가까이에 있어 될 수 있는 한 외부와 잘 통하는 곳에 배치하였다. 전체 궁궐 배치 상에서 볼 때 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내전이나 왕이 공식적으로 신료들을 만나는 외전, 그리고 왕실 가족이 기거하는 주거공간 등 궁궐의 중심부에는 뒷간이 없다. 이는 왕과 왕비, 또는 왕실 가족들은 용변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매우틀이나 요강 등 이동식 변기를 사용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뒷간은 주로 외곽에 배치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관원들이나 군인, 궁녀, 내시, 노비 등 궁궐에서 기거하거나 오래 머물면서 실무를 보는 사람들의 활동 공간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구역에 뒷간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단지 궁궐에 잠시 나들었던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오래 머무르며 먹고 배설하였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궁궐은 그렇게 정치와 행정, 생활과 문화의 현장이었다.
오늘날 서울의 궁궐에는 뒷간이 없다. 뒷간이 아닌 화장실, 수세식 공중 화장실이 한 궁궐에 두어 서너 곳씩 있을 뿐이다. 궁궐의 요소요소에 뒷간이 없다는 것은 궁궐에 더 이상 사람이 살며 활동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궁궐에는 비단 뒷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옛 건물들도 대부분 없어졌다. 근년에 복원한 것까지 모두 합쳐 보았자 원래 건물 간수의 5분의 1이나 4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건물이 없어진 빈터에는 잔디밭만 널찍하다. 이런 궁궐에서 궁궐의 본 모습, 건물과 건물의 관계, 그곳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의 실상, 그 시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본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지금 궁궐은 정치와 행정, 생활과 문화의 현장이 아니라 다만 구경거리 혹은 공원 정도로 전락했다. 그런 궁궐을 구경하면서 '옛날에는 궁궐에 화장실이 없었다'고 알고 있는 한 그 옛날의 궁궐,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기이하고 저급한 문화로 인식될 뿐이다. 궁궐의 뒷간을 찾는 작업은 호사가적인 기벽이 아니다. 궁궐은 살아 있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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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3장
꽃
4. 사군자
1) 사군자의 의미와 기원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많은 꽃과 식물 중에서 특별히 이들을 선택하여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의 인품에 비유, 군자라 하였다. 그 까닭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이 높은 기상과 품격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매화는 이른 봄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며, 난초는 깊은 산 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국화는 늦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며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모든 식물이 잎을 떨어뜨린 추운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은 간직하고 있다. 매, 난, 국, 죽의 순서는 각각이 꽃피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모든 식물이 두려워하는 추위를 이겨 찬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꽃을 피우고 푸르름을 더하는 매화, 국화, 대나무와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고히 향기를 뿜어내는 난의 기상을 위한 것이다. 특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군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던 유교사회에서는 고난과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사군자가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즉 사군자를 통하여 변함없는 뜻과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고아하고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군자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자’는 중국의 회화에서 성립된 화목이다. 사군자라는 총칭으로 일컬어지기 이전부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시문과 그림에서 각각의 기상을 취해 즐겨 다루어졌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 묵화의 소재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앞선 시기에 시문의 소재로 등장하였다. 최초로 대나무가「시경」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으며, 대나무와 함께 매, 난, 국은 화조화의 일부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960-1126년) 때에 와서 여러 가지 고사나 시문을 통해 이들 네 식물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상징성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대부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화목으로 등장하였다. 남송(1127-1279년) 말기부터 원대(1279-1368년) 초기에는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 은둔생활을 하는 한족 문인들 사이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크게 유행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의 난초로,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 뒤 명대(1368-1644년)에 들어와서 이들 매, 난, 국, 죽 특유의 장점을 유교적 덕목과 관련시켜 칭송하는 문화적 전통이 수립되어,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의 품격이 높이 평가되어 고려시대부터 시문과 회화, 공예품 등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회화에서는 고려시대에 송, 원 회화의 영향으로 왕공사대부 사이에 묵죽, 묵란, 묵매가 널리 그려졌다. 조선초기에도 사군자가 문인들 사이에 계속 사랑을 받아 왔고 조선 중기부터 독자적인 양상을 수립, 후기에 와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비록 사군자라는 개념이 회화, 그 중에서도 문인화의 화목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동양 사상의 일맥으로서 파악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여러 예술 분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꽃, 식물 자체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 즉 지조와 절개, 고아함과 품격을 높이 산 것이다. 이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각각에 담긴 의미와 상징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2) 매화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 땅 위에 고운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 이 매화는 백화가 미처 피기 전에 제일 먼저 피어나므로 ‘화형’ 또는 ‘화괴’라는 별칭으로 불리어 왔다. 또한 봄을 가장 먼저 전해 준다고 하여 일지춘색, 철간선춘, 한향철간이라 하였고, 춘한 속에서 홀로 핀 매화의 고고한 자태는 선비의 곧은 지조와 절개로 즐겨 비유되고 있다. 이처럼 맑은 향기와 아울러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매화의 특징이다. 선비들은 매화의 곧고 맑은 성품을 노래한 글을 지어 일편단심으로 사무하는 임에게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 때 임은 나라 또는 임금일 수도 있고 자신의 굳은 뜻일 수도 있다. 특히 청초한 자태와 향기로 인해 매화는 아름다운 여인에 즐겨 비유되었다. 옛 기생들의 이름에 유독 매화 ‘매’자가 많이 사용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매화가 아름다움과 함께 정절을 상징하였으므로, 여인들은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시문한 비녀인 매죽잠을 즐겨 착용하였다. 이와 같은 매화의 상징성으로 인해 눈이 덮인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나서는 심매가 문인과 풍류객들의 연중행사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범석호는「매보」에서 천하에 으뜸가는 꽃이라 칭송하였고, 소동파는 얼음 같은 맑은 혼과 구슬처럼 깨끗한 골격이라 평하였다. 강희안은「양화소록」의 화목9등품론에서 국화, 대나무, 연꽃과 함께 1등으로 분류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의 화품평론에서 강산의 정신이 깃들고 태고의 모습이 드러난 꽃이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나타나고 있는 꽃 중에서 매화는 도화(복숭아꽃)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는 매화는 우리 선인들의 드높은 기개와 굽힐 줄 모르는 지조의 상징으로 애창되어 왔고, 다 썩은 고목에서도 봄기운이 돌면 어김없이 맑은 꽃을 피우는 신의의 벗으로 노래되어 왔다.
백설이 자자진 곳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색의 이 시에서는 추이하는 계절과 더불어 걷잡지 못할 애상에 잠긴 마음으로 매화를 찾는 지사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매화는 달과 함께 자주 등장하고 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청초한 자태와 맑은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자연적인 조화와 운치를 한껏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생활을 한 송나라 시인 임포 이후로 매화와 달의 짝은 더욱 애호되고 있다. 실로 달과 매화는 예로부터 은일처사들의 아낌을 받아 온 고아함의 화신이요, 정절의 상징인 자연이었다. 달을 벗한 매화는 그림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수양매월 이제청절’이라는 화제가 적힌 윤리문자도에는 은나라의 은일처사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달과 매화를 벗삼아 은둔의 일생을 보냈다는 고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매화 그림, 묵매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매화의 꽃송이가 중국의 그림처럼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재 전문위원 허영환 선생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 성긴 것, 어리숙한 것, 완벽하지 않은 것, 기교를 부리지 않은 것 등을 좋아한 성격 탓’인 것 같기도 하고, ‘한국미술의 바탕을 흐르는 자연주의의 발로’인 것 같기도 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민족성은 빽빽한 것, 완전무결한 것, 아주 예쁜 것, 되도록 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묵매화가들이 어지럽게 줄기와 가지를 그리고 수십, 수백 꽃송이를 화면 가득히 그리면서 웅장, 완벽, 섬세를 추구할 때, 우리나라의 묵매화가들은 그러한 화법과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미술의 기조를 지키면서 여백의 미와 단순의 미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는 비록 묵매화가 사군자의 하나로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민족성에 맞게 완전히 소화, 재창조되어 한 단계 높은 미적 수준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파교심매도(擺橋尋梅圖, 심사정, 비단에 엷은 색, 115.0×50.5cm, 176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 난초
'난은 비록 한 송이가 피기는 하나 그 향기는 실내에 가득 차서 사람을 감싸고 열흘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남 사람들은 난을 향조로 삼는다.' 도곡이 지은「청이록」에 나타난 구절이다. 공자는 난의 향기를 왕자의 향이라 하였다. 특히 동양란은 서양란처럼 색채가 화려하지 않고 꽃도 작으나 담백한 색과 은근한 향기가 그 생명이다. 따라서 난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하는 것은 향이며 고귀함이다.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아한 자태로 은은한 향을 내뿜는 난은 지조 높은 선비와 절개 있는 여인에 비유되고 있다. 예로부터 ‘유인풍치정여란’, ‘난화사미인’, ‘유란여정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난은 유인, 미인, 정녀 등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난의 독특한 향기를 취하여 유곡가인, 미인향, 군자향, 공곡유향, 군자가패, 왕자지향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으며, 난유유자풍운, 난령인수계라 하면서 난의 고아함을 칭송하였다. 난의 향과 고귀함에 관한 찬미는 기원전 공자시대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있지만,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자서전적인 장편 서사시「이소」에서 그가 난을 즐겨 넓은 지역에 가득 심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연관시킨 난초의 상징성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이제현은「역옹패설」에서 “일찍이 여항에 객으로 머물러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난을 분에 심어서 선물로 주었다. 이것을 서안 위에 놓아두었는데, 한참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는 그 난이 향기로운 줄 몰랐다가 밤이 깊어 고요히 않았노라니 달은 창 앞에 휘영청 밝고 그 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하여 맑고 그윽한 향기를 사랑할 만하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음을 느꼈다”라고 하였다. 고려말의 이거인은 난을 재배한 것으로 유명하고, 조선초의 강희안은 우리나라 자생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난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기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묵란화로는 조선초 강세황의「필란도」가 있고, 김정희를 비롯하여 이하응, 김응원, 민영익 등은 묵란화의 대가들이다. 난에 관한 시를 남긴 이로는 김부식, 김극기, 이규보,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최경찬, 신위 등이 있다. 난을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한다. 사군자를 계절 순서로 말하면 매, 난, 국, 죽이지만 사군자화를 배울 때는 난, 국, 매, 죽의 순으로 한다. 그것은 난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많아 서화동원의 사상과 걸맞기 때문인 듯하다. 묵죽화가 직선미를, 묵매화가 굴곡미를 보여준다면 묵란화는 곡선미를 보여주는 수묵화이다. 난초그림의 대명사라 불릴 수 있는 완당 김정희의 난화론은 독특하다. 그는 글씨의 정신과 그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난초 그리는 법은 예사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가 있은 연후에 얻게 된다. 또 난초그림의 법은 화법이라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일에 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심의를 존중하고 품격을 높이 보는 문인화의 묘미 설파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청나라의 왕지원은, “난의 성격은 천연고결하여 마치 대가의 주부나 명문의 열녀 같아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 만약 속필로 그려 그 청고아치를 떨어뜨린다면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한편, 정몽주의 초명이 몽란이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난분을 깨뜨린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난은 또한 자손의 번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경기도 지방에서는 난초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구가 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지고, 충청북도 지방에서는 꿈에 난초가 대나무 위에 나면 자손이 번창하고 난초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진다.
묵란 - 강세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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