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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14 호
단기 4341. 10. 22 (음력 9. 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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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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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가을맞이 편지쓰기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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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문사 제13회 신춘문예
농민신문사는 제13회 신춘문예작품을 공모합니다. 역량 있는 작가와 우수 작품 발굴로 농촌문화 창달에 기여하기 위한 농민신문 신춘문예작품 공모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응모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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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 부문 및 원고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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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 당선작 1편, 원고지 70~100장, 500만원 - 시 : 당선작 1편 300만원(5편 이상 제출) - 시조 : 당선작 1편 300만원(5편 이상 제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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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내용 및 응모 자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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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내용은 제한 없으며, 기성 문인은 등단하지 않은 장르에 응모할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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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요령 및 유의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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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원고는 앞부분에 200자 원고지로 환산한 분량을 적을 것 - 원고지 사용 시 하나의 묶음으로 묶고 맨 뒤에 이름(필명인경우 본명 병기)·주소·전화번호를 적을 것 - 겉봉에 ‘농민신문 신춘문예 ○○부문 응모작’이라 적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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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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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은 <농민신문>에 게재하고 당선자가 신인인 경우 기성 문인으로 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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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감 : 2008년 11월 28일(마감일자 소인 유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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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표 : 2009년 1월 초<농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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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실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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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편번호 110-764)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36 농민신문사 생활문화부 신춘문예 공모 담당자 앞 - ☎ 02-3703-6161, 61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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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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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은 덕행으로, 부자는 선행으로 이름을 떨쳐야 한다.(주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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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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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짐승이름
“흰 이슬 비꼈는데 밝은 달 돋아온다/ 봉황루 묘연하니 청광은 뉘를 줄꼬/ 옥토(玉兎)의 찧는 약을 호객(豪客)에게 먹이고자.”
고산 윤선도의 시조에 나오는 토끼. 옥토끼는 달에 살면서 떡방아를 찧거나 불사약을 만든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토끼는 장생불사의 상징 동물로 여겨졌다. 그 민첩함으로 심부름꾼으로 나서는 일이 더러 있다. 경북 문경에 토천(兎遷)이란 곳이 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길을 잃고 헤맬 때 토끼가 나타나 절벽 길을 안내하였다고 한다. 문경에 ‘왕건’ 드라마 촬영장이 마련된 것도 우연은 아니겠다. “거부긔 터리와 톳기의 쁠와”(龜毛兎角, 두시언해)에서는 토끼를 ‘톳기’라 적었다. ‘톳’에 접미사 ‘-기’가 붙어 된 말로 볼 수 있다.
중국어에서는 토끼를 토자(兎子)라 한다. 여기 -자(子)는 작다는 뜻을 중심으로 하는 지소사로 보인다. -자(子)가 흔히 우리말로 토착하는 과정에서 ‘-지’로 바뀌어 쓰인다. 이르자면 가지(茄子), 종지(鍾子), 장지(障子)의 ‘-지’와 같다. 이 ‘-지’가 다시 소리 유창성을 꾀하려는 부정회귀를 통하여 ‘-기’로 바뀐 것으로 본다.
몽골말로는 ‘톨아이’(tulai)인데 말의 뿌리는 ‘톨-’이 된다. 받침소리에서 유연성을 보면 ‘톨-톧-톳’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한자어 어원으로 보는 견해보다는 알타이말 계통으로 보아 몽골말과 궤를 함께하는 우리말일 개연성이 더 높겠다.
정호완/대구대 교수·국어학
굽신거리다
'정문에서 경비원한테 여러 번 굽신거린 뒤에야 겨우 안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고개나 허리를 가볍게 구부렸다 펴거나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비굴하게 행동하는 모양'을 표현할 때 '굽신거리다'로 쓰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허리를 굽히는 것이므로 '굽다'의 '굽'에 '신(身)'이 결합(굽+신)된 것으로 알고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인 듯싶다. 하지만 '굽신거리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굽실거리다' '굽실대다'가 표준어다.
'저 사람은 사장 앞에서는 그저 굽실거리기만 하는 사람이다''○○○에게 굽실거리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현 정부에서 제외됐다'처럼 쓴다. (동작 또는 상태를 나타내는 일부 어근 뒤에 붙어)'그런 상태가 잇따라 계속됨'의 뜻을 더해 동사를 만드는 접미사 '-거리다'는 대체로 '-대다'와 바꿔 쓸 수 있다. '구시렁거리다' '넘실거리다' '꿈틀거리다' '움찔거리다' '방실거리다' 등이 있다. '굽실거리다'도 이와 같은 유(類)의 말이다. '몸을 앞으로 굽히다' '겸손하게 처신하다'를 뜻하는 '굴신(屈身)하다'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굴신(屈伸)하다'는 다른 말이다. 팔·다리 따위를 굽혔다 폈다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나이는 자기를 굽힘으로써 자신을 펴는 걸세. 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기를 굽히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는가? 중국 사람이라면 이 굽힐 굴(屈)과 펼 신(伸) 두 글자를 마음속에 새기고 반복해서 그 뜻을 헤아려야 하네.'(중국 작가 옌전(閻眞)의 '창랑지수(滄浪之水)'에서)
낯설음, 거칠음
우리가 많이 사용하고, 그래서 맞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단어들이 있습니다. '불원간에 닥쳐올 앞날의 낯설음에 대한 두려움.' '노지심의 거칠음은 성급한 성질이 빚어내는 것이다.' '눈 주위 피부의 거칠음을 방지해 줍니다.'
위 예문에 등장하는 '낯설음' 과 '거칠음'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잘못 쓴 것입니다. 이 단어들은 '낯섦'과 '거칢'으로 써야 합니다. 이들은 형용사인 '낯설다'와 '거칠다'를 명사 구실을 하게 만든 것인데 이와 같은 것을 명사형이라고 합니다. 받침 없는 말이나 ㄹ 받침을 가진 말 다음에는 '음'이 아니라 'ㅁ'을 붙여서 명사형을 만듭니다. '엄벌에 처함이 옳다'에서 '처하다'의 어간 '처하-'는 받침 없이 끝나므로 명사형은 'ㅁ'을 붙여 '처함'이 됩니다.
'낯설다'와 '거칠다'의 경우는 어간이 ㄹ 받침으로 끝나기 때문에 '낯설음' '거칠음'이 아니라 '낯섦' '거칢'으로 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줄다'의 명사형은 '줆'이 됩니다. ㄹ을 제외한 받침 있는 어간 다음에는 '음'을 붙여 명사형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재산의 많음과 적음에 따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의 '많음' '적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 밖에 '기'를 붙여서 명사형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오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 '이 창문은 열기가 어렵다' '신용이 없으면 돈을 빌리기가 쉽지 않다'의 '오기' '열기' '빌리기' 같은 경우입니다.
님, 임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님'은 사랑하는 연인, 친구, 부처일 수도 있고 조국이나 민족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현행 맞춤법에선 위글처럼 '사모하는 사람'을 뜻할 때는'님'이 아니라 '임'을 쓰도록 돼 있다.
그러면 '님'은 어떤 경우에 사용할까. '홍길동 님' '길동 님'처럼 사람의 성이나 이름 다음에 쓰여 그 사람을 높여 이를 때는 '님'으로 표기하는 게 맞다. 이때의 '님'은 의존명사로 '홍길동 씨'의 '씨'보다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해님·달님·나라님' 등에서 쓰인 '님'은 '홍길동 님'의 '님'과는 약간 다르다. '해님·달님·나라님'에서는 명사 '해·달·나라'에 높임을 나타내는 접미사 '-님'이 붙은 것이다. 따라서 '해님' '달님' '나라님'은 합성어가 아니며 합성어일 경우에 받쳐 적을 수 있는 사이시옷도 붙일 수 없다. 그러므로 '햇님' '나랏님'으로 표기해선 안 된다. '햇빛''햇볕' 등은 '해'라는 낱말에 또 다른 낱말인 '빛, 볕'이 합쳐진 합성어다. 또한 뒷말인 '빛, 볕'이 [해] [해] 등 된소리로 발음되므로 사이시옷을 첨가해 '햇빛''햇볕'으로 적는다.
문학작품에서 '사모하는 사람'을 표현할 때 '님'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바른 표기는 '임'이라는 걸 꼭 알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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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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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불만족 - 오토다게 히로타다
1. 행복한 아이 - 유아기, 초등학교 시절
내 인생의 스승님
도와주면 안된다.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을 꺼내 보면 지금도 쿡쿡거리며 웃음이 나온다. 내 옆에 서 있는 여자 짝궁.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고 얼굴은 말도 못할 정도로 긴장된 표정이다. 그 옆에서 온 얼굴에 환한 웃음을 가득 담고 있는 내 모습. 이 사진 한장이 모든것을 말해준다. 과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염려를 받던 장본인은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놀라고 당황스러워 했던 것은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졸였던 분은 1학년부터 4학년때가지 담임을 맡으셨던 다카기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할아버지 선생님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이 풍부하다해도 나와 함께 지내는 모든 생활은 생전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선생님이 맨 처음 나를 대하고 가장 것정했던것은 다른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너는 왜 손이 없니? 뭐 때문에 이런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니? 조심스럽게 짤막한 나의 팔다리를 만져 보는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께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을 흘리신 모양이지만 나야 이미 익숙했다. 친구가 되기까지의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했던 것 . 엄마 뱃속에 있을때 말이야.... 하면 언제나 같은 설며을 반복했다. 드디어 나를 둘러싼 아이들의 의문은 다 풀리고 우리 반에서 내 팔다리에 관해 묻는 친구는 더 이상 없었다. 선생님께서 간신히 한숨 돌리셨지만 또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카기 선생님은 굉장히 엄격한 분이셨다. 예전에는 선생님 반에 장애아가 있을 경우 이것저것 많은 것을 도와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만은 굳이 도와주지 않으셨다. 또 한 아이들에게도 도와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의 그런 냉정한 태도와 행동이 오히려 나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늘어나게 만들었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누나처럼 행동하고 싶은 마음에서인지 내게 더 맣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 선생님은 고민하셨다. 오토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이이들의 마음은 학급의 단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것을 억지로 못하게 막는다면 아이들에게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오토는 기다리기만 하면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젖어 버릴 것이다. 이런 갈등 끝에 선생님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게 내버려 두자. 그 대신 도저히 혼자 할 수 없는 것은 모두가 힘을 합해 도와주자. 라는 결론을 내렸다. 반 아이들은 선생님의제안을 듣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생. 일제히 입을 모아 예!라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며칠 후 선생님을 난감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실에는 아이들의 사물함이 하나씩 있어서 그 안에 곧은 자와 작은 돌들이 들어있는 산수세트와 풀과 가위들이 들어있는 도구상자를 함께 넣어 놓았다. 그리고 수업중에 수시로 사물함에 가서 필요한 것을 가져오곤 했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아이들은 모두 사물함에 가서 물건을 가져오지만 나는 아이들이 제자리에 앉고 난 후에 가지러 가야 한다. 아이들의 허리 아래 정도의 높이에서 걸을 수밖에 없는 내가 붐비는 아이들 속에 함께 줄을 선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출발부터가 늦었다. 게다가 도구상자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꺼낸 뒤 뚜껑을 닫고 돌아오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도 나는 도구상자를 상대로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보통때 같았으면 짝꿍이 내가 갖다줄게라며 필요한 것을 가져다 주었겠지만 바로 며칠 전 선생님께서 주의를 주지 않으셨던가 모두들 내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았지만 거들어 주지 않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나를 뒤로 한 채 수업은 시작되었다. 흑흑, 흑흑 나는 결국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학교에서 흘린 최초의 눈물이었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시작할 수 없다는 분함보다는 혼자 남았다는 슬픔이 훨씬 더 컸다. 당황한 선생님께서 쏜살같이 달려오셨다. 잘했어. 너 혼자 이렇게까지 해냈쟎니? 따뜻한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마침내 으앙하며 봇물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생각하셨다. 이 아이는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저항감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 구별된다든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오토 때문에 나머지 애들 전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와주는 것이 이 아이를 위한 것은 아니다. 고민 끝에 선생님이 내린 결론은 사물함을 두 개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 도구가 든 상자와 산수세트를 각각 다른 사물함에 넣어 두고 뚜껑을 열어 둔다. 그러면 뚜껑을 여닫을 필요없이 아주 쉽게 학습 도구를 꺼낼수 있으니 그만큼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언제나 내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미끄러진 왕자님
내가 교정에 나서면 순식간에 인기스타가 된다. 팔다리가 없는 아이, 그 아이가 타고 다니는 전동 휠체어. 누구에게나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특히 내가 짧은 팔로 조작했기 때문에 아이들 눈에는 휠체어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다른 반이나 다른 학년 아이들이 나를 볼 기회는 쉬는 시간밖에 없다. 그래서 교정에 나서기만 하면 마치 꿀을 발견한 개미떼처럼 주위에 몰려들었다. 왜 팔다리가 없니?라며 물어오는 아이도 있고 휠체어에 타 보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 반 아이들이 다가와서 잘난 체하는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아하 그건 말이야. 오토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말이야.... 나는 학교에서 스타였다. 내가 가는 곳에는 이중 삼중의 원이 만들어지곤 했고 내가 이동을 하면 아이들이 줄지어서 휠체어 뒤를 졸졸 따라왔다. 튀기 좋아하는 내가 이런 상황을 마다할 리 없다. 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좋았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아이들은 왕자님 같다며 추켜세워 주기도 했다. 어느날 나는 왕자님 자리에서 쫓겨났다. 오토는 앞으로 선생님의 허락 없이 훨체어를 타서는 안된다. 마침내 다카기 선생님으로부터 휠체어 사용을 금지당하고 만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우월감을 들 수 있다. 나 자신은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아이들을 보녀 기분 좋아했지만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아이들이 오토를 쫓아다니는 것은 전동 휠체어가 신기해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정확히 판단하셨던 것이다. 또 장애인=특별한 사람이라는 상식을 깨기 위해 나를 보통아이들과 똑같이 다뤄 왔는데 전동 휠체어로 인한 우월감이 그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는 생각도 하셨다. 또 하나 선생님은 나의 체력을 염려하셨다. 초등학생은 성장기에 있다. 팔다리가 없지만 성장기에 접어들어 근육의 힘을 한창 키워야 할 나이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것이 도움이 될 리 없다고 생각하셨다. 아주 가혹한 지시였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발과 다름없는 휠체어. 다른 아이들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몸을 털썩 땅바닥에 붙이고 엉덩이를 끌어당기듯 해서야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는 내게 휠체어 없는 교정은 너무도 멀고 넓기만 했다. 체력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당연히 교내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휠체어 없이 교정을 걸어다니기 시작한 후 얼마동안 여선생님들로부터 너무 가여워요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는 그런 반대 의견이 더욱 거셌다. 엉덩이를 땅바닥에 철썩 붙이고 걷는 내게 있어 여름의 뜨거운 지열과 겨울의 차가운 기운은 끔찍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또 조회시간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조회가 끝나면 아이들은 음악에 맞춰 행진을 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남학생의 선두가 바로 나였기 때문에 우리 반은 늘 나중에 교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오토를 기준으로 걷지 말고 모두들 먼저 들어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 넓은 교정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나. 이를 보다 못한 선생님들에 의해 휠체어 허가론은 더더욱 거세게 주장되었다. 그러나 다카기 선생님은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오토가 어리니까 사람들이 가여워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립을 해야 한다. 앞날을 내다보고 지금 오토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생각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런 신념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다카기 선생님의 이 결단은 내 인생의 정답이었다. 그 뒤 내가 잔학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장애를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나는 휠체어에서 내려 내 짧은 다리(혹은 엉덩이?)로 계단을 오르내리고 학교 건물들을 오가야만 했다. 그렇다. 오늘날 내가 어다든 혼자 갈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다카기 선생님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휠체어에만 의지했더라면 휠체어 없이 살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살아가는 열의나 삶에 대한 여유를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의도적으로 내게 엄격하셨다. 오토가 나를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 대신 내가 담임이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는 말씀을 아주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미운아이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아이 매 한대 더 때린다는 말이 있다. 다카기 선생님을 생각하면 이 말의 깊은 의미를 뼛속 깊이 느낄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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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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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 이근배
어느 날 문득 서울 사람들의 저자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보았을 때 산이 내 곁에 없는 것을 알았다 낮도깨비같이 덜그럭거리며 쓰레기더미를 뒤적이며 사랑 따위를 팔고 있는 동안 산이 떠나버린 것을 몰랐다 내가 술을 마시면 같이 비틀거리고 내가 누우면 따라서 눕던 늘 내가 되어 주던 산을 나는 잃어버렸다 내가 들르는 술집 어디 만나던 여자의 살냄새 어디 두리번거리고 찾아도 산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산이 가버린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 시집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문학세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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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3부 나라를 열다
3.청동제 무기로 정복전쟁을 벌이다
푸른 빛에 감도는 신비
단단한 돌을 골라 돌칼을 만들던 석공이 날카롭고 굳센 청동검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또 진흙을 빚어 손을 모양을 만들고 나무를 때 그릇을 구워내던 도공이 일정한 모형에서 찍혀 나오는 청동기를 보고 기술의 우수함에 감탄을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인류 역사는 또 한번 굽이쳤고, 그 굽이는 세계 모든 지역으로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번져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서기전 1000년경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구리는 오늘날에도 용도가 매우 다양하다. 구리는 낮은 열에도 잘 녹는데, 이 성질은 구리의 약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따위 다른 급속을 합금시키면 매우 단단해지고 강한 열에도 쉽게 녹지 않는다. 처음 돌에서 광석을 찾아내고 이어 구리의 용도를 발견하고 이를 합금시키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들이 모두 에디슨 같읕 발명가는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생활에 필요하고 편리한 도구를 만들 수 있을지 궁리한 사람들이 차츰아츰 기술을 발전시킨 것이다.
청동기문화가 같은 청동기문화군인 남만주-요동-한반도에 유입된 경로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종래에는 은나라의 청동기문화가 중국의 동북지방을 거쳐 유입되었다고 보았다. 실제 은나라의 청동기는 발굴된 분량도 많고 형태도 다양하다. 지금도 전해지는 세 발 달린 은정은 청동기의 대표로 일컬어질 정도이다. 이 문화가 주나라에 들어와 더욱 꽃을 피웠다. 조선이 이웃 나라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처지이고 보면 이 유입설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인상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다음에는 자체 발원설이 있다. 오랫동안 질그릇을 구우면서 도공들은 1천 도 이상의 열을 다루었다. 이렇게 생활도구의 꾸준한 발명을 거듭하는 가운데 구리의 속성과 합금의 법칙도 발견해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근거로 다른 지역의 것과는 다른 독특한 청동기의 발굴을 내세우고 있다. 곧 서기전 2000년경부터 청동제품을 만들어오다가 서기전 1000년경에는 비파형동검 같은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오늘날 비파형동검은 많이 발굴되었지만 그전의 청동제품은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부 시베리아로부터 유입되었다는 설이 있다. 서기전 13세기경. 남부 시베리아에 있는 예니세이 강 주변에는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 상류지방에서는 서기전1200년에서 700년 사이에 카라스크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곳의 주민들이 동쪽으로 이동해와서 우리나라에 청동기문화를 형성시켰다. 이들은 묘제로 돌널무덤을 사용했는데 그 무덤에서 시베리아 계통의 청동단추를 발굴한 보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연대가 훨씬 내려오게 된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남부 시베리아지방에 연원을 두었으며, 그 문화가 요하 유역으로 내려와 자체 발전하고 이어 한반도 남부에까지 퍼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이렇게 흘러들어오면서 은주의 영향도 받고 자체 개발도 했다고 보는 것이 순리로 보인다. 문화는 교류와 수용에서 발전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 독창 독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동기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질그릇을 구워 완성시키는 온도는 섭씨 1천 도정도이다.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는 도구의 필요온도는 100에서 800도 정도면 된다. 철광석을 녹이는 온도는 1200도 이상이어야 한다. 도공이 구리 다루는 기술자로 전환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는 당시에도 상식으로 통했을 것이다. 합금 비율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는 것도 알았다. 구리에 주석 비유을 줄이고 아연을 더 넣으면 색깔이 더욱 푸른 빛을 띤다. 강도도 이 원리의 적용을 받는다. 만드는 과정도 일정한 단계를 밟았다. 초기 단계에는 주형 곧 거푸집을 만들어 찍어냈다. 칼이나 창이나 방울 따위의 모형을 만들어놓고 주물을 부어 굳은 뒤에 그대로 들어내는 것이다. 주형 기술이나 다듬는 솜씨가 미숙할 때에 이런 만듦새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불려서 두드리는 연성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합금하여 주물을 고온에 불린 상태에서 원하는 모양대로 두들겨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근세조선 후기까지 대장간에서 써오던 방법이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칼, 창, 활촉 같은 무기를 만들 때에는 강도를 따지고 방울, 단추, 장식품을 만들때에는 대개 색깔에 관심을 두었다. 일단 모형을 만들오놓고 찍어내면서 두들기는 수법을 함께 사용했다. 모형은 흙으로 빚어 만들었는데, 이것은 고온에서도 녹지 않는다.
약탈의 시대
청동기는 용도에 따라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무기류이다. 무기 중에서도 특히 칼이 가장 많이 발굴되고 있는데, 이것이 중요한 청동검이다. 청동으로 만든 칼이 살상용으로 쓰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돌로 만든 칼은 짐승을 잡거나 고기를 자를 때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청동으로 만든 칼은 전쟁용으로 많이 쓰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도전적 욕구가 먼저인지, 신무기가 전쟁 욕구를 유발했는지 가릴 것없이 청동기시대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역사가 이어졌다. 우리 고대 청동기문화권에 널리 분포된 청동검은 요동반도의 끝부분인 여대시강상무덤에서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끝부분이 날카롭게 다듬어져서 약간 두텁게 올라오다가 다시 타원형을 그리며 손잡이쪽에서 멈춘 모양을 하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처음 요하 유역에서 발견되어 여기에서부터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는데, 요동반도와 지금의 심양 아래 남만주일대에도 널리 분포되어 나타난다. 이 동검이 출토된 상황에 따라 이 일대를 같은 청동기문화권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대체로 초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달리 세형동검은 날이 약간 투박하게 이루어져 내려오다가 손잡이 부분에 이르러 미세하게 들어간 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비파형보다 굴곡이 적다. 세형동검의 출현은 비파형보다 훨씬 후기인 서기전 4세기말과 3세기초, 연나라가 조선을 침공하였을 때 조선의 청동기문화군이 대동강 또는 청천강 이남으로 밀려난 것과 거의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세형동검은 거의 청천강 이남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한반도의 독특한 청동기문화 특성을 보여준다. 이 한국식 동검문화는 서기전 3세기경에 먼저 대동강과 금강유역으로 이동하였고 그후 위만조선의 등장과 한사군의 설치 등 정치 변화에 따라 대동강, 영산강, 낙동강 유역으로 번져갔다. 다시 말해 세형동검은 서기전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무기류중에 또 창과 화살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는 돌로 만들던 무기를 이제는 청동으로 만들어냈다. 청동제 무기는 단단하고 날카로워서 오래 쓰기도 했고 효과도 컸다. 특히 정복전쟁에서 호용성이 높아 주로 전쟁무기로 사용되었다. 투구와 마구같은 무기 보조도구도 만들어냈다. 투구나 갑옷, 방패 따위는 방어용이다. 청동은 방어용 도구에도 적절히 배합되어 쓰였다. 말안장이나 말발굽 같은 도구에도 두루 쓰였다. 이제 이러한 도구를 돌이나 뿔로 만들어서는 결코 보조용구의 효과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보조 무기가 만들어지고 사용되기 시작햇다.
두 번재는 방울이나 장식품 따위이다. 방울은 말에 다는 것도 있으나 무당이 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영웅으로 우러름을 받는 지위자는 청동제 무기로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방울을 흔들어대며 뽐냈고, 하늘이나 땅이나 산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맡아보던 제사장은 방울을 흔들어대며 신을 불러온다고 큰소리를 질러댔다. 방울은 계급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였다. 특히 우두머리들은 온갖 청동제 장신구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섬세하고 푸르스름한 단추를 단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기도 하고 청동제 손칼을 번쩍번쩍하게 윤을 내서 차고 다니기도 했다. 정복전쟁에서 약탈한 물건 중에는 청동제 말이나 호랑이 모형도 있었다. 이것들 외에 말이나 호랑이 모습의 띠고리도 발굴되고 있다. 칼자루와 칼집 등에도 여러 가지장식을 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치품의 전형이다. 생활이 풍족해짐에 따라 사치를 부리는 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재미일지도 모른다.
세번째는 농기구와 생활용품으로 끌, 송곳, 손칼, 보습 따위이다. 청동제 도구는 돌로 만든 것보다 몇 배나 호과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청동제 도구는 극히 일부에만 쓰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청동제 도구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에 비해 농기구의 현실적인 이용가치는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청동을 무기로 만들어 약탈전쟁을 벌이는 것이 더 효용가치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상대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청동무기가 필요했다. 오늘날 핵이 이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을까? 핵이 강대국만의 독점물이듯 청동기도 처음에는 강한 나라, 유력한 지배자의 독점물이었다.
청동기시대는 서로 오순도순 나누어 먹고 살던 시대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누어지는 갈림길이었다. 일반 생활용구나 농기구에 먼저 청동기를 대대적으로 사용했더라면 인류의 생활수준은 훨씬 윤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와 정반대였다. 내가 힘들여 만드는 것보다 빼앗는 것이 더 손쉽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아한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가 일시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아주 느리게 천천히 지구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이런저런 단계를 거치며 적어도 지구 위에서 몇천 년 동안 퍼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구석기시대의 석기보급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빠르게 번진것이라 볼 수 있다. 청동기문화의 영향은 엄청난 회오리바람이었다. 그 영향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변화를 촉진시켰다. 무엇보다 구석기시대 이후 인류 역사의 99퍼센트 이상의 기간을 독점해온 석기가 급격한 변화를 나타냈다. 간석기는 청동기시대 초기에 땅을 파거나 나물를 베거나 밭을 갈거나 고기를 잡는 실용도구로 여전히 중요하게 쓰였다. 새로운 농사법 등 생산수단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청동기가 무기 제작으로 치우치자 석기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간석기의 날과 자루 사이에 칸막이를 만들기도 하고 날과 손잡이를 구분해 만들기도 했다. 날도 양날로 갈아 만들어냈으며 자루 중간에 단과 절을 두었다. 쉽게 말해서 자르거나 찌르기에 편리하게 만들고 손잡이를 구분해서 손을 보호할뿐만 아니라 힘이 적게 들도록 만들었다. 이 원리는 돌촉이나 돌송곳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단단한 재료를 찾아 더욱 예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간석기는 골방으로 밀려났다. 앞으로는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 사례 이외에는 늙어빠져 골방에 앉아 있는 석기 이야기는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변화를 보인 것은 토기였다. 구석시대와 신석시대에 걸쳐 도구의 첫째 자리를 차지했던 빗살무늬토기는 이제 민무늬토기로 자리바꿈을 했다.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의 차이는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무늬가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무늬가 있어도 단순하냐, 복잡하냐의 차이일 분이다. 민무늬토기가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청동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나타났다는 점 때문이다.민무늬토기의 분포가 비파형동검 지대나 세형동검 지대와 거의 일치하는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 곧 요동반도에서 남해안과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화군에서만 보이는 것이다. 민무늬토기는 주로 붉은 색이지만 갈색과 검은색이 종종 섞여 있다. 붉은색은 송화강에서 시작하여 금강, 영산강, 낙동강으로 번져나갔고 갈색과 검은색도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다. 더러 단순한 서너 개의 세로줄이나 가로줄을 새긴 토기도 있는데 그 변화는 무늬보다는 모양새에서 두드러진다. 아가리의 덧띠를 유난히 강조하기도 하고 아가리를 좁게 하고 몸통을 굵게 하기도 하고 중간 부분에 손잡이를 배치하기도 하고 밑부분을 펑퍼짐하게 하거나 밑받침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다양성은 빗살무늬토기가 따라오지 못하는 요소들이었다. 물론 철기시대로 내려오면 요란한 무늬가 다시 나타나고 형태도 더욱 다양해진다. 민무늬토기는 고인돌무덤처럼 다른 지역의 문화층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우리나라의 것이다. 다른 민족권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만들고 발전시킨 것이다.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생활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청동기가 농기구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으나 농업용 연장의 발달에는 큰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무엇보다 나무로 만든연장이 부쩍 늘어났다. 나무로 만든 연장은 쉽게 썩어서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으나 그 흔적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그중에 특히 나무로 만든 보습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단순히 땅을 파서 씨앗을 뿌리는 수준이 아니라 땅을 갈고 뒤지고 배주는 역할을 보습이 담당했던 것이다. 돌이나 뿔로 만든 반달칼도 부쩍 늘어났다. 반달칼은 곡식의 대를 자르는데 이용되었다. 아마도 이 반달칼은 수수나 벼이삭을 자르는 데 쓰였을 것이다. 짐승을 부리는 기술도 훨씬 발전되었다. 가축 중에서 돼지나 닭이나 개는 식용으로 길렀지만 소와 말은 사뭇 달랐다. 야생 소와 말을 일짐승으로 길들이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무리 길을 들여놓아도 걸핏하면 사나위진다. 오늘날에도 소나 말이 일할 만하게 자라면 짐 나르기, 쟁기질 따위로 길들이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마소를 농업 생산에 투입함으로써 농업 노동력이 몇 배로 증가되었다. 농기구와 짐승을 이용한 농업의 발전은 생산구조를 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무엇보다 짐승사냥과 물고기잡이의 효용성이 줄어들었다. 이는 활이나 창 같은 사냥도구가 줄어드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먹거리의 중심이 곡식과 가축으로 옮겨가다보니 사냥에 열의를 덜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활이나 창으로 짐승을 잡기보다는 좀더 쉽고 편한 방법을 찾아냈다. 곧 올가미, 그물, 함정, 덫 따위로 산짐승을 잡았고 몰이사냥의 방법을 쓰기도 했다. 사냥의 목적도 고기 보다는 가죽이나 털에서 구했다. 물고기잡이도 마찬가지로 그 의의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 때에 와서 돛배가 등장한 것은 일상으로 물고기를 잡기보다는 전문적인 수송이나 어업 생산활동이 전개되었음을 뜻한다. 이에 따라 묶는식 낚시와 그물잡이가 활이나 작살잡이에 우선했다.
이렇게 농업 중심으로 생산활동이 전환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은 더욱 높아지고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었다. 산짐승이나 물고기를 잡는 대신 가축으로 육식을 해결하면서 더 많은 노동력을 농사에 투자하게 된 것이다. 생활의 풍요는 필연적으로 인구의 증가를 가져온다. 이무렵 마을과 무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인구가 집단으로 모여 살고 잉여생산물이 축적되면서 자연히 시장을 통한 교환이 활발해졌다. 신석기시대에 나타난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먼 지역에서 모자라는 물품을 가져오고 남는 물품을 대신 내주는 교역이 등장해 시장경제의 원리가 싹텄다. 이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에서 내륙지방에서도 명태뼈가 발견되고 있으며 조개팔찌를 긴 유골도 보인다. 이때에는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저장법도 개발되었다. 또 물물교환이라는 불편한 교역 형식에서 벗어나 편리한 교환 수단을 찾게 되었다. 이처럼 인구의 증가와 잉여생산물의 축적과 활발한 교역은 사적 소유를 확대시키고 빈부의 격차를 벌려놓았다. 게다가 강력한 청동제 무기는 약탈전쟁이나 정복전쟁을 유발했다.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재부를 더하게 되고 그 재부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노예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정복자는 전쟁포로나 범죄자를 노예로 만들어 생산 노동에 동원했다. 고대국가의 출현과 노예 소유는 청동기문화와 맞물려 있다. 조선에서도 노예를 소유했으나 노예가 기본 생산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노예제사회는 아니다. 다만 이 단계에서 원시공동체의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이행하는 모습을 읽게 된다. 따라서 조선의 건국은 바로 청동기문화가 일으킨 파동의 결과물이었다. 단군이 신석기시대에 출현했다고 보는 견해를 인정하더라도 고대국가의 면모는 청동기시대에 갖추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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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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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1. 달리는 부처 기사
개도 웃을 이야기
좁은 택시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천차만별 요지경 속이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도 똑같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네모진 얼굴, 둥근 얼굴, 길쭉한 얼굴... 그런가 하면 험악하게 생긴 얼굴도 있고 선한 인상의 얼굴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의 얼굴이 저마다 다르듯이, 성격과 개성이 다양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직업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바로 택시 기사라고 한다. 그네들은 비좁은 차 안에서 하루 종일 온갖 사람을 만나야 하고 별의별 일을 다 겪어야 한다. 때로는 좋은 일도 있고 가슴 뿌듯한 일도 있지만, 택시 기사들은 억울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운전 경력 30년째인 개인택시 기사 안정윤 씨는 지금도 5년 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 기가 차다고 말한다.
어느 날, 여자 손님이 택시를 세우더니 `대전 시내로 갈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대전은 서울에서도 한참 먼 장거리라서 먼저 요금부터 조정해야 하는 게 순서인 법. 먼 곳이라 나름대로 왕복거리로 따져 요금을 계산한 뒤 “5만 원이면 갈 수 있지요”했더니 그 여자는 두말없이 차에 오르더란다. 행색이나 말투로 봐서 그저 평범한 여자 손님이었다. 차는 쏜살같이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휴게소에서도 단 한 번밖에 쉬지 않았기 때문에 택시는 안씨의 생각보다 비교적 빨리 대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후 1시 30분경. 대전역 근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그 여자는, “기사님, 수고스럽겠지만 잠깐 세워 주실래요? 내 여기 아는 곳인데 볼일이 있어서요. 잠깐이면 돼요.” 하면서 오느 옷가게를 손 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십시오.”
차 안에서 대기한 지가 한참이 지났다. 마냥 기다리다 못해 가게 안을 기웃거려 들여다보니 그녀가 사람들과 무슨 얘기인가를 나누며 커피를 배달까지 시켜 마시는 것이 눈에 띄였다. 지루해서 나른하게 기지개를 켠 뒤 하품을 하고 있자니 조금 뒤 그녀가 밖으로 나오더니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안씨에게 권했다. “누구는 다방에서 시켜 마시고 누구는 종이컵 커피를 마시게 하나?” 내심 슬며시 불만스러웠지만, 마침 슬슬 졸음이 오던 참이라 안씨는 고맙게 받아마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한기가 몸을 엄습하는 느낌에 그는 퍼뜩 잠이 깼다. 차가운 빗방울이 열어 놓은 창문 안으로 사정없이 들이치고 있었다. 저녁 8시 30분. 날은 어느새 저물었는지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걸까? `아차, 그 손님!` 그제서야 퍼뜩 잠에서 깬 안씨는 황급히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시야가 닿는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여기, 아까 그 여자분 어디 갔습니까?” 안씨는 전에 그녀가 떠들고 앉아 있던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멀뚱히 그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다.
“아까 그 여자 손님 말인가요? 간 지 한참 됐지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불숙 들어오더니 커피를 사주겠다고 해서 마셨는데, 조금 있더니 어디론가 사라지더라구요.”
지방까지 내려가서 빈털터리로 터덜거리며 다시 올라오는 그의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하루 벌이를 고스란히 손해본 것은 차치하더라도, 돈 한 푼 없이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에게 대체 어떻게 변명할 것인지 안씨는 그저 눈앞이 깜깜해질 뿐이었다. 수면제를 탄 커피를 마신 사건 이후,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들이 사주는 음료수는 절대 마시지 않고 우선 의심부터 하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스님, 동료 기사들이 겪은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있자면 제 얘긴 아무것도 아닌 셈입니다. 저보다 더한 일을 당하고 사는 택시 기사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구료. 그런 험악한 일을 많이 겪으십니까?” “택시 기사라면 누구든 한두 번쯤 겪게 되는 일이지요. 일전에 저와 가까운 동료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지요.”
늦은 밤 강남 XX동으로 가자며 두 여자가 택시에 올랐다. 주고받는 내용으로 보아 절친한 친구 사이인 듯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구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울기도 하다가 누군가를 원망하는 소리도 하고... 앞에서 듣자니 민망하기까지 하더라고 했다. 한마디 하려다가 기사는 `살다보니 무슨 속상한 일이 있어 저러는가 보다.`하고 애써 이해하며 아무 말없이 참고 앉아 있었다. 목적지 3분의 2쯤 되는 지점에 오자 한 여자가 잠시만 세워달라고 하더니 근처 약국으로 들어갔다가 곧 나왔다.
“아저씨, 시끄럽게 해서 어떡해요. 미안해서 드리는 건데..., 수고하시는데 이것 좀 드세요.”
이렇게 말하는 그 여자의 손에는 드링크가 한 병 들려 있었다. 그도 피곤했던 참이라 아무 생각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조금 지나니 뒷좌석의 여자들도 지쳤는지 조용한 기색이었다. 얼마 후, 목적지에 다다랐는데도 그녀들은 내릴 기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손님, XX동 다온 것 같은데요, 어디에 내리십니까?”
그러자 그녀들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주세요.`하고 미루면서 자꾸 기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기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한 여자가 노골적으로 그의 기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기사 아저씨, 괜찮으세요?” “왜 그러십니까? 빨리 내리는 곳을 알려 주십시오.”
머릿속이 서서히 몽롱해지며 나른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참으며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졸음이 올 시간이 아닌데 자꾸 눈이 감겨오는 것이다. `혹시 좀점의 그 드링크가?“ 그제서야 손님들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내리시지 않고 뭐하시는 겁니까?”
기사의 언성이 높아지자 그제서야 두 여자는 마지못해 꾸물거리며 내리는데,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밖에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차 안만 흘낏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더니 기사는 곧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창문을 굳게 잠그는 사실만은 잊지 않고... 알고보니 그녀들은 택시 전문 털이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요 스님, 그때 그 친구가 왜 안 당했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은 평소에 수면제나 각성제 등의 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기 때문에 약물 중독증세가 있거든요. 보통 웬만큼 먹어서는 듣지 않기 때문이죠.”
아연실색할 일이다. 택시비를 내기 싫다고 남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도망가는 사람이나, 남의 돈을 빼앗기 위해 드링크에 약을 타서 권하는 사람들 이라면 진정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진정 배가 고프거나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듣게 될 때 내 마음은 아프다. 어이없이 당하는 사람보다 속이는 사람이 더 측은하고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그가 짓는 죄업이 그 얼마나 크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사람이란 `지은 바대로 거두는 법`이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들이 사람을 잘 믿지 못하게 되는 것도 이처럼 어이없이 당하는 실례들이 흔치 않게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일들이 어찌 택시를 운전하는 이들만이 겪는 일이겠는가. 사실 우리 주위에는 해서는 안 될 고약하고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게 마련인 것이다. 콩을 심어 놓고 팥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자업자득` 또는 `인과응보`라는 말로 표현한다. 착하고 좋은 행위만 찾아서 열심히 하게 되면 좋은 습관이 생겨서 행복하게 잘살 수 있을 것이요, 나쁘고 악한 행위만 끊임없이 되풀이를 하다보면 자연히 그 살아가는 모습도 괴롭고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스스로 복을 짓지는 못할 망정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이는 죄를 짓는 일이다.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고약한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그 죄업은 계속 다음 생에도 이어지리라. 부디 마음을 곱게 지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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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배추를 씻으며
그 동안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미루어 왔던 일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초조해지는 한 해의 마지막 달. 안팎으로 월동 준비를 하느라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분망한 12월이다. 월동준비의 가장 큰 행사는 역시 김장인 듯싶다. 우리 수녀원에서도 며칠 전에 김장을 했다. 배추를 나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공동작업은 평소에 대화가 부족했던 이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고 한솥밥을 먹는 식구로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그만큼 일손 또한 빨라지는 것임을 실감나게 해준다.
"이봐요, 이 배추가 아직 너무 살았지." "조금은 더 죽어야겠는걸." "아니야. 이만하면 알맞게 절여졌어요."
수백 포기의 배추를 씻어내면서 주고받는 이런 대화를 듣노라면 절로 미소짓게 된다. 최 종적으로 양념을 넣기 전에 적당히 잘 절여진 배추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소금에 절여진 배추의 그 부드러움을 닮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의 사이에 있어서도 서로 원만한 관계가 오래 유지되려면 자신의 거칠고 뻣뻣한 면들을 겸손과 인내와 절제의 소금으로 조금씩 가라앉힐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남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과 아집, 자신의 실수나 잘못은 깊이 반성할 틈도 없이 다른 이의 결점과 잘못만을 가차 없이 비난하는 말이나 행동 등의 그 뻣뻣한 '살아 있음'을 우리는 사랑과 용서, 이해와 관용의 소금으로 아픔과 쓰라림을 참으며 '죽일 줄도' 알아야 하리라.
이 시대의 불의와 어둠을 탓하며 목소리를 높이거나, 성급하고 충동적인 저항의 큰 몸짓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신의 삶과 내면을 제대로 가꾸고 돌아보는 지혜를 키워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겐 '잘 죽어 잘 익은' 성숙함을 기대하면서도 자신의 설익음은 개의치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맛있는 김치가 되기 위해 숨죽여 엎드려 있는 배추들의 기다림과 침묵의 수련기를 지켜보면서 나도 소금에 잘 절여진 배추처럼 매일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는 조용한 죽음의 용기를 배우면서.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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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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