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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640 호
단기 4342. 8. 3 (음력 6. 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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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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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버티라. 그 고통은 차츰차츰 너에게 좋은 것으로 변할 것이다.(오비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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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지게
고장말
진리지꼿(진달래꽃)이 허버지게 펫더고만!
‘허버지게’는 표준어 ‘굉장히’와 대응하는 고장말이다. ‘허버지게’와 뜻이 같은 ‘겁나’와 ‘겁나게’가 전남·북에서 두루 쓰는 반면에, ‘허버지게’는 주로 전남에서 쓴다. ‘겁나게’와 마찬가지로, ‘아주 많다’는 뜻의 형용사 ‘허버지다’의 어근 ‘허버지-’와 어미 ‘-게’가 결합된 것으로 보이나, ‘허버지다’는 이 지역에서 실제 쓰이는 말이 아니다. ‘허버지다’는 표준어 ‘흐벅지다’(탐스럽게 두툼하고 부드럽다)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엇지녁이넌 비가 허버지게 왔쌓더만 오널은 해가 쨍쨍하게 났구만.” 또한 ‘허버지게’의 ‘허버’가 부사로 쓰여 ‘아주’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어따 물괴기럴 허버 많이 잡았네야잉.”
‘허버지게’와 같은 뜻을 갖는 고장말은 ‘허벌나게’인데, 전남·북에서 두루 쓰인다. ‘허벌나게’도 ‘허벌나-’와 ‘-게’가 결합된 것으로 보이나, ‘허벌나다’ 또한 실제 쓰이는 말은 아니다. “하여간 그 녀석들을 잡아다가 귀싸대기부터 허벌나게 올려붙여놓고, 닦달을 해도 할랑게 염려 말소.”(<당제> 송기숙) ‘허벌나게’의 ‘허벌’은 표준어 ‘허발하다’의 ‘허발’(몹시 굶주려 있거나 궁하여 체면 없이 함부로 먹거나 덤빔)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런 사실은 ‘허벌나게’와 동사 ‘먹다’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허벌나게 묵었드니만 배가 겁나게 불러.”
‘허버지게’와 ‘허벌나게’ 모두 윗사람과 말할 때는 잘 쓰지 않는다.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고도쇠
사람이름
1676년, 군영에서 대기하고 있던 역마를 타고 나간 이들에게 죄를 주도록 병조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황귿놈이 2필, 이진위·최귿동이 1필씩 등 모두 11필을 끌고 나갔다. 곧바로 역리 ‘이쟈근뇽이·이고도쇠·박효선’ 등 일곱에게 영을 내려 이들을 잡아 나누어 추문하라 하였다.
‘고두쇠’(고도쇠)는 작두 따위의 머리에 끼는 부품이다. 명이 길어진다고 아이 주머니 끈에 은으로 만들어 채우는 장식품 또한 고두쇠이다. ‘고도’가 든 이름에 ‘고도놈이·고도말이’도 있다. 흰 겹저고리 또한 궁중에서는 ‘고도’라 하였다.
고도와 비슷한 이름에 ‘고돌이’도 있다. 고도리는 고등어의 새끼, 조선 때 죄인의 목을 졸라 숨을 끊는 포도청 소속 사람이다. 태조가 원나라 맹장인 조무가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깝게 여겨 ‘고도리살’(고두리살)을 쏘아 수십 번 맞히니 조무가 말에서 내려와 무릎 꿇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훈몽자회>를 보면 고도리에는 ‘울고도리·뼈고도리’도 있다. 전쟁에서 신호로 쓰는 ‘우는살’(명적)이 ‘울고도리’이다. 화살은 살대·살짓·살밑(화살촉)으로 나뉜다. ‘살짓’은 화살 뒤에 방향타 구실을 하는 깃털이다. 활줄을 ‘시위’라 하며 옛말엔 ‘시울/시욹’이라고도 하였는데 화살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파낸 곳이 ‘오늬’이다. 버들잎처럼 생긴 화살촉을 ‘힝그럭’이라고 했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장애, 장해
2005년 열린 제4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말아톤'이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7개 부문을 휩쓸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그 애는 장애가 있어요' 등 영화 속 대사들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여기 나오는 '장애'와 또 다른 단어인 '장해'는 뜻이 조금 다른 말이다. '장애'는 어떤 사물의 진행을 거치적거리게 하거나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일, 신체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등을 뜻한다.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에 장애가 된다' '그 환자는 청각장애에다 호흡장애가 있다'처럼 쓴다.
'장해'는 하고자 하는 일을 막아서 방해함 또는 그런 것을 말한다. '전자파가 지나치게 많이 방출되면 TV 수신이나 휴대전화 통화 등에 장해를 줄 수 있다' '시위대는 별다른 장해를 받지 않고 시청 앞 광장까지 진출했다'처럼 쓰인다. '장애'와 '장해'는 대부분의 문장에서 넘나들며 쓰일 수 있지만, 문맥에 따라 어느 한쪽이 더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다. 일의 수행을 방해하는 요인이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줄 때에는 '장애'보다 '장해'를 쓰는 것이 낫다.
할 게, 할게
유길준이 19세기 말 '서유견문록' 서문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처음 주장한 이래 20세기 초 일기 시작한 언문일치 운동 등의 영향으로 현재는 입말·글말이 별다른 차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말할 때와 글을 쓸 때 약간의 차이는 있다. '너와 나'는 '너랑 나랑' '너하고 나하고'로, '이것 저것'은 '이거 저거'로 흔히 말하는 등 문어체와 구어체의 차이는 미미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다.
이러한 문어체와 구어체의 차이는 '내가 할 게 무엇인지 몰라도 천천히 할게'에서처럼 때때로 띄어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서'내가 할 게'의 '게'는 '것'을 구어체적으로 표현한 '거'와 '이'가 결합한 형태로, '것이'의 준말이다. '내일 할 게 뭐지' '지금 먹고 있는 게 맛있니'처럼 띄어 써야 한다.
그러나 '천천히 할게'와 같이 쓰이는 'ㄹ게'나 '을게'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로, 붙여 써야 한다. '이따가 다시 올게' '내일 갈게' '내가 할게'처럼 사용된다.
간지르다, 간질이다
다른 사람의 손길이 몸에 닿으면 간지럽지만 스스로는 자기 몸을 만져도 별로 간지럽지 않다. 그것은 계획에 관계하는 뇌 부위가 간지러운 느낌이 올 거라는 걸 지각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 미리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을 줄임으로써 외부에서 오는 정말 중요한 자극에 뇌가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니 조물주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간지럼과 관련해 '살갗을 건드려 간지럽게 한다'는 뜻으로 '간지르다'라고 쓰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열어놓은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간지른다' '바다의 갈피갈피 꿈틀거리는 고기 떼들이 겨드랑이를 간질러 웃게 만든다' '이 배롱나무는 간지럼을 탄다고 한다. 나무 밑에서 큰 줄기를 간지르니 진짜로 잎과 꽃을 흔드는 것 같다' 등이 그런 예다. 예문 중의 '간지른다, 간질러, 간지르니' 등은 모두 '간지르다'를 활용한 형태인데 이들은 전부 잘못된 것이다.
간지르다가 아니라 '간질이다'가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질이다'를 활용한 '간질인다, 간질여, 간질이니'로 고쳐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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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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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길 - 손택수
길이 착 달라붙는 느낌 뭐랄까 내 발이 무슨 나무뿌리라도 되는 줄 아나 나를 땅속에 아주 심어두겠다는 심사로 길 깊숙이 발이 끌어당겼다가 빼내려고 하면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는 진절머리 말마라 그런 여자가 나는 차라리 그리운가 보다 바짓가랑이 좀 젖는다면 어떠랴 누가 나 같은 것을 이렇게 받아준 적 있느냐 한사코 살을 부비며 붙들어 본 적 있느냐 밋밋하던 몸매가 비만 오면 울통볼통 숨겨놓았던 육감을 드러내며 아주 애를 먹이는 찰지디찰진, 뭐랄까 속궁합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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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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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 침묵 - 白利雲
갑자 을축 지나 하나 둘 사라진 봉분
병인 정묘 지나 오니 달빛 더욱 교교해져
허공에 시비를 세우네 시시비비 세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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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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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아래에서 홀로 술 마시다(월하독작月下獨酌) - 이백李白
꽃들 사이에서 한 병 술 들고 가까이할 사람 없어 홀로 마시네. 술잔 들어 밝은 달을 불러오고 그림자를 마주하니 세 사람이 되었도다.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나만 따라다닐 뿐이라네. 잠시 달과 그림자를 짝으로 삼았으니 즐기는 것은 모름지기 봄이 제격이기 때문이라네. 내 노래하니 달이 서성이고 내 춤을 추자 그림자가 아물거리네. 깨어있을 때는 함께 즐기고 취한 후엔 각자 흩어진다네. 감정이 없는 사귐을 영원히 맺어 머나먼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길 서로 기약하세.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화간일호주 독작무상친 거배요명월 대영성삼인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월기불해음 영도수아신 잠반월장영 행락수급춘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아가월배회 아무영영란 성시동교환 취후각분산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영결무정유 상기막운한
이백(李白701―762)에게는 ‘시선(詩仙)’이라는 별칭이 있다. 마치 신선(神仙)처럼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영험한 작시(作詩) 능력을 지녔다는 최고의 찬사이다. ‘근체시(近體詩)’라는 중국시의 체제가 완성되었던 당대(唐代)에 이백은 형식적인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호방(豪放)한 필세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네 수(首)의 연작시로 이루어진 <월하독작> 또한 음주(飮酒)란 소재를 바탕으로 그의 자유분방한 정신세계를 한껏 드러낸 작품이다.
절친한 이 하나 없는 쓸쓸하고 적막한 밤, 홀로 시름에 젖어 있을 만도 한데 이백은 이 고독한 심사를 뿌리치고 자신만의 파티(Party)를 만든다. 꽃 내음 가득한 봄밤에 늘 그랬듯이 너무도 좋아하는 달빛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들이킨다. 그리곤 천연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달아! 어디보자, 오호! 그림자 그대도 벌써 왔는가’라 말하며 절로 흥에 겨워 구수한 노래 가락에 춤사위를 더한다.
감정이 없는 ‘무정(無情)’한 이들과의 자리라 오히려 속 시원히 맘 편하게 즐긴 듯하다. 이에 말 많고 탈도 많은 속진(俗塵)을 벗어나, 저 멀리 넓디넓은 우주세계에서도 한 번 만나자며 영원불변의 우정을 약속한다. 이 시는 이백이 천보(天寶) 3년(744) 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 양국충(楊國忠), 양귀비(楊貴妃) 및 고력사(高力士)의 모략으로 조정에서 쫓겨나기 전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니, 주흥(酒興) 속 고독(孤獨)이 행간(行間)마다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런 일이겠다.
* 壺(호) : 술병./ 親(친) : 가까이하다./ 邀(요) : 부르다. 맞이하다. * 不解(불해) : ~할 줄 모르다./ 徒 (도) : 다만. * 暫伴(잠반) : 잠시 벗하다./ 將(장) : 더불어. * 行樂(행락) : 나가 놀다./ 及春(급춘) : 봄철에. 봄에 때를 맞추다. * 徘徊(배회) : 배회하다. 망설이고 차마 떠나지 못하다. * 零亂(영란) : 흩어지다. 그림자가 어지럽게 움직이는 모습. * 無情遊(무정유) : 희비(喜悲) 등의 인정에 얽매이지 않은 교유. * 邈(막) : 아득히 멀다./ 雲漢(운한) : 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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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 / 지혜 / 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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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볼 만한 인생 - 해롤드 셔먼 (고동호 옮김)
제6장 나눔의 자리
어느 비오는 날 오후에 노신사가 문 앞에서 떨고 있다가 지나가는 신문팔이 소년을 보았습니다. 노신사는 신문 한 장을 산 뒤에 물었습니다. "아가야, 춥지 않니?" 그때 소년은 웃는 얼굴로 노신사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아저씨, 나는 아저씨를 만나기 전에는 몹시 추웠습니다." -레이몬드 오토-
헬렌켈러
만약 지금 자신에게 정신적, 혹은 신체적인 장애가 있어 하루하루 그러한 상태로 덧없이 살아가는 것이 괴롭다고 생각한다면, 같은 장애를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그것과 싸우고 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틀림없이 마음속에 새로운 삶의 의욕이 되살아나고 의욕으로 넘치게 될 것이다. 그 유명한 헬렌켈러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시력과 청력을 잃고 말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가 살아갔던 암흑과 허무의 세계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은커녕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암흑의 세계에 살았다. 그러나 이 암흑의 세계에서 헬렌켈러의 영혼은 빠져 나왔다. 그녀를 가르치고 이끌어준 사람의 인내심과 노력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노력 또한 그 몇 배의 것이었다. 그녀는 외계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고, 어떤 소리를 발함으로써 언어에 대신하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끔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뒷날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삶에의 메시지이다.
"어떤 때라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세요. 어떤 핸디캡을 가지고 있더라도 인생에는 가능성이 언제나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 역시 할 수 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집념과 용기를 가지세요. 자기 자신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헬렌켈러는 생명의 영원성에 대한 신념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생명이란 하나의 종이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태어나면서 갖추어진 값진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재난이나 좌절은 우리들의 마음을 일구어 주는 것입니다. 보다 훌륭한 것이 마음속에서 싹을 키우고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헬렌켈러는 고통과 절망의 심연에 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보내고 있다.
"실패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개성이라는 보물을 꺼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75세라는 고령으로 헬렌켈러는 온 세계 신체장애자의 대표로서 극동으로 여행했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의 즐거움은 뒷전에 두었다. 그녀는 어디엘 가더라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병든 사람들이나 장애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이라는 것은 육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표현수단으로서 육체를 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육체 그 자체로는 영혼에 반응하는 힘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헬렌켈러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고 그 육체에 영혼이 살고 있는 것이어서, 설령 육체가 병든다 할지라도 영혼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헬렌켈러는 이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 생명의 영원성을 그렇게도 상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 사실은 무엇인가 육체적인 핸디캡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 용기를 줄 것임에 틀림없다.
남을 돌봄으로 자기 고뇌를 잊는다
하만 프레스바라는 사람은 제 1차 세계대전 중 의료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거기에서 악성결핵에 걸려 장기 입원하게 되었다. 결핵균은 뼈에까지 침투해 그는 늑골의 대부분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중병의 병상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기계장치 인형'이라고 웃으며 말하고, 늘 밝고 명랑하게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자기의 괴로움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높이 평가되어 그는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되자 상이군인의 시중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동료들을 위해 맨 앞에 서서 일하고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낫기를 기도하며 정부의 원조도 받을 수 있도록 주선을 했다. 또한 퇴역 군인을 위한 잡지인 '오버 서비스'지에 투고하고 환자의 간호방법이나 퇴역군인 회의 운영에 대해서 의견을 발표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퇴역 군인들에게 얼마간의 정신적인 원조를 함으로써 나 자신의 건강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일전에 내가 하만 씨를 만났을 때 그는 '사후의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가' 하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고, 그러한 각오로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하느님이 부르시면 언제라도 이 세상을 떠날 채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릅니다. 아들 필이 어엿한 성인으로 장성하게 될 때까지는 더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하만 씨는 단호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후 그의 아들 필은 20세가 되어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하만 씨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 밤은 하만 씨에게 있어서 또 다른 세계로의 새 생활이 시작된 날이라고 지금도 나는 믿고 있다.
나의 친구
육체적인 핸디캡이 있다고 해서 인생을 어둡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장애를 극복하려고 하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즐거움이나 만족감뿐만 아닐 무언가를 이룩했다는 성취감마저도 맛볼 수가 있다. 나의 친구인 샘 에밀리라는 사람은 독신자인데 수년 동안 뉴욕시 클럽 상임멤버로 근무하고 있었다. 샘은 갓난아기 시절 간호원의 실수로 침대에서 떨어져 머리에 부상을 입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뇌하수체에 이상을 일으켜 신체의 성장이 불균형하게 되어버렸다. 그는 동체의 폭은 넓지만 길이가 짧고 다리가 극단적으로 길며 발은 엄청나게 큰 기형아였다. 또한 시력도 정상이 아니어서 색맹인데다가 근시여서 안경을 끼거나 확대경이 없으면 글을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목의 구조에도 이상이 있어 큰소리로밖에 얘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샘 에밀리가 종사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게다가 때때로 격심한 고통에 휩싸이기도 하여, 원래가 건강체질이 아니었던 그는 결국 무언가를 쓰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의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지만 다른 가족들의 적은 벌이에 비하면 겨우겨우 살아갈 수는 있었던 것이다. 대서업이었다. 샘의 인생이 결코 활동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러 가지 인생살이의 모험을 상상하고는 즐거워했다. 그가 속한 뉴욕시 클럽멤버의 직업은 실로 다채로워서 탐험가, 편집자, 강연가, 대서가, 변호사, 의사, 과학자, 게다가 정치가도 있었다. 그런데 그에 속한 모든 사람은 각각의 분야에서 저명한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샘과 친하고 샘도 그들과 어울려 폭넓은 지식을 교환했다. 샘은 타고난 큰 목소리로 곧잘 사회의 부정을 규탄하는 신랄한 의견을 내뱉기도 했다. 클럽의 사람들은 그가 온후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멤버 중 누군가가 곤란에 빠져 있을 때 샘은 맨 먼저 달려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력에 이상이 있었던 샘은 라디오를 아주 친한 친구처럼 아꼈다. 그는 유명한 오페라의 곡목을 라디오를 통해 대부분 알고 있었다. 스포츠도 몹시 좋아해서 축구나 야구의 시합 중계는 거의 빠뜨리지 않고 들었다. 그러나 스포츠 시합이나 연극을 실제로 보러 가는 경우는 맨 앞줄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시력은 그만큼 나빴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농구선수권 시합의 맨 앞자리 좌석 표를 구했기 때문에 샘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막상 체육관에 도착해서 자리를 찾아보니 우리들의 자리는 2열에 있었고, 맨 앞줄에는 보도관계자와 양팀의 후보선수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사고하고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그는 괜찮다고 말했다.
"모처럼 왔는데... 봐야하지 않겠어요?"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체육관은 열광적인 팬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시합은 팽팽한 접전이었다. 연장전까지 벌인 시합에서 내가 응원하던 팀이 결승골을 터뜨리고 승리한 순간 나는 흥분해서 샘에게 말했다.
"멋진 시합이었어!" "정말 멋진 시합이었어. 볼 수 있어서 더 좋았어."
그는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듣고 갑자기 후회가 되었다. 샘에게는 선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셈, 너는 잘 보이지 않았나 보구나." 내가 이렇게 말하자 샘은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저 재빠른 손놀림, 저 슛, 볼 던지는 방법, 정말 멋있었어."
나는 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시합을 즐기는 방법은 나와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는 선수들의 어깨 위의 움직임은 볼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절묘한 드리블이나 패스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탄력 있는 팔의 움직임, 점프하는 몸, 튕겨 올라가는 공, 이러한 것이 그를 열광케 했던 것이다. 체육관 내의 분위기와 함성을 듣고 게임이 백중세인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시야의 협소함에도 잘 순응해서 충분하게 시합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나는 무슨 일이 잘 되지 않거나 실망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날 샘이 보여주었던 행동을 되새겼다. 그리고 서려 내가 현상에 만족 못할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최대한으로 살려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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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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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1
2. 아이들에 대하여
선물
"할아버지 . 제발 오세요."
할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말했다. 먼지 긴 부엌 유리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창백한 불빛 속에서 할아버지는 비닐로 덧댄 의자에 거북하게 앉아 계셨다 뻣뻣한 팔은 호마이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고 시선은 나를 지나 벽을 향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옹고집쟁이인 이태리 시골 노인이셨다. 실제로 받은 것이든 상상으로 받은 것이든 과거에 입은 상처들을 결코 잊는 법이 없으셨다. 그리고 화가 잔뜩 나셨을 때는 끌끌 혀를 차셨다. 지금도 그렇게 하신 것은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꼭 오세요, 할아버지 . 할아버지가 오셨으면 정말 좋겠어요."
일 곱살 먹은 내 여동생 캐리도 애원했다. 캐리는 나보다 스물 한살이나 아래로, 우리 집안에 놀랄 정도로 뒤늦게 찾아온 가족.
"할아버지에게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 드릴께요. 엄마가 저한테 가르쳐 주신다고 했어요 "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추수감사절이잖아요. 그러니 제발 오세요. 할아버진 지난 4년 동안 우리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않으셨어요. 이제 과거는 잊으실 때도 됐잖아요?"
할아버지는 그 파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지난 몇 해 동안 온 가족을 위협해 온 그 강렬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난 달랐다. 어쨌든 난 할아버지를 알았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할아버지의 고독을 이해했으며, 할아버지를 닳아서 나 역시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데는 무능력했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할아버지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의 죄는 아들에게 물려질 것이다.' 라는 격언이 있지 않은가. 모든 남성은 자신이 어떤 것을 결정할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기도 전에 불행한 '선물' 을 받고, 또 그것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는다. 그 불행한 선물이란 바로 '남자' 라는 잘못된 관념이다. 우리는 끝내 바깥에서는 힘들고 내면적으로는 무력해진다. 지금 나와 할아버지 사이에 놓여져 있는 몇 발자국의 거리는 사실 몇 광년의 거리일 수도 있었다.
캐리는 아직도 할아버지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캐리는 알지 못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가서 뒷마당을 내다보았다. 겨울 빛 속에 헝클어진 정원은 회색이고, 엉킨 잡초들이 무성했다. 넝쿨들은 한쪽에서 야생 식물처럼 자라 있었다. 할아버지는 저곳에서 기적을 만들곤 하셨다. 아마도 당신 자신 속의 자연을 조화롭게 이끌지 못하는 대신 바깥에 있는 자연을 가꾸는 일에 몰두하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 할아버지는 정원에서 손을 떼셨다. 그리고는 훨씬 더 심각하게 자신 속으로 파묻히셨다. 창문에서 시선을 돌린 나는 깊어져가는 어둠 속에서 할아버지를 살폈다. 독특하게 생긴 턱과 크고 거친 손, 할아버지의 모든 것이 인생이 얼마나 가차없는 훈련이었나를 반영해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열 세살 때부터 일을 했으며 , 경제 공황기에는 실업자가 되는 수모를 당하셨고, 트렌튼 채석장에서 작업 노동자로 이십 년이 넘도록 일하셨다.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우린 이제 가야만 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오시기로 결정하시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제가 모시러 올께요."
할아버지는 돌처럼 굳은 채로 똑바로 앞만 쳐다보며 앉아 계셨다. 오래된 파이프를 빠시면서 , 며칠 뒤 캐리가 나에게 할아버지의 주소를 물었다. 내가 물었다.
"뭐하려고 그러니?"
캐리는 종이 한 장을 예쁘게 접어 파란색 봉투 속에 넣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나는 캐리가 받아 적을 수 있도록 천천히 주소를 불렀다. 캐리는 한 글자마다 정성을 들여 둥근 글씨로 천천히 썼다. 주소 쓰기를 마쳤을 때 캐리는 연필을 내려놓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 편지는 내 손으로 직접 부칠 거야. 우체통 있는 곳까지 날 좀 데려다 줘 "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하자 괜찮겠지? "난 지금 해야만 해. 내 부탁을 들어 줘 "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다.
추수 감사절날 나는 늦게 일어났다. 맛있는 파스타 소스 냄새가 났다. 엄마는 자신의 특별 요리인 라비올리. 브로콜리, 고구마, 월글 소스를 준비중이셨다, 이태리식과 미국식을 혼합한 엄마의 훌륭한 전통 음식이었다.
"우리는 의자가 네 개만 필요하다, 캐리 ."
내가 부엌으로 들어갈 때 엄마가 캐리에게 말하고 계셨다. 캐리는 머리를 저었다.
"아녜요, 엄마, 다섯 개가 필요해요. 할아버지가 오실 거예요 ." 엄마가 말씀하셨다. "얘야, 제발 " 그러자 여동생은 단호하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꼭 오실 거 예요. 난 알아요." 내가 말했다. "캐리, 그만 좀 해라. 할아버진 안 오실 거야 너도 그걸 알잖니 ." 나는 캐리가 실망감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즐거운 날을 망치는 걸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존, 내버려둬라." 그리고 나서 엄마는 캐리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한 자리를 더 만들거라."
아버지가 거실에서 나오셨다. 아버지는 주방으로 들어오시다 말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캐리가 식탁을 차리는 걸 지켜보셨다. 마침내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테이블 주위에 모여 앉았다 잠시 동안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엄마가 캐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기도를 해야지, 캐리?"
여동생은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 다음 캐리는 머리를 숙이고 턱을 괸 다음 중얼거렸다.
"주님 , 저희를 축복해 주시고 저희가 먹으려는 음식들을 축복해 주세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축복해 주시구요... . 할아버지가 빨리 오시도록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하느님 ."
서로의 잔을 들어 건배를 한 다음 우리는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할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캐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복도에서 시계가 똑딱거렸다. 그때 갑자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캐리는 벌떡 일어나 복도를 달려갔다 그리고는 서둘러 문을 땄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검은 색 정장 차림으로 똑바로 서 계셨다 할아버지가 가진 유일한 양복이었다. 한 손으로는 중절모를 들어 가슴께에 얹으시고 다른 손에는 갈색 종이 봉지가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종이 봉지를 들어 보이며 말씀하셨다
"마실 걸 좀 가져 왔다 "
그로부터 두세 달 뒤 할아버지는 잠을 주무시던 채로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의 서랍장을 정리하다가 나는 파란색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안에는 접힌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다. 캐리가 보낸 그 편지였다. 종이에는 어린아이의 서투른 그림으로 식탁과 다섯 개의 의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중 한 의자는 빈 채로 남겨져 있었고, 나머지 네 의자에 앉은 사람들에는 엄마, 아버지, 존, 캐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네 사람의 가슴에는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하트는 가운데가 금이 간 채로 갈라져 있었다.
- 존 카테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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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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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2장 시작을 위하여
사랑의 시작
사랑의 시작을 신중히 하라. 사랑을 시작함으로써 기쁨을 맛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랑 때문에 쓰디 쓴 고통을 맛보는 사람도 있다. 인생에서 사랑은 세상에서 태양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사랑을 할 때 아름다워지며 사랑을 할 때 용기와 힘을 얻는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랑은 아니다. 사랑이 무조건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행복과 희망을 주다가도 슬픔과 비탄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놓기도 하고, 사랑을 얻었을 때는 마냥 행복하다가도 일단 잃어버리면 깊은 슬픔에 휩싸인다.
사랑으로 해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변한 이들도 많지만 그 사랑으로 해서 고통받으며 후회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절망과 비탄의 소굴에서 허덕이던 사람이 올바른 사랑을 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가 하면, 희망과 행복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 잘못된 사랑에 빠짐으로써 비참한 신세로 뒤바뀌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시작은 신중하고 신중해야 한다. 올바른 사랑은 명약이 되지만 잘못된 사랑은 독약이 된다. 남녀가 만나는 것만으로 남녀가 포옹하고 입맞춤하는 것만으로 사랑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랑이기만 하면 낙원에 이른다는 달콤한 환상도 버려야 한다. 우리를 낙원에 이르게 하고 우리를 희망으로 인도하며 우리를 아름답고 포근하게 하는 사랑은 올바른 사랑뿐이다.
시간의 활용
짧은 시간을 알뜰히 활용하라. 한정된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얻어내는 비결은 그것이다. 잡담 한마디 할 만한 시간이라도 영어 단어를 외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짧은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잠시잠시 주어지는 틈을 알뜰하게 이용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많은 시간을 얻어내는 비결이다. 짧은 시간은 그 자체로서는 별 효용이 없지만 꾸준히 활용하기만 하면 엄청난 일을 이루어낼 수 있다. 티끌이 모여서 태산을 이루듯 잠시잠시 주어지는 자투리 시간이 상상을 초월할 만한 결과를 빚어낸다.
시간이 주어지는 것과 시간을 활용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에나 공통적이지만 그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같은 시간 속에서 사는 데에도 어떤 이는 큰 일을 이루어내고 어떤 이는 세월(시간)타령만 하며 허송 세월을 하는데, 그것은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짧은 시간이라하여 잡담이나 하면서 흘려 버려서는 안 된다. 가장 많은 시간을 원한다면 틈틈이 주어지는 짧은 시간부터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한다. 큰 일일수록 연속되는 짧은 시간의 활용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잠시잠시 나는 틈을 활용함으로써 극복된다. 한꺼번에는 도저히 욀 수 없는 영어 단어도 틈틈이 주어지는 짧은 시간에 의해서 외워 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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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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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94. 새롭게 펼쳐지는 팍스 아메리카나 -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개시(198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86년 서울, 제10회 아시안 게임 개최 / 1987년 6월항쟁, 6.29선언 공표. KAL858기 폭파사건
1986년 9월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통칭 가트(GATT)각료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여덟 번째 다자간 무역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이 협상을 우루과이라운드라 한다. 87년 2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협상을 시작한 우루과이 라운드의 주요내용은 농산물 분야와 서비스, 지적 소유권에 관한 교역문제이다. 가트는 1948년 관세, 수출입규제 등의 무역장벽을 다각적인 교섭을 통해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미국 주도하에 발족되었다. 무력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협상과 조정으로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폐지케하는 교섭의 장인 것이다. 전후 국제무역 질서는 가트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미국이 그 주도권을 쥐었다. 가트의 가맹국은 89년 12월 현재 96개국, 우리 나라는 67년에 가입했다. 가맹국은 협상을 통해 67년 케네디 라운드에서는 공업제품과 농산물 관세를 평균 35% 인하했고, 73년부터 79년에 걸친 도쿄 라운드에서는 평균 33%의 관세를 인하했다. 도쿄 라운드의 합의에 따른 관세인하가 87년 종료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우루과이 라운드가 86년 9월 선언된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종전의 내용에 금융, 정보통신, 건설 등 서비스 분야를 새로이 협상대상에 넣었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각료급으로 구성된 무역협상위원회이며, 그 산하에 관세, 비관세 농산물, 지적 재산권, 긴급수입제한 등 14개 분야의 상품협상 그룹과 처음 도입된 서비스 협상 그룹, 도합 15개 협상 그룹이 있다.
1990년 7월 2일 농업협상 그룹 의장은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초안을 제출, 선진 7개국의 동의를 얻었다. 그 내용을 모든 수입제한 품목의 자유화, 농업보조금 폐지, 이중곡가제 페지, 영농자금 융자 중단, 수출보조금 철폐 등이다. 이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은 자국의 농업을 전혀 보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예외 없는 전면개방 을 주장하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 뒤에는 나름의 계산과 이유가 숨어 있다. 80년대 들어 농업공황, 제조업의 쇠퇴, 서비스 산업 팽창으로 산업구조가 변한 미국은 그에 따른 새로운 국제 무역 질서를 구축할 필요에 직면했다. 즉 농업과 서비스 산업의 비교유위를 무기로 세계경제의 패권을 회복, 강화하려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범세계적 자유무역 질서의 확립 이것이 우루과이 라운드르 통한 미국의 의도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이 크게 떨어지자 미국은 세계유일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걸프 전쟁으로 TEKA 후세인을 지칭했고, 이스랑엘과 아랍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중동평화회의를 열게 했으며, 이어 로마에서 개최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은 유럽에서 물러설 것을 원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겠다. 는 태도를 보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는 미국의 영향권을 고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표명인 것이다. 80년대 초 레이건이 주장했던 팍스 아메리카나 가 실현되어가는 느낌이다.
한편 미국의 막강한 정치외교력과 군사력에 맞서 유럽은 경제통합뿐 아니아 정치통합까지 추진, 이른바 유럽 일가 를 세울 전망이다. 유럽공동체(EC)와 유럽 자유무역연합이 통합된 유럽 경제지역(EEA) 창설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유럽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면 유럽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의 17%에서 10년 뒤에는 37%로 대폭 증가, 미국과 일본을 앞지르게 된다. 미국도 자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경제 및 군사, 안보 블록을 형성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경제의 블록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21세기를 앞둔 세계질서의 재편성 과정이기도 하다.
1991년 11월 12일 서울에서 제3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각료회의(APEC)가 열렸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한국, 아세안(ASEAN) 6개국, 그리고 중국, 대만, 홍콩의 중국 3국이 참석, 총 15개국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 회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력과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방향에 대해 집중토의했다. 회의 직전, 말레이지아가 불참을 통고해왔다.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경제협의체를 결성하자는 말레이지아의 주장에 미국이 보인 태도에 불만의 표시였다. 미국의 베어커 국무장관은 미국이 배제되는 무역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는 내용의 비망록을 일본에 보내는 한편, 한국에는 말레이지아는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랬다 며 압력을 가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의사대로 말레이지아 안에 반대할 것을 약속했다. 이 같은 미국의 압력에 대해 말레이지아 마하티르 총리는 말했다.
"미국은 작은 나라들의 미래에 위협이 돼가고 있다."
95.루마니아 영웅 에서 독재자로 -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대통령 처형(19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88년 제6공화국 출범. 서울, 제24회 올림픽 개최. 국회청문회 열림.
1989년 12월 27일, 루마니아 텔레비전은 대통령 차우세스쿠와 그 부인 엘레나 부통령의 재판기록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방영했다. 차우세스쿠는 쓰고 있던 털모자를 집어던지며 화가 난 표정으로 뭔가를 말했으며, 옆에 앉은 엘레나는 시종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이들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구국위원회는 두 사람이 12월 25일 비밀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형집행 직후의 두 사람의 시체를 찍은 사진이 일간지 머릿기사를 크게 장식했다.
차우세스쿠는 1918년 부쿠레슈티 근교에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살 때인 1933년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반나치 운동을 벌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루마니아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1965년 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74년에 유럽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여타의 동유럽 사회주의국들과는 달리 분명한 독자노선을 걸었다. 68년 바르샤바 조약국의 체코 침공을 비난했으면,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추진한 중공업정책이었다.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수출 위주의 석유화학공업에 치중한 그의 중공업정책은 수출 비용의 엄청난 증가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석유화학 투자에 끌어들인 외채 110억 달러를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차우세스쿠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외채상환에 두고 극도의 긴축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식량, 원자재 등 수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수출했다. 국민들은 희생과 인내로 견뎌야 했다. 1인당 육류 배급량 월 500g, 빵 하루 160g, 영하 25도의 강추위가 계속되는데 전력과 휘발유 공급까지 제한되어야 했다. 국민의 드높아지는 불만과 쿠데타 위협을 누르기 위해 차우세스쿠는 족벌체제를 구축했다. 군대가 미덥지 않자 보안군에게 각종 특혜를 주어 자신의 친위대로 키웠다. 보안군 내에는 비밀경찰을 두었다.
차우세스쿠의 몰락은 89년 12월 16일 루마니아 서부 티미시와라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방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영토였으며, 주민의 대부분이 헝가리 인이다. 이날의 시위는 이들 헝가리인의 인권옹호에 앞장섰던 개신교 목사 토에케스를 국외로 추방하기 위해 경찰이 강제연행하는 데 항거, 주민들이 인간사슬을 만들어 저항한 데서 비롯되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무차별 발포,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21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는 관제 궐기대회가 열렸다. 차우세스쿠의 사진과 그를 칭송하는 수많은 현수막이 내걸린 가운데 수십만의 군중이 모였다. 차우세스쿠가 연단에 올라 지난 주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위를 제국주의자들과 그 스파이들에 의해 야기된 것 이라고 격렬히 성토했다. 순간 군중 속에서 야유와 함께 차우세스쿠 퇴진을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에 호응했다. 궐기대회를 생방송하던 국영 텔레비전 화면이 갑자기 텅 빈 하늘을 보여주더니 노래가 나오다가 이내 흰 브라운관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국영 라디오는 한동안 분노에 찬 군중들의 외침을 방송하는 실수 를 저질렀다. 함성은 곧 아비규환으로 바뀌고 방송은 중단되었다. 보안 요원들은 군중을 무차별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현장에서 8명을 즉결 처분했다. 잠시 후 차우세스쿠는 다시 연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날 밤 늦게까지 부쿠레슈티 시는 시민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수만명의 시위대로 들끓었다.
다음날 22일, 시위 계속되었다. 보안군의 총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오후,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시위대에 가세한 루마니아 정규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성난 시민과 함께 대통령 관저로 행진해왔다. 차우세스쿠는 군중에게 연설하려다가 야유를 받고 부인 엘레나와 함께 공산당 본부 건물 옥상에 대기시켜 놓은 헬리콥터를 타고 도피했다. 이어 부쿠레슈티 라디오 방송국은 마네스쿠를 중심으로 하는 구국위워회가 전권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3일 후 구국전선은 비공개 비밀 군사재판을 열어 차우세스쿠 부부를 전격적으로 처형시키고, 국민에게 녹화 테이프를 공개했다. 그러나 그 테이프는 절반 이상이 삭제되어 본래 2시간짜리가 45분짜리로 줄어 있었다.
"우리는 루마니아 역사를 피로 물들인 소름끼치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구국위원회는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마니아의 영웅에서 소름끼치는 독재자로 전락한 차우세스쿠의 몰락은 불과 일주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루마니아에는 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으로 하는 새 정부가 출범,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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