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90가지 - 자크린느 클랭 옮긴이 : 최복현
1. 불확실한 경계 (2/2)
대가 없이 마음을 주는 것
역사 속에 남겨진 업적들 가운데 우정에 대한 부분은 보잘 것 없는 가문처럼 취급된 채, 유명인사가 된 부부들과 위해한 사랑 이야기에 특혜를 주고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씌어진 도덕론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절]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아들 니코마크에게 헌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선, 행복, 덕성, 정의, 우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철학은 자유인, 교양인, 성찰인, 덕을 실해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우정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덕'이며, 어쨌든 '우정이 미덕을 동반하게 될 때 유용성과 매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정은 애정, 기쁨, 도움 협동심을 바탕에 깔고있습니다. 만일 도덕적인 감정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정은 곧 사라져버릴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정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우정은 상호 관계 또는 상호성 속에서 두 사람의 인격적인 동등함을 전제로 하고 있고, 권리가 내포돼 있는 정의, 의무, 의연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흥미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우정은 자신의 친구를 위해 선행을 하거나 어쨌든 그렇게 해 보이는 것을 원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진실한 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위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원전 1세기경 키케로는 정치에서 은퇴한 후 딸 튈리아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까다로운 여인 테랑시아와의 어려운 부부 관계에 대해 철학적인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달랬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우정론]에서는 렐리우스가 등장해서 말을 합니다. 이 책은 인간의 삶에 활력을 주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태양에 대한 진정한 찬가입니다.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시각을 뒷받침하면서 "나의 견해는 선한 사람들 사이에만 우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미덕만이 두 명의 진정한 친구를 만들어주며, 그 들 사이에 우정이 지속되도록 해준다"라고 주장합니다. 키케로는 혈연 관계보다 우정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정은 예의와 애정 없이는 생길수 없습니다. 반면에 혈연 관계에는 마치 반감, 악의, 증오 등이 그속에 들어 있기라고 한 것처럼 이러한 감정이 머물러 있습니다. 키케로는 덕성의 세계에서 우정을 너무 높게 위치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우정의 최고 경지에는 최고의 선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이것은 때에 알맞고 부담이라고 없는, 우아함으로 가득 찬 관계입니다. 우정에서 존경을 따로 떼어낸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를 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정은 점착력이며, 경쟁심이며, 서로간의 '완전한 일치'입니다. 키케로는 이것이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자신의 마음을 주는 것이지, 필요에 의해서나 그로 인해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라고말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나 때문에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이 중에서 일부분을 우정에 힐애했습니다. 그는 보편적인 우정과 완벽한 우정을 구별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여성들은 완벽한 우정을 나누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되는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우정의 아름다움은 정신적인 질서에 있으며, 우정은 영원과 절대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완벽한 우정을 나누기 어렵다는 것인데, 여성은 정말로 이러한 경지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걸까요? 철학자가 알고 있는 '진귀하고 품위 있는' 우정이란 같은 이상, 지적인 교류, 생동감 있는 애정의 공유로 자라납니다. 연인들이 사랑을 나눌 때 오로지 육체적인 결합에만 열중하고 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친구들은 '두 몸으로 이루어진 한 영혼'으로 살아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몽테뉴가 말하는 우정은 다른 감정과 비슷하게 우정이 심리학의 영역에 가지런히 놓여지는 대신,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즉 우정은 영혼의 고양이며, 완전한 인격을 추구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정은 결코 다른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우정은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는 것이며, 잔인성이나 비속함들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이지요.
우정은 방황이나 편류를 배제합니다. 정신의 세계보다 상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별한 대우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우정을 나누는 것, 우정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이고 의식적인 일치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특별하고 영웅적인 우정이 있을 뿐이지요. 역사, 신화, 문학 등에서 그 사실을 잘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훈, 자신에 대한 초월, 지혜의 탐색, 이해 관계를 떠난 행동, 애타주의적 행동, 예술적인 착상, 철학적 성찰, 신성에 대한 사랑에 의해 두사람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아쉴르와 파트 피카소, 햄릿과 호라티오, 생 텍쥐페리와 귀요메, 카프카와 막스브로 등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친구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고대 수메르에서 생긴 문명이 우리가 사는 지구의 최초 문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놀랍게도 [길가메시의 서사시]가 두 남성간의 아주 아름다운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친구는 길가메시와 엔키두이지요. 여신의 아들인 길가메시는 유명한 건축가인데, 그는 우루크(Uruk)의 도시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엔키두는 여신의 명령으로 점토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무꾼과 유사하여 외딴 곳에서 살았으며, 미개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엔키두를 찾아온 한 시녀와의 만남이 그를 연마시켰고, 그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곧 사랑의 기술에 눈뜨게 되지요. 시녀는 그에게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그대는 또 하나의 다른 그대처럼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오" 라고 예언하면서 말입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위엄 있는 도시 우루크에서 엔키두는 처음으로 길가메시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갑니다. 비슷한 힘을 두 남자는 맞닥뜨려 싸움을 합니다. 하지만 싸움의 결과는 우정을 향해 문을 열게 됩니다. 이 우정은 상대의 강한 힘을 인정하는 것이며, 상대와 자신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또 갈등과 장점을 초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후로 엔키두와 길가메시는 서로 떨어질수 없는 형제가 됩니다. 그들이 함께하는 첫 모험은 '지상에서 악을 쳐부수는' 고상한 구상으로 시작됩니다. 5,000년이 지난 후에도 이 우정은 지혜, 불멸성, 선, 아름다움 진실의 추구를 통해 두 인간의 존재를 결합시키는 관계의 원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길가메시와 엔키둥의 우정은 찬사와 초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류하는 힘입니다. 우정은 각자를 더 훌륭하게 해 주었고, 그들 두 사람 모두에게 세상을 더 좋게 만들도록 부추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악은 지상에서 계속 번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정은 우리에게 내면의 정원에 자라는 잡초를 뽑게 하거나, 사막에 꽃을 피우게 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타인들과 세상에 대해 우정 어린 시선을 던진다는 것, 그것은 이미 지상에서 악을 물러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이러한 우정의 경험은 우정이 매력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화합으로 맺어지는 관계임을 알게 합니다. 곧 우정은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진실한 친구는 정신적인 여정에서 큰 도움을 줍니다. 이것은 우정의 심오한 의미이기도 하지요. 석가모니는 우정의 역할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만일 그대와 삶의 여정을 함께할 현명한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정복을 끝낸 후에 할 일 없는 왕처럼, 또는 숲속의 코끼리처럼 계속해서 고독하게 될 것이오."
우정에 접근한 여성들
지금까지 여성들은 우정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처럼 소외되어 왔고, 점처럼 우정에 끼여들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위대함과 고귀함, 완성미의 추구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졌지요. 실제로 남성들은 전쟁터에서 그들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가졌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고 넓혔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성들은 뒤에 숨어서 익명인 채로 생을 살아왔습니다. 남성들은 피의 의식에 의지함으로써(각자의 피를 섞거나 마심으로써)우애 관계의 협약을 교환합니다. 반면 육체와 관련된 사랑의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영웅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우정을 보유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끔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는 우정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면서, 일부다처제로 인한 의심, 증오, 질투의 감정이 여성들간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남성들이 오래도록 세상을 지배해 왔던 이유는 이처럼 여성들을 세분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서로 다투면서 적대감을 느끼는 동안 남성들의 힘은 더욱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성들은 수세기 동안 여성들이 우정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시켰던 걸까요? 남성들은 여성들이 지닌 감성, 감정의 최상권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혁명을 이루지 못하며, 감동이나 애정, 모성적 사랑으로는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남성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혈연관계와 생식의 필요성으로 인해, 남성들은 규방에 빗장을 지름으로써 남은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우정이 만일 영웅적인 특성과 다른 그 무엇이라면, 그리고 애정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면, 여성들은 보다 일찍 우정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또 여성들이 족장사회, 계급사회에서 우정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면, 그것은 동등성의 본질에 의해 그 관계가 자유(또는 반항)의 요인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여성들이 교양 있고 지적이며, 독립적이고, 남성들보다 상위에 있으며, 또 남성들을 초월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중세의 궁정 귀부인들, 17세기초에 글을 쓰거나 살롱을 운영하던 귀부인들, 철학자, 과학자, 작가들로 둘러싸여 있던 18세기의 그 유명한 귀족계급 부인들이 그녀들입니다.
라 브뤼에르는 "중세에 태어난 사람들의 순수한 우정에는 어떤 취향이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상 여성들은 지식에 접근하듯이 우정에도 접근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성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던 이중의 보루(자유,저항, 교리 등)을 비난했던 것이지요. 남자와 같은 능력을 갖춘, 자신의 여성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들은 우정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세는 사랑을 포르네이아,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등 네가 지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그것이 저속한 성욕이든 사랑의 욕구이듯, 우정이듯, 순수하고 보편적인 사랑이든 말입니다. 그런데 우정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고,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진정한 사랑과 가장 근접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필리아는 아가페의 시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가페의 대사라 해야겠지요.
필리아는 에로스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욕구, 육욕에 대한 갈증, 융화와 대상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취향을 가진 에로스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앙양시키는 교육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정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필리아에서 아가페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에로스에서 필리아에 이르는 것이 더 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