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달영(柳達永.1911.4.8∼2004.10.27)
농학자. 사회 운동가, 수필가. 경기도 이천 출생. 수원 고농 졸업. 미네소타 대학 수학. 서울 농대 교수. 재건 국민 운동 본부장 역임. 그는 수필 "신문 망국론" "흙과 사랑"에서는 경세가로서의 풍모와 자연 찬미를 보여 주었다. 담백하고 진지한 인간상을 모색하는 철학적인 필치로 정평이 높다.
슬픔에 관하여
사람의 일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위로 하여 짜 가는 한 조각의 비단일 것 같다. 기쁨만으로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이는 사람의 흉중에도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의 눈에도 기쁜 웃음이 빛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 해서 절망만 일삼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고호가 그린 "들에서 돌아오는 농가족"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얇게 무늬지고, 넓은 들에는 추수할 곡식이 그득한데, 젊은 아내는 바구니를 든 채 나귀를 타고, 남편인 농부는 포크를 메고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생활하는 사람의 세계를 그린 그림 가운데 이보다 더 평화로운 정경을 그린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넓은 들 한가운데 마주 서서, 은은한 저녁 종 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농부 내외의 경건한 모습을 우리는 밀레의 "만종"에서 보거니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그 다음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밀레와 고호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평화 지향의 사상은 마치 한 샘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구별할 수 없다.
그 무서운 가난과 고뇌 속에서 어쩌면 이렇게도 모든 사람의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는 평화경이 창조될 수 있었을까? 신비로운 일이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나(봄의 소나타)를 들을 때도 나는 이러한 신비를 느낀다. 둘 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슬픔은, 아니 슬픔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영혼을 정화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 아닐까? 예수 자신이 한없는 비애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인류의 가슴을 덮은 검은 하늘을 어떻게 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공자도 석가도 다 그런 분들이다. 나의 막내 아들은 지난봄에 국민 학교 1학년이 되었어야 할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 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 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의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서고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 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 사람의 물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었나 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아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 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 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쁜 병을 고쳐 줄 수 있게 말이다."하고 말했었다. 그른 고개를 끄덕이었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 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없이 총명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픈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겨울 정원에서
정원에 흰 눈이 가득하게 덮였다. 연인을 안으려고 벌린 두 팔처럼 광교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겨울철에는 우리 평화 농장 좌우편에서 유난스레 푸르르다. 우리 농장도 광교산의 한 줄기로 완만하게 뻗어내린 경사지이다. 왼편으로 맑은 시내가 흘러내리고 바른편으로 제법 노송의 티가 도는 수령 백 년 안팎의 송림이 길게 둘러 있어 우리 농장의 울타리 구실을 하고 있다. 농막 주위에는 십여 년 전, 내가 이 땅을 개간하던 무렵에 심어서 가꾸어온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이제는 모두 크게 자라서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 보게 되었다. 나와 내 아내가 해마다 땅을 파고 거름을 묻고, 가지를 간추려 주고, 벌레를 잡고 병을 막기 위해 소독을 하면서 지성스럽게 가꾸어 온 나무들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그루 정들지 않은 것이 없다. 남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 심어 가꾼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고 큰 여러 종류의 나무들은 그대로 우리집 가족들이다. 이제는 서리 맞아 낙엽이 져서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들이 못가에도 언덕 위에도 잔디밭가에도 정자 주위에도 을씨년스럽게 찬 바람에 떨고 서 있다. 각종의 산새들이 몰려와 앙상한 가지 위에 앉아서 재재거릴 때에는 잎사귀 하나 꽃 한 송이 없는 나무들은 더욱 살벌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바라보면 어느 나무 어느 가지 하나도 오달진 눈을 지니지 않은 것은 없다. 목련. 라일락. 산수유 가지에는 탐스러운 꽃을 잉태한 야무진 꽃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리고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의 수피 속에는 강인한 생병이 충만해 있다. 손으로 나무 줄기를 어루만져 보노라면 나무와 나의 생명이 서로 하나가 되어 흐르는 듯한 삶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
버드나무, 벚나무, 백양나무, 자작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오동나무, 박태기나무, 아기씨나무, 복숭아나무, 모과나무, 은행나무... 그 어느 것을 보더라도 백인의 용기를 가진 도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싹틔울 때와 꽃 피울 때와 잎을 떨어 버릴 때를 올바로 아는 선지자처럼 느껴진다.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함축이라고 할 것이다. 차원이 높을수록 소박하고 떫은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함축 때문이다. 그런데 겨울 나무들은 네 계절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함축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그렇게 메마르고, 또 그렇게 외로워 보이건만 겨울 나무들의 가지가지에는 이미 봄날의 찬란한 꽃 세계도 신록의 청신한 향연도 충분히 마련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씨 심어 가꾸어 기른 나무들 사이를 무한의 애정을 느끼면서 거닌다. 세월이 내 머리칼을 은실로 표백하면서 쉬지 않고 흐르고 있건만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나무들을 어루만지면서 흰 눈 위를 거닌다. 봄이 돌아오면 시냇가의 능수버들은 어느 나무보다도 일찍 꿈처럼 아련한 초록으로 실가지들을 물들이고 흐느적거리겠지. 언덕 위의 산수유나무는 잎이 돋기도 전에 잔설 속에서 황금의 꽃을 마술처럼 가지마다 푸짐하게 피우겠지. 그리고 진달래, 개나리, 미선, 백목련들이 일찍 피기 경쟁을 벌일 것이고 철쭉, 아기씨꽃, 살구, 매화, 앵도, 홍도, 백도, 박태기 들이 각각 제 시간을 찾아 피어 나겠지. 모란, 옥싸리, 모코렌지, 레드멘들이 차례차례로 뒤를 이어 피겠지. 언덕 위의 과수원의 사과나무, 배나무도 푸짐하게 꽃을 피울 것이고, 숲 속의 자작나무, 백양나무, 은사시나무, 상수리나무, 참나무, 밤나무꽃들도 멋을 아는 눈에는 버릴 수 없는 풍취를 심어 줄 것이 틀림없다. 그 무렵에는 연못에 수련의 둥근 잎이 물 위에 몇 개씩 동동 뜨기 시작하겠고, 금잉어 떼들이 물을 굽어 보는 나에게 먹이를 달라고 수면에 호화롭게 떠올라 조를 것이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깊은 겨울날에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거칠 것 없이 비쳐 오는 겨울볕을 받으면서 나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뚜비와 함께 눈 위를 거닌다. 잎 하나 지니지 않은 겨울의 낙엽수들은 제각기 특유의 골격과 수형을 지니고 있어 제나름의 본 모습을 보여 준다. 수석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줄 아는 사람들은 겨울의 벌거벗은 나무들을 감상해 볼 것이다. 그 소박하고 깊이 있고 떫은 멋에 취하여 반드시 삼매경에 잠기게 될 것이다.
난만한 봄을 마른 가지에 빈틈없이 준비하고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봄날을 의심 없이 믿고 기다리는 겨울 나무, 눈서리와 매운 바람을 희망 속에 꾸준히 견디고 참는 침묵의 겨울 나무, 볼수록 믿음직하고 멋지고 아름답다. 탁월한 예술인 같기도 하고, 천년을 내다보는 철인 같기도 하다. 겨울 정원의 낙엽수 사이를 거니는 멋을 나는 점점 즐기게 된다.
초설에 붙여서 -전진을 위한 회고와 전망-
어느 날 나는 텅 빈 운동장에서 두 팔을 앞뒤로 높이 휘저으면서 혼자 걸어가는 한 어린이를 지나쳐 볼 수가 있었다. 밤 사이에 내린 첫눈으로 뒤덮인 운동장은 동녘 하늘에 솟아오르는 햇살에 더욱 눈이 부시었다. 그 흰 눈 위를 생기가 넘치는 그 어린이는 마치 사열대 앞을 행진하는 군인처럼 기운차게 신이 나서 꺼덕꺼덕 걸어가는 꼴이 하도 익살맞아서 나는 혼자 웃음을 참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린이는 가끔 그 활발한 행진을 멈추고 차려의 자세로 서서 고개를 돌려 뒤를 한 동안씩 바라보다가 전과 똑같은 보조로 두 팔, 두 다리를 높직높직 쳐들면서 다시 걸어가는 것이었다. 옥판선지 같이 깨끗한 흰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이 자국자국 무늬져서 길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 어린이는 눈 덮인 운동장을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서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어느 정도로 똑바른가를 검토해 보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어린이가 걸어간 발자국은 부분적으로는 곧았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바른편으로 또는 왼편으로 굽어 있었다.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그 어린이의 행동을 통하여 적지 않은 것을 느꼈고, 또 배울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부귀 빈천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누구나 자기들의 일생을 곧고 바르게 걸어가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걸어간 그 생애의 발자취들은 작고 큰 허다한 파란 속에 가지가지의 복잡한 곡선을 그리고 가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영원히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눈 덮인 들판에 가지가지의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가는 나그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눈 덮인 운동장 위를 걸어가는 저 어린이가 짬짬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돌려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을 이윽히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슬기로운 일인가?
공자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증자는 '내가 날마다 세 차례씩 스스로 반성해 본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날마다 일기를 쓰면서 지나간 하루의 생활을 살펴본다. 주말에는 1주일의 생활을, 월말에는 한 달 동안의 생활을, 그리고 연말에는 1년 동안의 생활을 더듬어 살펴보는 것이다. 또 누구나 자기의 생일에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되씹으면서 자기의 걸어온 삶의 발자국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뚫어보고 스스로 지나온 자국을 살펴보는 일은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자기 자신과 스스로 걸어온 발자취를 때때로 돌아다 보지 않고서는 걸어가는 옳은 방향을 찾아 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가'손에 쟁기를 쥔 사람은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고 제자에게 경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경고는 결코 걸어온 과거를 살피고 되씹어 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뚜렷한 큰 목표를 세운 다음에는 그 목표를 잠깐 동안이라도 놓치지 말고 한결같이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뜻이다. 눈 덮인 운동장을 일직선으로 걸어가고자 애쓰는 저 천진한 어린이의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 대하여 우리는 그 원인을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저 어린이의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저 어린이가 만일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포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같이 걸어갔더라면 저 어린이의 발자국의 줄은 매우 곧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어린이는 앞을 향하여 곧게 나가려고 치밀하게 주의를 했었지마는 먼 앞에 움직이지 않는 일정한 큰 목표를 세우는 슬기가 아직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으로서 각각 자기 자신의 한결같은 목표가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가면서, 때때로 지나온 과거를 보살피고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경주장에서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린다고 하더라도 골을 향해서 달리지 않는다면 그 달음질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귀중한 일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는 한스럽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나'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물론이지마는, 또 우리라는 사회인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작은 나'와 '큰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알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인생의 걸음걸이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작은 나'와 '큰 나'의 이중의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민족이 장구한 역사의 험한 길을 걸어오다가 이제 비로소 세계 무대 위에서 살길을 열어 보고자 거족적으로 분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작은 나'로서의 행로의 목표와 회고도 중요하지마는 '우리'로서의 행로의 확고한 목표와 겸허하고 정성스런 회고가 절실히 요청된다. 첫눈이 내린 오늘, 나는 눈 벌판을 걸어가던 저 어린이를 더욱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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