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평범하게 그리고 상식적으로 - 이동진(시인)
1945 년 황해도 신천 출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70 년 '현대문학'에 시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함.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 외교안보 연구원, 주일 총영사, 주벨기에 공사 역임. 저서에 '한의 숲', '시들린 세월', '객지의 꿈',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하는 죄인', '민주화 십자군', 희곡집 '독신자 아파트', '누더기 예수', 번역서 '장미의 이름', '성난 지구' 외 다수가 있음.
허공에 쏘아댄 화살
인생이란 무엇이냐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면 다시 못 올 내 청춘.
술자리에서 또는 노래방에서 지금도 이 유행가를 목청껏 뽑아대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흥겹고 또 약간은 데카당적인 노래다. 물론 나도 이 노래를 좋아한다. 그러나 청춘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다가, 아무리 피었다가 시들면 다시 못 오는 청춘이라고 해도,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춤을 추어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청춘도 인생도 아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가사는 시로 승화되지 못한 채 유행가 가사에 그치고 만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정말 무엇인가? 누가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시건방지게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지 대답을 해야 만 한다.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삼천포로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케 세라 세라...... 이것은 인생이 뭔지 모르겠으니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생활 태도라고 본다. 이래 가지고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따지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다. 한편,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견해가 있다. 우리 유한한 개인의 삶이 결국은 한줄기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동양 철학과 종교에서 자주 등장한다. 또한 서양의 사상에도 인생은 꿈이라는 비유가 들어 있다. 그러면 인생이 정말 꿈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만일 우리 삶이 꿈이라면 각 개인의 자유와 책임, 죄와 벌은 인위적으로 지어낸 코미디일 뿐이다. 꿈속의 자유가 무슨 자유이며, 꿈속에서 저지른 악행이나 잘못에 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러니까 꿈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인생이 부질없는 것, 덧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비유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러면 인생은 정말 무엇인가? 인생은 모순과 우연투성이 만도 아니고 꿈도 결코 아니다. 인생은 살아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삶의 총체다. 생로병사도 삶의 형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고통과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행복도 있다. 그러니까 인생을 꿈이라고 하거나 모순과 우연투성이라는 말은 극단론이다. 동시에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는 말도 극단론이고,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등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향락주의도 역시 극단론이다. 어느쪽이든 극단론에 빠지게 괸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허공에 쏘아댄 화살 신세다. 무의미하고 오로지 귀찮은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중용의 도가 참다운 삶의 길인가? 극단론에 빠지지 않고 중용, 즉 한가운데의 균형을 지키는 것도 길은 길이지만, 너무나 추상적이라서 실생활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해설이 필요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절름발이 여인이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길을 건너가는 모습을 오늘 지켜보았다. 차량 통행이 많은 큰길이다. 뜸해진 틈을 타서 빠른 걸음으로 건너가는 그 걸음걸이가 애처롭다.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은 그 여인을 병신, 또는 듣기 좋은 말로 지체부자유자라고 한다. 겉보기는 그렇다. 분명히 병신은 병신이다. 병신이란 말을 아무리 그럴듯한 명칭으로 바꾼다고 해도 절름발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절름발이는 그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멀쩡한 인간들이 못 깨닫는다는 데 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만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겉은 멀쩡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속이 병든 인간으로 가득찬 세상인 것이다. 위장, 간장, 허파, 콩팥, 눈, 신경, 두뇌 등에 병이 든 병자, 즉 병신이 얼마나 많은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병원에만 병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원 바깥의 세상에도 병신이 천지 사방에 널려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병신이면서도 자기가 병신이란 사실을 외면하거나 못 깨닫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병신이라고 비웃고 욕하고 경멸하고 못살게 군다는 데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이룬 사회
독선, 편견, 아집, 오만에 사로잡힌 사람도 병신은 병신이다.
돈과 재산에 눈이 먼 사람도 병신은 병신이다. 부동산 투기, 대형 금융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도 병신은 병신이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형태의 차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병신은 병신인 것이다. 그래서 병신으로서 걸어가는 인생의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화를 하나 들기로 하자.
옛날에 절름나라와 절뚝나라가 있었는데, 두 나라의 왕이 모두 절름발이인 반면, 백성은 모두 두 다리가 멀쩡했다. 절름나라의 왕은 매우 오만해서 스스로 병신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두 다리 멀쩡한 백성이 병신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하루는 왕명을 내려 모든 백성의 다리 한쪽을 잘라서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왕은 대단히 만족했지만 다리 잘린 백성은 한결같이 고통스럽고 불행했다. 절뚝나라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그 왕은 자신이 병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백성의 다리를 자르지는 않았다. 자기 혼자 병신의 인생길을 걸어가면 그만이라고 믿었다. 백성 가운데 아무도 왕을 병신이라고 흉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왕도 백성도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산너머 산도적 떼가 침입해 왔다. 그러자 절름나라의 왕이 도둑 두목의 칼에 맞아 죽고 온 나라가 점령당하고 말았다. 멸망한 것이다. 그러나 절뚝나라는 끄떡없이 버티었다. 버린 정도가 아니라, 얼마 후 절름나라에서 산도적떼를 몰아내고 말았다. 두 나라가 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두 종류의 백성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병신이라고 욕을 해댔다. 그러자 왕이 명령을 내렸다. 병신이라는 말을 쓰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우리 나라에는 병신이 단 한명도 없다. 한쪽 다리가 짧든, 두 다리가 멀쩡하든, 그것은 육체의 일부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이윽고 두 다리 멀쩡한 쪽이 절름발이들을 도와 주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고 왕국은 날로 부강해졌다.
위 설화에서 굳이 그럴듯한 교훈을 끄집어낼 생각은 없다. 이 세상에 착하고 어진 사람만 남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악인을 싹쓸이한다고 해도(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긴 해도), 결국은 또 악인이 나타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악인 또는 선한 인간, 즉 두 패로 갈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순간 또는 일정 기간 악을 행하다가도 나중에 착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이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모두 극단론이라고 본다. 인간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간직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질문 같지만 사실은 간단하다.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는 것이다. 동시에 남(또는 이웃, 민족, 나아가서는 인류)을 위해서도 똑같은 성의와 노력을 기울여 일을 하는 것이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자. 이 말은 이웃만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 아니다. 이타주의도 극단론에 빠지면 올바르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이기주의도 그렇다.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에는 돌아와서 나의 이익, 나의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신으로 사는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이라고 본다.
다만 한 가지는, 절뚝나라의 왕처럼 우리 각자가 스스로 병신이라는 점, 부족하고 결함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자인해야 한다. 동시에 나의 결함을 덮기 위해서 수많은 타인에게 고통과 불행을 주는 절름나라의 어리석은 왕을 닮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돈, 재산, 학식, 명예, 권력, 지위 등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이룬 사회에 질서와 평화, 행복과 번영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지, 어느 개인이 자기만의 쾌락, 안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독점할 그런 목표가 결코 아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그러니까 열심히, 정직하게 노력해서 돈을 더 벌려는 활동, 한 단계라도 위로 올라가 출세하려는 노력은 가치가 있다. 지식의 추구, 명예의 유지, 권력의 행사도 마찬가지로 의의가 있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불의와 부패를 통해서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 가족이나 가문만을 위해서, 자기 패거리만을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한다면 더욱 악한 일이다. 나 자신을 위하고 동시에 남을 위한다는 정신, 자기 분수와 능력에 맞게 추구하겠다는 정신이 중요하다. 그리고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양심적인 방법으로 돈이든 재산이든 추구하겠다는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인생의 목적은 보람이다. 삶에서 보람을 제외하면 그 삶 자체가 정말 개꿈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흔히 삶의 목적을 보람에 두지 않고 돈, 재산, 명예, 권력의 획득에 둔다. 그러한 것 모두가 삶의 보람을 축적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시적인 수단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치관의 혼돈 또는 상실이 오고, 사회 질서의 문란, 기강의 파괴가 발생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무슨 절묘한 해답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할 필요가 없다. 그 대답은 평범한 인간, 상식적인 인간의 가슴에는 다 들어 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자. 자기 만족을 위해서 온 백성의 다리 한쪽을 잘라낸 어리석은 왕의 행동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어떠한 행동을 하든, 대화를 하든, 궁리를 하든, 한 번만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자. 나의 이러한 생각, 말, 행동이 혹시라도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아닐까? 내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내 능력에 넘치도록 욕심만 부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우화도 기억하자.
어느 날 왕이 한 사람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면서, 하루 종일 걸어가는 범위의 땅을 다 주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쉬지 않고 사방을 뛰어다녔다. 광대한 토지가 자기 몫이 되었지만 해질 무렵에 그는 탈진해서 쓰러져 죽었다. 그 사람이 마지막에 소유한 땅은 자기 몸을 누인 흙구덩이 뿐이었다. 이것은 토지나 재산을 경멸하자는 말이 아니다. 땅을 왜 가지려고 하는가 하는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다. 광대한 토지, 즉 어마어마한 재산은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보람있는 일, 자기와 남을 동시에 위하는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우화다.
가난은 미덕이 아니다. 가난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은 더욱 나쁘다. 오늘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가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해선 곤란하다. 부유한 것이 죄는 아니다. 악한 것도 아니다. 재산을 물려 주는 것도 악하지 않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사회의 상식에 비추어)으로, 부패와 불의를 통하여 부유해지는 것은 나쁘다. 악한 짓이다. 그렇게 얻은 큰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지 않고, 역시 부정한 방법으로 상속시키는 것은 더욱 악한 짓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흔히 말하는 총체적 부패 구조하고 한다.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진정 올바른 삶의 길을 각자가 찾아내야 한다. 그 길은 거창하거나 극적인 것이 아니다. 매우 평범한 길이다. 예전부터 우리 민족이 알고 또 실천해 온 것이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너무 평범하다. 너무 어리석은 듯 보인다. 그렇게 하다가는 깡통찬다고 야유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고 믿는다.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자기 삶의 참된 보람으로 발견한다. 비록 일시적으로, 구조적으로 경멸을 당하고 짓눌린다 해도, 상식적 진실을 따르는 사람만이 최후의 한마디를 할 것이다. "나는 정말 잘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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