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96.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콜로 - 독일 통일(199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90년 한,소 수교
1990년 10월 3일 0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제국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빌리 브란트 전총리, 동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 데메지에르 총리,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 등 동서독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면 계단 앞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에 삼색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군중들은 일제히 독일국가를 합창했다. 자유의 종이 은은히 울려퍼졌다. 뒤이어 환성이 터지고 폭음소리와 함께 찬란한 불꽃이 치솟아 밤하늘을 수놓았다. 동서로 갈려 있던 독일이 45년 만에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앞서 2일 저녁 9시, 동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는 동독 정부 해체식이 거행되었다. 시종 무거운 분위기였다. 쿠르트 마주르의 지휘로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환희의 송가만 아니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착잡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통일 기념행사는 의외로 차분히 진행되었다. 3일 오전 11시, 카라얀의 옛집인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 홀에서는 통일 독일 출범행사가 개최되었다. 동독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가 맨 먼저 연단에 올라섰다.
오늘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무슨 일을 함께 하며 무슨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오후가 되자 브란덴부르크 문과 제국의회 광장은 다시 인파로 뒤덮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두 건물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주는 부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동독, 정식 명칭 독일민주공화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서독, 정식명칭 독일연방공화국이 면적 37만 5천km2, 인구 7천 760만 명을 가진 유럽의 거인으로 재탄생했다. 면적으로는 프랑스, 에스파냐 다음의 3위이지만 인구는 서유럽 제1위이며, 유럽 전체로 보아도 소련 다음 가는 대국이 된 것이다. 통일 이전의 서독은 국민총새산 세계 3위, 제일의 수출국, 유럽 공동체 공업생산량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동독은 동유럽 사회주의국 가운데 가장선진이었다. 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자유, 민주 를 외치는 10만 군중의 시위로 시작된 동독의 개혁은 꼭 일년 만에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에 의한 독일 통일로 종결되었다. 동독은 노동자들에게 버림받았다. 90년 3월 18일의 총선에서 동독 노동자들의 63%가 서독과의 급속한 통합을 지지하는 기독교민주연합 등 우익정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간 살아온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낳은 결과였다.
첫째, 당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당의 선전매체들은 항상 동독이 최고 라고 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동차를 사려면 15년을 기다려야 하고, 집을 얻으려면 1천 마르크의 뇌물을 줘야 할 정도로 부패가 만연했다. 노동자들 사이엔 다음과 같은 농담이 퍼져 있었다. 한 동독시민이 경찰에 가서 외국으로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는 동독으로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상하게 여긴 경찰이 어떤 동독으로 가고 싶으냐고 묻자,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동독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비밀경찰 슈타지의 감시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8만의 정규요원, 12만의 비정규요원을 거느린 슈타지는 직장뿐 아니라 사생활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비정규요원들은 월 1천 마르크와 자동차를 빨리 공급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자진해서 슈타지에 협력했다. 셋째, 공장경영에 대한 불만이었다. 극단적인 획일주의가 노동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렸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빈둥거리며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보수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간부들의 무사안일주의, 관료적 태도는 노동자들의 창의력을 결정적으로 파괴했다. 넷째, 낙후된 서비스 산업과 질 나쁜 소비재에 대한 불만이 컸다. 국가에서 경영하는 서비스 산업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에만 영업을 하기 때문에 라디오나 자동차가 고장나면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한편 좋은 품질의 소비재는 모두 수출되고 정작 국민들에게는 질 나쁜 것만 공급되고 있었다.
동독 노동자들의 불만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그들은 실업상태가 어떤 것인지 몰라 불안하기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일할 수는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실업자가 되는 게 나을지 모른다. 고 생각할 정도로 동독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들의 불만을 자유와 민주, 시장경제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다. 독일인이 통일 직후 가장 많이 쓴 말은 당케, 고르비 였다. 동독 정권이 위기에 몰렸을 때, 소련이 무력개입을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통일에 결정적인 일조를 했다는 뜻에서이다. 탈출하는 동독인에게 국경을 개방하여 통독의 기폭제 역할을 한 헝가리도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 대학의 철학교수 바바라 안더스는 동독의 변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동독의 비극은 지난해 필연적으로 발생한 민주혁명이 서독으로의 병합으로 끝났다는 데 있다.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콜로 끝났다.
97. 아랍 민족주의의 화신, 후세인 - 걸프 전쟁 발발(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
1991년 1월 17일 새벽 0시 50분, 미 공군 F15E 전폭기 중대가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위치한 미 공군기지에서 발진,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이어 2천 5백 대에 달하는 F15E 전폭기 편대가 잇달아 사우디 중부와 동부지방에서 이륙했다. 몇 시간 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끝내 후세인은 쿠웨이트에서 떠나지 않았다. 따라서 무력 이외에는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떠나게 할 다른 선택이 없었다....나는 미국민에게 이번 전쟁이 제2의 베트남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걸프 전쟁의 발단이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벽 3시, 이라크 군의 탱크가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섰다. 왕과 그 가족은 재빨리 사우디로 도망을 쳤고, 이라크 군은 별반 저항도 받지 않고 7시간 만에 쿠웨이트를 손에 넣었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은 다시 주목거리가 되었다. 세계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던 중 10월 8일,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경찰이 발포, 팔레스타인 인 20여 명이 죽고 150명이 다친 사건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태인들에게 돌을 던지자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실탄, 고무탄,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한 것이다. 이는 유태인들이 통곡의 벽 위 예루살렘 신전 터에 새 신전을 세우려 한다는 보도가 있은 후 일어난 사건이었다. 67년의 중동전쟁 이래 최악의 유혈사태였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번 학살에 대한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1월 29일, 오는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라크에 대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한국전쟁 이후 40년 만에 유엔 사상 두 번째로 유엔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미국은 20만의 병력을 페르시아 만에 배치해놓고 있었다.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한 시한을 넘긴 지 24시간 후인 1991년 1월 16일 자정을 기해 미국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전면 공습,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뗀 지 25년 만에 다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서방측에는 잔인한 독재자요 아랍제국 건설의 야망에 들뜬 전쟁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랍 인들은 그를 아랍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아랍 인들은 수세기 동안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수탈과 모멸을 받아왔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바빌로니아 영광과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 장군, 제국주의 열강과 맞섰던 나세르 대통령을 기억하는 아랍 인들은 후세인을 그 연장선상에 놓았다.
걸프 전쟁은 서방측의 최신예 무기가 첫선을 보인 화련한 무기 전시장 이었다. 30cm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 레이더에도 포착되지 않는 F117A 스텔스 기,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아파치 헬기,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위성의 활약도 눈부셨다. 미사일 공격을 미리 알고 경보를 발하는 조기경보 위성, 구름층은 물론 사막의 모래층까지 3m가량 투시할 수 있는 레이더 위성 라크로스, 적진관측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사진정찰위성 등 첨단 과학기술과 전자장비가 총동원된 전자오락 게임 같은 전쟁이었던 것이다. 다국적군은 이 최신무기로 하루 평균 2천 회, 30초에 한 번 꼴로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2월 24일 미, 영, 프, 사우디 11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은 지상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중재로 이라크가 제시한 8개안의 종전 평화협의안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26일 새벽 1시 35분, 이라크는 쿠웨이트 주둔군을 철수한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면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7일, 부시 대통령은 밤 12시를 기해 종전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휴전회담은 3월 3일 이라크 남부 사프완 공군기지에서 열렸다. 미국의 슈와르츠코프 다국적군 사령관, 사우디의 할리드 빈 술탄 아랍군 사령관, 이라크이 아미드 국방부 작전국장, 마흐무드 3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이라크는 미국측이 제시한 평화안을 전면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40일에 걸친 걸프 전쟁은 이라크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98. 핵과 인류의 미래 - 미국, 단거리 핵 폐기 선언 (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9월 27일 대통령 부시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TV중계를 통해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지상 및 해상 발사 단거리 핵무기를 일방 폐기 또는 철수할 것 을 선언했다. 미국이 폐기하겠다고 선언한 핵무기는 유럽에 배치된 수천 기의 핵폭탄, 지상 발사 미사일, 잠수함과 전함에 탑재된 4백기 이상의 토마호크 핵 크루즈 미사일, 항공모함의 핵폭탄 등이다. 여기에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시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에 배치되어 있는 핵무기도 포함된다. 미국의 핵무기 전문가가 펴낸 핵전장 이란 책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는 군산 미공군기지에 핵폭탄 60개, 8인치 포 핵폭탄 40개, 155밀리 곡사포 핵폭탄 30개, 핵지뢰 21개, 총 151개의 전술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76년 미국 방위정보 센터는 주한 미국의 F4팬텀을 비롯하여 지대지 로켓, 지대지 미사일 등 핵무기 운반기능 무기에 운반가능 탄두 수를 곱하는 산출방식으로 계산, 661개 내지 686개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부시 선언으로 단거리 핵이 폐기되어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과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등 전략 핵무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야은 계속 추진되고 있어 핵전쟁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핵전쟁은 온 인류를 파멸시킬 아킬레스 건이다. 지금까지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 원자폭탄이 터졌을 경우, 인류의 반수가 즉사 혹은 단기간에 죽더라도 나머지 반수는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생존자의 앞날에 핵겨울 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져 결국 온 인류가 멸절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우선 원자폭탄 투하로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고 그 때문에 생긴 그을음 섞인 연기가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원폭 투하 후 약 10일쯤에는 두터운 연기층이 북반구를 뒤덮게 된다. 핵공격을 면한 지역에도 강한 편서풍에 의해 두터운 연기층이 몰려올 것이다. 몇 주일 후 이 연기층은 남반구에까지 퍼진다. 원폭투하 20일 후, 연기층이 태양광선을 차단하여, 북반구의 중위도 지방은 평균기온보다 약 50도 정도 기온이 떨어진다. 그뿐 아니라 지구 전체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어둡고 지독히 추운 겨울이 계속된다. 이러한 기온변화로 우선 농업이 괴멸된다. 북반구 중위도 지방은 농업지대이므로, 설령 핵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라 해도 세계농업의 파탄으로 인한 기아상태를 면할 수 없다. 이윽고 모든 동식물은 집단적인 멸종위기에 빠지고 만다. 인간도 예외일 수는 없다. 현재 미국과 소련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단 10분의 1만 써도 핵겨울 이란 대규모 기후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한다. 미국은 이미 1950년대 초 그 충분량을 넘어섰다.
인류를 파멸시킬 또하나의 위험은 온실효과 이다. 지구를 알맞게 따뜻이 데워주는 것은 대기중의 이산화탄소이다. 이산화탄소가 태양광선의 적외선을 흡수, 열이 대기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기중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계속 늘어나는 데 문제가 있다. 이는 오랜 기간 석유, 석탄,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대량 사용해온 결과이다. 아직까지 대기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은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대로 화석연료를 계속 사용한다면, 21세기 중반에 이르러 지구의 기온은 전체적으로 몇 도쯤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그 정도의 온도변화가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우선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 지구상의 빙하가 다 녹으면 해면이 10m가량 높아져 연안의 도시들은 모조리 물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200만년 전, 원숭이로부터 인간을 진화케 한 것은 평균 5도 정도의 기온 변화였다. 온실효과로 인한 기후변화는 이번엔 인류를 멸절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구 가까이에는 금성이 있는데 그곳 대기에는 실로 엄청난 이상화탄소가 함유되어 있다. 이 때문에 대량의 태양열이 대기밖으로 방사되지 못해서 금성의 표면온도는 무려 섭씨 470도라는 고온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서양의 고전 문학작품 속에 묘사된 지옥 의 세계인 것이다. 지구도 이대로 이산화탄소를 계속 방출한다면 틀림없이 금성처럼 된다. 코스모스 의 저자인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말이다.
온실효과를 막으려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줄여야 하고 현재로선 화석연료를 쓰지 않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태양열, 지열, 조류, 핵융합 등 대체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 중 실요화에 따르는 경제성을고려할 때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핵융합에 의한 원자력 에너지이다. 그러나 원자력은 절대로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기술 이다. 1986년 5월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상 최악의 사고가 발생, 원자력 에너지의 사용에 경종을 울렸다. 원자력 사요엥 따르는 방사성 폐기물의 처분도 커다란 문제거리이다. 원자력 발전에 사용된 핵연료에서 나온 플루토늄 239는 극히 적은 양으로 폐암을 일으키는 맹독성인데다가 10kg만 가지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다. 그 위험이 없어지려면 반감기의 열 배인 무려 24만 년 동안 엄중히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그에 비해 원자로의 수명은 불과 평균 30년이다. 이렇게 볼 때 원자력의 이용은 분명 파우스트의 거래 이다. 일시적인 편리의 대가로 후손들에게 위험한 방사성 폐기물을 남겨주는 셈인 것이다.
라듐 발견으로 원자력 시대의 문을 연 퀴리는 1903년 라듐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범죄자의 손에 들어가면 라듐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인간이 자연의 비밀을 안다는 것이 좋은 일인가, 그것으로 이익을 얻기에 충분할 정도로 인간정신이 성숙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