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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687호
단기 4343. 1. 15 (음력 12. 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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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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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대학교에서는 김소월의 작가 정신을 이어받아 청소년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신장하고 문예 창작 활동을 고취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청소년 소월문학상'을 공모한다고 합니다. 학생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제 17회 청소년 소월문학상 응모 요강
1. 응모자격 : 전국고등학교 및 해외동포고등학교 재학생 2. 응모부문 : 시(3편~5편), 소설(A4용지 8장 이상) 3. 주 제 : 고등학생으로서 생각하기 적합한 주제 4. 응모방법 : ①응모원서(본교 소정양식, 복사사용 가능) *http:// kll.pcu.ac.kr(응모양식 다운 받으실 곳) ②작품 출력물 ③작품 CD, 디스켓 첨부 본교로 우송
5. 응모유의사항 : 동일 작품을 타 문학공모에 중복 투고하는 경우 두 곳 모 두 탈락. 6. 마 감 : 2009년 4월 24일(金)(마감일 소인분까지 접수받음) 7. 보 낼 곳 : (우)302-735 대전광역시 서구 연자 1길 14 (도마2동 439-6)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사무실 ‘청소년 소월문학상 담당자’ 8. 시상내역 - 부문별 대상/2인 : 상장, 상품 및 본교 국문과 입학시 2년간 학비 전액 면제 - 부문별 우수상/약간명 : 상장, 상품 및 본교 국문과 입학시 1년간 학비 전액 면제 - 부문별 장려상/약간명 : 상장, 상품 및 본교 국문과 입학시 1학기 학비 전액 면제 9. 수상작 발표 : 2009년 6월 중 10. 문의전화 : 042-520-5311, fax:042-520-5311 E-mail : dittybag@pc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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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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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안다. - 알프렌드 E. 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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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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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상의 특징
탈북하여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른바 새터민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사선을 넘어 어렵게 자유를 찾은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남한 사회에 빨리 적응하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 탈북 새터민들의 언어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발음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첫째, ‘ㅓ’가 ‘ㅗ’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다. 걱정〔→ 곡종〕, 건설〔→ 곤솔〕, 떠나지〔→ 또나지〕, 선생님〔→ 손생님〕, 어떻게〔→ 오또케〕, 어머니〔→ 오모니〕, 정신〔→ 종신〕.
둘째, ‘ㅡ’ 또는 ‘ㅗ’가 ‘ㅜ’로 발음되는 경향이 있다. 그게〔→ 구게〕, 그러니〔→ 구러니〕, 으로〔→ 으루〕, 은혜〔→ 운혜〕, 음식〔→ 움식〕, 크면〔→ 쿠면〕.
셋째, 발음이 약화되는 현상이 있다. 가공하고〔→ 가공아고〕, 갔어요〔→ 가서요〕, 개척할〔→ 개처갈〕, 돌아왔을〔→ 돌아와슬〕, 됐어〔→ 돼서〕, 모질지〔→ 모지지〕, 있어서〔→ 이서서〕.
넷째, ‘ㄴ’ 첨가 현상이 있다. 강요〔→ 강뇨〕, 경영〔→ 경녕〕, 모양〔→ 모냥〕, 운영〔→ 운녕〕, 중요한〔→ 중뇨한〕.
“선생님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머니의 걱정이 떠나지 않았습니다”는 〔손생님한테 오또케 말해야 할지 오모니의 곡종이 또나지 않았습네다〕가 될 것이고, “일이 그렇게 됐어. 자식으로서 부모의 은혜를 망각하고 말았어”는 〔일이 구러케 돼서. 자식으루서 부모의 운혜를 망각하고 말아서〕가 된다.
전수태/고려대 전문교수
딤섬
만두(饅頭)는 약 3000년 전 중국 광둥 지방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탄생 배경을 담은 이야기가 있으니, 제갈공명이 남만(南蠻)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풍랑을 재우기 위해 사람의 머리 대신 만두를 빚어 고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만두가 중국을 벗어나서 널리 퍼진 이제 그 원형을 원래의 표현인 ‘饅頭’로 가리키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만터우’라고 이르는데 소가 없는 찐 떡을 뜻하고, 일본에서는 아주 달리 ‘교자’(餃子, ギョ─ザ)라고 일컫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소가 있는 만두는 ‘자오쯔’(餃子)라 하며, 그 발음이 ‘交子’(‘자식을 내려주다’는 뜻)와 같아 예부터 길한 음식으로 친다고 한다. 요즘 유행하는 ‘딤섬’도 만두의 일종이다.
중국의 딤섬은 ‘차와 함께 즐기는 만두 형식의 간단한 음식’을 뜻하며 한입 크기로 만들고, 점심 식사로 2~3가지 딤섬을 먹거나 오후 간식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딤섬이 찐만두 형태로만 통하는 면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찐 것을 비롯하여 튀긴 것과 구운 것도 있어 수천 가지나 되며, 우리나라에서도 전문점에 가면 종류가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딤섬’이란 말이 중국의 표준어는 아니며, 딤섬이 발달한 광저우 지방의 사투리 발음에서 유래하였고, 표준어로는 ‘뎬신’(點心)이 된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어중이떠중이
학원사 <고사성어>에 ‘어중이떠중이’(오합지중)를 “마구잡이(맹목적)로 모여든 무리들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후한서> ‘경엄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서기 23년 유현이 황제에 오른 한나라는 평온하지 않았다. 한단에 터를 닦은 왕랑은 사뭇 세력이 강했다. 그는 본디 점쟁이였는데, 성제의 아들 유자여라고 하여,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앉아 군대를 강화하고 천하를 노리고 있었다. 상곡 태수 경황의 아들 경엄은 젊었어도 생각이 깊고 병법에 능한 인물인데, 아비의 명을 받아 왕랑 토벌에 참가했다. 그런데 부하 장수 중에 왕랑의 꾐에 빠져 정통을 이은 한나라 천자인 줄 알고 그에게 붙좇는 자가 있었다. 경엄은 그들 부하 장수들을 불러, 왕랑의 잔꾀를 일러 주며, 그를 물리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큰소리를 땅 쳤다. 그 말 중에 “돌격대를 보내 어중이떠중이(오합지중)를 짓밟는 것은 고목을 꺾고 썩은 것을 부수는 것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 있다.
‘어중이떠중이’(오합지졸·오합지중)가 여기서 생긴 말이다. 이 밖에 <사기>에 ‘끌어모은 무리’(규합지중), 또는 ‘뭇사람 모임’(와합지중)이란 것도 있다. 모두 “보잘것없는 무리”라는 뜻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개밥바라기
저녁 무렵 어둑해지면 서쪽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있다. 개밥바라기다.‘바라기’는 작은 사기그릇을 말한다. 이 별은 저녁샛별, 어둠별, 태백성, 장경성(長庚星)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일상적으로는 금성이라고 부른다. 지구의 안쪽에서 태양 주위를 도는데, 저녁과 새벽에 선명하다. 새벽이 되면 샛별, 계명성(啓明星), 명성(明星)이 된다.
파열음
허파에서 숨이 나오고 한순간 막혔다 터진다. 이때 내는 소리가 파열음 곧 터짐소리다. 소리는 혀 뒷부분과 여린입천장(연구개) 사이에서 터지고(ㄱ,ㄲ,ㅋ), 혀끝과 잇몸에서 터지며(ㄷ,ㄸ,ㅌ), 두 입술 사이에서도 터진다(ㅂ,ㅃ,ㅍ). 우리말에서는 ‘ㄱ,ㄲ,ㅋ,ㄷ,ㄸ,ㅌ,ㅂ,ㅃ,ㅍ’ 이렇게 아홉 개가 파열된다. 폐쇄음이라고도 한다.
냄비, 남비
성탄절이 가까워 오던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조셉 맥피라는 구세군 사관은 재난을 당한 1000여 도시 빈민을 먹여 살릴 궁리를 하다 집안에서 사용하던 큰 솥을 들고 나가 거리에 내걸고 도움을 호소한다. 1928년 12월 15일 서울.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던 박준섭은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시작한다.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에 울려 퍼지는 자선의 종소리는 지나는 사람들의 가슴을 데우며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했다. 이 냄비는 오래도록 '자선남비'로 불렸다. 과거에는 '남비'가 일본어 '나베(鍋)'에서 온 말이라 하여 원형을 의식해 '남비'로 표기했으나 1988년 규정을 개정하면서 'ㅣ'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냄비'를 표준어로 삼았다. '서울나기' '풋나기' 등 '-나기'도 '-내기'로 함께 바뀌었다. 구세군 '자선남비' 역시 '자선냄비'로 이름을 바꾸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자선남비'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올해 자선냄비는 24일로 거리 활동을 마감했지만, 경기침체와 몇 년 만의 한파로 불우이웃들에겐 어느 해보다 도움이 절실한 겨울이다.
그저, 거저
"모나리자는 행복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한없이 슬픈 것 같기도 한 모나리자의 미소. 최근 컴퓨터로 표정을 분석한 결과 혐오감ㆍ두려움ㆍ분노가 얽혀 있긴 하지만 행복한 감정이 83%로 나타나 흥미를 자아낸다.
'그저'는 '그냥 하염없이' '아무 조건 없이' 등의 뜻으로 "제설차량 지원은 꿈도 못 꾼 채 그저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 "이재민을 따뜻하게 맞아 주는 그들의 온기가 정겹고 그저 고맙기만 하다"처럼 쓰인다. 그런데 이를 '거저'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간혹 본다. 발음이 비슷해 헷갈리기 쉬우나 뜻이 다른 낱말이므로 구분해 써야 한다.
'거저'는 '아무런 노력이나 대가 없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빈손인 상태'를 가리킨다. "농구에서 가로채기는 2점을 거저 얻는 것이나 같다" "아무리 급해도 환갑잔치에 거저 갈 수는 없다"처럼 쓰인다. 힘을 들이지 않고 일을 해내거나 어떤 것을 차지하는 것을 '그저먹다' '그저줍다'고 하는 예가 있으나 이 역시 '거저먹다' '거저줍다'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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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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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破紙) - 천양희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증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을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천양희 시집"너무 많은 입"[창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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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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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기행(1) - 김옥정 - 피아골
무시로 흔들리는 역사의 난기류 속을
표표히 떠돌다가 낙화 된 못 목숨이
피아골 먹빛 골짜기에 떼바람으로 눕던 날
풀꽃도 숨을 죽인 골 안 숲을 내려 깔고
혼자 애탄 뻐꾸기가 토해 놓은 붉은 울음
묵묵히 앉은 바위 얼굴 돌이끼로 가려 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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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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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2
4. 자신의 꿈을 이루는 일에 대하여
살아야 할 이유
(인간 의미 추구)의 저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사람이다. 그는 독일계 유태인 정신과 의사로서 수만 명이 학살당한 곳에서 살아남았다. 열악한 음식과 환경, 아무 의료 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동료 유태인들은 수없이 죽어 갔지만 그는 죽음을 이겨냈다. 전쟁이 끝난 뒤 석방된 그는 어떻게 해서 그 지옥 같은 곳을 살아 낼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어떤 힘을 그는 갖고 있었는가? 어떻게 생존을 지속할 수 있었는가? 프랭클 박사는 대답했다.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는가는 내 선택에 달린 일임을 난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난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고 희망 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선택하기 위해선 내가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에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난 내 아내의 손에 생각을 집중했다. 그 손을 한번만 더 잡아 보고 싶었다. 한번만 더 아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한번 더 껴안을 수 있고, 가슴과 가슴을 맞댈 수 있기를 난 간절히 원했다. 그것이 내 생명을 일초 일초 연장시켜 주었다."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에 갇힌 다른 포로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배급되는 음식은 국 한 그릇에 완두콩 한 알일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쓸모 없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들에 절망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 버리는 대신 그는 단 한 가지의 목표에 마음을 쏟았다. 자기 자신에게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주었으며, 그 이유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그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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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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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4장 지혜의 메아리
법
법보다는 진실과 양심을 앞세워라.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철두철미하게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바르고 떳떳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적인 진실과 양심이다. 법을 너무 맹신하지 말아야 한다. 사소한 분쟁만 벌여져도 법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비인간적인 정서에는 법이 어울릴지 몰라도 인간적인 정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로지 잘잘못만 따져서 편을 갈라 놓는 법의 심판은 진실과 양심을 앞세우고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인간적인 정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법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으로써만 동원해야 한다. 모든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해 보고서 그래도 안될 경우에 한해서만 법에 의지해야 한다. 법에 호소하면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 관계의 단절은 막지 못한다. 법은 승자의 손을 들어주는 동시에 패자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인간 관계를 극과 극으로 치닫게 한다.
분쟁 해결도 중요하고 손익 계산을 정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정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서로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는 인간 사회에서 인정은 그 어떤 이익보다도 크고 값진 것이다. 돈 몇 푼 받자고 친구간의 우정(의리)을 깨고, 조금 더 편하게 살아 보겠다고 이웃간의 정을 깨는 것은 빈대 몇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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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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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2장 동양문학
감자 - 김동인(1900-1951)
환경적 요인이 인간 내면의 도덕적 본질을 타락시켜가는 과정을 그린 자연주의 작품으로,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자란 여주인공 복녀가 환경의 노예가 되어, 도덕성 제로상태의 동물인간으로 타락해가는 과정을 폭로하고 있다. 특히 결말 부분 복녀의 시체를 놓고 왕서방과 한의사, 복녀남편 사이의 금전거래 장면은 비정한 인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체. 짜임 등에서 한국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생애와 작품활동
이광수와 함께 한국근대소설의 선구자 김동인은 자연주의 작가, 탐미주의 작가(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 작가)로 불린다. 호는 금동. 춘사. 평양의 대부호의 아들로 출생하여 금시계가 아니면 차지 않을 정도로 유아독존격으로 성장했다. 1912년 김동인은 기독교계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나, 성경과목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중퇴, 1914년 도일하여 1917년 일본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한다. 그의 유학의 본래 목적은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으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의 자존심과 빈번한 영화감상, 탐정소설과 문학작품 탐독으로 점차 예술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가 당시 가장 경모한 작가는 톨스토이뿐으로, 그를 제외한 문학, 특히 일본문학은 경시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작가라 경멸한 작가였다. 1917년 메이치 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부친 사망으로 일시 귀국, 이듬해 거부의 딸 김혜인과 결혼하고 다시 도일하여 그림에 뜻을 두어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그의 문학적 경력은 1919년 전후해 시작되는데,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1919)를 도쿄에서 자비로 간행했으며, 여기에 우리말로 쓴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같은해 3월 3. 1운동으로 귀국, 아우의 부탁으로 격문을 초하여 주었다가 출판법 위반협의를 받아 6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단편 피아노의 울림, 중편 마음이 옅은 자여를 발표하여 문학비평가의 역할의 문제를 에워싸고 염상섭과 논쟁을 벌인다. 1921년에는 그의 대표적 단편 중의 하나로 쾌락주의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한 심미주의 사상을 표현한 배따라기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 무렵의 김동인은 경영난으로 <창조>를 폐간하며, 사적으로는 화류계 여성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방탕한 생활을 시작한다. 방탕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작품을 발표하여, 1923년에는 단편 이 잔을, 태형 등을 발표한다. 특히 이 잔을은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그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보여주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이어 환경 결정론의 사상이 엿보이는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 감자, 시골 황서방, 눈보라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수년간의 방턍생활로 많은 가산을 탕진했을 뿐만 아니라, 잇따른 사업의 실패, 부인의 가출과 이혼으로 인한 가정파탄 등으로 불행과 시련을 겪게 되며, 정신적인 고초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시련의 몇 년을 지내 후 1929년경부터는 그는 다시 창작활동을 재개, 단편 광염 소나타 를 발표하는데, 1935년에 발표하는 광화사와 함께 악마적 심미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1930년 재혼한 김동인은 1932년까지 많은 장. 단편을 발표한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죄와 벌, 신앙으로,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 등이 있다. 이중 신앙으로는 극심한 삶의 시련을 겪은 후 그의 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며, 붉은 산은 그의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동인은 1933년 장편 운현궁의 봄을 발표하나, 모친 별세를 당하고 이후 불면증 증세가 악화되어 강한 최면제를 복용하게 되어 약물중독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이광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작가론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우수한 평론의 하나로 인정되는 춘원연구를 비롯, 나의 문단생활 회고기를 발표한다. 1935년경에는 그의 순수 문학적 창작활동은 이미 현저하게 감퇴되어 광화사 외에 1938년에 단편 가두, 1939년에 김연실전, 1941년에 곰네 등의 발표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문학외적 활동으로 1939년 박영희. 임학수 등과 함께 소위 북지황군위문작가단 의 일원으로 1개월간 만주를 다녀옴으로써 민족적 분노를 사기도 한다.
방탕한 생활과 사업의 실패로 재산과 아내를 잃고 초래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문. 잡지 등에 닥치는대로 역사소설 사담 등을 썼으며 아편중독에 불면증까지 걸렸다. 6.25중에 서울 자택에서 중병으로 사망했을 때 누구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비참한 최후였고,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현재 <조선일보>사에서 동인문학상을 제정, 수여하고 있다.
문학적 특성
간결한 문체와 양식적 완결성이 잘 드러난 그의 작품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또한 모든 작품에서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적 교훈주의를 배척하고,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운 순수문학운동을 벌였다. 그의 작품의 한국문학사적 업적을 요약해보면, 1.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서구적 자연주의 경향의 문학을 확립했으며 2. 본격적인 단편소설(배따라기, 붉은 산)을 개척한 점(그는 단편에서는 성공했지만 장편에서는 장편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3. 단편이 지니는 속성의 하나인 유머와 위트, 패러독스를 단일한 구성 속에 도입했으며 4. 문장을 혁신했고 5. 사재를 들여 본격적인 순수문예지 <창조>를 발간한 점 6.구어체 문장을 개척한 점 7. 근대적 문예비평을 개척한 점을 들 수 있다. 김동인은 그의 조선근대소설고에서 이광수의 불완전한 구어체 문장에 대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창조> 동인은 보다 철저한 구어체 문장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주장하며, 그 특징으로 1. -더라 , -이라 등의 구두에서 탈피, 2. 현재형 시제에서 과거행 시제의 개척 3. 영어의 He, She 등을 그 라는 대명사로 표기한 점 4. 사투리의 처음 사용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김동인의 문학적 특성은 일찍이 백철이 그를 예술지상주의 작가로 규정한 이래 김동리에의해 자연주의의 작가, 혹은 조연현에 의하여 예술지상적 또는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다양하게 규정되어왔다. 이러한 여러 규정은 김동인 문학세계의 다양성 혹은 그 사조적 바탕의 혼재성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계속 논란의 여지는 있다. 결국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주의와 유미주의의 두 봉우리로 가름할 수 있는데, 그 대표작이 감자와 광화사 다.
자연주의
자연주의 문학이 인생을 위한 예술 이라고 한다면 탐미주의 문학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인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연주의다. 20년대에 한국문학에 수용, 혼류된 근대적 문예사조의 하나로서 자연주의의 가장 뚜렷한 영향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작가가 김동인이다. 그의 문학의 자연주의적 특성은 물질주의적. 결정론적 인간관과 반도덕성 등으로 그의 문학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유년기부터 욕구충족이 용이한 부유한 가정환경과 그의 선천적 기질로 말미암아 청년기에는 강렬한 쾌락주의적 인생태도를 지니게 된 듯하다. 전통적인 신앙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궁극적, 초월적 근거인 신에 대한 이러한 거부의 태도 속에는 인간을 다만 자연적. 동물적 존재로 규정하는 물질주의적 인간관과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감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인간관과 가치관을 완전한 형식을 통하여 극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있게 자란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기품을 가지고 있는 복녀라는 한 여인이 생존을 위협하는 가난한 환경 때문에 도덕의식을 상실하고 동물적 인간으로 점차 타락해,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자적인 냉정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감자에서 작자는 반사회적인 환경으로 인해 도덕성을 상실하고 동물적 존재로 전락해가는 한 여인의 삶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존재와 운명의 결정요인으로서의 환경을 강조하는 환경결정론 과 도덕적 가치부정의 자연주의적 인간관 가치관을 구현하고 있다.
탐미주의
김동인의 반도덕적이며 병적 광기를 내포한 쾌락주의는 그가 자연주의적인 일련의 작품들을 창작하던 1920년대 전반에 걸쳐 그의 삶을 지배한 듯하다. 그는 수년간 광포한 방탕생활을 하며 마침내 파산과 가정파탄이라는 개인적 파국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가 새롭게 출발한 사상이 감자 등의 자연주의적인 작품을 통해 부정하고 거부한 신이나 도덕 대신 그가 진정한 가치로 선언한 미 가 절대적 가치로 지향의 대상이 되는 소위 탐미주의다. 이러한 사고의 기초 위에서 탐미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는 두 작품 광염 소나타, 광화사가 창작되며, 이들 작품에서 작자는 일찍이 그가 보인 이광수식의 계몽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대입장과는 달리, 직접 그의 탐미사상의 설교사가 된다. 김동인의 탐미사상은 사상적으로 미숙한 것으로 그의 탐미주의 작품은 근원적인 예술충동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예술지상론을 펴기 위한 이데아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탐미주의는 그의 자연주의 작품에 비해 작품적 실천에 있어 뚜렷한 성취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 점은 가령 오스카 와일드 같은 외국의 탐미주의 작가들이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의 형식이나 기교를 중시하며, 어휘나 문체의 미적효과나 작품의 미적구성에 큰 비중을 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
복녀 : 규율 있는 출신이지만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아 전락, 비극적 죽음을 맞음. 남편 ; 천성적 게으름뱅이. 아내로 하여금 매음으로 돈을 벌게 하고 자신은 무위도식함. 왕서방 : 중국인 지주. 한동안 돈으로 복녀를 샀다가 본부인을 얻게 되자 냉정하게 복녀를 버림.
작품의 주요내용
무대는 싸움. 간통. 살인. 도둑. 징역 등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이다. 복녀는 원래 가난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율있게 자라난 처녀이다. 이러한 복녀가 전락하는 것은 극도로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과 결혼하고 부터다. 복녀를 데려오느라 조금 있던 재산을 다 써버린 20년 연상의 남편은 게으름과 불성실한 처신으로 호구의 방책을 놓쳐버리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로부터 전락을 거듭하게 된 복녀의 집은 마침내 칠성문 밖으로 나앉게 된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다간 굶어 죽을 판이 된 복녀는 거지로 나선다. 그러나 젊은 나이의 그녀에겐 그 일조차도 쉽지 않다. 그리하여 복녀는 하루 32전 벌이인 송충이잡이에 나선다. 매일 송충이잡이를 나가던 복녀에게 이상한 현상이 눈에 뜨인다. 젊은 여인들 몇이 늘 놀다시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비결이 다름아닌 몸을 파는 것임을 알게 된 복녀는 자신도 못 이기는 체 이러한 거래에 동참하게 된다. 막상 나서니 이보다 좋은 벌이가 없다. 사람으로 못할 일도 아니고, 일 안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재미가 있고,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로 복녀는 점점 도덕의 구속으로부터 일탈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복녀는 감자밭에 들어가 감자 몇 알을 훔치다 밭 주인인 중국인 왕서방에게 들킨다. 이미 자기 육체의 위력을 알고 있는 복녀는 왕서방에게 죄값으로 몸을 주고 오히려 돈까지 얻어 나온다. 이로부터 왕서방과의 관계는 남편이 묵인하는 가운데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왕서방이 정식으로 부인을 얻어 성례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서방으로 인해 신세가 바뀌어지고 있던 복녀는 이 소식을 듣고 눈이 뒤집힌다. 왕서방의 혼례가 있던 날 밤, 복녀는 낫을 준비하여 강짜를 부리지만 그날 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나오는 것은 복녀의 몸뚱아리다. 낫을 들고 강짜를 부리다 그 낫을 왕서방에게 빼앗겨 오히려 자신의 목을 찔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녀가 죽은 뒤 사태수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사흘이 지났다. 한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체 앞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의사, 왕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세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다음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사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실려갔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김동인의 문학은 춘원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문단 선배인 이광수와 깊이 연계되어 규정된다. 이는 김동인이 춘원의 소설을 사회교화 도구라 비판하고 자신의 문학적 지향을 참인생. 참예술의 완성에 두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1925년 <조선문단>에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몇몇 프로 비평가들은 빈궁한 삶을 소재로하여 그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를 신경향파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감자에서 작가의 관심은 사회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분노를 터뜨리는 데 있지 않다. 정직한 농가에서 절도있게 자란 처녀인 복녀가 빈민굴의 매음녀가 되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이 별다른 감정없이 그저 제시되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얌전한 농가에서 빈민굴로 전락)에 따라 복녀라는 인물은 변화한다. 입체적인 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정론 의 영향을 여기서 볼 수 있는데, 이런 변화에 의해 감자의 인물들은 어떤 자의식도 갖지 못한다. 몸을 팔아 번 돈을 남편에게 자랑스럽게 내 보이는 복녀나, 아내의 죽음을 30원과 맞바꾸는 남편에게는 윤리나 도덕에 대한 의식이 없다. 그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뿐이다. 이런 특징들, 특히 결정론의 영향을 지적하는 데서 감자 를 자연주의로 보려는 견해가 생겨난다. 김동인의 작품 중 자연주의라는 평을 듣고 있는 것에는 배따라기, 감자, 김연실전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감자는 자연주의의 정신이 잘 구현되어 있다는 평을 받는다. 도덕이나 윤리. 법이라는 치장을 걸치기 전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잘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감자는 김동인이 지향한 문학정신의 한 결정체라 할 작품이다. 한국의 근대단편이 시작된 이래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로 창조된 복녀, 결정적 반전으로 경악을 안겨주는 극적인 구성, 이에 동원된 간결 명료한 문체, 특히 감자 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평가되는 방언의 문체화, 이런 것들은 김동인이 한편으로 춘원을 시샘하며 한편으로 그를 극복하고자 하였기에 이룰 수 있었던 대표적 성과다. 그러나 이 작품도 김동인의 문학을 말할 때 흔히 지적되는 역사의식의 부재 라는 한계 안에 갇혀 있다는 비판은 면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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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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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선비가 사는 방식 - 각의
뜻을 닦고 행동을 고상하게 하며, 세상을 떠나 세속과는 달리 처신하고, 높은 이론과 원망, 비방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은 산골의 선비이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마른 몸으로 못에 뛰어드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인의와 충신을 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겸양하여 몸을 닦는 것은 평범한 세속의 선비이다. 남을 선한 곳으로 이끌려는 사람이며, 유세하거나 머물면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큰 공을 말하고 큰 이름을 내세우며, 군신의 예를 지키고 상하를 바르게 하여 다스리려는 것은 조정의 선비이다. 임금을 존중하고 나라를 강하게 하는 사람이며, 공을 세우고 남의 나라를 삼키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숲이나 진펄을 헤치고 광야에 거처하며, 고요한 곳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무위를 즐기는 사람은 강해*의 선비이다.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한가한 것을 좋아하여 심호흡으로 썩은 것을 토하고 새것을 마시며, 곰처럼 매달리고 새처럼 펴며 장수를 위하는 사람은 도인*의 선비이다. 형체를 기르는 사람이며, 팽조처럼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만약에 갈지 않고도 높고 인의가 없이도 닦아지며, 공명이 없이도 다스려지고 강해가 없이도 한가하며, 도인하지 않고도 장수한다면 일체를 망각할 수도 있고 일체를 소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음은 한 극단에 서지 않고 뭇 아름다움이 그를 따를 것이다. 이것이 천지의 도며 성인의 덕이다. 그래서 '비고 적막하고 허무한 가운데 무위하는 것이 천지의 고른 것이며, 도덕의 근본이다. '라고 하는 것이며, 또 '성인은 여기서 쉰다.'고 하는 것이다. 쉬면 평이해지고, 평이하면 염담하게 된다. 평이하고 염담하면 우환이 들어오지 못하고, 사기가 내습할 수 없다. 이렇게 하면 그 덕이 온전하게 되고 정신은 이지러지지 않게 된다.
* 강해 : 강호를 일컫는다. * 도인 : 정좌하여 호흡을 조절하는 도가 양생법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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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한 행동과 고답적인 담론으로 세상을 비방하고 사람을 원망하는, 혼자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산골의 선비들이다. 그들은 불평하거나 괴로운 나머지 물에 빠져 죽기 일쑤다. 인의와 충신을 말하고 공손하고 겸양하며, 오로지 자기 몸을 닦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세속의 선비들이다. 이들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동시에 남을 착하게 이끌고자 하며, 천하를 유세하거나 교육에 종사하고 있다. 반면에 큰 공업을 말하고 큰 이름을 세우며, 군신간의 예의와 상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조정의 관리들이다. 그들은 임금을 받들어 나라를 강하게 하고자 하며, 혹은 공을 세워 남의 나라 땅을 병탄하려 든다.
또 시골로 돌아가 무위를 즐기는 강해의 선비들은 세상을 피하거나 한가하게 지낸다. 심호흡을 해서 묵은 공기를 토하고 새 공기를 들이마시며, 곰처럼 거꾸로 나무에 매달리고, 새처럼 몸을 펴서 장수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도인의 선비들이다. 이들은 신선술로 양생하고자 하며, 팽조처럼 장수하려 든다. 하지만 뜻을 갈지 않아도 행동이 고상하고 인의가 없이도 몸을 닦으며, 공명이 없이도 나라를 다스리고 강해가 없이도 한가하며, 도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오래 살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도 어느 것 하나 없는 것이 없고, 마음이 텅 비어 모든 아름다움이 스스로 따를 것이다. 이것이 곧 천지의 도이며 성인의 덕이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허심하여 고요하며, 허무 속에서 무위의 덕을 지키는 것이 천지에서 가장 평화로운 생활 방식이며 도덕의 본질'이며, '성인은 허심, 고요, 허무, 무위의 경지에 쉰다.'고 말했다. 무위에 쉬면 마음이 고요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곧 편안할 것이다. 또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면 근심 걱정이 깃들지 않고, 나쁜 기운도 그를 덮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의 덕이 온전할 수 있고, 정신도 손상되는 일이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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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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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이 피네 - 법정 스님(류시화 엮음)
8. 수도자가 사는 집
올 봄은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말씀이 진실임을 터득하였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며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을 뜻한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할 수 있다면 이런 오두막에서 이다음 생으로 옮아가고 싶다. - 법정 스님 수상집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여름 장마가 찾아와 산에 물이 불었다. 전에 없던 개울이 생겨나고 쏜살같은 급류가 오솔길을 무너뜨리고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시중에 볼일이 있어 오두막을 나선 스님은 예기치 않게 그 급류와 맞닥뜨리게 되셨다. 개울은 제법 폭이 넓어 간단히 뛰어넘기가 어려웠다. 자칫 발을 헛디뎌 급류에 휘말렸다간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발 아래로 꿈틀거리며 흐르는 거센 물줄기를 바라보며, 그 순간 스님은 문득 크게 무서워지셨다고 한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리고 다음 순간 ‘아, 아직도 내게 소멸의 두려움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그 급류 앞에 서서 자기를 되돌이키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나는 스님과 오랜 교분이 있으신 청학 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면서 청학 스님은 그분이 저토록 홀로 산중에 사시는 것에 대해 무척 염려하셨다. 그동안 스님을 만나오면서 내가 받은 인상은 그분이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매우 충실하다는 것이다. 많은 것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고, 그토록 이름이 나 있으면서도 명성이나 명예 따위를 썩은 감자처럼 여기시지만, 한 순간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작은 느낌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스님은 자주 인간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가끔은 옆구리에서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자신의 존재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생의 초월을 꿈꾸지만 막대기처럼 무뎌진 인간이 되고자 함은 아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되 오히려 눈과 귀, 오감 등을 활짝 열고 자신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에 반응하는 것이 명상의 목적이다. 스승의 죽음에 슬피 우는 임제 선사에게 다른 제자가 생사 해탈을 위해 공부하는 자가 어찌 그렇게 죽음 앞에서 초연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자, 임제 선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나도 죽음이 없고 태어남이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스승을 오랫동안 보아 온 내 두 눈이 이제 더 이상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나더러 그 눈물을 틀어막고 있으란 말인가.’ 여름 장마비가 내려 산중에 급류가 생겨났다. 오두막을 나서 그 급류 앞에 서 있는 스님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물론 그분은 급류도 뛰어넘고 자기 소멸의 두려움도 쉽게 뛰어넘으실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내 심정을 말하면 나 역시 그분이 저토록 홀로 산중에 살고 계시는 것이 때때로 걱정스럽고, 이제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 하고 따져 볼 때도 있다. - 엮은이
수도자가 사는 집
선정 삼매가 충만하길 빕니다. 건성으로 앉아 있지 말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살펴보십시오.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하고 순간순간 기쁨이 배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정진은 의무적인 행위가 아니라 침묵 속에 떠오르는 삶의 향기입니다. 중심이 잡히면 말이 필요없게 됩니다. 즐겁게 정진하는 것이 안거입니다. (여여선당에 보낸 편지에서)
서상대사의 <선가귀감>에 이런 법문이 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명예나 재산을 구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의 속박을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고 해서다.’ 이것이 바로 출가 정신이다.
인도의 위대한 시인 까비르는 이렇게 노래한다. ‘너는 왔다가 가는 한 사람의 나그네, 재산을 모으고 부를 자랑하지만 떠날때는 아무것도 가지 못한다. 너는 주먹을 쥐고 이 세상에 왔다가 갈 때는 손바닥을 펴고 간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물질적인 결핍이라든가 신체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다. 행복할 수 있는,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새로 핀 꽃을 보고 그 꽃에 매료당하는 것은 가슴의 영역이지 머리의 영역이 아니다. 생명의 신비는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또 가슴에서 온다. 삶의 부피나 덩이만 생각하고 삶의 질을 놓쳐 버리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명상을 왜 하는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선가귀감>은 말하고 있다.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이것을 깊이 새겨둬야 한다. 무엇인가 인위적으로, 억지로 바른 법을 찾느라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바른 법에서 멀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같은 경전은 말하고 있다. ‘중생의 마음을 버리려고 할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 억지로 바른 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바르지 못한 일이다. 오히려 본래의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따로 부처를 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얻어지는 게 아니다. 본래 청정한 마음,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최고의 정진이다. 정진이라는 것이 밤잠을 안자고 탐구하는 그것이 아니고, 본래 청정한 그 마음을 지키는 것, 본래 때묻지 않은 맑은 마음을 지키는 것 이라고 서산대사는 말하고 있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내 내면의 흐름을, 내 생각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달마는 ‘관심일법 총섭제행’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둬 들인다’는 뜻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우리는 이것을 일과 삼아서 해야 한다. 모든것이 최초의 한 생각에서 싹튼다. 이 최초의 한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까비르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 그대 몸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 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 수천 개의 그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안으로 살피라는 소리이다.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 수천개의 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 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그 아름다움을 묵묵히 지켜보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세상을 살 줄 아는 사람은 한 해가 지난다고 해서 더 늙지 않는다. 수행자는 그런 덧없는 세월을 한탄할 게 아니라 그 세월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덧없이 살고 있는가, 무가치하게 살고 있는가를 되돌아봐야 한다. 나는 설이 되면, 해가 바뀌면 늘 그렇게 한다. 과연 내가 한 해 동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얼마만큼 잘 썼는가. 그것이 과제처럼 내 앞에 다가온다. 어떤 때는 고맙게 여길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우회스러워질 때도 있지만, 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맞는다.
출가자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출가했고, 어떤 것이 진정한 출가자의 본분이고 삶의 태도인가를 생각한다면 이백오십가지 계율을 낱낱이 챙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생활 자체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도 늘 그것을 반성하고 있지만, 진정한 출가 정신을 가지려면 가난해야 한다. 옛 수도자들은 다 가난했다. 풍족한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도전이다. 모든 것이 풍부한 이런 세상에 수도자들이 살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풍요로운 물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하나의 과제다. 그러므로 출가자는, 수도자는 우선 가난해야 한다. 가난이 기본이다. 가난해야 그 속에서 진정한 수행이 이루어지고 그 정신이 맑아진다. 옛 수행자들의 덕이란 무엇인가, 청빈의 덕이다. 청빈의 덕을 우리가 몸과 마음에 익힐 때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있는 것이지, 머리만 깎고 먹물 못만 입었다고 해서 불제자라고 할 수는 없다. 절집안은 청정이 생명이다. 청정이란 오염되지 않은 본래 순수한 그런 상태를 말한다. 무엇보다 청정성의 회복이 가장 시급하다.
수도자가 세상의 흐름에 대해 너무 어두워도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세상 흐름에 편승하는 것도 수도자답지 않다. 개인의 능력이나 희망에 따라 새로운 정보에 대한 지식들을 갖추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래야 그 사회를 알고, 그 사회를 바르게 이끌 테니까. 그러나 내 개인적인 바람은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처럼 좀 고색창연한 그런 수도자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이 닳아빠진 현대 사회에 큰 기여가 될 것이다. 어설프게 현대화의 물결에 편승해서 마치 수도자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양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거기서 무엇이 얻어지겠는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불철주야 외곬으로 파고드는 그런 수행자 역시 소중하다. 왜냐하면 그도 한 몫을 하고 있지 때문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다. 우리가 마음의 수양을 하고 개인의 수행을 한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만 멈추라는 것은 아니다.
맑은 영혼이 빠져 나간 얼굴, 그것은 빈 껍질이다. 혼이 없는 얼굴은 빈 껍질이다. 숨쉬는 시체에 불과하다. 맑은 영혼이 깃들지 않은 미모는 마치 반짝이는 유리로 해박은 눈과 같다. 유리로 어떻게 사물을 식별하고 감상할 수 있는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려면 영혼을 맑고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 얼굴이란 무엇인가. 얼의 꼴이라는 뜻히다.‘얼’을 아름답게 가꾸면 그 꼴인 얼굴은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나는 이틀이든 사흘이든 집을 비우고 나올 때는 휴지통을 늘 비워 버린다. 거기에 거창한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고 끄적거리다 남은 종이쪽이거나 휴지조각 같은 것들인데 일단 불에 태워 버리고 나온다. 내가 집을 떠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할 때 남긴 물건들의 추한 꼴을 남한테 보이기 싫어서다. 그래서 그때그때정리해 치운다. 이제 곧 가을이고 조금 있으면 나무들이 잎을 다떨어뜨린다. 계절의 변화를 보고 ‘아, 세상이 덧없구나. 벌써 가을이구나. 어느덧 한 해도 두달밖에 안 남았네’ 하고 한탄하지 말라.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낙엽이나 열매들이 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고 있는가. 비본질적인 것, 불필요한 것은 아깝지만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홀가분해진다. 나뭇잎을 떨어뜨려야 내년에 새 잎을 피울 수 있다. 나무가 그대로 묵은 잎을 달고 있다면 새 잎도 피어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매순간 어떤 생각, 불필요한 요소들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새로워지고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그렇지 않으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사람이다. 맨날 그 사람, 똑같은 빛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어떤 틀에 박혀 벗어날 줄 모르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낡은 것으로부터, 묵은 것으로부터,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거듭거듭 털어 버리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수도자는 앉는 자세가 일반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늘 허리를 바짝 펴야 한다. 허리를 바짝 펴면 정신이 가장 맑아진다. 허리가 삐딱하면 정신이 죽어 있는 것이다. 남의 흉을 많이 보는 사람은 허리가 삐딱해진다는 말이 있다. 허리를 바짝 펴면 남 흉볼 여력이 없다. 허리를 바짝 펴면 눈이 저절로 자기 코끝으로 온다. 자기 허물만 살피는 것잉지 남의 허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도 기대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의 등뼈에 의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진리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의 등뼈 외에는 어는 것에도 기대지 않는 안정된 마음이야말로 본래의 자기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론 순간순간 죽어간다는 소식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녹스는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홀로 있으려면 최소한의 인내력이 필요하다. 홀로 있으면 외롭다고 해서 뭔가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는 버릇을 버려햐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자기 영혼의 투명성이 고이려다가 사라져 버린다. 홀로 있지 못하면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는다. 홀로 조용히 사유하는, 마음을 텅 비우고 무심히 지켜보는 그런 시간이 없다면 전체적인 삶의 리듬 같은 것이 사라진다. 삶의 탄력을 잃게 된다.
명상은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려면 맑고 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명상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훈련이다. 명상은 절에서, 선방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서 겹겹으로 둘러싸인, 겹겹으로 얽혀 있는 내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서 무심히 주시하는 일이다. 연꽃은 아침 일찍 봐야 한다. 오후가 되면 벌써 혼이 나가 버린다. 연꽃이 피어 날 때의 향기는 다른 꽃에선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그리고 연잎에 맺힌 이슬방울, 그것은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 또는 비오는 날 이렇게 우산을 받고 연못가를 배회하고 있으면 후둑후둑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명상은 바로 마음을 열고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일과 같다.
사랑이 우리 가슴 속에서 싹트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진정한 탄생이고 부활이다. 사랑이 우리 가슴 속에서 태어나는 순간, 다시 말해 겹겹으로 닫혔던 우리 마음이 활짝 열리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사랑과 거듭남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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