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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18호
단기 4343. 3. 14 (음력 1. 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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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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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거창국제연극제 세계초연희곡 공모
거창국제연극제는 세계초연희곡 작품 발굴을 통한 창작극의 활성화와 공연의 다양성을 위해 제22회 거창국제연극제 세계초연희곡을 공모합니다. 참신하고 역량 있는 작가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o 주최 : (사)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 o 주관 : 거창국제연극제 집행위원회 o 응모자격 : 기성작가 및 신인작가 구분 없이 초연작품에 한함 o 제출서류 : 공모신청서 1부, 창작희곡 원고 4부(홈페이지 참조) - 소재 및 장르 제한 없음 - 90분 내외로 공연 가능한 작품 o 공모기간 : 2010년 2월 16일 ~ 7월 10일까지(7월 10일 소인 유효) o 제출방법 : 우편 및 이메일(2가지 모두 보내야함) - 우편 : (670-853)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50-3 (사)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 희곡공모 담당자 - 이메일 : kift-1989@hanmail.net o 발표 및 시상식 : 2010년 8월 15일(예정), 개별통보 o 시상장소 : 거창 수승대 내 축제극장 o 시상내역 : 대상 1편(1,000만원) o 심사위원 : 연극계 권위 있는 연출가 3명 o 기타사항 - 제출한 원고 및 서류는 일체 반환하지 않음 - 타 대회에서 입상 또는 이미 공개된 작품이거나 표절임이 확인될 경우 무효 처리됨 - 선정된 작품의 저작권은 당선일로부터 5년간 (사)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에 귀속됨 - 선정된 작품은 전문 극단과 연계해 제23회 거창국제연극제 기간 중 공연됨 - 선정된 작품을 모아 3년에 한 번 희곡집 발행 o 문의 (사)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055-943-4152~3), www.kif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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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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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사랑, 평화와 유머를 예금합시다. 긍정적이고 유쾌한 생각들로 마음을 채우면 마음의 은행은 더 많은 이자를 돌려줍니다."
-'머피의 법칙'창시자로 유명한 조셉 머피가 쓴 자기계발서 <조셉 머피 마음 수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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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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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유행어
북한의 청소년·대학생들도 멋내기를 좋아한다. 이발소에 가면 머리 모양을 찍은 사진에서 취향대로 하나를 고른다. 이때 남학생들은 ‘구름머리’, ‘갈매기머리’, ‘송이머리’ 가운데 하나를 택할 것이다. 여자들은 여름에는 ‘나리꽃머리’, ‘폭포머리’, ‘단발머리’, 겨울에는 ‘옥류머리’, ‘들국화머리’, ‘함박꽃머리’, ‘청춘머리’, ‘파도머리’ 가운데 하나로 단장할 것이다. 여성들은 외출할 때 가슴띠(브래지어)를 하고 달린옷(원피스)을 입고 얼굴에는 살결물(스킨로션)을 바를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독사’, ‘박치기’, ‘불여우’ 등 별명을 가진 ‘쎈낭’(선생)이 싫어 집단체조 시간을 뚝거먹고(빼먹고: 우리식으로 땡땡이치고) 대동강가로 나갈 수도 있다. 평양의 ‘놀새족’은 몇 해 전 유행했던 압구정동의 우리네 ‘오렌지족’보다 행복하다. 압구정동의 오렌지족은 아버지 재산이 전부지만 평양의 놀새족에게는 아버지 재산에 더하여 출세까지 보장돼 있다. 프로야구나 대중스타가 없는 북한에서는 장소가 마땅찮아 대학 선배인 남자 ‘○○ 동지’와 후배인 여자 ‘○○ 동무’가 모란봉공원, 대동강변의 오솔길 등에서 산보(데이트)를 한다. 이때 여자는 신중해야 한다. 누구와 ‘산보’한다는 소문이 나면 ‘헌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혼인발이 끊길 우려가 있다. 유흥가도 접대부도 없는 북한에서는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는 남녀들 사이에 ‘부화사건’(혼외정사)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전수태/고려대 전문교수
마초
근래에 유행하는 말로 ‘육식남’(肉食男) 또는 ‘짐승남’이라는 표현이 있다.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남성인 ‘초식남’(草食男)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간단히 말하면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남자라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 매력을 넘어서서 도가 지나쳐 부정적으로 인식되면 ‘마초’(macho)가 된다. 우리가 쓰는 마초는 남자 또는 수컷을 뜻하는 에스파냐 말이 바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영어로 들어간 다음 들어온 말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영어에서 우리처럼 ‘마초’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비교적 최근에 들어왔기에 굳이 일본어를 통해서 들어왔다고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형용사로서 1928년에 처음 사용되었고, 1951년에 명사로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웹스터 사전의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언론매체에서는 한국언론재단의 누리집 검색 결과 1995년 1월의 영화 관련 기사문에서 처음 쓴 것으로 파악된다.(“이 작품들은 기존의 영화가 부각해 온 강한 남성의 ‘마초이미지’나 여성에 대한 ‘가해자’라는 고정된 인식에서 벗어나 남성의 보다 본질적이고 일상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 <한국일보> 1995년 1월25일치 15면)
한편, ‘마초’와 유사한 외래어로 ‘터프가이’(tough guy)가 있는데, 후자에는 부정적인 면이 없다는 차이가 있으며, ‘육식남’과 ‘짐승남’은 ‘터프가이’이면서 유행을 선도하는 멋과 부드러움까지 두루 갖추었다고 한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않다의 활용
‘좋지 않다’에서 ‘않다’는 ‘않으냐’로 활용한다. 앞의 ‘좋지’가 형용사여서 보조용언 ‘않다’도 형용사로 쓰인다. ‘좋다’가 ‘좋으냐’로 활용하는 것과 같다.‘맞지 않다’의 ‘않다’는 ‘않느냐’로 활용한다. ‘하지 않다’도 마찬가지로 ‘않느냐’다. ‘맞다’와 ‘하다’가 동사이기 때문이다. 형용사일 때는 ‘않으냐’, 동사일 때는 ‘않느냐’다.
명사형 어미
동사와 형용사는 다양하게 활용하며 우리말의 특징을 보여 준다. 활용한 어미는 동사와 형용사를 명사처럼 보이게도 한다.‘-ㅁ’,‘-음’,‘-기’ 따위를 붙인다. 가다는 감, 좋다는 좋음, 웃다는 웃기로 형태를 바꾼다. 동사 ‘만들다’는 ‘만들’이라는 어간에 ‘-ㅁ’이 붙어 ‘만듦’이 된다. 그렇다고 품사가 명사로 바뀐 것은 아니다.
까망 고무신
1960, 70년대에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고무신에 관한 추억이 생각날 것이다. 당시 고무신은 대부분 검은색이었다. 검정 고무신, 즉 까만 고무신을 '까망' 고무신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일상에서 검은 빛깔을 얘기할 때 '까망'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그러나 '까망'은 표기법에 어긋난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까망'이 아니라 '깜장'이라고 해야 옳다. 빛깔을 나타내는 형용사에는 '하얗다, 노랗다, 파랗다, 빨갛다, 까맣다' 등이 있다. 이것을 '그런 빛깔이나 물감'을 뜻하는 명사로 바꾸면 '하양, 노랑, 파랑, 빨강, 까망'이 된다. '하양, 노랑, 파랑, 빨강'은 표준말이지만 '까망'은 표준말이 아니다. 사전에 '깜장의 잘못'이라고 돼 있다. '가망, 거멍, 꺼멍'도 '감장, 검정, 껌정'의 잘못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까망'은 '까망 양말, 까망 가방, 까망 운동화'처럼 널리 쓰이고 있으며, 빛깔을 나타내는 다른 말을 명사로 만드는 방식도 같다. 유독 '까망'만이 표준말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같은 뜻으로 널리 쓰이는 '깜장'이란 명사가 있긴 하지만 복수표준어로 해도 문제가 없을 듯하다.
못쓸 짓
남에게 고약한 말이나 행동을 할 경우 흔히 '못쓸 말을 했다' '못쓸 짓을 했다' 등과 같이 '못쓸'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러나 '못쓸'은 '몹쓸'이라고 해야 맞다. '몹쓸'은 '악독하고 고약한'이라는 뜻으로 '나는 술에 취해 아이에게 몹쓸 소리를 해대고 말았다' '사랑이란 몹쓸 병에 걸렸다'와 같이 쓰인다. '몹쓸'은 특이하게도 다른 활용 형태는 없고 관형사로만 '몹쓸 것, 몹쓸 사람, 몹쓸 말, 몹쓸 곳, 몹쓸 놈' 등처럼 사용된다.
'못쓰다'는 '얼굴이 못쓰게 상했다' '그는 병으로 하루하루 못쓰게 돼 갔다'와 같이 '얼굴이나 몸이 축나다'는 뜻으로 쓰이거나, '거짓말을 하면 못써' '무엇이든 지나치면 못쓴다' '증거도 없이 의심하면 못쓰는 법이야' 등처럼 '옳지 않거나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못쓰다'는 '못 쓰다'와도 구분해야 한다. '못'과 '쓰다'를 띄어 쓰면 '쓰다'에 부정문을 만드는 부사 '못'이 결합한 형태가 돼 '라디오가 고장 나 결국 못 쓰게 되었다' '못 쓰는 물건을 모두 버렸다'와 같이 '사용하지 못하다'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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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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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의 편지 - 이윤택
시집을 왔다 맹숭맹숭하다 내 위에 포복한 남편... 괜스리 심각한 표정 참을 수 없어 쿡, 웃다가... 뺨따귀를 맞았다.
거의 혼자 방에서 지낸다 책...헤드폰...거울... 그리고 시간은 무제한 방출 그냥 이대로 지워 간다는, 어쩌면 지당한 생각... 볼품없는 옆모습이라도 떠올려야겠다
솜씨없는 연애법이랑 그 잘난 시 나부랑이까지 나에겐 세일러복 시절의 사진첩 같은 것인가 감상에 빠져 있군...이라든지 누구나 가끔 그럴 때가 있어...따위 몰상식한 답변은 사양하겠다
국제시장 골목서 칼국수 사 먹으면서 너가 부자랬음 좋겠다...고 한말.... 기억하니? 그때 선생님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과도한 모험을 서슴지 않고 연출하는 아동처럼 너에게 헌납했던 골목길에서의 키스... 연극이었다...
부산 앞바다 너절하게 떠다니는 걸레조각처럼 나는 가진 게 없어서 늘 죄송했다 도시 집단 이주촌 제1종 생활보호 대상자 밀떡 먹고 검은 똥 누면서 필사적으로 2년제 교육대학 천상의 밧줄처럼 매달려야 했던 여자에게 이 시대는 처음 눈뜬 사랑을 허락할 능력이 있니?
너는 땡전 한푼 없이 날 불러내었고 커피 한잔 마시며 숙녀 흉내라도 내기 위하여 나는 전날 밤 3백개의 플라스틱 꽃술을 더 달아야 했다.
밤새워 2십원 짜리 조화를 만들면서 세 번 네 번 눈을 감았다 떠도 아니다, 이건... 맹목이다...
나는 문이란 문 죄다 열어 제쳐놓고 일기장 속 고이 찔러넣은 감정들 날려 버리기로 했지. 지하다방 희미한 등불 아래 기억을 씻고 광복동 밤길 갈 곳 없이 떠도는 너의 발자국 지우고 한 해 다 지나도 소식 없는 2급 정교사 자격증 따위 믿지 않기로 하고 당신, 나의 권리자가 되어 주겠어요? 교육대졸, 보조개 소유, 33,23,33인치 신부값은 얼마쯤 할까 철 지난 사내들에게 추파를 던졌지
지금 잠옷까지 그럴 듯하게 걸친 채 얼음 채운 잔 ..현실적으로 들고 있다 경탄할 만한 세상 아니니?
아침마다 한강을 넘는 단조로운 어깨들의 꿀꿀거림 속에서 힘차게 승용차 기어를 밟는 남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잘들 해보라지...
내가 보여주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 또한 한강의 기적처럼 새로운 미덕으로 떠오를 것이니 너 같은 철지난 사림(士林)들은 상처를 내보이며 엄살 떨다가 자식새끼 하나 없이 일찍 죽어라
내 그때, 너에 대한 생각들로 밤치장 하고, 불밝힌 강변로 소요하며 제법 우아한 모습으로 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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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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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7) - 유선
- 소망
온누리 구석구석 못 다 채운 정이었나
일고 스러지는 숨결 또한 인연의 끈
기우는 노을을 지고 불 지피는 손짓 하나,
일상의 바다 저켠 섬 하날 띄워 놓고
넉넉히 쌓인 세월 침묵으로 타는 눈빛
한 풀이 바라춤 속에 끼고 싶은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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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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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11 - 조해일의 `아메리카
미국의 맨얼굴을 보기 위해 머나먼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곳에 가면 깨닫게 된다. 서울에서 정북방으로 20여㎞ 거리, 휴전선 이북의 원산을 향해 벋어 있는 경원선 국도와 철로가 나란히 지나가는 곳,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주한미군들과 몸 부대끼며 살아온 도시, 동두천이 그곳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함석헌은 우리 겨레를 `학대받은 계집종'에 빗댄 바있다. 그의 비유가 여유와 관조의 결과이기는커녕 냉정한 관찰의 산물임을 지나간 역사는보여준다. 고려 때 원나라로 끌려간 공녀들에서부터 조선의 그 많은 논개들, 식민지 강점기의 일본군위안부들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여성들은 겨레의 굴종과 치욕을 온몸으로 감당해 왔다. 게다가 그것은 이민족의 지배에서 해방된 뒤에도 끝나지 않았으니, 오늘날 양공주 또는 양색시로 불리는 이들이 그를 증거한다. 해방과 함께 이 땅에 들어왔으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진주를 확고히한 미군들은 이른바 기지촌을 형성시켰고 그것의 첫번째 필요조건은 몸 파는 여자들이었다. 팔려고 내놓은 한국 여자들의 몸뚱어리와 그것을 사고자 하는 미군 병사들의 욕정,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클럽으로 이루어지는 기지촌은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여러 시인·작가들이 그 세계에 눈을 주었음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시인 장영수·김명인씨가 각기 시집 <메이비>와 <동두천>에서 혼혈아와 기지촌 풍경을 다루었고, 소설가 천승세씨의 `황구의 비명'과 윤정모씨의 <고삐> 연작은 양공주 문제를 프리즘 삼아 한미관계의 예속적 본질을 까발렸다. 최근작으로는 복거일씨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과 윤이나씨의 <베이비>가 기지촌과 양공주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1972년에 발표된 조해일씨의 중편 `아메리카'는 기지촌인 ㄷ읍 ㅂ리의 클럽에 스며든 대학 중퇴생의 눈에 비친 양공주들의 삶과 죽음을 소묘한다. 군을 제대한 뒤 학교에 복학하는대신 당숙이 운영하는 클럽의 문지기로 취직한 `나'는 클럽을 드나드는 양공주들과의 성적인 일락(逸樂)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차츰 ㄷ읍의 사정에 눈을 떠간다. 무책임한 구경꾼이거나 기껏해야 본능에 몸을 맡긴 한 마리의 숫컷으로서만 자신이 몸 담고 있는 ㅂ리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 변화가 오는 것은 우연히 목격한 양공주의 죽음으로 해서이다. 동거하던 여자를 밤무대 쇼에 나간다는 이유로 목 졸라 죽인 흑인 병사의 범죄를 겪고 그렇게 죽은 양공주의 장례식을 지켜본 그는 양공주들의 자치 조직인 `씀바귀회'를 찾아가 그들의 실상을 청취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비록 그가 “오늘 내게 그녀들의 춤은 이상하게도 삶에 대한 격렬한 거역의 몸짓처럼 보였다”라며 시각의 변모를 토로하지만, 그것의 궁극은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갈등 내지는 소외관계라는 도식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무력감”일 따름이다. 그같은 무력감의 결과일까. 소설의 결말은 홍수의 몫으로 돌아간다. 홍수는 클럽과 골목을 채우고 넘치지만, 기지촌 자체나 그것의 정치경제적 근거를 함께 쓸어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명 구조용 고무보트를 타고 동네 골목에 나타난 미군들은 노약자들을 부대로 대피 시켜 보살피기조차 한다. 그렇다면 미군의 자비와 잔혹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단 말인가. 같은 양공주 문제를 다룬 천승세씨의 `황구의 비명'이나 윤정모씨의 <고삐> 연작이 미군과 미국에 대한 고발과 거부라는 명쾌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끝을 내버린 `아메리카'의 성취를 회의하는 시각도 있다. 그에 대해 작가는 “현실에서 명쾌한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데 소설 속에서만 유독 매듭을 짓는 것도 작위적일 것”이라며 “나는 다만 기지촌과 양공주들의 실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가 `아메리카'를 비롯한 일련의 기지촌 소설들을 쓰게 된 데에는 부친이 동두천에서 클럽을 경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소설에 나오는 ㄷ읍 ㅂ리는 바로 작가의 부친이 클럽을 경영했던 동두천시 보산동을 가리킨다. 하지만 소설이 쓰여진 뒤 사반세기, 소설 배경으로부터는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96년 여름의 보산동은 소설에서 묘사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산동의 상징이었던 양공주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 한때 3천명 가까이에 이르렀다는 그 여자들은 지금은 겨우 30명 미만에 머물고 있다. 그 여자들이 출입하는 클럽 주인들의 모임인 한국특수관광업협회 동두천지부의 이명석 지부장(46)은“현재 지부에는 33개 업소가 가입해 있지만, 실제로 영업을 하는 곳은 10여 군데밖에 안 된다”고 밝혔다. 달러의 위력이 현저하게 줄어든 데다 미군들에 대한 주민 감정이 나빠져서 그들이 전만큼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부대 밖으로 나오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흑인 병사에게 살해당한 동료를 단체로 장례지낸 `씀바귀회'의 모델인 민들레회 역시 회원 수의 격감으로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나마 주말 저녁에나 기지촌 분위기를 낸다는 보산동 골목의 평일 낮은 황구의 혓바닥만 큼이나 늘어져 기신거리고 있었다. 인디언헤드니 맨해튼, 와일드캣, 뉴하우스, 리버티 따위의 영문 이름을 쓴 클럽이나 테일러, 사진관들이 오래 된 영화 세트처럼 꾸며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활기와는 거리가 멀다. 땡볕이 내리쬐는 골목을 한동안 지키고 서 있어도 양공주로 짐작되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두세명씩 짝을 지어 어슬렁거리는 사복 차림의 미군 병사들, 열살 미만의 흑인 혼혈아와 또래의 한국 아이, 무료한 표정으로 어서 밤과 주말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한 동네 주민들이 골목을 오갈 뿐이다.
소설 속에서 흑인 병사에게 살해당한 양공주의 장례는 동료 양공주들의 집단적인 한풀이 의식과도 같이 치러진다. 소복한 여자들은 미군 부대 정문에서 노제를 지낸 뒤 부대 앞을 흐르는 신천의 다리를 건너 상패동 공동묘지까지 흙먼지 이는 길을 곡을 하며 나아간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졸(卒)한 양공주들은 동두천시 서쪽 상패동 공동묘지의 한켠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홍주리의 무덤, 면사포 한번 못 써보고' `양춘실의 무덤, 다음 세상엔 좋은 팔자 타고나기를' `박데비의 묘, 꺾인 꽃도 꽃이랍니다'…. 양공주들의 `경기'가 좋았던 시절만 해도 이런 묘비명이 적힌 나무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돌보는 이 없는 그 여자들의 무덤은 세월과 인정의 풍화작용에 씻기고 무너져 다시금 없을 무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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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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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5장 나 하나 행복 둘
과잉 보호
자녀를 상전처럼 떠받들지 마라. 부모가 자녀보다 오래 산다면 그는 평생 동안 상전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외톨이가 되고 만다. 자녀보다 오래 사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며 남의 자녀들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은 어느 부모나 다 가지고 있지만,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과잉 보호를 구분할 줄 아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과잉 보호가 곧 자녀 사랑이라고 생각하고는 열심히 시중을 들어 준다. 자녀만큼은 부족한 것 없이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온 인생을 바쳐 가면서까지 애를 태운다. 그러나 사랑이 곧 과잉 보호는 아니다. 무조건의 사랑은 자녀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자녀에게 시녀 노릇을 해서 키울 때는 퍽이나 자녀를 이롭게 하는 것같이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먼 장래를 내다보았을 때는 자녀를 사회의 불구자로 만들고 있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게 자란 자녀는 부모가 일일이 시중을 들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만다. 부모는 자녀의 교육자이지 하인이 아니다. 자녀에게 고통도 가르치고 세상 사는 법도 가르쳐야 하는 인생의 스승이다. 자녀가 살아가야 할 곳은 좁아터진 부모의 품속이 아니라 넓고 넓은 세상(사회)이다. 그리고 그곳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히 적용되는 냉엄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한 연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자녀가 귀하면 귀할수록 더욱더 철저히 세상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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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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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소금-생산에서 세금까지 - 김의환
왜 소금이 중요한가
오늘날 소금은 무척 흔하다. 그런데 소금이란 말에 귀한 '금'이 왜 들어있을까? 혹시 소금이 금처럼 귀했던 옛 역사 때문에 말에 흔적으로 남은 것은 아닐까? 소금, 영어 salt의 어원은 라틴어의 salarium에서 유래된 '군인들의 봉급'이란 뜻으로, 로마시대에는 군사들의 봉급으로 곡식과 돈 대신 귀한 소금을 지급한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소금은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한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물품인 동시에, 요리의 조미료로서 그리고 어물의 보관과 가공에도 중요한 물품이었다. 사람의 몸 속에는 약100g의 소금이 있으며 하루 평균 12, 13g을 섭취해야만 하는데, 이는 소금이 인간의 생리기능을 조절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금이 부족하면 정신불안, 현기증, 식욕부진, 피로, 권태 등 육체적정신적으로 현저한 기능상실이 초래된다. 소금은 채소와 무를 절여서 김치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고춧가루를 넣어 담그는 김치는, 18세기 이후 잦은 비로 인해 생산이 줄어들어 소금 값이 등귀하자 소금을 전보다 덜 사용하고도 오래 저장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 임란 후 일본을 통해 전래된 고추를 넣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흉년으로 큰 기근이 들어 물 대신 솔잎과 솔 껍질을 먹을 때 소금을 함께 섭취해야만 부황이 들지 않아, 기근 때 구황염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수렵과 어로활동을 통한 조개굴새우등의 생선과 사냥으로 잡은 여러 짐승에 함유되어 있는 소금 성분을 섭취하였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되어 곡물과 채소류를 주식으로 하면서부터 소금 결핍이 초래되었고, 따로 소금을 섭취할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선사시대 이래 지금까지도 내륙지방에서 동물을 사냥하거나 가축을 잡으면 고기 못지 않게 짐승의 피를 마시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온 것도 바로 이 소금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농업 생산의 확대로 인구가 증가하고 생활 근거지가 강이나 바닷가에서 내륙으로 확대되면서 소금 수요가 늘어나자 본격적으로 소금 생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래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깊숙한 곳에서는 언제나 소금이 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소금이 생산되지 않던 만주 영고탑 지역의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넘어 조선의 장수와 군사들을 납치하고는 인질의 교환조건으로 소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여진족에게 소금을 주면 곧 인질을 석방해 줄 정도로 소금은 생존과 깊은 관련을 갖는 물품이었다. 조선 후기 삼수갑산지역에서 군복무를 하는 군인들은 곡식 대신에 이 지역에서는 매우 귀한 소금을 가지고 가서 이를 바꾸어 군대생활의 비용으로 쓰기도 하였다.
소금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네팔 등 히말라야 산맥 부근의 산이나 아프리카 사막 한가운데에서 소금을 석탄과 같이 채굴하는 모습을 접할 때 우리는 의아함을 느낀다. 소금 하면 바다에서 생산되는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암염이라는 것이 있다. 이 지역이 옛날에는 바다 밑부분이었으나 지각변동으로 산이나 육지로 변하여 소금이 바위처럼 형성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암염이 없기 때문에 소금은 모두 바닷물에서 생산하였다. 바닷물로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농경이 시작되고 인간의 생활 근거지가 내륙으로 확대되어 간 아주 오랜 옛날이다. 그 당시의 생산방식은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대체로 토기에 바닷물을 넣어 끓여서 소금을 생산하는 토기제염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원시적 소금생산으로부터 한 단계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염전을 만들어 바닷물을 1차 증발시킴으로써 농축시킨 함수 즉 짠물을 끓여 생산하는 염전식이 그것이다. 바닷물에는 소금이 약 3% 정도밖에 들어있지 않아 곹 바로 끓일 경우 많은 연료가 소요되고 생산성이 매우 낮았다. 그리하여 염전을 만들고 그곳에서 햇볕에 바닷물을 한 차례 증발시켜 보다 소금의 농도를 짙게 한 뒤 이를 끓여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고려시대 동안 염전식의 소금 생산은 서남해안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염전식의 소금생산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간석지가 발달하여 염전조성이 쉬운 서남해안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서남해안에서는 상현하현 때 바닷물이 물러간 후 써래를 단 소를 이용하여 염전바닥을 하루 2-3회씩 갈아엎고, 그 위에 바닷물을 골고루 뿌려 증발시켜 소금기가 농축된 함토 즉 짠 흙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함토에 다시 바닷물을 부어 진한 소금물을 만든 후 철이나 흙으로 만든 솥에 끓여 소금을 생산하였다. 염전 바닥에는 검은 점토를 깔아 햇볕에 의한 증발률을 높였으나, 한달에 상하현 기간인 12일 정도밖에 작업하지 못하였고 그것도 비가 오지 않아야만 가능하였다. 이에 비해 동해안에서는 간석지가 발달되지 못하여 염전 조성이 어려워 여전히 바닷물을 직접 끓여서 소금을 생산하였다.
서남해안과 동해안의 소금생산에는 생산도구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동해안에서는 바닷물을 직접 끓여야 했으므로 높은 열이 필요하여, 흙으로 만든 토분을 사용할 경우 바닥면이 쉽게 갈라지므로 철분을 사용하였다. 서남해안에서는 1차 농축된 소금물을 끓이므로 열이 낮아도 가능한 토분을 사용해서 생산하기도 했지만, 토분보다 철분의 수명이 길어서 대체로 철분을 사용하였다. 땔감의 경우에도 토분에는 열이 약한 나뭇가지나 풀을, 철분에는 화력이 큰 소나무 등을 사용하였다. 이 같은 생산방식은 대체로 조선 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계속되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제방을 쌓아 염전을 조성하는 방식이 나타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제방이 있으면 상하현 외에 조수의 차이가 크지 않은 때에도 생산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되는 소금도 대체로 하루를 기준으로 염분 하나에 1섬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한 염분에 동원되는 인원도 5명 이상이나 되었으며, 작업도 매우 힘들었다. 연료비와 인건비가 생산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여 총 비용의 3분의 2이상이 넘었다. 따라서 19세기에도 소금은 여전히 귀하고 비싼 물품이었다. 염전염분 외에 소금 생산에 필요한 시설로는 소금을 끓일 때 비를 피하기 위한 염막과 염분을 서까래에 매달기 위한 장치인 구철, 바닷물을 여과시켜 1차 농축시키는 구덩이인 섯등 등이 있었다. 한편 소금생산 과정에서의 고된 땀을 식히고 피로를 풀기 위해서 노동요와 민속놀이인 소금놀이 마당이 생겨나기도 했다. 소금 생산이 근대적 방식으로 전환된 것은 1907년 이후의 일이다. 기존의 염전식에다 보다 근대화된 시설을 갖추고 햇볕에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의 결정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즉 이때에 와서 비로소 우리에게 낯익은 천일제염이 시작되어 소금 생산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소금은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강, 하천의 수로나 육로를 거쳐 내륙 깊숙한 곳까지 유통되었다. 이미 백제 초기에는 남한강을 따라 충북 내륙지역까지 소금 유통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소금은 곡식과 함께 가장 폭넓게 유통된 상품이었다. 17세기 이후 선박을 이용한 해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서울이 상업도시로 성장하고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이 되어 경강의 각 포구는 조운의 중심지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 전국적 상품유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전국에서 생산된 소금이나 미곡 등이 선박을 이용하여경강에 집결되었다가 다시 지방에 분산되는 유통구조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외방 포구들도 주변 장시와 연결되면서 소금과 곡물 등을 유통시키는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서울의 상업은 시전상인의 역부담에 대한 대가로 정부에서 상품에 대한 독점적 유통권인 금난전권을 부여하는 시전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에는 소금을 판매하는 염전으로 경염전, 마포염전, 용산염전 등이 있었는데, 시전을 중심으로 한 유통체계는 선상(소금상인)이 전라도충청도 등지에서 생산된 소금을 싣고 와서 경강의 여객주인에게 넘기고, 여객주인은 이를 다시 구매독점권을 가진 시전상인인 염전에게 도하여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구조였다. 이 때 시전상인은 소금 유통에 대한 대가로 소금 1섬에 1, 2전씩 징수하였으나 때로는 그 가격을 올려 받기도 해서, 서울의 소금 값은 시전상인의 농간에 좌우될 지경이었다. 시전은 소금을 중간도매상에게 넘겨 소비자에게 판매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염전 상인들은 독점권을 빌미로 소금의 가격을 시가의 절반 이하로 책정하는 등의 폐단을 일으켰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소금의 판매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소금상인들은 이들의 침탈을 피해 오히려 내수사 등에 투탁하여 이익의 일부를 납부하고 보호를 받으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대책을 마련하여 염전의 소금상인에 대한 수세권만을 인정하여,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면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마포염전인들은 빚을 지자 그 운영권을 성균관 반인들에게 팔아, 성균관 반인들이 소금을 매하여 그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한편 18세기 후반에 성장한 포구의 주인층들은 소금 유통을 중개보조하면서 그 대가로 소금 1섬에 5푼이나 1전씩을 징수하였다. 이들에게는 소금 등 상품유통에 대한 독점권인 주인권이 있어 그 권리가 매매상속양도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주인권은 400냥 이상 나가기도 하였다. 이 때의 소금 유통은 시전상인은 배제되고 소금상인이 여객주인과 직접 거래하여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식이었다. 양반가나 부호들도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대지주로 성장하기도 하였는데, 남양의 박씨가, 서산의 이씨가, 암태도의 문천씨가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렇게 소금 유통이 활발해지자 경강에는 소금을 전업적으로 하역하면서 생계를 꾸려 가는 도시노동자도 생겨났다. 조선 후기 소금 1섬의 가격은 쌀값의 2분의 1인 2냥 정도였으나, 소금 흉년에는 값이 뛰어올라 4,5냥이 되기도 하였다. 소금상인들은 이러한 가격차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지방의 경우에는 강을 거슬러 배로 수송하거나 육지로 행상이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이 때 소금장사는 다른 지방의 소식을 전해주는 통신원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문학작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사랑의 로맨스를 엮어내기도 하였다. 특히 낙동강변 지역에서의 소금 유통은 통영에서 상인의 사사로운 판매를 금지하고 전적으로 독점하여, 소금 값이 10냥 이상으로 뛰어오르는 등 갖가지 문제를 야기하였다.
소금세는 어떻게 거두었나
소금산업은 다른 것과 달리 단기간에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국가가 이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옛부터 '나라를 넉넉히 하고 백성의 삶을 구제하는 길은 소금을 굽는 것이 으뜸'이라 하였다. 고대국가에 있어서 소금은 철과 함께 군사경제력의 확대를 위한 중요한 교역품이었고, 이를 장악한 세력이 중심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소금 확보에 주력하여 고구려의 경우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켜 소금과 해산물을 확보하였다. 이 때 복속민들이 천리의 먼길을 걸어서 고구려 수도로 이를 운반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소금 확보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는 별로 보이지 않으나, 백제와 신라 역시 소금을 중요시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적 소금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고려말에는 특히 궁핍해진 국가재정의 해결 방안으로 소금세를 걷는 방안이 대두되었다. 당시에는 원의 공물진상 요구에 따라 재정이 궁핍해진 가운데, 권문세족과 사찰이 토지 외에 염분까지도 대부분을 차지하여 막대한 이득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에 충선왕은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권세가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소금의 전매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대체로 개인의 염분 소유 및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허용하였다. 그 대신 국가는 생산자에게서 일정액의 소금을 세금으로 징수하였다. 세종 말엽에는 군자창 곡식과 의창곡의 마련을 위해 전매제를 추진하였으나,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분과는 달리 오히려 심각한 소금 품귀현상을 초래하여 큰 피해를 가져옴으로써 곧 폐지되고 말았다. 이처럼 조선초기의 소금정책은 대체로 그 생산은 생산자인 염한에게, 유통과 판매는 상인에게 맡기되 국가에서는 그에 대한 세금만을 거두는 수세제로 운연되었다. 즉 특정기관이나 개인에 의한 독점적 지배를 배제하고, 호조에서 각 도의 염분을 파악하여 세염을 곡식이나 포로 바꾸어서 군사재정에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영은 직전법의 폐지를 빌미로 하여 16세기 후반에 염전에 대한 수세권이 절수의 형식으로 출가한 왕의 자녀들인 궁방과 중앙관청에 지급됨으로써 크게 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러한 절수는 합법화되어 더욱 확대되었다. 재정의 어려움이 커지자 절수를 혁파하여 염전의 수세권을 되찾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 이권이 크고 궁방 등 왕과 직결된 세력에 주어졌던 만큼 실시되기는 어려웠다. 궁방의 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된 17세기 후반에는 기존 궁방의 염분 절수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신설 궁방의 경우에는 염분 3좌로 제한하였으며, 염분 1좌당 수세액도 10섬으로 정하였다. 그러다가 1750년(영조 26년) 균역법 시행과 맞물려 절수 혁파도 함께 거론되어, 비로소 수세권이 다시 호조에 귀속되었다. 이때 전매제를 실시하지 않고 수세제로 운영한 이유는 종래 염분을 차지하였던 세력의 반발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판매를 국가가 직접 관장할 경우 광범위한 염장 시설의 관리와 유지를 위한 재력 문제, 행정력의 비효율성, 그리고 생산활동을 포함한 유통경제 전반을 위축시킬 가능성 등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호조에 귀속되었던 수세권은 뒤에 균역청으로 이전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률적인 수세에서 벗어나 염분의 크기, 염전의 척박정도, 시장장시의 원근 등 여러 조건을 참작한 보다 합리적인 수세 기준이 마련되었다. 또한 소금 1섬에 1냥 5전씩 징수하는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소금정책은 여러 사전류의 서술과는 달리 전매제가 실시된 적은 거의 없었다. 전매제가 실시되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시기에는 왕의 친인척과 상급관청에 수세권을 넘겨주어 특정 기관이나 세력이 수세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또한 큰 흉년 시 소금의 생산으로 진휼곡 마련 등 재정확충에 이용하자는 주장이 계속되었으나, 전선이나 조운선의 제작을 위한 소나무 벌목 금지정책이 우선시되어, 소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소금 생산의 확대에는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절수가 혁파된 후에도 생산은 염한에게, 유통과 판매는 상인에게 맡기고 국가에서는 수세만 하는 수제제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바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모두의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잘못된 수산업법으로 또 다른 형태의 '절수'가 행해지고 있다. 남해 강진만의 경우 전 현직 국회의원, 도의원 등 특정 몇 사람이 처음 몇 천원의 인지대를 내고는 영구히 바다의 운영권을 장악하여, 대다수 어민의 업을 빼앗고 독점적 이익을 누리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조선중기 임꺽정 항쟁의 원인 중의 하나가 공동으로 이용하던 바닷가의 갈대밭을 궁가와 권세가가 독점적으로 점유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찍이 소금업의 폐단을 비판하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했던 다산 정약용 동상의 두 눈이 '자신의 오늘과 우리의 오늘이 어떻게 다른가'하고 160여 년이라는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강하게 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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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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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3장
꽃
3. 무궁화
1) 나라꽃과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국화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국화를 두고 있다. 국화가 정해지는 것은 법으로 공식화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깊은 관련을 가진 꽃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은 법이나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면 수십, 수백 가지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중에서 왜 하필이면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옛날부터 선조들은 매, 난, 국, 죽 사군자의 기품과 절개를 아껴 왔고 모란, 이화의 영화로움과 화려함을 즐겨 애송하였으며, 진달래, 봉숭아 등에 우리네의 정서를 담아 왔다. 이처럼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시로 노래되고 그림으로 장식외어 온 여러 꽃들을 생각하면, 문득 역으로 무궁화가 왜 국화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하나의 기정사실로만 받아들일 뿐 의문조차 품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일단 뒤로 미루고, '국화와 무궁화'의 현상학적인 측면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무궁화가 국화로 굳어진 역사적 시점은 개화기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화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고증은 있을 수 없으나, 대체로 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문호개방 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서양 여러 나라들이 그들 왕실의 문장, 훈장, 화폐 등에 사용한 국화를 접하게 되자, 어떤 이유로든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잡고 있던 무궁화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무궁화는 민족의 상징이 되어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여 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채택된 애국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는 국화로서의 인정을 얻게 된 가장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무궁화가 국화로 적합한가에 관한 시비는 195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상논쟁까지 벌이며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자격이 평가, 재검토되어 왔다.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 국화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 나라의 국화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는 1. 국토 전역에 분포하는 꽃, 2. 우리나라 원산종으로 민족을 상징할 수 있는 꽃, 3. 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한 꽃, 4. 이름과 모양이 모두 아름다운 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에 비추어볼 때 무궁화는 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하며, 둘째 원산지가 인도이므로 외래식물이며, 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하며, 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늦게 돋는다는 점 등으로 인해 국화로서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국화는 그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꽃이 있다면 충분히 검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가 현재의 무궁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궁화에 대해서 충분히 안 다음 위에서 말한 부적합한 사유들이 타당한 것인지에 관해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한 나라의 국화는 단순한 꽃으로서만 평가될 수 없으며, 이면에 간직된 깊은 뜻과 정신을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동양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군자국 ... 유훈화초조생춘사'라 하여,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국은 우리나라, 훈화초는 무궁화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무궁화를 훈화초, 목근, 순영, 순화, 조개모락화, 번리초 등으로 칭하였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피기 시작한 것은 2천 년이 훨씬 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임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에 인용한 고금주에는 '군자지국 지방천리 다목근화'라 하여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피는 것을 예찬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우리나라를 '근역' 또는 '근화향'이라 불러 왔다. 신라 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 “근화향(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일컬음)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하였고,「구당서」(737년: 성덕왕 36년) 신라전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 예찬하였으며, 또한 신라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일컫는 꽃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도 스스로 근역, 근화향, 근원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근역'은 무궁화가 많은 땅,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무궁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규모의 글 중에, 친구 두 사람이 근화를 일컬어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 하고 또 한 사람은 '무궁'이 옳다고 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무궁화', '무궁화', '무궁화' 등으로 쓰이다가 조선말경에 현재의 '무궁화'로 정착되었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예로부터 무궁화는 우리나라 고유의 다른 이름이 있었으며, 이 우리말에 유사한 한자음을 따서 사용해 오다가 뜻이 좋은 무궁화로 통일되어 쓰여진 것이라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강희안이 저술한 「양화소록」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단군이 개국하였을 때 목근화가 비로소 나왔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이라 불렀다 한다... 속명 무궁화라 한다. 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화(오얏꽃)를 왕실화로 삼았으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는 어사화는 무궁화로 사용하였다. 또한 임금을 모신 가운데 베풀어지는 연회에 신하들이 사모에 무궁화를 꽂았는데, 이를 진찬화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보노라면, 막연히 근대 이후부터 민족의 꽃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라는 무궁화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무궁화가 본격적인 국화로 등장,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는 개화기이다. 당시 윤치호, 남궁억 등 선각자들은 민족의 자존을 높이고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를 유지하고자 나라꽃으로 무궁화를 결의하였다. 당시에 만들어진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라는 구절이 아무런 저항없이 표현된 것도 무궁화가 우리나라,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인연을 맺어 온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계속된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민족정신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존재로서 민족의 가슴에 심어져 왔다. 국권이 상실되던 해 9월 애국지사 황현(1855-1910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슬픔에 젖었네. 무궁화 이 강산이 이젠 침몰되어 버렸네.
또한 김좌진 장군은 '삼천리 무궁화 땅에 왜놈이 웬일인가'라고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을 애타게 기원하였다. 이 땅의 여인들은 우리나라의 지도 위에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송이의 무궁화를 수놓으며 광복의 그 날까지 민족정신을 심어 나갔다. 특히 남궁억은 무궁화를 통해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확산시키고자 '무궁화동산 꾸미기'운동을 전개하였다. 전 강토에 민족정신의 상징인 무궁화를 심어 무궁화 삼천리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을 확산, 고향인 홍천에다 무궁화밭을 가꾸어 해마다 수십만 그루씩 각 지방의 학교, 교회, 사회단체에 공급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반일적 사상의 발로라 하여, 1933년 이른바 '무궁화사건'이란 이름으로 체포하여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일제는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민족지도자들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조국을 상징하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하고,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한 흉계를 꾸몄다. 그들은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 경멸하여 격하시켰으며, 어린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느니 심지어 '눈이 먼다'고 까지 하여 멀리 피하여 가도록 가르쳤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국화말살정책을 강행, 무궁화를 심지 못함은 물론 심어진 무궁화를 모두 캐내도록 하고 무궁화를 캐어낸 자리에는 사꾸라를 심도록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의 혼을 뿌리채 말살하고 일본인화하겠다는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근세의 명수필가로 알려진 김소운은 광복 후 일본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내용의 서간체 연재수필을 썼는데, 제목을「목근통신」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는 무궁화가 그대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 되어 왔으며, 그 줄기찬 화기는 민족의 줄기찬 불굴의 정신과 연관시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왔다. 그 뒤 우리는 바쁘게 살아왔다. 광복후 채 일어서기도 전에 6.25로 민족의 비운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전진만을 계속하여 왔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꽃,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꽃. 여기에는 온 국민이 관심과 의견을 제시할 권리와 필요가 있다. 이제 무궁화가 가지는 꽃 자체로서의 의미와 상징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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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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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3
2. 삶을 위하여
엄마의 수프 단지
삶에는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보물들이 아주 많다. 어떤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해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그것들이 지닌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살아간다. 엄마의 수프 단지도 그 중 하나였다. 그것은 이가 군데군데 빠지고, 희고 푸른빛 나는 유약이 발라진 커다란 단지였다. 그 단지가 화덕 위에서 끓고 있는 모습을 난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 볼 수 있다 마치 활화산처럼 김을 피우면서 그것은 언제나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학교에 갔다가 부엌 뒷문으로 들어올 때면 그 내음은 입안에 군침이 솟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음은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엄마가 그 단지 옆에 서서 길다란 나무 주걱으로 그것을 휘젓고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나는 그 냄새만으로도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엄마의 미네스트로니 수프(마카로니나 야채 따위를 넣은 수프)에는 정해진 요리법이 없었다. 그 요리법은 상황에 따라서 늘 발전했다. 그것은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산악지대에 살 때부터 그래 왔다. 그곳에서 엄마는 엄마의 노나(할머니)에게서 그 비법을 배웠으며, 할머니는 또 그 윗대의 할머니로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 그것을 전수 받았다. 우리집은 미국에 이민온 지 얼마 안 되는 대가족이었다. 그런 우리집 식구들에게 엄마가 끓여 주시는 수프는 우리가 결코 배곯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그것은 팔팔 끓고 있는 만정의 상징이었다. 그것의 요리법은 부엌에 무슨 재료가 있는가에 따라 그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수프의 내용물을 보고 우리집의 경제 사정을 판단할 수 있었다. 토마토, 국수 사리, 콩, 당근, 셀러리, 양파, 옥수수, 고기 등이 가득 든 걸쭉한 수프는 버스카글리아 집안이 잘 돌아가고 있음을 상징했다. 반면에 희멀건 수프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다는 뜻이었다. 우리집에선 음식을 결코 내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모든 남는 음식은 전부 엄마의 수프 단지 속으로 들어갔다.
수프를 끓일 준비를 하는 것은 엄마에게 있어서 매우 신성한 일이었다. 엄마는 음식 만드는 일을 신의 섭리에 대한 찬양으로 여겼다. 엄마는 지극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감자 한 알, 닭고기 한 조각을 수프 단지 속에 집어넣었다. 구약성서의 잠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아직 어두운 시간에 일어나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한다. 그녀의 자녀들이 일어나 그녀를 축복하리라 …." 하지만 한 번은 엄마의 그 수프 단지가 나를 아주 당황스럽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나는 극서 때문에 학교에서 사귄 새 친구를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솔은 마른 체구에 머리칼이 검었다. 그는 나에게 흔치 않는 친구였다. 왜냐하면 솔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그 친구의 집은 도시에서 가장 부자 동네에 있었기 때문이다. 솔은 종종 나를 자기집의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 집안에는 흰색 유니폼을 입은 요리사가 있어서 번쩍거리는 은제 식기들이 진열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요리는 고급이었지만, 사실 그는 별로 맛이 없었다. 그 음식들은 불에 그을린 단지에서 끓여져 나오는 우리집의 음식과는 달리 마음의 정성이 빠져 있었다. 게다가 그 집 분위기도 음식과 비슷했다. 모든 것이 너무 형식적이었다. 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교양이 있고 정중했다. 하지만 식탁 위에서의 대화가 지나치게 조용하고 형식적이었다. 그리고 그 잡안에선 아무도 서로를 껴안지 않았다. 솔이 가장 가까이 아버지와 접촉할 때는 악수할 때뿐이었다. 우리집에선 따뜻한 포옹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남자든 여자든, 사내아이든 여자아이든 언제나 서로 껴안고 야단들이었다. 그리고 만일 하루라도 엄마에게 키스를 하지 않았다가는 당장 이런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다.
"무슨 일이냐? 너 어디 아프니?"
하지만 그 무렵 나의 삶에서는 저녁을 먹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이 두쪽으로 갈라져도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우리집 식구들은 너무 달랐다. 다른 친구들의 집에서는 아무도 화덕 위에 우리집처럼 커다란 단지를 올려놓고 있지도 않았으며,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맨 먼저 숟가락을 주며 그릇에다 수프를 퍼담지도 않았다. 나는 엄마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렇게 하지 않는단 말예요."
그러면 엄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난 그 사람들과는 다르다. 난 어디까지나 로지나일 뿐이야. 내 미네스트로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
마침내 솔은 드러내 놓고 자기를 우리집 저녁식사에 초대해 달라고 요구했다. 난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사실 그것보다 엄마를 더 행복하게 해드리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난 불안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우리집 식구들과 식사를 같이 했다간 솔이 영영 내 곁에서 떠나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엄마, 우리도 햄버거나 후라이드 치킨처럼 미국식 음식을 좀 먹을 순 없어요?"
엄마는 한참 동안 날 째려보셨다. 난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걸 알았다. 엄마와 다른 아홉 명의 식구들은 연달아 솔을 껴안고 등을 두드리며 법석을 떨었다. 잠시 후 우리는 아버지의 자랑이자 기쁨인, 아버지가 손수 짜신 식탁에 둘러앉았다. 정교하게 무늬가 새겨진 식탁이었지만 이미 음식때가 잔뜩 얼룩져서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식탁 위에는 화려하고 밝은 색채의 식탁보가 씌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식사 기도를 마치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의 앞에는 수프 그릇이 하나씩 놓였다. 엄마가 물으셨다.
"어이, 솔! 이것이 무슨 음식인 줄 알겠어?" 솔이 대답했다. "수프 아닌가요?"
엄마가 강조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수프가 아니야. 이건 미네스트로니라구!"
그런 다음 엄마는 미네스트로니의 효능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두통과 감기, 심장병, 소화 불량, 신경통, 간 질환 등에 특효였다. 솔의 야윈 체구를 보더니 엄마는 수프를 먹으면 틀림없이 미국에 이민 와서 성공한 어떤 이태리 운동선수처럼 뼈가 튼튼해 질 것이라고 거듭 확신을 갖고 말씀하셨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것으로 내 친구 솔과는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이런 별난 사람들과, 기이한 발음, 이상한 음식이 있는 집에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솔은 두말 없이 자기 그릇을 비우더니 한 그릇을 더 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빨며 말했다.
"정말 맛있는데요." 작별 인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을 때 솔이 실토했다. "넌 정말 훌륭한 가정을 갖고 있구나. 우리 엄마도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서 그는 덧붙였다. "임마, 넌 행운인 줄 알아!"
행운이라구! 손을 흔들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걸어가는 솔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약간 의아해 했다. 내가 얼마나 행운아이었던가를 나는 이제 안다. 솔이 우리집 식탁에서 경험한 그 만족감은 엄마의 미네소트로니 수프에 담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따뜻함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난 안다. 그가 느낀 것은 사랑이 가득한 한 가정의 식탁에서 체험한 순수한 기쁨이었다. 엄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엄마를 묘지에 묻고 돌아온 다음날 누군가 미네스트로니 수프 단지가 얹힌 화덕의 가스를 잠궈버렸다. 황금빛 시절은 그렇게 불꽃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맛좋은 수프 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던 신성한 사랑과 안도감은 오늘날에도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준다. 솔과 나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정을 키워 나갔다. 그의 결혼식날 나는 들러리를 섰다. 얼마 전에 나는 그의 집으로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 솔은 아이들을 일일이 껴안아 주었고, 아이들은 또 나를 껴안았다. 그런 다음 솔의 아내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수프 그릇을 식탁으로 가져왔다. 야채와 고기 토막이 풍성하게 들어간 닭고기 수프였다. 솔이 나한테 물었다.
"어이, 레오. 이것이 무슨 음식인 줄 알아?"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수프 아닌가?" 솔이 골을 내며 말했다. "수프라구? 이건 단순한 수프가 아니라 닭고기 수프야! 감기와 두통, 소화 불량에 아주 효과가 있지. 그리고 간 질환에도 좋구 말야." 솔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윙크를 보냈다. 나는 다시금 집에 온 느낌이 들었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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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회문
ROTAS OPERA TENET AREPO SATOR
위에 보여지는 것은 수백 년 동안 학자들에게 신비함을 불러일으켰던 사각 회문이다. 또한, 'PATER NOSTER A O'의 아나그램(문자, 철자를 만들어 새글을 만들기)이기도 하다. 이 유명한 사각 회문은 트레모나에 있는 피에브 테르쟈니 교회로 이르는 인도에서 발견되었고 카페스트라노 근처에 있는 성 피터 교회와 영국과 프랑스에 있는 몇 개의 고대 교회들은 이 회문을 새겨두었다. 이 회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판자라고 하는 이탈리아 중세 학자의 주장에 따르며 이 회문은 바람과 바퀴가 성경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 즉 '영원'과 '무한함'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이 회문을 해석한 사람은 영국의 윌리엄인데 그는 수년 전 이 문자들을 대칭적으로 배열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ORE TE PATER ORO TE PATER SANAS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당신은 고통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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