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61. 다이너마이트와 노벨 상 - 노벨, 다이너마이트 발명(186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64년/흥선 대원군 집권, 1865년/경복궁 재건 시작
1896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재산은 모두 돈으로 바꾸어 기금으로 만들고 해마다 그 이자를 지난 1년 동안 인류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금으로 준다. 즉,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또는 전쟁준비를 방지하거나 줄이기 위해서, 또는 평화회의를 열거나 확대하기 위해서 가장 훌륭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 이러한 부문의 상금은 어느 나라 사람에게 주어도 좋다'
그의 유언에 따라 약 9백만 달러에 달하는 기금이 마련되었고, 상의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노벨 상으로 정해졌다. 최초의 노벨 상 수상식은 190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거행되었다.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네 형제 중 셋째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병약했다. 가난한 발명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간 그는 문학에 심취, 셀리의 시를 읽고 장차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꿈을 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발명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1850년 17세 되던 해 노벨은 혼자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노벨의 아버지는 무기제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1862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 연구를 시작했다. 액체로 된 니트로글리세린은 보통 화약의 몇 십 배 강한 폭발력을 지녔지만 두드리거나 문지르기만 해도 폭발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이것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종전의 어떤 화약보다도 강력한 힘을 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초의 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노벨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통 속에 보통 쓰이는 검정색 화약을 담은 유리관을 넣고 유리관의 뚜껑을 막으면 폭발력이 훨씬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듬해인 1863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에 대한 특허를 따내고 스톡홀름에 공장을 세웠다. 그해 말 옴메베루그 광산에서 노벨이 만든 화약이 최초로 사용되었다. 대성공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구리 광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광산 주인은 노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화약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노벨의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동생 에밀과 직공 세 사람,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공장은 물론 산산조각이 났다. 스웨덴 정부는 스톡홀름에서 화약제조를 일절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노벨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노벨은 연구를 계속했다. 형과 함께 독일 함부르크 근처에 공장을 세우고 알프레드 노벨 회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여기서 제조된 화약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호주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그러나 1865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것을 비롯, 파나마 운하를 지나가던 화물선이 폭발하여 476명이 사망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니트로글리세린 저장창고가 폭발, 14명이 사망하는 등 사고가 잇달았다. 그러자 노벨은 액체인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체로 만들면 운반하기 쉽고 따라서 폭발사고도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것이다. 1866년 드디어 노벨은 위대한 발명을 해냈다. 규조토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스며들게 한 것이다. 그해 10월 노벨은 이 화약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이너마이트는 인간의 노동을 대폭 줄이는 데 기여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수로는 길이 17킬로미터, 그중 터널이 6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수로를 만들기 위해 3만 명이 11년간 일을 했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면 100명 정도의 인원으로 10개월이면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후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보다 화력이 강한 폭발성 젤라틴, 발리스타이트라는 무연화약을 연달아 발명했다. 그의 발명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도 했지만 인간 생명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무기로 상용되었다. 노벨은 만년에 이 점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듯, 평화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희사하겠다고 말했다. 노벨 상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된 것이다. 1890년 그는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옮겨나 6년 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62.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위하여 - 마르크스, (자본론)제1권 출산(1867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866년/제너럴 셔먼 호 사건. 병인양요로 프랑스와 싸움
역사상 이름을 남긴 학자들 중 마르크스만큼 후대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혁명을 낳았으며 수많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케 했다. 마르크스 자신의 말대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철학'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라인 주 트리에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망있는 법률가였으며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8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인 마르크스는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머리가 좋고 자잘이 뛰어난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트리에르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르크스는 1836년 본 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법률공부보다는 시와 철학에 열중했다. 1년 후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그는 헤겔 철학이 풍미하고 있던 베를린에서 불타는 열정으로 지적 탐구에 몰두했다. 철학, 논리학, 언어학, 수학, 문학, 시 등등 그의 지적 섭렵은 온갖 분야에 미쳤다. 그때 마르크스는 예니 폰 베스트팔렌이란 여성과 약혼 중이었다. 예니는 트리에르 사교계의 꽃으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지성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은 마르크스의 재능을 아껴, 1838년 마르크스의 아버지가 죽자 대신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두 사람은 7년간이나 약혼상태로 지냈다. 그 동안 마르크스는 공부를 계속했고, 예니는 온갖 소문과 주변의 악의에 찬 시선을 견디며 마르크스를 기다렸다. 예니는 의지 굳고 인내심 많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마르크스 못지않는 열정으로 헤겔 철학을 비롯, 지적세계를 섭렵했다. 이후 그녀는 평생 동안 마르크스의 충실한 비서요 동반자로 일했다. 마르크스의 원고를 정리해주고 적절한 비판을 가하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1841년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라인 신문)편집장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그가 쓴 몇 개의 논설 때문에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자, 1843년 10월 마르크스는 임신 3개월의 예니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연구하는 한편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의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독불 연감)에 글을 썼다. 평생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만나 것도 이때였다. 1845년 2월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해 브뤼셀로 갔다. 그후 엥겔스와 영국을 여행하고 공동저술에 착수하는 한편 공산주의자 회합에 참석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망명했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몹시 힘겨웠다. 집세를 못내 쫓겨나야 했으며, 가난과 질병으로 두 명의 아이를 잃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아내와 꼬마 제니도 병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네겐 치료비가 없으니 의사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근 열흘간 나는 가족들에게 빵과 감자만을 먹였고 오늘은 무얼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일 뿐입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 속에서도 마르크스는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1867년 (자본론) 제1권을 탈고했다. 그 책은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건강, 행복, 가족을 희생해서'이룬 작품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산업화가 낳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보았고,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사회를 체험했다. 그리하여 뛰어난 통찰력으로 자본주의란 모든 것을 상품화하며 인간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체제라고 간파했다. 일찍이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는 부르주아에게만 유리한 사회일 뿐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건 굶주림과 사슬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사회, 지배계급도 피지배계급도 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자본론)은 바로 그러한 사회의 건설을 위해 자본주의의 본질을 명쾌히 밝힌 필생의 업적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독일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모두 흡수하여 새로이 극복한 것으로서 종래의 관념론을 뒤집은 유뮬철학이다. 그는 인류사회가 일정한 법칙을 갖고 변화발전하며,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한 확신 아래 평생 혁명을 위해 일하고 글을 썼다. 1881년 예니가 사망했다. 오랜 생활고와 망명생활에도 꿋꿋이 남편 곁을 지켜온 그녀는 장암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마르크스도 뒤를 다르듯 2년 후인 1883년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그가 죽은 뒤 더욱 널리 보급되고 실천에 옮겨졌다. 유럽 각지에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1917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63. 바다를 이은 최초의 운하 - 수에즈 운하 개통(186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68년/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
1869년 세계 교통사상 획기적인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아메리카에서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 것이고, 또 하나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것이다. 그중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대운하라는 의의 외에, 유럽 선진국들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총독은 투르크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후원을 요청했다. 1859년 총독은 수에즈 운하건설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일으켰다. 프랑스인 리셉스가 그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영국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 운하가 건설되면 인도양과 아시아로 가는 항로가 대폭 단축되어 식민지 경영이 훨씬 유리해지리라는 생각에서 운하 건설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운하의 규모상 영국의 자본만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 프랑스에게 합작을 청했다. 프랑스는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하면 손해를 볼 뿐이라고 생각하여 합작을 주저했다.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은 이집트에서 영국의 군사적 행동은 없을 거라고 약속,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869년 11월 17일 착공한 지 10년 만에 운하가 완공되었다. 총길이 162.5킬로미터, 바다와 바다를 잇는 세계 최대의 운하였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런던과 싱가포르간의 항로는 2만 4천킬로미터에서 1만 5천 27킬로미터로 절반 가량 줄어들게 되었다. 이집트 인들은 이에 반발, 1881년 아라비 파샤의 지도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은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이 기회에 아프리카 남부로 진출하고자 했다. 1883년 나일 강 상류에 있는 수단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이집트와 그를 배후조종하는 영국에 대해 성전을 선포했다. 영국은 이집트 총독의 군대 만여 명을 동원, 영국군 장군 윌리엄 힉시의 지휘하에 수단을 정복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은 수단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집트 군은 이 싸움에서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글래드스턴은 새로운 수단 정복 계획을 세웠다. 1885년 영국은 고든을 수단으로 파견했다. 그는 바로 중국에서 상승군이란 용병대를 지휘, 무력으로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든 역시 수단의 지도자 마흐디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의 목은 창 끝에 꿰어져 부도덕한 정복자의 말로서 공개되었다. 이에 영국은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기괸총으로 수단 인 11,000명을 무차별 사살, 고든의 복수전으로 삼았다. 그후 영국은 보어 전쟁을 일으켜 남아프리카 연방을 만들어 식민지로 삼고, 케이프, 카이로, 캘커타를 거점으로 하는 이른바 3씨정책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열강은 질세라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지금까지 미지의 세계로 알려져 있던 아프리카 내륙지방에 대한 탐험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탐험가는 스코틀랜드의 의사 리빙스턴과 영국인 기자 스탠리이다. 리빙스턴은 1840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약 30년 동안 아프리카 중남부 일대를 탐험했다. 그의 탐험기는 유럽 인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스탠리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받아 중앙 아프리카의 콩고를 탐험, 원주민과 협정을 맺어 벨기에를 콩고에 진출케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열강은 앞을 다투어 탐험가를 후원하여 아프리카 진출을 서둘렀다. 아프리카는 순식간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혹은 보호령이 되어갔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서부, 북부, 중부 일대를 장악했으며, 벨기에는 콩고를, 이탈리아는 트리폴리와 리비아를, 독일은 카메룬, 토고를 손에 넣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남은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나라간의 국경선이 다른 대륙과는 달리 일직선으로 곧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정복국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삶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들에게 유럽 백인들이 갖다준 것은 학살과 노예사냥, 착취와 굴종뿐이었다.
64. 철과 피만이 통일을 가져다준다 - 비스마르크, 독일통일 달성(1871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871년/신미양요로 미국과 싸움. 척화비 건립. 호포법 실시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은 봉건반동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빈 체제로 불리는 이 시대를 주도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였다. 각국의 국경선이 혁명이전으로 되돌려지고 나라마다 일제히 봉건왕조가 부활되었다. 독일은 빈 회의의 결정에 의해 35개 국가와 4개 자유시로 분립되었다. 프로이센은 그중의 한 소국이었다. 1861년 즉위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융커 출신의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등용, 독일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융커란 독일 북동부의 지주층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군대와 고위관리의 요직을 독점하고서 국왕의 충실한 지지기반이 되어주고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15년 태어났다. 그는 독일이 통일되면 프랑스, 영국 못지않은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인물이었다. 청년 시절, 무려 28번의 결투를 벌인 경력을 지닌 그는 32살에 의원으로 당선, 황제 통치라야 국민이 행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수정치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왕은 그를 신임하여 독일 연방희회의 프로이센 대표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 36살 때의 일이다.
비스마르크는 이 직책을 7년간 수행했고, 그후에는 러시아 대사, 프랑스 대사로 활약하면서 무력으로 누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오늘의 문제는 말이나 다수결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이른바 철혈정책을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군비확장에 반대하는 의회를 눌러 4년 동안 그 권리행사를 정지시키고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 군비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비스마르크는 참모총장 몰트케, 육군대신 론과 함께 독일통일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통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였다. 비스마르크는 우선 프랑스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어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켰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라인 강 유역의 합병을 인정받는다는 조건하에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1866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오스트리아는 7주 만에 무너졌다.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프랑크푸르트 등을 합병하고 라인 강 이북을 손에 넣어북독일연방을 결성했다.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다. 비스마르크는 미리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에 비밀외교를 벌여 프랑스를 원조하지 못하게 하고 교묘하게 프랑스를 유도, 선전포고를 하게 했다. 1870년 7월 마침내 전쟁(보, 불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황은 프로이센에게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데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경험까지 갖춘 프로이센 군을 프랑스는 당해내지 못했다. 8월 프랑스 군의 본거지 메스 요새가 점령당하고 이를 구원하러 나선 나폴레옹 3세가 세당에서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는 즉시 휴전을 제의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이를 거절하고 파리로 진격, 1871년 1월 파리를 함락시켰다. 프랑스는 철과 석탄의 보고 알자스 로렌지방을 떼어주고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해야 했다.
파리 함락을 눈앞에 둔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왕가의 상징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제국의 황제 취임식을 가졌다. 이로써 수십 개로 분립해 있던 독일연방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으며, 프로이센의 호헨촐레른 왕가는 독일 황실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통일된 독일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20년 동안 그는 탁월한 외교수완을 발휘했다. 동맹정책을 써서 독일의 지위를 강화하고 프랑스의 부흥을 저지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유럽 정치는 기실 비스마르크에 의해 움직여졌다. 때문에 이 시기를 비스마르크 시대라고 한다. 그렇지만 유럽 각국은 독일의 팽창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카톨릭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성장, 그를 위협했다. 당시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라살레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각각 이끄는 두 그룹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두 그룹은 1875년 독일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고타 강령)을 발표했으며, 1877년 12명의 의원을 하원에 내보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자들의 집회, 결사, 출판을 금지하는 한편, 질병보호법, 실업보장법, 노후보장법 등 일련의 사회복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지하로 들어가 도리어 확대일로를 걸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는 새 황제 빌헬름 2세와의 불화 끝에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불만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898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진국이던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국가 주도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65. 어둠을 몰아낸 제2의 빛 - 에디슨, 백열전구 발명(187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75년/운양호 사건, 1876년/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 1879년/지석영, 종두법 보급 시작
1929년 10월 21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 그린필드 마을의 포드박물관에서 백열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라듐을 발견하 퀴리 부인,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 에디슨의 친구이자 자동차 왕으로 유명한 헨리 포드, 후버 대통령, 그리고 에디슨의 조수였던 프랜시스 줄 등이 참석했다. 이윽고 저녁때가 되어 회장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옛날의 조수에게 말했다.
'줄, 천천히 발전기를 돌리게'
그런 다음 에디슨은 전등 스위치를 넣었다. 순간, 수백 개의 백열전구에 불이 켜지고 회장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후버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디슨 씨는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미국인입니다. 에디슨 씨는 세계에서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큰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이 위대한 미국인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바입니다' 이번엔 에디슨이 인사를 했다. '만약 우리들이 한 일이 이 세상에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을 가져올 수 있었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가까스로 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2년 후 에디슨은 사망했다. 그의 나이 84세이었다. 토머스 엘버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 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5대호의 하나인 이리 호에서 약 13킬로미터 거슬러올라간 휴런 강 유역이었다. 에디슨은 7남매의 막내였으나 위로 셋은 어렸을 때 죽었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매우 호기심 많고 엉뚱한 짓을 곧잘 해서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듣는 일이 흔했다. 국민학교 성적은 매 꼴찌를 면치 못했다.
'네 머리는 썩어빠졌어!'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은 에디슨은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공부를 배웠다. 어느 날 어머니가 준 (자연과학 학교)라는 물리학 책을 읽은 그는 과학실험에 몰두, 지하실에 실험실을 만들고 (에디슨 연구소)라 불렀다. 1859년 12살이 된 에디슨은 열차 신문판매원이 되었다. 매일 아침 7시 포트휴런을 출발, 3시간 걸려 디트로이트에 도착한 다음 저녁때까지 거기서 지내고 다시 열차를 타고 밤 9시 30분에 포트휴런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열차의 화물칸을 빌어 이동 실험실을 만드는 한편, 여가 시간엔 디트로이트 시내 도서관에 가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어치웠다. 이무렵 기차 실험실 안에서 화재를 일으켜 차장에게 얻어맞은 바람에 그는 귀가 조금씩 나빠지기시작했다. 1862년 에디슨은 열차에 깔릴 뻔한 역장의 어린 아들을 구해준 보답으로 그에게서 전신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후 에디슨은 전신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험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곳저곳 직장을 떠돌면서 그는 발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1870년 에디슨은 뉴저지 주 뉴어크에 공장을 세웠다. 그가 발명한 '주식표시기'를 4만 달러에 팔아 그 돈으로 마음껏 실험에 몰두할 수 있는 장소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하루 4시간밖에 자지 않으면서 일과 실험에 몰두했다.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그의 공장에 모여들었다. 2중 전신기, 4중 전신기, 등사판, 에디슨식 전시펜 등 갖가지 발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876년 에디슨은 멘로파크라는 조용한 시골로 이사를 했다. 이곳에서 축음기와 송화기를 발명했고, 벨이 만든 전화기를 한층 개량했다. 사람들은 에디슨을 '멘로파크의 마술가'라고 불렀다. 1878년 에디슨은 백열전구 연구에 착수했다. 그때까지 만들어진 백열전구는 고작해야 5, 6초 이상 빛을 발하지 못했다. 에디슨은 에디슨 전구회사를 만들어 수학자 앱튼, 유리기술자 보엠 등 유능한 조수들과 함께 연구를 거듭했다. 1879년 10월 21일 밤, 무명실을 태워 만든 필라멘트 실험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전구는 40시간 이상 계속 빛을 발했다. 그해 섣달 그믐날 밤, 에디슨은 멘로파크에 전등을 켰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발명품을 눈으로 보기 위해 각지에서 밀어닥쳤다. 멘로파크 언덕길 양쪽을 밝힌 전등불이 금방 내린 하얀 눈을 환히 비추었다.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리하여 전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밖에도 에디슨은 영사기, 전기철도, 축전지 등 무려 1,300여가지 발명을 해냈다. 그의 발명은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인류문명을 발전시켰다. 무엇이 그의 발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느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상상력과 큰 희망, 그리고 일하고 싶다는 의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