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3부 나라를 열다
2. 동이족이 세운 나라
공자도 오고 싶어했던 동이의 나라
고대 우리 민족은 동이족으로 표현되고 있다. '동이'는 중국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세계적으로 역사기록이 풍부한 중국의 고전이나 역사책에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기록이 단편적이나마 많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동이라든지, 조선이라든지, 예맥이라든지, 한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책들에 나오는 단편적인 기록을 망라하여 체계를 세워 적어놓은 역사책이 삼국지와 후한서이다. 동이열전의 내용을 보면 고대 우리 역사를 더듬을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동방의 종족을 이라고 불렀다. 은대의 갑골문에도 인이가 나오니 그 유래가 매우 길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이에 대해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란 근본이다. 이는 어질어서 생명을 좋아하므로 만물이 땅에 근본하여 자라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도리로 다스리기 쉽다. 그래서 군자국과 불사국이 있기까지 하다. 군자국이라는 표현은 에의를 안다는, 곧 문화수준이 높다는 것이고, 불사곡이라는 표현은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약이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조선을 에의의 나라, 불사약이 있는 나라로 칭했다. 이에는 아홉 종류가 있는데 공자도 '구이'에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공자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세상에서 바른 도를 펴려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차라리 뗏목을 타고 동쪽 오랑캐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탄하였다. 중국 전설의 임금인 요는 신하 희중에게 우이에 살라고 명하면서 이 땅을 양곡은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인데 지금 산동성의 동쪽 바닷가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 이 요임금 때에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였다. 순임금의 뒤를 이은 우임금이 하왕조를 세웠다. 하왕조 때부터 동이족은 발해 연안에 널리 퍼져 살았고 나아가 세력을 키워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국 용산문화의 중심지인 익도에까지 뻗쳤다. 용산문화는 청동기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의 사정을 알려주는 서경에는 내이들이 목축을 하면서 누에치기로 실을 뽑아낸다고 하였다.
동이족들은 처음 유목부족으로 이곳에 건너와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누에치기를 했다. 지금도 이 전통을 이어 산동반도에는 양잠방직업이 큰 산업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내이는 내주와 등주에 자리잡고 살았는데, 이들 중에 기족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이들에 관한 청동 명문이 전해져오고 있다. 하나라 3대 왕인 태강은 정치를 소홀히하다가 난을 일으킨 예에게 쫓겨나 죽었다. 예는 동방의 군주로 그에 관한 이야기는 춘추좌씨전과 논어에도 나온다. 이 예의 사건을 두고 최초로 이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 제상이라는 사람이 동이의 공격을 받아 같은 성바지의 마을을 떠돌다가 끝내 멸망되었다. 그의 아내는 살아남아 소강을 낳았고 소강은 하왕조의 6대 왕이 되었다. 소강 이후 이의 사람들은 왕화에 감복되어 대대로 하왕실에 복종하고 음악과 춤을 바쳤다. 하왕조의 마지막 왕인 걸 임금은 포악한 정치를 하였다. 이 틈을 타서 여러 이들이 중국 내지를 침입하였다. 하왕조를 쳐서 은나라를 세운 이는 탕이다. 탕은 서기전 1751년에 은왕조를 세웠다. 탕임금은 혁명을 하고나서 여러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은왕조의 8대 왕인 중정때에 남이가 침입하였는데, 남이는 처음의 구이에서 이름이 보이지 않는 새로운 동이이다.
청동기문화의 선구자
이로부터 300여 년 동안 이는 복종하고 배반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25대 왕인 무을에 이르러 은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무을은 폭압정치를 펴서 인심을 잃었다. 이에 동이가 점점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와 대산으로 옮겨와 살았다. 그후로는 점점 본토 깊숙이 들어왔다. 이때의 사실이 갑골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인방의 출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방은 바로 동이를 말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임금은 두 번에 걸쳐 인방을 정벌하였는데 각가 10개월, 8개월이 걸렸다. 이 기록은 은의 복사에 나타나고 있다. 좌전에는 "주임금이 동이를 이기고 나서 그 몸이 떨어졌다" 라고 쓰여 있다. 주임금이 동이를 정벌하고 힘이 쇠약해져 멸망했다는 것이다. 주나라의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였다. 무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성왕이 임금이 되었으나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무왕의 동생 주공이 섭정을 하였다. 무왕의 다른 동생들인 채숙과 관숙은 주공이 찬탈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채숙과 관숙은 회이 등을 지원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주공은 이들을 정벌하였느데 이때에 와서야 드디어 동이를 평정하였다고 하였다.
주임금과 주공의 정벌로 은말과 주초에 내이들은 비로소 중국의 중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는 전쟁포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듯하다. 포로들은 비교적 높은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 가지 기술을 가졌다는 뜻으로 백공이라 불렸다. 동이족은 이때 중국의 청동기문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어냈다. 그 중거가 바로 주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청동기 명문 끝에 붙은 백공의 씨족 표시이다. 앞의 기록은 무론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갑골문이나 복사 및 전해지는 단편의 이야기를 적은 논어 좌전 같은 고전에도 보이는 내용이다. 중국에서는 요순시대를 이상정치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뒤를 이은 하은주 삼대를 요순의 이상정치를 본받아 인덕을 펴고 무도한 군주를 혁명의 이름으로 방벌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의 전통을 세운 시대로 본다. 하지만 요순 당시의 기록은 전해지지않는다. 하은주 삼대를 따져서 주는 역사시대로 보고 은은 갑골문의 출현으로 반역사시대로 보고 있으며, 하는 근래 이리두문화의 발견으로 부분적으로 일부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중국 상고시대에에는 아직 중화사상 또는 중화주의가 싹트지 않았다. 중화주의는 중국을 통일한 진한 이후에 생긴 개념이다. 주나라의 영토도 서안과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세계관도 이 범위를 넘지 못했다. 그러므로 중국 민족과 이민족이라는 막연한 개념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주나라 사람들은 내이들이 계속 대항해오자 그들의 기록이나 서법을 애써 없애버렸다. 이때부터 민족감정이 싹텄다.
중국 사람들의 눈에는 동이족이 강력하고 문명한 종족 또는 민족으로 비치었다. 중국은 이들에 대해 결코 나라이름을 쓰려고 하지않았다. 이는 뒷날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쓴 것과 구별된다. 또 동이를 아홉으로 나누기도 하고 다른 이름의 이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이는 다른 주변민족의 경우에서는 볼수 없는 현상이다. 진한시대에는 동이와 함께 서융, 남만, 북적을 확실하게 구분지어 기록하였으나 그 이전에는 주로 동이만이 이민족으로 떠올랐다. 초기에는 이민 족에 대한 통칭을 동이라고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동이가 1천 년 이상 투쟁을 벌여온 탓이었다. 처음에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낸 탓으로 동이를 만물을 소생시키는 근본으로 보기도 하고 활을 잘 만들고 잘 쏘는 민족으로 보기도 하고 예절의 나라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하왕조이후 중국의 왕조와 맞서 싸우며 투쟁을 벌이자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동이족은 중국과 맞서 싸운 정도가 아니라 승리를 거두었기에 황하 아래쪽 회수 일대와 산동반도에 정착해 살았던 것이다. 중국은 북부지방에서 가장 농토가 발달한 산동성을 동이족에게 내주었고 끝내 황하 일대의 중심부에도 동이족이 살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이족이 중국 땅을 얼마나 석권했는지는 중국 기록에 위의 사실 이상으로 나오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뒷날 하은주 삼대의 사실을 열심히 쓴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중화사상이 발동하여 동이 관계의 이야기를 적당히 얼버무렸을 것이다. 그러니 "점차 중토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 고 애매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이족에 구이가 있다고 하였듯이 이들의 갈래는 단순하지 않다. 동이는 원래 중국 서북부에 있다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 갈래는 산동반도 쪽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동쪽으로 나와 발해만을 따라서 요동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학설도 있다. 또 좁은 의미의 동이는 산동반도로부터 회수유역에 거주하였던 우이, 회이, 내이, 서융등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에서 보면 발해, 황해를 둘러싼 황하, 요하, 대동강 등의 충적지에 마제형으로 분포되어 살던 종족을 말한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부사년은 이 관계 연구의 대가이다. 그는 하은주 삼대를 동서 투쟁의 연속으로 본다. 화하족과 동이족을 투쟁의 주체로 보는 것이다. 중국 북쪽을 정치의 중심으로 볼 때 이것은 큰 설들력을 지닌다. 또 중국인 학자 서욱생은 중국 상고의 민족을 화하, 동이 그리고 남쪽의 묘만으로 확대 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남쪽의 정치적 무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서언왕은 정치계의 위인이다
동이족이 오늘날의 한민족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동이족을 만주족의 조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바다 건너의 왜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이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신비에 빠진 상고사를 푸는 한 열쇠가 될 것이다. 주나라의 봉건왕조는 주변의 이민족을 공격하여 복종을 강요하였다. 특히 3대 가왕은 북방 유목민족을 정벌하는데 온 국력을 기울였고, 한때 주변민족과 주나라는 평화를 유지하는 듯했다. 그러나 서기전 1000년경에 태어나 서언왕이 서융과 회이의 땅에서 서국이라는 왕국을 건설했다. 중국 역사책에서는 서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참람되이 왕호를 쓰고 "구이를 거느리고 종주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의 상류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서언왕은 이 기록처럼 안휘성 사현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처음에는 땅 500리, 주민 1만여 호의 작은 나라였다. 중국의 박물지에 서언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수국의 궁인이 알을 낳아 물가에 버렸다. 며칠이 지난 후 궁인은 알을 다시 가져와 방안에 두었는데, 이윽고 껍질을 깨고 한 아이가 나왔다. 그는 어질고 지혜로워서 임금의 자리를 이었다.
이 탄생설화는 주몽이나 혁거세 설화와 비슷하다. 따라서 동이 계열의 근원설화에서 분파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서국은 서언왕이 처음 세운 것이 아니고 동이족의 나라로 존재해오던 것을 확대하여 힘을 키운 나라였다. 박물지는 이어 이렇게 적고 있다.
언왕은 인자한 왕으로 널리 소문이 났다. 배를 짜고 상국에 가려고 진과 채 사이에 운하를 뚫다가 붉은 활과 화살을 얻었다. 이러한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기 때문에 드디어 할을 이름으로 삼아 타칭 언왕이라고 하였다.
한자의 언은 "활처럼 굽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양자강과 회수의 제후들이 복종하였는데, 모두 36개국이었다. 언왕은 구이 족속을 거느리고 주왕실을 공격하였다. 당시 주의 목왕은 주색에 빠져 인심을 잃고 있었는데다가 멀리 바빌론의 여왕에게 조공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목왕은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서언왕에게 섬서 동쪽의 제후를 다스리게 하였고, 섬서 서쪽의 제후는 직접 다스렸다. 이렇게 해서 주나라는 양분되었고 한쪽을 서언왕이 차지했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조선상고문화사에 '대서제국'이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이렇게 썼다.
회하 부근에서 종교계의 위인이라 할지 정치계의 위인이라 할지 이름짓기 어려운 한 위인이 나서 당시 조선 사람의 대표가되어 지나 천지를 한번 들었다 놓으니 또한 암흑 한가운데의 빛이라, 독사자의 깊이 환영할 만한 사람이로다. 그 사람이 누구이뇨? 곧 이 아래에 말하고자 하는 바 서언왕이다.
그 뒤 서언왕은 목왕의 꾀임에 빠졌다. 목왕은 자신의 힘으로 서언왕을 누를 수 없자 멀리 초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주와 초는 연합작전을 펴서 서국을 습격하였다. 서언왕은 산속으로 달아나면서 인의에만 힘쓰고 무비를 갖추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이를 두고 신채호는 이렇게 말했다.
서언왕이 이에도 잘못하였도다. 무릇 언왕의 망함이 한사람의 망함이 아니라 곧 전폭의 망함이며 서국 전부뿐만이 아니라 곧 해외 조선 식민지 전체의 망함이며 식민지 전체뿐만이 아니라 곧 조선의 위령이 망함이나, 이미 망하는 자리거든 혈육은 망할지언정 정신은 망하지 말지니, 만일 칼도 활도 없는 수만 백성이 다 싸움에 죽었으면 곧 서국의 정신이 만세 끼쳤으리로다.
서언왕의 인의에 은덕을 입은 제후들은 그를 오랑캐라고 깔보지 않고 기려 마지않았다. 동이의 활동상을 애써 깎으려 했던 역사가들도 이 대목만은 빼지 않았다. 주나라 봉건왕조 말기에 등장한 여왕은 포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제후들도 크게 동요하였다. 이때 회이는 하남성, 하북성, 안휘성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무리를 모아 황하의 상류인 이수, 낙수에까지 침입해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곧 서언왕의 후손들이었고, 서국 거주민의 후예들이었다.
조선과 연나라의 숙명적인 대결
주왕실이 쇠약해지자 여러 나라들이 패권을 잡으려고 일어났다. 그중에 제나라의 환공이 왕의 다음 자리인 공을 표방하고서 관중이라는 탁월한 가신을 데리고 패권을 잡았다 제환공은 5패의 하나로 꼽히는데, 산동반도의 풍부한 어업과 염업으로 부를 쌓았다. 관중은 서기전 664년경 북쪽에서 연나라가 산융이나 고죽에게 핍박을 당할 때 역공으로 물리쳤고 나라의 힘을 모아 강력한 이적의 침입을 막았다. 관중보다 200여 년 뒤에 태어난 공자는 "만약 관중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머리를 땋아올리지 않고 늘어뜨리는 것이나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라했다. 곧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그뒤 100여 년이 흐른 제나라 영공 때에도 산동반도에는 내이가 있었다. 내이는 지금의 봉래현에서 황현에 이르는 지방인 산동반도의 북쪽, 발해만의 아래쪽 입구에 살고 있었다. 이 내이는 말할 것도 없이 동이의 한 갈래로 유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제나라 영공은 안영의 도움을 받아 서기전 557년에 내이를 멸망시켰다. 앞으로도 내이가 있던 봉래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제나라는 내이를 멸망시킴으로써 어업과 소금의 생산을 확실히 거머쥐고 패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제나라의 명재상으로 관중과 안영을 꼽는데, 안영은 내이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영 부자는 내이의 땅을 식읍으로 얻었다. 그러나 내이 종족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내이의 사람들은 이전에 청동기문화를 주도했듯이 철기문화를 주도했다. 중국에서 무쇠를 나타내는 옛 글자는 쇠와 오랑캐의 뜻을 따서 만든 회의문자 철이었다. 곧 쇠는 동이 사람들이 다룬다든가, 쇠는 동이에서 나온다는 뜻을 지닌 글자였다. 또 발해만의 등주 바다 귀퉁이에서 북쪽 요동으로 갈 때에는 당시 잠기지 않은 바닷길인 노철해협으로 다녔다고 하는데 이 노철해협은 철을 나르던 통로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동이족이 먼저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에게 철기문화를 배워 중국에 전달했다는 학설이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 학자들은 이 점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관중은 제환공에게, 제후이면서도 실제로 왕노릇할 나라가 셋이 있는데 바로 제를 비롯하여 연나라, 초나라라고 말하였다. 제와 연에서는 소금이 나기 때문이고 초에서는 황금이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멀리 서쪽에 있는 진나라를 빼놓았으나 당시의 실상으로는 빠질 만하다. 연나라는 주무왕의 아들 소공을 봉한 제후국으로 출발했다. 연나라는 수도를 계에 두었는데 지금의 북경이다. 그래서 근세조선시대에는 북경을 연경이라고도 불렀다. 연나라는 중구의 정치 중심무대인 황하 상류와 멀리 떨어진 동북지방에 있어서 전란에 휘말리는 일은 적었으나 새외민족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고 있었다. 이런 탓으로 춘추시대가 가고 전국시대가 왔는데도 연나라 관련기사는 사기연표에 160여 년 동안 이렇다할 만한 사건이 하나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연나라가 무사안일한 실정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웃인 산융과 동호는 요서지방에서 강력한 힘으로 연나라에 맞서왔다. 그 주변에 사는 오환과 선비도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였다. 그 바깥에 예맥과 조선이 있었다. 서기전 8세기에서 4세기까지 연나라는 흉노와 동호를 상대로 싸워야 했고 많은 압박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그들을 멸망시켰다.
이 중간지대의 민족이 멸망한 뒤에야 연나라와 예맥과 조선의 교류가 트였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관자에 처음 등장한다. 관자에서 비로소 종족 또는 민족을 일컫는 동이와 구분해서 쓰고 있다. 제나라는 멀리 조선과 무역한 사실을 적고 있는데 이는 조선이 나라이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맥은 조선이라는 이름보다 불확실하게 쓰였다. 흔히 '예맥조서'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예맥과 조선인지, 예맥의 조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분리해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예맥족은 흔하와 길림 일대에 있었다고도 하고, 그 이남의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지방에 살았다고도 한다. 또 춘천이나 강릉지방을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여씨춘추에는 "예맥은 북쪽 바닷가의 동쪽에 있다" 고 하였다. 여기의 북쪽 바다는 발해만으로 볼 수 있다. 정약용의 말대로 예맥을 춘천, 강릉이라고 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정약용은 예맥고에서 이렇게 썼다.
예맥이란 말은 욕으로서 천하에 가장 천한 이름이다. 중국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따져보지도 않고 예맥이란 몹쓸 이름을 우리에게 덮어씌우니, 해명하지도 아니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우리 쪽도 미혹된 바가 아닌가? 예맥 사람들은 원래 근본이 없어서 물과 풀밭을 찾아니고 사슴이나 산돼지 뒤를 이리저리 쫓다가 마침내 우리 땅에 들어와 몇 군데 섞여 살게 되었다.
예는 땅이름으로 "더럽다"는 뜻이라 했고, 맥은 오소리나 담비 같은 짐승을 말하는데 그들이 담비 같은 짐승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예맥이 우리 민족 고유의 이름이 아니고 북쪽에서 흘러왔다고 본다. 그러나 예맥을 조선과 동류나 대칭으로 일컫기도 하고 부여, 고구려의 뿌리라고 보기도 한다. 이 명칭은 동이족이나 조선족과 같은 뜻으로 쓰일 수는 없을 것 같다. 맥족은 조선과 함께 중국에 정복당하지 않고 세력을 뻗어나갔다.
조선은 부족 또는 군장사회를 유지해오다가, 요서와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동반한 정착농업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일부는 발해만을 중심으로 산동반도로 진출하여 이주민 국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서기전 1000년경에는 부족이나 주민의 범위를 확대하여 정치세력으로 크게 성장하였고, 여러 종족을 정치연맹으로 결성하여 새로운 공격자 연나라에 맞서 힘을 길러나갔다. 그 힘은 점차 통치력과 통합력을 길러주어 조선은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정식으로 왕호를 선포하고 나섰다.
신채호는, 조선의 중심지인 왕검성이 요서지방인 창려에 있었는데 요하 동쪽의 해성으로 옮겼다가 이어 대동강가의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연나라 장수 진개는 소왕(서기전 311년에서 270년)의 영토확장정책에 따라 서쪽으로 침입하여 조선 땅 2천 리를 빼앗았다. 이로 하여 조선은 힘이 약해졌고 도읍도 대동강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서쪽 끝에서 일어난 진나라의 시황제는 이른바 전국의 7웅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그는 가까운 나라들을 하나씩 공격해서 연전연승을 기록했다. 연나라는 진나라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연나라 태자 단은 그 화가 자기나라에 미칠 것을 예단하고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철퇴로 진시황의 수레를 내리친 창해역사가 바로 동이족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은 서기전 226년 대군을 이끌고 연나라 수도인 계를 공격했다. 연왕은 암살을 지휘했던 태자 단을 베어 진시황에게 바쳤으나 진시황은 여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통일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연왕 희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많은 신하를 이끌고 요동으로 달아났다. 진시황은 대군을 요동으로 보내 끝내 연왕 희를 포로로 잡아왔다. 서기전 222년의 일이었다. 주나라의 희성을 받은 연나라는 800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동방과의 분쟁도 다른 나라의 손으로 넘어갔다. 진시황은 7웅 중에 마지막 남은 제나라를 공격하고 나섰다. 제나라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왕은 포로가 되었다. 연나라가 망한 다음해의 일이었다. 이로써 진시황은 중국 최초로 명실상부한 통일를 이룩했다.
진시황은 통일정책의 일환으로 모든 이민족을 억누르고 분산시켰다. 특히 회수와 사수에 살던 동이족을 분산시켜 한 족속으로 편호했다. 이렇게 해서 동이족의 자취는 산동반도 일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전시황의 철저한 동화정책에 따라 이곳의 동이족은 동화 흡수되었다. 다만 요동이나 황해너머에 있는 동이의 나라는 신비스러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진시황은 늙어가면서 죽지 않는 선약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는 중국을 통일한지 2년 뒤에 동방을 순수하러 나섰다. 이때 서불이라는 자가 도사 행세를 하며 진시황에 동방에 선약이 있다고 꾀었다. 진시황은 서약을 얻으려고 서불에게 많은 돈을 주고 동남동녀를 딸려보냈다. 이때부터 중국 사람들은 바다 건너 조선에 삼신산이 있고 그곳에 불사약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 전진기지가 발해만 아래쪽에 붙어 있는 봉래이다. 봉래는 동이가 자리잡았던 곳이고 봉래산 위에는 봉래각이 잇어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더욱이 봉래각이나 연대의 동쪽 바다에는 때때로 바다 가운데에 누각같은 집들이 나타나고 산자 모양의 봉우리가 나타난다. 이것은 해류와 기압의 영항으로 나타나는 신기루인데 옛사람들은 동쪽 삼신산의 모습으로 여겼다. 이제 동이의 이미지는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단일민족이란 없다
진의 통일 이후 중국 내의 동이족은 중국에 동화되어갔으나 일부는 요동과 발해를 건너 이동을 했다. 요동 쪽에서는 동이족이 흉노와 동호가 사라진 마당에서 연나라 이후 진나라와 그뒤를 이은 한나라와 직접 접촉을 했다. 진의 통일 이후 중국 쪽에서는 동이를 조선으로 바꾸어 불렸는데, 서기전 194년 조선의 준왕이 쫓겨나고 위만조선이 등장 하였다.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 쪽의 정치 망명자들과 전쟁을 피해온 도망자들이 계속 요동을 넘어 밀려들었다. 조선은 압록강, 대동강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를 전개시켜나갔다. 여기에는 이미 진한이라는 이름의 집단이 거주하고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활동이 기록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남쪽 한의 선주집단이라는 사실이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북방민족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이 진한세력이 합류한 뒤부터 조용하기만 해던 남쪽의 한들이 기지개를 켜며 기동을 시작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자. 동이족과 한 갈래인 예맥족은 북쪽지역에 살면서 독자의 문화영역을 만들었으며, 중국의 산동반도로 진출하여 정치집단으로 성장하다가 강한 저항에 부딪혀 주춤거렸다. 이들은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보급에 공헌하였다. 동호족이나 흉노족과 엄격하게 구분되는 에맥족은 상고시대에 발해만을 사이에 두고 산동반도, 요동반도, 조선반도를 서로 연결하며 동이문화권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하여 북쪽의 예맥, 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의 주요종족 주성원이 되었다. 남쪽에는 삼한의 한족이 기본을 이루었다. 한족은 오래전에 북쪽에서 내려와 예족이나 맥족과 구분되었다. 이들은 남쪽에 살면서 주로 해양활동을 벌여 일본과도 밀접한 교류를 가졌다 이렇게 볼 때 동이족과 예족, 맥족 그리고 한족이 고대국가를 형성하면서 우리 민족의 토대를 구성한 것이다.
특수한 종족을 제외하고는 세게사적으로 단일민족이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 민족도 순수한 단일민족일 수는 없다. 한민족은 여러 종족이 오랜 기간에 걸쳐 섞인 것이다. 이들이 언어와 풍습을 공유하면서 단일에 가까운 민족을 형성해왔다고 보아야 한다. 어러 객관적인 사실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민족은 민족 형성기에 언어, 문화, 역사와 간은 기본요소는 충분히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 근대적 민족주의 민족의식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그 뿌리와 태동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 일본과 끝임없이 이어져온 역사적인 마찰은 우리의 민족의식이 유럽에서는 찾기 힘든 시기에 일찍 형성된 요인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