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71.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 - 신해혁명 발발(191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09년/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총살, 1910년/한일합방, 조선총독부 설치, 토지조사령 발표
거대한 중국대륙에서도 혁명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러, 일전쟁이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의 청왕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서태후는 일본의 승리는 일찍이 입헌군주제를 채용한 때문이라고생각하고 마지못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그리하여 1908년 헌법대강을 발표하고 1911년 최초로 내각을 소집했다. 그러나 이 내각은 만주족 출신의 황족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인들의 불만을 샀고, 입헌군주제 아닌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혁명운동이 드높아갔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손문은 1866년 광동성 향산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홍수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제2의 홍수전으로 자처했다. 13살 때 맏형을 따라 호놀룰루로 간 손문은 1894년 그곳에서 흥중회를 조직했다. 이듬해 청, 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은 광동에서 청왕조 타도를 내걸고 봉기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후 손문은 미국, 영국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의 삼민주의는 이때 골격이 완성되었다. 삼민주의란 민족, 민권, 민생주의를 말하는데 정치적 독립, 왕정타도와 공화정 수립, 경제조직의 개혁을 뜻한다. 삼민주의는 신해혁명을 이끈 지도이념이 되었다.
1905년 러, 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문을 동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흥중회, 광복회, 화흥회를 발전적 해체하고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총재가 되었다. 중국혁명동맹회는 새로운 중국의 이름을 '중국화민국'으로 정했다. 동맹회는 기관지 (민보)를 발행하여 삼민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회원을 국내로 보내 활발한 조직활동을 폈다. 1911년 10월 9일 한구의 러시아 조계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혁명당원이 비밀리에 만들고 있던 폭탄이 터진 것이다. 다음날인 10월 10일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중 혁명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병사들이 거사를 하고 이에 혁명당원들이 가세, 무창을 점령했다. 이를 '무한봉기'라 한다. 이를 계기로 혁명운동은 각지로 번져, 한 달도 되기 전에 14개 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각 성 대표들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중화민국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가결했다. 그때 미국에 있던 손문은 급히 귀국, 이듬해 1월 1일 남경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이를 신해혁명이라 한다. 이후 10월 10일은 쌍십절이라 하여 중화민국 건국기념일이 되었다.
한편 청왕조는 화북지방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 원세개에게 혁명군을 물리쳐줄 것을 청했다. 원세개는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내각총리 자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하고 혁명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다. 그때 혁명군은 심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남경정부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손문은 어쩔 수 없이 원세개와 밀약을 맺었다.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우되 원세개를 초대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조건이었다. 혁명군과의 타협에 성공한 원세개는 청조에 압력을 가하여 마침내 1912년 2월 황제인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3월 10일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혁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취임한 뒤 국민당 해산령을 내려 사실상 국회를 정지시켰다. 그의 야심은 제정을 부활시켜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찬 계획은 혁명세력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원세개는 제정취소를 포고하고 1916년 6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후 약 10년 간 중국은 군벌들이 할거하는 혼란기를 맞았다.
손문은 중국공산당과 제휴, 국민당을 개편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이루었으며, 군대를 길러 군벌축출을 꾀했다. 그러나 손문은 혁명 완수를 보지 못하고 1925년 3월 12일 60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무릇 40년간을 국민혁명에 힘써온 목적은 중국의 자유평등을 구하는 데 있었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중을 환기시키고 또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으로 대하는 민족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현재까지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동지들은 내가 저술한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와 제1차 전국대표대회선언에 의거하여 계속 노력하여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이다...'
72. 지구 최후의 자연보고, 남극 - 아문센, 남극점 도착(191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1년/조선총독부, 어업령, 삼림령, 교육령 발표. 105인 사건
지구의 양극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0세기 초 북극과 남극이 각각 정복됨으로써 이러한 의문은 풀리기 시작했다. 북극은 바다, 남극은 두터운 얼음으로 뒤덮인 대륙이다. 남극대륙은 면적 1,350만제곱킬로미터, 한반도의 약 62배이며 평균 두께 2,450미터의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지구상에 있는 얼음의 약 90%가 이곳에 있는 셈이다. 평균기온은 여름 영하 30도, 겨울 영하 70도에 이른다. 남극대륙은 불모의 땅으로 보이지만 실은 금, 은, 크롬, 니켈, 우라늄 등 지하자원과 석유, 천연가스가 풍부히 묻혀 있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최후의 자연보고이다. 1961년 노르웨이, 뉴질랜드, 미국, 벨기에, 소련,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영국, 호주, 일본, 칠레, 프랑스 12개국이 남극조약을 체결, 남극대륙의 국제법상의 지위를 정하고 남극 이용의 원칙을 세웠다. 조약가맹국은 1986년 현재 28개국으로 늘어났다. 세계최초로 남극점에 발을 디딘 사람은 아문센이다. 북극점은 그보다 조금 먼저 미국의 피어리에 의해 정복되었다.
로알 아문센은 1872년 7월 16일 노르웨이의 작은 항구 보르게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사망했다. 아문센은 일찍부터 탐험가가 될 생각으로 축구, 달리기, 스키 등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문센이 의사가 되길 바랐으므로 그는 오슬로 대학의학부에 들어갔다.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1893년 21살이 된 아문센은 학교를 그만두고 탐험가가 될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선 일등항해사 자격을 얻고, 이어서 선장이 되었다. 1903년 6월 16일 밤, 아문센은 요어 호를 타고 북극으로 떠났다. 그의 항해목적은 북서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9월 12일 킹 윌리엄 섬의 남쪽에 도착한 아문센일행은 에스키모들과 겨울을 지내고 1905년 8월 13일 다시 항해를 떠났다. 8월 26일 그들은 요어 호로 다가오는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베링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고래를 잡으러 가는 포경선이었다. 이로써 노르웨이 오슬로를 떠나 그린랜드와 알래스카 북안을 거쳐 베링 해협을 통과하는 북서항로가 처음 개척되었다. 아문센이 33살 때 일이다.
아문센은 곧이어 북극점을 탐험할 계획을 세웠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탐험가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아문센은 남극점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1911년 1월 17일 프람 호는 남극대륙 서쪽의 로스 섬 연안에 닻을 내렸다. 거기서 65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는 영국의 스코트 탐험대가 기지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 역시 남극점이 목표였다. 아문센은 스코느 일행을 앞지르기 위해 극점에 이르는 최단거리 코스를 선택했다. 1911년 10월 20일 아문센 일행은 네 대의 개썰매를 타고 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스코트 탐험대는 11월 1일 출발했다. 그들은 아문센과는 다른 코스를 선택했다. 아문센 일행은 모두 52마리의 개를 데리고 있었다. 예정된 지점에 이르면 개를 차례로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전진했다. 한 달 후인 11월 21일 남위 85도 39부, 높이 3,200미터 지점에 이르렀다. 12월에 들어서자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동상 때문에 아문센의 얼굴에선 피고름이 흘렀다. 그러나 아문센은 멈추지 않았다. 12월 14일 오후 3시, 일행은 드디어 남극점에 도달했다. 위도계의 바늘이 남위 9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문센은 그곳에 노르웨이 국기를 꽃았다. 극점에서 3일을 머문 후 일행은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더욱 험난했다. 아문센은 만약 돌아가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뒤에 올 스코트 일행에게 증표를 남기고 출발했다. 그러나 일행은 2,976킬로미터를 걸어 무사히 프라미 호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한편 아문센 일행이 극점을 정복한 지 한 달 뒤인 1912년 1월 17일 스코트 탐험대가 극점에 도착, 바람에 휘날리는 노르웨이 국기를 발견했다. 이들의 실망은 대단했다. 4명의 스코트 탐험대는 곧 귀로에 올랐다. 그러나 3월 대설폭풍을 만나 조난, 한 사람도 살아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은 다시 북극으로 관심을 돌려 비행기를 타고 북극해를 횡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비행기는 얼음 위에 내릴 수가 없었으므로 비행선을 타기로 했다. 1926년 5월 11일 노르웨이, 이탈리아, 미국 세 나라의 공동탐험대가 비행선 노르게호를 타고 킹즈 만을 출발, 다음날 1시 25분 북극점에 도달하고 비행을 계속,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북극해 횡단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2년 후인 1928년 5월, 아문센과 함께 북극횡단 비행을 했던 이탈리아의 노빌레가 다시 북극탐험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된 사건이 일어났다. 아문센은 즉시 그를 구조하기 위해 비행선을 타고 북극으로 향했다. 6월 16일 오전 4시, 아문센이 탄 프랑스 비행선 라탐 호가 노르웨이의 도르모소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것이 로알 아문센의 최후였다. 노빌레를 태운 이탈리아호는 다른 탐험대에 구조되어 무사히 돌아왔지만, 아문센의 비행선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73. 세계를 불사른 두 발의 총탄 - 사라예보 사건,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3년 안창호, 로스앤젤레스에서 홍사단 결성 / 1914년 경원선, 호남선 개통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인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은 맑고 쾌청한 날씨였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조세핀은 사라예보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육군대연습을 참관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오픈 카가 잠시 멈칫했다. 그때 길모퉁이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었다. 순간 총성이 울리고 차에 타고있던 황태자 부부가 쓰러졌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황태자 부부는 15분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범인은 세르비아 인 카브리엘로 프린체프, 19살의 병약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세르비아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원으로서, 세르비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항거하는 뜻으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것이다. 이를 세칭 사라예보사건이라 한다.
사건이 일어나자 전 유럽은 긴장했다. 발칸 반도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만큼 향후 정세가 어떻게 급변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발칸 반도는 유럽 제국주의 열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슬라브주의가 팽팽하게 맞서 문자 그대로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 있었다. 세르비아는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래 러시아, 투르크,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1878년 투르크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세르비아는 독립을 이루었지만 1908년 다시 오스트리아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당하고 말았다. 세르비아 인들은 오랜 외세의 지배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은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 일어난 사건이다.
황태자의 죽음을 전해들은 오스트리아 황실은 냉담했다. 황태자가 신분 낮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황실의 냉대를 받고 있었다. 황태자비 조세핀은 보헤미아 백작의 딸로서 신분의 격이 낮아 공식 사교석상에서는 정식 황태자비로 대우받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두 사람의 장례식엔 황제도 황족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 것은 세명의 자식들뿐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취한 대외적 태도는 몹시 강경했다. 7월 23일 오후 6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 내의 반 오스트리아 출판물의 금지와 반오스트리아 단체의 해산''반오스트리아 운동을 금지하기 위한 협의회와 암살자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 참여''오스트리아 정부가 지목하는 세르비아 관리 파면'등 세르비아의 민족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세르비아는 그중 일부분만을 받아들이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때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낸 통첩을 온건하고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유럽 각국은 각자의 이해관계, 동맹관계에 의해 급속하게 전쟁에 휘말려들어갔다. 당시 유럽은 이른바 삼국동맹 세력과 삼국협상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삼국동맹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삼국협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각기 동맹국으로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발칸을 잃고 싶지 않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차르 타도를 외치는 혁명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므로 그 같은 내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도 이에 대항코자 8월 1일 러시아에, 3일에는 그 동맹국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군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단숨에 제압하고 프랑스로 향했다. 8월 2일 이번엔 일본이 영, 일동맹에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처음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영국도 중립국 벨기에를 침범했다는 명목으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발했다. 11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투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온 아라비아가 투르크에 대항하여 영국 편을 들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역시 참전하면 독립시켜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적극 협력했다. 발칸의 여러 나라들도 각각 참전했다. 불가리아는 독일 편에,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바야흐로 세계전쟁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한편 사라예보 사건의 주인공 프린체프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은 면했다. 그러나 자신이 불지른 세계전쟁의 종말을 보지 못한 채 1918년 봄 지병인 폐결핵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는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견할 만큼 통찰력을 갖고 있진 못했지만, 그가 쏜 몇 발의 총탄은 제국주의 열강의 해묵은 모순을 일거에 터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74.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러시아 혁명 발발(191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5년 박은식, (한국통사)간행 / 1916년 박중민, 원불교 창시 / 1917년 한강 인도교 완공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2월 22일,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전쟁이 시작된 후 독일식 이름인 페테르스부르크를 페트로그라드로 고쳤다)에서는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배급품이 떨어지고 없다는 사실을 알자, 굶주림과 분노에 사로잡힌 이들은 빵가게, 식료품점을 습격했다. 대부분 여성들인 이들은 가난한 병사의 아내, 그리고 여공들이었다. 다음날 사회주의 단체들은 (부녀자의 날)을 선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빵을 다오!' '아이들이 굶고 있다!' '차르를 타도하자!'
이날은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여했고, 다음날인 2월 24일에는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이 숫자는 페트로그라드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2월 25일 총파업이 일어났다. 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황제 니콜라스 2세는 내일까지 모든 환란을 정지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시위대는 자꾸 불어나기만 했다. 경찰과 군인들은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 시위대에 가담한 사람들이 곧 자신들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교들은 발포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하는수없이 공포탄을 쏘았다. 그래도 15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2월 27일 마침내 병사들은 총부리를 장교들에게로 돌렸다. 시위군중은 환호했으며, 병사들과 함께 동궁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동궁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깃발을 꽃았다. 시위를 주도한 병사와 노동자들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평의회)임시집행위원회'를 결성 했다. 병사는 1개 중대당 1명, 노동자는 1천 명당 1명 씩 대표를 선출했다. 그리고 (이스베스챠(뉴스))라는 이름의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의회는 혁명의 급진화를 막기 위해 황제를 퇴위시키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300여 년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했다. 이것이 3월혁명(러시아력으로는 2월이어서 2월혁명이라고도 함)이다. 4월 3일,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레닌이 망명지 독일로부터도착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현실화시켜 러시아에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한 혁명가이다. 그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 불거진 광대뼈와 낮은 코, 깊고 작은 눈, 작은 키에 벗겨진 머리를 한 다분히 도양적 풍모를 지닌 그는 1870년 4월 22일 볼가 강 연안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몽고계 타타르 인이었고, 아버지는 교육관리, 어머니는 교양이 풍부한 여성이었다. 1887년 레닌으로 하여금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에서 동물학을 공부하던 형 알렉산더가 황제 알렉산드르 3세를 암살하기위해 여섯 명의 청년들과 폭탄을 만들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한 것이다. 그후 레닌은 혁명이란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잔대학에 입학, 법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교내 시위와 관련되어 사형수의 동생임이 밝혀지자 제적, 카잔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카잔에 북귀한 레닌은 1년 동안 대학 4년 과정을 독학하여 법대 줄업시험에 통과했으며, 1892년 법률사무소에 취직했다. 이때 그는 이미 마르크스의 저작을 모두 독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노동자들이 있는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났다.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페테르스부르크에 온 레닌은 1895년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 노동자와 혁명적 지식인간의 결합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의 연인이자 동지인 크루프스카야도 8개월 뒤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결혼했다. 1900년 레닌과 크루프스카야는 망명길에 올랐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을 전전하는 망명생활을 하며 그는 한시도 쉼없이 혁명을 준비하고 지도해나갔다. 1917년 2월 혁명 직후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국적으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공화국'이었다. 그리고 '전쟁 반대''임시정부 반대'를 외쳤다. 이윽고 10월 25일 새벽, 적위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시가를 재빨리 장악했다. 그날 밤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레닌이 의장, 트로츠키가 외무위원, 루이코프가 내무위원, 스탈린이 민족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이 11월 혁명(볼셰비키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주요한 사건의 하나이다. 러시아에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짐으로써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레닌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고, 레닌 또한 러시아 혁명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레닌의 친구였던 막심 고리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원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력하게 불행과 슬픔과 고통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75. 민족자결주의와 세계평화 - 윌슨, 14개조 평화원칙 제창(191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8년 이동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결성 / 1919년 3.1일 운동 발발 / 상해에 임시정부 수립
1918년 11월, 독일이 휴전조약에 서명함으로써 4년간에 걸친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판도를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립을 천명하고 유럽으로부터의 주문으로 자국의 산업을 번영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던 미국은 1915년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독일 잠수함에게 격침당해 타고 있던 미국인 백여 명이 사망하자,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17년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마침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200만 명의 육군을 서부전선에 보내는 한편, 막대한 규모의 군수물자와 재정원소를 투여,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영행을 미쳤다.
한편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당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종식을 추진했다.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으며, 유럽 노동자 계급의 지원 없이도 러시아에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1918년 3월 3일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 독일과 강화하고 연합군을 탈퇴했다. 이에 여유가 생긴 독일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로 돌려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대패하여 후퇴하고 말았다. 동맹국 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투르크는 영국에게 메소포타미아를 점령당한 뒤 10월 30일 항복하고, 불가리아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패하여 휴전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운동이 일어나 황제가 스위스로 망명, 합스부르크 가가 무너지고11월 3일 항복했다.
독일에서도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11월 3일 킬 항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독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사회주의당이 이끄는 새 정부는 11월 11일 프랑스의 우아즈 강 연변에 있는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조약에 서명,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났다. 1919년 1월 전승국 27개국 대표가 프랑스 파리에 모여 강화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중심인물은 미국의 윌슨, 영국의 로이드 조지, 프랑스의 클레망소였으며, 그중에서도 윌슨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파리 시민들은 윌슨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정의의 사도 윌슨에게 영광을!'이란 현수막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이 그에게 꽃을 던졌다. 윌슨이 이처럼 유럽 인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은 것은 그가 발표한 이름바 '14개조 원칙'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의 식민지 약소국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소수민족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헝가리가 독립하고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등 남슬라브인의 거주지와 합쳐 세르보 크로아트 슬로벤 왕국이 되었다. 이는 나중에 유고슬라비아로 개칭되었다.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의 헤자즈는 독립을 했다.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도록 약속받았다. 그러나 승전국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의 독립운동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일본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일본에 대한한 중국의 5.4운동 역시 무시되었다. 영국을 도왔던 식민지 인도도 원하던 독립을 얻지 못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한편 윌슨은 패전국 독일에게 너무 가혹한 강화조건을 제사하면 오히려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독일에 대한 보복을 가벼이 하자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입장은 강경했다. 사실 서부전선의 전투는 거의 대부분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이루어져 프랑스의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독일은 자기 나라 땅에선 전투를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난항을 거듭한 끝에 파리 강화회의는 6월 28일 베르사유 궁에서 조인식을 갖게 되었다. 독일의 영토와 해외 식민지는 갈갈이 찢겨 승전국에게 넘어갔고, 막대한 배상금을물러야 했다.
한편 윌슨이 14개조 원칙에서 주장한 '대소 국가의 구별없이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의 상호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연맹의 설립'은 이의없이 가결되어 조약의 주요내용으로 포함되었다. 1920년 11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제1회 국제연맹 총회가 열렸다. 국제연맹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국제평화기구였지만, 출발부터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주창자인 미국이 상원의 조약 비준 거부로 참가하지 못했으며, 러시아와 패전국이 제외되었다. 그 뒤 패전국의 가입이 허락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독일 등이 차례로 가입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할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있어침략의지를 누를 수가 없었다. 1933년 일본과 독일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7년에는 이탈리아가 탈퇴, 이들 파시즘 세력은 또 한 차례의 세계전쟁을 일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