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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19 호
단기 4340. 12. 31 (음력 11. 2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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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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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학사에서 주관하는 소천아동문학상 제3회 신인상 작품을 공모합니다. 소천아동문학상은 우리 아동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강소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제정된 권위 있는 아동문학상으로, 2006년부터 신인상을 신설하여 패기있는 신인작가를 발굴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모집 부문| 장편동화 (초등학교 3, 4학년 대상, 미발표 창작물) |원고 분량| 200자 원고지 250매 안팎 |응모 자격| 신인 및 등단 10년 이내 기성작가 |응모 마감| 2008년 1월 31일(마감일 우체국 소인 유효) |시상 내역| 당선작 1편, 상패 및 창작지원금 500만원 (당선작은 책으로 출간하며, 인세는 별도 지급합니다.) |수상자 발표| 2008년 4월 초 (주)교학사 홈페이지 및 개별 통보 |응모 방법| ① 우편으로 접수하며, 겉봉에 ‘소천아동문학상 신인상 응모작’이라고 명기하세요. ② 인쇄물, 디스켓, 줄거리 요약물을 첨부하세요. ③ 성명, 주소, 전화번호, 생년월일, 약력을 기입하세요. ④ 같은 원고를 타사 공모에 중복 투고하였을 경우 심사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보낼 곳| 121-021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105-67 (주)교학사 소천아동문학상 신인상 담당자 앞 |문의| TEL (02)707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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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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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 본 일은 모래 위에 새겨 두고, 은혜 입은 일은 대리석 위에 새겨 두라. /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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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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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쭈그렁 밤송이
건강에 대해 관심이 높아가는 시대이다. 건강에 스트레스는 악이고 즐거움은 선이라고 한다. 과연 꼭 그런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 까닭은 건강하게 활동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일이 많은 반면, 잔병치레를 자주하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노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장자의 이야기를 보자. 우산에 아름답고 곧게 자란 나무가 많았다. 그 나무가 곧고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재목으로 쓰려고 마구 도끼질을 해댔다. 나무가 없어지자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나 양을 방목하여 마구 뜯어먹게 하였다. 우산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리고 벌거숭이의 추한 산이 되었다. 쭈그렁 밤송이 삼년 가듯 완전치 못한 것, 보기 싫은 것은 그대로 놔두기 때문에 오래 간다. 곧게 자란 나무는 그럴 염려 없이 제 수명을 다한다. 도덕경의 ‘곡즉전’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건강관리에 이 이야기를 도입해 보자. 건강하다고 몸을 마구 써보라. 우산과 같이 쉽게 망가진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한 산도 자꾸 관리를 하다 보면 아름다워지듯이 우리 몸도 마찬가지이다. 잔병치레 많이 하는 사람은 건강에 조심하기 때문에 오래 사는 데 비하여 건강한 사람은 건강을 과신하여 몸을 함부로 하기 때문에 갑자기 죽는 일이 많다. 항상 적절한 긴장과 자극, 건전한 위기의식이 있어야만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생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
논에 미꾸라지를 키울 때 한쪽 논에는 미꾸라지만 넣고, 다른 쪽에는 미꾸라지와 함께 메기를 키우면 메기를 넣어 키운 미꾸라지가 훨씬 더 통통하게 살이 쪄 있다고 한다. 미꾸라지들이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항상 활발히 움직였기 때문에 더 많이 먹어야 했고 그 결과 더 튼튼해졌던 것이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쭈그렁 밤송이 삼년 간다.
열고 닫을 때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문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열지 않고 오랫동안 놔둔다. 소동파는 ‘자고로 아름다운 여자는 박명하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미인이니 이 남자 저 남자가 자꾸 귀찮게 하니 빨리 죽을 수 밖에...
손해와 이익 아들을 둘 둔 어머니가 있었다. 큰아들은 소금 장수였고 작은 아들은 우산 장수였다. 이 어머니는 항상 웃고 울었다. 비가 오면 우산 파는 아들이 잘 되어 좋으나 소금 장수 아들이 걱정이었고 날이 개면 그 반대였다. 한 사람이 손해를 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는 뜻의 이야기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한 이야기를 하나 더 살펴보자. 초나라 왕이 사냥을 갔다가 아끼던 활을 잃어버렸다. 활은 명품이었다. 신하들이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왕은 “초나라에서 잃어버린 것이니, 초나라 사람이 얻을 것이다. 내가 꼭 찾아서 무엇하랴.”고 말했다. 공자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왕의 생각이 왜 그렇게 크지 못한가? 왜 사람이 잃은 것을 사람이 얻을 거라고 말하지 않는가?“고 했다. 자칭 ‘국문학의 국보적 존재’였던 고 양주동 박사는 ”아깝다! 공자의 생각이 왜 그리 크지 못하냐. 왜 자연에서 잃은 것, 자연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느냐“며 공자보다 한 술 더떴다.
다이어트 뚱뚱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살찐 몸매가 싫었다. 어느날 의사를 찾아간 그녀는 몸매가 날씬해 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누드 모델의 사진을 주며 말했다. “냉장고 안에 이 사진을 붙이세요. 무엇이 먹고 싶어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사진을 볼 것 아닙니까? 그때마다 정신이 바짝 들어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의사의 처방은 정말 효험이 있었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 적마다 아름답고 멋진 몸매의 사진을 보고 식욕을 억제하였고, 마침내 아무개 대통령 후보의 아들처럼 한 달만에 몸무게를 10kg이나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거꾸로 그녀 남편의 몸무게가 10kg이나 불어난 것이다. 우연히 냉장고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나체 사진을 본 남편은 그 사진을 보기 위해서 자주 냉장고 문을 열었고 그때마다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이익보는 사람이 있으면 손해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한 사람의 손해는 다른 사람의 이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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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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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5장 - 교육
사고를 방해하는 것(III)
5. 안이화와 실리성의 편중-미국의 교육(4)
사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안이화해서, 이해하기 쉽게 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중대한 잘못을 초래하는 것이다. 미국식의 '안이화'에는 위험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나에게 이런 경험이 있다. "알기 쉬운 프랑스 문법"이라는 책을 뉴욕에서 출판하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그 책이름을 "쉬운 프랑스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이었다. '쉬운 프랑스어'나 '쉬운 프랑스 문법'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알기 쉽게 재미있게 설명할 수는 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며 안된다. 그러나 격변화나 동사의 활용변화를 쉽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효과적인 것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암시를 주는 정도의 것이다.
#1 아무리 따분하고 지겹더라도 처음에는 참을성 있게 끈질기게 극복해야 한다. #2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이미 해낸 일이니까.
이것은 원칙적이다. 라틴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라틴어의 학습이나 교과서의 체계를 보면, 우리 유럽인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미국에서는 라틴어를 꼭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라는 식의 적당주의로 꾸며져 있다는 것을 곧장 알 수가 있다. 그럴러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물어물할 바에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1 아무렇게나 어물어물하는 습관과 #2 열등감 만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단편소설이나 단막극 시나리오 등을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교육 방법도 고전어학 코스를 가르칠 때보다는 몹시 발달되어 있다. 한편 학생 쪽에서 보면, 그런 분야(단편소설이나 시나리오) 중에서 성공하고 싶기 때문에 성과도 상당히 있는 듯하다. 테크닉이란 점에서는 거의 나무랄 곳 없을 만큼 완벽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것은 '팔리는' 상품을 만들려고 하는 상업주의적인 욕망의 결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문제인 것이다. 기교면에 있어서는 그 어느 곳 하나 나무랄 곳이 없지만 아무래도 감동을 주지는 않는 것으로 금방 바닥이 드러나는 것들이 양산되고 있다. 즉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스마트하게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리성'이라는 기생충에게 좀먹힌 정신에서 미에 대한 사고력 같은 것이 우러날 리가 없는 것이다. 미국의 학생들은 누구나 다소간은 '문화란 사치스러운 것, 즉 군더더기와 같은 것' 이라는 고정관념을 안고 학교를 나온다. 그러니 과연 그들의 상상력은 개발되어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싹이 싹둑 잘려 버린, 보기에도 가엾은 모습이 된다.미국식 교육은 역시 젊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6. 전통에서 오는 지성의 우선-프랑스의 교육(1)
프랑스의 교육은 뭐든 미국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것 투성이다. 그 교육의 결함이 나타나는 방식도 또한 정반대이다. 프랑스의 학교가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이념은 지성이다. 학생들은 공부를 마칠 때에, '나는 지성의 성과가 '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교문을 나서게 된다. 그래서 그들도 또한 잘못된 '환영'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들은 매우 중대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생활상의 실제적인 면'이라고 하는 인생에 있어서는 불가결한 관념은 돌보지 않고, 이를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지성편중이라는 프랑스 교육의 결함은 전통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학교는 90% 이상이 도시의 한복판에 있고, 유명한 학교는 파리에 집중되어 있다. 대개의 학교는 아직도 중세기의 수도원 같은 좁고 고색창연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높은 벽으로 막혀 있는 좁은 뜰, 여기서는 학생들의 자연스러운 육체적 활동 요구는 거의 전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미국의 학교의 개방적이고 넓고 건강한 분위기는 이런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약으로 쓰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 이와 같은 감화원의 뜰에서 어떤 체육이 가능한가를 상상해 보라. 대답은 분명하다. 감화원 안에서와 같은 빙빙 도는 운동밖에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이런 환경에서 짓눌러진 '울분'을 학생들은 어떻게 풀고 있을까? 그들은 부득이 상상이나 표현의 연구에 집중을 하게 되고, 정신의 세계에로 도피하는 것이다. 마음만은 그만큼 생생하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이런 광경도 폴 부르제(1852-1935, 프랑스의 소설가)의 시대까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사실이었다. 오늘날에는 그 당시만큼은 심하지가 않다. 대학예비학교(우리 나라의 인문고교와 같은 것)의 학생들은 체육관에 다니기도 한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축구나 테니스를 즐겨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대체로 11시간의 학과시간 중 단 두 시간이 '놀아도 좋은' 시간으로 할당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7. 재사의 대량 생산-프랑스의 교육(2)
프랑스의 학교는 문자 그대로 '교사와 책'을 의미한다. 학생끼리의 토론이 중간에 끼여드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고전어를 다루는 방법을 보면 프랑스의 교육이 '머리만 큰' 교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최근까지도 이 나라에서는 고전어(희랍어와 라틴어)가 국어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고전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 반동으로 다른 학과목은 그리 열심히 공부를 안하게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용적인 면이 없다고 하여 일률적으로 비난할 것은 못되지만, 이런 정도로까지 이와 같은 '관습'은 문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물론 '문학'을 배움으로써 학생들이 얻는 바가 적지 않다. 우선 무엇보다도 사실의 논리에 익숙해지게 된다. 명석함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인간적인 성숙을 해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는 일이다. 프랑스의 학생들은 이 점을 소홀하게 한 교육의 폐해를 자칫하면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미숙한 두뇌에 지극히 전문적인 지식이나 관념을 억지로 주입하는 방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소년들의 대부분이 겉똑똑이의 재사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그들은 스스로 뜻도 잘 모르는 전문용어를 입에 담음으로써 우월감에 젖기 쉽다' 그리고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행세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에 익숙해져 버리기 쉽다. 가장 곤란한 것은 이와 같은 불성실성이 몸에 배어 버리는 일이다. 프랑스의 교사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학생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특히 파리에서는-그런 것들은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같은 고질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어떻게 환자를 고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8. 우등생 숭배주의-프랑스의 교육(3)
예를 들면 프랑스의 교사들은 천재의 개념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1 '천재'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천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천재'의 화신을 찾아 나선다. 그 반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얻은 학생이 당장에 그들의 우상으로 떠받들려진다. 일단 이렇게 되면 그들은 자기 체면이고 뭐고 내던지고 이 '천재' 앞에 엎드려 버리고 만다.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버리는 것은 이른바 예정된 행동인 것이다. 말하자면 '운명'의 소관이라고나 할까? 다른 나라에서는 열등생이라 할지라도 각지 활로가 있다. 예를 들면 학과공부는 잘못해도 스포츠의 실력이라든가 용기, 일을 잘 처리해 가는 능력 등 뭔가 한 가지 일에서 특징이 있으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민할 것이 없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지성 우선인 프랑스에서는 결코 그렇게는 안된다. '천재' 이외의 사람, 즉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슬프게도 열등감의 노예가 되고 만다. 따라서교육상의 왜곡이 프랑스 국민성의 약점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 사람은 과연 현명하기는 하지만 지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까?" 나는 여기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프랑스 인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남이 험담하는 것을 잠자코 들어 넘길 수 있는 국민이기도 하다. 즉,
#1 웃을 수 있는 경우 #2 비난을 받을 일에 대해서 핀잔을 주거나 비꼬아 말할 수 있는 경우
이와 같은 국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처럼 아주 끈질긴 인내심으로 계속 추진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는 계몽운동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또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프랑스 인이 잘하는 '토론을 위한 토론'은 그리 흔하지 않다. 조국이나 나아가서는 자기에게 피해가 생길 우려가 있으면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즉시 토론을 중지하고 실제적인 대책을 세우려고 든다. 그러나 프랑스 인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하여튼 너무나도 관념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이 없다고 아픈 데를 찔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성'편중의 교육의결과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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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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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터기 쓰다
본뜻 : 남으로부터 넘겨 받은 걱정거리를 덤터기라고 한다.
바뀐 뜻 : 본뜻 외에 억울한 누명이나 오명을 뒤집어 쓰는 일로 더 널리 쓰이고 있다. 흔히쓰는 '덤테기'는 틀린 말이다.
"보기글" -동생이 재산을 날리는 바람에 형님이 그 덤터기를 썼지 뭔가 -깨진 유리창 밑에 서 있다가 괜히 유리창 깬 놈으로 덤터기 쓸 뻔 했잖아
동티가 나다
본뜻 : 건드려서는 안 될 땅을 파거나 돌을 옮기거나 파내는 일을 말한다. 오래된 나무나 신성시 되는 나무를 벨 때 그것을 수호하는 지신들의 노여움을 입어 재앙을 받는다는 민속 신앙 용어다. 본래는 땅을 움직인다는 동토에서 나온 말이다.
바뀐 뜻 : 건드리지 않을 것을 잘못 건드려서 스스로 걱정거리를 불러들이거나 해를 입는 일을 말한다.
"보기글" -점순이네는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이 우물을 파더니 동티가 났지 뭔가 -돌쇠 녀석, 또 무슨 동티를 내려고 마을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체로키 글자
올해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기념하는 첫해다. 한글날은 세종 임금이 1446년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훈민정음은 창제 원리가 과학적이며 글자 구성이 체계적이다. 그래서 배우기 쉽고 쓰기에 편리하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또한 만든 때와 만든 사람이 분명하게 알려진 세계에서 하나뿐인 글자라는 점도 자랑거리다.
미국 동남부에 흩어져 사는 토착민(인디언) 중에 체로키 겨레가 있다. 체로키 겨레는 체로키말을 쓰는 꽤 큰 부족이었으며, 유럽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다른 부족보다 세련되고 차원 높은 문화를 누렸다. 미국 스모키산 자락에 있는 그들의 겨레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기 겨레는 만든 때와 만든 사람이 분명한 고유글자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들의 조상 세쿼이아라는 사람은 체로키말에는 86 음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하나씩 표현하는 음절글자를 만들어 글자생활을 하게 했다. 1820년 무렵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로키말로 된 책·신문·잡지를 발간했다.
그러나 체로키글자는 음소문자인 로마자 알파벳에 획을 더하거나, 고치거나, 뒤집어서 만든 음절문자다. 마치 일본이 한자를 조금씩 변형하여 음절문자인 가나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독창적으로 만든 글자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창제자와 창제 연도가 확실한 세계에서 유일한 글자는 한글뿐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억수
큰사전에서 ‘억수’를 찾아보면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로 풀이돼 있다. 이러한 뜻의 ‘억수’는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비가 억수로 내리부었다’처럼 쓰인다. 우리말에는 이와 다른 뜻을 가진 ‘억수’가 있다.
“억수의 산목숨이 골짜기마다 그득그득 모두 제 몫을 하고 ….”(박경리 <토지>) “저 고래 덕분에 오늘 고기가 억수겠어요. 어탐기를 좀 봐요!”(천금성 <허무의 바다>) “동생들을 거느리고 산나물을 억수로 많이 해 온 적도 있었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억수로 퍼마셨는데도 도무지 취하지가 않는다 그런 말입니다.”(이동하 <도시의 늪>)
여기서 ‘억수’는 ‘세차게 내리는 비’의 뜻이 아니라 ‘아주 많은 수나 양’, 또는 ‘아주 심한 정도’의 뜻으로 쓰였다.
이런 뜻의 ‘억수(로)’를 경상도 방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억수의 산목숨’ 등에서 ‘억수’는 한자말 억수(億數)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한자 ‘억’(億)은 ‘억대, 억겁, 억만’ 등에서처럼 ‘오랜, 많은’의 뜻이 있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가리키는 ‘억수’와 표기는 같지만 그 뜻이 다르므로, 별도의 올림말로 올리거나 아니면 동음이의어로 다룰 수도 있을 터이다. ‘소리는 같으나 뜻이 다른 낱말’을 동음이의어라 하는데, 사전에서는 ‘철자’가 같고, 그 뜻과 어원이 다른 낱말들에 한해 ‘강¹’, ‘강²’처럼 어깨번호를 붙여 구별하고 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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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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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7. 군인은 군인의 임무에 따른 뿐이다(위청, 곽거병)
2) 불패의 젊은 영웅(곽거병)
곽거병은 위청의 여동생인 소아의 아들로서, 그녀가 무제의 귀여움을 받아 후궁이 되자 일찍부터 궁궐에서 살았다. 그리고 무제 7년의 정벌 때에는 18세로 종군하여 유격대를 지휘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로로 관군후로 임명되고 또 3년 후에는 표기 장군에 임명되었다. 고난 속에서 자람 숙부 위청에 비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귀족 장군으로서 유달리 눈을 끄는 화려한 존재였다. 곽거병의 부대는 언제나 정선된 정예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참 부장의 부대의 병졸, 군마, 병기 등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그리고 곽거병은 그 강력한 기병과 함께 언제나 본대보다 앞장서서 대담하게 적진 깊숙이 진공해 들어갔다. 게다가 그의 부대는 행운도 따라 한번도 곤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장군들은 언제나 불운에 휘말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문에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신임이 나날이 두터워지더니, 드디어 대장군 위청도 능가할 기세가 되었다. 흉노의 혼야왕도 서부 지역에서 번번이 한군에게 패하여 수만의 병졸을 잃었는데, 모두 곽거병의 군대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흉노의 선우는 격노하여 그 해 가을, 혼야왕을 처벌하기 위해 출두를 명했다. 이에 대해 혼야왕은 휴도왕 등과 공모하여 한나라에 항복할 결심을 하고 사자를 보내어 우선 변경의 수비를 맡고 있던 한군에게 그 뜻을 전했다. 때마침 한나라의 이식 장군이 황하 유역에 성채를 쌓고 있었다. 장군은 혼야왕의 사자를 맞이하자 즉각 무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무제로서는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항복을 가장하고 들어와 변경을 습격할 우려는 충분했다. 그리하여 무제는 곽거병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라고 했다. 곽거병의 군사는 황하를 건너 흔야황의 부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혼야왕의 부장들이 등을 보이며 도망갈 기색을 보았다. 그것을 보자 곽거병은 혼야왕 진영에 뛰어들어 도망가려는 자 8천여 명을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이어 혼야왕만을 말에 태워서 무제에게 먼저 보내고, 자기는 항복한 군을 통솔하고 황하를 건너 귀로에 올랐다. 이때에 항복한 흉노는 수만을 헤아렸다. 장안에 도착한 곽거병에게 무제는 거액의 상금을 하사하고, 혼야왕에게는 1만 호의 봉지를 주어 탑음후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무제는 곽거병의 공을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 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서역왕 혼야왕과 그 부하를 모조리 우리 한나라에 귀순시켰다. 군량은 적의 양식을 빼앗아 충당하고 병졸을 강궁 1만여 명을 편입했다. 포악하고 강한 자는 죽여서 수급과 포로를 합쳐 8천여를 얻었고 더구나 우리 장병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 우리 장병은 거듭되는 토벌전을 잘도 견디어 주었다. 이리하여 황하 연안으로부터 요새밖에 이르는 땅에서 백성의 고초는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려 하고 있다. 이로써 표기 장군 곽거병에게 1천 7백 호를 하사함과 동시에 주둔군을 반감하고, 백성들의 노역을 경감하노라."
그로부터 얼마 후 한나라는 귀순해 온 흉노를 변경의 옛 요새 바깥 땅에 분산 이주시켰다. 그들은 모두 오르도스의 땅에 있으면서 옛날 풍습을 유지한 채 한나라에 귀속해 살았다.
치열한 사막전
기원전 119년 봄, 무제는 대장군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 2명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의 흉노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기병은 각각 5만, 여기에 보병, 수십만이 후속부대로 뒤따르고 있었다. 이때에도 정선된 정예 부대는 모두 곽거병 군에 배속되어 있었다. 원래 곽거병은 정양을 근거지로 삼고 선우와 대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 출정하려 할 때 포로를 잡아 문초하여 선우가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무제는 급히 작전을 변경하여 곽거병에게는 더욱 동쪽에서 출격하라고 명령했다. 대신 정양에는 위청의 군대를 보냈다. 이리하여 위청은 곽거병과 협력하여 흉노에 공격을 가하려고 사막 깊숙이 진격을 개시했다. 그 병력은 5만 명이었다. 이때 전에 흉노에 투항했던 조신이 선우에게 말했다.
"사막을 건너온다면 한나라 군사는 지쳐 있기 마련이니 작전을 잘 쓰면 무난히 적을 생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우는 정예군을 골라서 사막의 북쪽 기슭에 포진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도 한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위청 휘하의 군대는 국경에서 천여 리 진격한 지점에서 선우를 발견하여 즉각 진형을 정비했다. 위청은 무강거(판자로 에워싸고 포장을 씌운 차량)를 고리 모양으로 늘어놓아 본영으로 하고 5천 기를 적진으로 돌격시켰다. 흉노군도 약 1만 기를 내보내 이에 맞섰다. 마침 해가 저물 무렵이었는데 질풍이 모래를 휘말아 올리며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양군이 모두 거의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군은 좌우 양 날개의 병력을 투입해서 차츰 포위의 태세를 갖추어 갔다. 선우는 한군이 병력으로도 우세할 뿐 아니라, 투지도 왕성하여 이대로는 자기네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황혼 속을 노새 6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부하 수백 기와 함께 단숨에 한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도주했다. 양군이 뒤섞인 혼란된 격전은 날이 저물어도 계속되어 양군이 거의 같은 숫자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다가 사로잡은 포로의 입에서 선우가 이미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지체 없이 가볍게 무장한 기병이 어둠을 뚫고 선우를 추적했다. 대장군 위청도 직속 부대를 이끌고 추적했다. 그리하여 흉노는 대열이 흩어지며 도주하였고 새벽녘까지 2백 리 쯤 진격했으나 선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위청은 여세를 몰아 계속 흉노를 몰아붙이면서 전군에게 넉넉하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 후 철수했는데 이때 성을 다시 쓰지 못하도록 완전히 불태우고 나머지 군량은 모두 가져왔다. 한편 대장군 위청이 선우와 대전하고 있을 때, 전장군인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가 이끄는 부대는 본대와 떨어져 동쪽으로 진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고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었다. 두 장군이 본대에 합류한 것은 본대가 사막의 남쪽까지 철수해 왔을 때였다. 위청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부관을 보내어 해명을 요구했다. 이때 이광은 보고서 작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결했으며, 조이기는 속죄금을 내고 평민으로 되었다. 이 전쟁에서 위청 휘하의 군대가 귀환하기까지 올린 전과는 포로, 수급을 합해 1만 9천에 이르렀다. 한편 흉노측에서는 선우가 열흘씩이나 행방불명이었기 때문에, 우욕여왕이 자립하여 선우를 자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의 선우가 나타나자 우욕여왕은 깨끗이 본래의 지위로 돌아갔다.
패배란 없다
표기장군 곽거병의 군대는 위청군과 같은 규모였다. 다른 점은 휘하에 부사령급 막료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천리도 넘게 진격하는 전과를 올려 그 성과가 대장군 위청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개선한 후 무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을 통솔함에 있어 포로의 정예를 더하여 얼마 안 되는 장비를 가지고 대사막을 넘었다. 그리하여 획장거(강 이름)를 건너 흉노의 왕 비차기를 참살하고 좌대장의 군과 싸워서 그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둔두왕, 한왕 등 3인과 장군, 대신을 비롯하여 83명을 사로잡았다. 아울러 낭거서산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고연산에서는 땅에 제사지냈으며, 한해(고비사막이라고도 하고, 바이칼호라고도 함)를 굽어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포로의 총수는 7만 4백 43명, 적군의 3할을 격멸시켰다. 더구나 군량은 적에게 뺏어 오지 깊숙이 침공하면서도 보급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로써 표기 장군에게 5천 8백 호를 하사한다."
빛과 그림자
표기장군 곽거병의 부하들은 부장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상금을 받거나 승진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이에 반하여 대장군 위청에게는 아무런 상금도 없고 부하에게도 영광을 얻은 자가 없었다. 이때부터 위청의 권위는 나날이 쇠퇴하고, 곽거병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위청은 친구나 식객들까지 썰물처럼 사라져 곽거병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의 추천만 있으면 쉽사리 관직, 작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임안만은 그것을 옳게 생각지 않고 위청 밑에 머물러 있었다. 곽거병은 과묵하고 기골에 넘친 인물이었다. 무제가 그에게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배우라고 권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 순간순간에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또한 그에게 커다란 저택을 하사하며 무제가 한번 가서 보고 오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흉노가 망할 때까지는 저렇게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겠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무제는 더욱 더 그를 존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곽거병은 젊었을 때부터 무제의 측근에서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부하를 위로할 줄을 몰랐다. 그가 출진할 때에는 무제가 친히 수레 10대 분의 좋은 음식을 내렸다. 그 식량은 개선할 때까지 남아돌아서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사졸들은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또한 요새 바깥 땅에서 병사들이 굶주림 때문에 걸을 기력조차 잃고 있을 때에도 그는 장수들과 함께 공차기를 즐겼다. 곽거병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이 출중한 장군은 불과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한편 위청은 인품이 인정스럽고 겸허하여 부하들의 인심을 사로잡는 정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망은 곽거병을 따르지 못했다. 언젠가 위청에게 그의 부하 소건이 물었다.
"왜 장군께서는 천하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그 이름을 빛내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위청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전에 몇몇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 인물들을 초빙하자, 황제께서는 이들을 매우 미워해 그들을 결국 극형에 처하셨다. 사대부를 가까이 하거나 어진 사람을 불러들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을 물리치는 것은 처자께서 하실 일이다. 신하된 사람은 오직 법을 따르고 직책을 지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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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3부 활성산소의 피해를 막아주는 항산화제의 비밀
제1, 2부는 프리라디칼, 활성산소의 정의와 그것들이 몸 속 어디 어디에서 생기는가에 대한 것이고, 이번 장은 그런 활성산소를 처리하는 항산화제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내용이 좀 전문적이긴 하지만 알고 보면 별 게 아니다. 항산화제는 우리 몸의 세 군데(세포안, 세포막, 세포 바깥)에 존재하며 각각 위치하는 항산화제의 종류가 다르다. 세포 안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항산화효소가 프리라디칼을 처리한다.
1. 수퍼옥시드 디스뮤타제, 2. 카타라제, 3. 글루타치온 페록시다제, 4. 셀레니움 세포막에서는 다음과 같은 항산화효소가 프리라디칼을 처리한다. 1. 비타민 E, 2. 비타민 C, 3. 조효소 큐 세포 외부(예: 혈관 내)에서는 다음과 같은 항산화효소가 프리라디칼을 처리한다. 1. 비타민 E, 2. 비타민 C, 3. 구리나 철을 처리하는 트랜스훼린, 락토훼린, 세룰로플라스민, 알부민 등
혈액 속에 있는 항산화제들 중에서는 어느 물질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까?
혈액이 녹슬지 않도록 하는 지역방위군은 곧 LDL이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항산화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은 LDL에 붙어다니면서 보호를 하고 어떤 것은 혈액을 흐르면서 LDL을 보호한다. 이들은 LDL이 프리라디칼의 공격을 받을 때 자기 몸을 던져서 방어를 하므로 공격 횟수가 많을수록 점점 그 양이 줄어들게 된다.
재미있는 한 실험 결과를 소개한다. 사람의 혈액을 뽑아서 그 성분을 모두 분석하고 양을 잰다. 물론 이 안에는 LDL도 들어 있다. 그 다음, 혈액 안의 LDL이 과산화변질이 되도록 조작을 가하고 나서 다시 혈액 성분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지질의 과산화변질 속도가 증가되면서 눈에 띄게 줄어드는 물질이 있었는데, 토코페롤, 베타카로텐, 라이코펜 등이 그들이다.
이 실험의 결과는 무엇을 뜻하는가? 토코페롤, 베타 카로텐, 라이코펜등이 LDL을 보호하는 물질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이들은 처음에는 LDL의 과산화변질을 억제하는 데 쓰이면서 소모가 되므로 양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예 다 소모가 되어 바닥이 나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LDL의 과산화변질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토코페롤, 베타카로텐, 라이코펜 등은 세포 밖 혈액 내에서 지질이 변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항산화 방위대이다. 이들 중에서도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까? LDL 덩어리를 분서갷 보면 그 안에는 프리라디칼의 공격에 약한 다가불포화지방산이 많이 들어 있다. 동시에 지질을 보호하는 항산화제들도 같이 들어 있다. LDL 한 분자당 토코페롤은 7개인데 비해 베타카로텐, 라이코펜, 조효소 큐 등은 1개도 안되리만큼 적은 양이다. 양이 많으면 당연히 항산화 역할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니 베타카로텐, 라이코펜도 중요하지만 혈액 내 LDL이 과산화변질이 안되도록 해 주는 실질적인 항산화제는 토코페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혈액 내 항산화 방위력을 증강시키는 방법도 이들을 투여하는 것이다. 하루에 얼마큼을 어떤 식으로 투여하는지는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토코페롤이 LDL에 붙어다니면서 보호 역할을 하는 것과 달리 어떤 것은 혈액 내를 흐르면서 프리라디칼을 감시하고 제거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비타민 C이다. 혈액 안의 비타민 C가 거의 바닥나 있는 사람은 프리라디칼에 의한 과산화변질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런 사람에게 비타민 C를 투여하면 즉시 과산화변질 속도가 억제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비타민 C는 항산화제 작용을 하는 동시에 또 다른 독특한 성질이 있다. 화학적으로 볼 때 비타민 C는 환원제(다른 물질로부터 산소를 빼앗거나 혹은 전자를 건네 주는 성질)이므로 구리, 철이온을 환원시킬 수가 있다. 비타민 C에 의해 전자를 건네받은 철은 흡수가 더 잘 된다. 이런 이유로 비타민 C가 부족한 사람은 철의 흡수가 잘 안되어서 철분결핍 빈혈이 더 잘 생기게 된다. 만일 빈혈이 잘 낫지 않는 사람은 비타민 C를 같이 복용해 보라.
비타민 C에 의해 혈액 속의 철이나 구리 성분이 전자를 건네받게 되고, 만일 이때 과산화수소가 존재한다면 새로운 반응이 일어나 아주 해로운 활성산소인 히드록시라디칼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실험실에서는 철과 비타민 C의 혼합물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지질의 과산화반응에 유도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타민 C의 해로움은 인체 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포 바깥의 조직액에는 혼자 떠 다니는 자유 상태의 구리, 철이 대부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리나 철이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항상 꼭 붙들어 잡고 있는 다음 물질들 역시 항산하제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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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고을의 품관들에게 나물죽을 대접했던 이지함
이지함(1517-1578)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형중, 호는 토정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그의 형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다. 장성하여 모산수 이성랑의 사위가 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이튿날 외출하였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는데 그가 입고 갔던 명주 도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집안 사람이 물으니 대답하였다.
"홍제원 다리를 지나다가 거지 아이가 추위에 얼어 신음하는 것을 보고 찢어서 세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날 자기 형에게 말하였다.
"제가 저의 처가를 관찰하였더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재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가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이듬해에 정말 재화가 일어났지만 모면하게 되었다. 이지함은 또 배를 잘 부려 넓은 바다를 평지처럼 다녔으며, 국내의 산천은 거리가 멀다고 하여 안 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또 평상시 자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여색을 경계하라. 여색에 대한 경계를 엄격히 하지 않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이지함은 배고픈 것을 참아 보려고 열흘 동안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목마른 것을 참아 보려고 한더위에 물을 끊기도 하였고, 고달픈 것을 참아 보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걷기도 하였다. 그는 화담 서경덕에게 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늘 무명옷에다 짚신 차림으로 솜옷을 짊어지고 다니며 사대부의 집에 가서 어울려 놀면서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기탄 없는 언행을 하였고 여러 방면의 잡술에 환하게 통달하였다. 큰 박을 네 모서리에 매단 거룻배를 타고 노도 사용하지 않은 채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지만, 풍파의 위험을 겪지 않았다. 그때마다 장사를 하여 맨손으로 경영한 사업이 몇 년 사이에 수천 석의 곡식을 축적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는 소매를 털고 떠났다. 또 섬에 들어가 오이를 길러 그것으로 곡식을 샀으며, 또 여러 척의 배로 경강(한강)에 이르러서는 낮고 습기가 있는 곳에다 흙으로 축대를 쌓았는데 높이가 수십 자나 되었다. 거기에다 흙집을 지어 밤에는 흙집에서 자고 낮에는 흙집 위에 올라가 지냈는데, 그 흙집을 토정이라 하였다. 그곳에서 얼마 동안 살다가 버렸다.
그는 또 쇠로 갓을 만들어 쓰다가 벗어서는 거기에다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으며, 끝나면 씻어서 다시 쓰곤 하였다(지금의 벙거지가 이것이다). 더러는 패랭이를 쓰고 거친 칡옷에다 나막신을 신고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천한 사람의 일을 하여 밑바닥 생활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일생 동안 남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하루는 느닷없이 민가에 침입하여 어느 부부 곁에 앉아 있었다. 주인이 크게 화를 내어 그를 때리려고 하다가 그가 늙은 사람이라 온화한 말로 내쫓기만 하였다. 또 볼기 맞는 형벌을 받아 보려고 일부러 높은 관원이 지나가는 앞길을 범하였더니 그 관원이 화를 내어 볼기를 치려고 하다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모습이 이상하므로 볼기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의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는데 장사지낼 묘터를 보니 자손 중에 반드시 두 사람의 정승이 나올 터이기는 하지만 막내아들에게는 불길하다는 터였는데, 막내아들이란 바로 이지함 그였다. 그러나 이지함은 스스로 그 불길한 것을 떠맡겠다고 하였는데, 뒤에 그의 조카 이산해는 정승이 되었고, 이산보는 벼슬이 1품이었지만 그의 아들은 현달하지 못하였다. 포천현감이 되어 다갈색 무명 베옷에다 짚신을 신고 부임 하니 딸린 관속들이 음식을 차려 올렸는데, 이지함이 눈여겨 자세히 보고는 수저를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이 뜰에 꿇어앉아 아뢰었다. "고을에 토산물이 없어 차린 음식에 특별한 것이 없었으니 다시 차려 올리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진수성찬을 차렸지만 이지함은 또 앞서와 같이 말할 뿐이었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이 겁을 내어 벌벌 떨면서 죄주기를 바라므로 이지함이 말했다. "우리 나라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고 고달픈 것은 모두 먹고 마시는데 절제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차릴 때에 소반 사용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오곡을 섞어서 지은 밥 한 그릇과 나물을 넣어 끓인 국 한 그릇을 갈모나 갑에 담아서 올리라" 이튿날 포천 고을 안의 품관이 인사하러 찾아오자 말린 나물로 죽을 쑤게 하여 그 죽을 들도록 권하였다. 품관들은 갓을 나직이 내려 숟가락을 들고서 조금 먹다가 조금 토하곤 하였는데 이지함은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으며 만류하였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집안 살림이 너무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내당에 앉았노라니 부인이 말하였다.
"남들은 모두 당신을 비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어찌 저를 위해서는 조금도 시험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곧 나비를 만들어 낼 터이니 구경하겠소?" "지금은 깊은 겨울인데 어찌 나비가 있단 말입니까. 당신 말씀이 너무나 허망할 뿐입니다" "구경만 하시오"
이지함이 곧장 옷을 꿰매는 재료며 용기를 담아 둔 데로 가서 여러 가지 색깔의 재단하고 남은 비단과 명주 조각을 가져다 손에 쥐고 무어라고 중얼중얼 주문은 외우고는 조금 있다가 공중으로 던져서 흩으니 나비가 분분하게 방 안에 가득하고 오색이 찬란한데, 각기 재단하고 남은 본바탕의 색깔을 따라 나비가 되어 오락가락 날며 춤을 추는데 현란스러움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부인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자, 이지함이 다시 공중을 향하여 손바닥을 펴고 주문을 외웠다. 나비가 모두 즉각 손바닥으로 도로 모였는데 조금 있다가 쥐었던 손바닥을 펴니 비단과 명주 조각이 그전처럼 있었다.
"지금 식량이 떨어져 밥을 지을 수 없는데 어찌 신기한 술수를 부려 이렇게 급박한 형편을 구제하지 않으십니까?" "그쯤이야 어려울 것이 없지요"
이지함이 즉시 계집종에게 놋그릇 한 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 그릇을 가지고 경기 감영의 다리 앞에 가면 한 노파가 백전을 주며 사려고 할 것이니 팔아 오너라"
계집종이 명을 받고 갔더니 과연 그릇을 사려는 사람이 있었고 모두 가르쳐준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릇을 팔고 값을 받아 오니 또 명하였다.
"네가 이 돈을 가지고 서소문 밖의 저자 가에 가면 대나무를 결어 만든 삿갓을 쓴 사람이 급히 수저를 팔려고 할 터이니 사가지고 오너라"
계집종이 또 가서 보니 과연 말한 그대로였으므로 수저를 사다가 바쳤는데 은으로 만든 수저였다.
"네가 이 수저를 가지고 경기 감영 앞으로 가면 어느 하인이 금방 은수저를 잃어버리고 같은 색깔의 은수저를 구하려고 할 터이니 이것을 보이면 열 다섯 냥의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팔아 오너라"
계집종이 가보니 모두가 가르쳐준 그대로이므로 열다섯 냥을 받아다 바쳤다. 이지함이 다시 한 냥의 돈을 주면서 말했다.
"그릇을 샀던 노파가 처음에는 그릇을 잃어버려 그것을 대신하려고 샀다가 이제는 그 그릇을 찾게 되어 샀던 자에게 도로 물리려고 할 것이니 도로 물려주고 오너라"
계집종이 또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므로 그릇을 도로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지함이 그 남은 돈과 그릇을 부인에게 주어 아침, 저녁의 끼니를 잇게 하였다. 부인이 더 많은 양을 청하였더니 이지함이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재물이 많은 자에게는 반드시 재앙이 따르게 마련이니 더 보탤 필요가 없소"
그 뒤에 그가 아산현감이 되었는데, 어느 늙은 아전이 죄를 범하였다.
"네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다"
이지함이 나무라며 그의 갓을 벗기고 센 머리를 땋아 애들 머리처럼 만들게 하고 벼루를 들고 책상 앞에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 늙은 아전이 원한을 품고 있다가 몰래 지네 즙을 가져다 술에 타서 올린 것을 이지함이 마시고 죽었는데, 나이 60세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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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지음
망한 나라의 음악, 혹은 나라를 멸망시킬만큼 음탕한 음악.
위나라의 영공이 진나라에 가는 도중 복수근방에서 참으로 심묘한 음악 소리를 들었다. 영공은 그에 심취하여 거느리고 있던 음악사에게 그 가락을 베끼도록 분부하였다. 이윽고 진나라에 당도하니 영공은 그 음악사에게 일러 진나라 평공 앞에서 그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런데 진나라에는 사광이라고 하는 탁월한 음악사가 있어 음악으로써 학을 춤추게 하고 구름을 부른다는 명인, 그래 평공은 곧 사광을 불러다가 같이 듣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광은 음악이 연주되자
"잠깐 기다려줍쇼! 그건 망국지음이올시다."
하고 음악사의 연주를 만류하였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하는 영공과 평공에게 그 내력을 들려 주었다.
"옛날에 은나라 주왕을 섬기는 사연이라고 하는 유명한 음악사가 있었습니다. 사연은 주왕을 위해 음탕한 악곡들을 지어 올렸거니와 주왕은 밤낮으로 그 악곡들에 홀려서 지내셨읍죠. 주왕은 그렇듯이 악독한 정치를 하다가 멸망하자, 사연은 악기를 안고 동쪽의 복수로 가서 투신자살 했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언저리에선 그 곡조가 들려오고 있다더니만..."
영공도 평공도 소름이 끼쳐 다시는 그 음악을 들을 리 없었다. '한비자'의 십과편에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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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썩어 버린 군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대학로에 머리 짧은 사내 하나가 리어카를 밀고 군밤과 땅콩엿을 팔았다. 그러던 하루 여대생 둘이 걸어가는 걸 보았다. 한 여대생은 울며 가고 있었고, 한 여대생은 우는 여대생을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우는 여학생은 막무가내였다. 군밤장수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깜박였다.
"얘, 울지 말고 우리 군밤이나 사 먹자."
잠시 군밤장수 앞에 멈춘 여대생 중 하나가 천 원을 내고 군밤장수에게 군밤을 달라고 했을 때, 울던 여학생이 막 뛰어가 마침 오는 버스를 타고 가 버렸다. 군밤을 사 먹으려던 여학생이 멍청히 서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실례지만 저 여학생이 무슨 일로 그렇게......"
머리가 짧은 군밤장수는 기왕 군밤 먹을 사람이 갔으니까 식은 군밤보다 금방 구운 군밤이 맛있다며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물었다.
"아르바이트로 겨우겨우 공부를 해왔는데 그만 추가등록기간을 놓쳤어요. 그래서 휴학계를 내고 오던 길이었어요. 하긴 재추가등록기간이 있지만 하루밖에 기일이 안 남았거든요."
군밤장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 학생 이름이 뭐요?" "아저씨가 왜요?" "그 학생이랑 데이트나 한 번 해 볼까 합니다." "S대 국문과 2학년 정보덕화예요." "...... 이름이?" "아빠, 엄마가 불자라서 스님에게 받은 법명이래요." "아, 그럼 법명으로 호적엘 옮겼군요."
여학생이 머리가 짧은 군밤장수의 위아래를 쓸어보고는 이름을 말해 주었다. 길거리에서 군밤장수를 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는 생각에서였는지 학교와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 이튿날이 되었다. 대학로에는 머리 짧은 군밤장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일년 후 S대 불교학생회로 새로운 법사가 왔다. 법사는 마른 듯한, 그러나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청회 여대생 중 하나가 스님을 뚫어져라 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기어코 여대생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법회는 끝났다. 학교 주변에서 새로운 법사스님을 위한 환영회의 뒷풀이까지 끝나고, 스님이 막 전철을 타고 절로 돌아가려는데 낮에 눈물을 흘리던 여학생이 스님을 불러 세웠다.
"스님, 눈이 내려요. 작년 그때 친구가 사 준 군밤을 먹지 못했어요. 고마우신 스님 때문에 군밤을 고이 간직하려 했는데 군밤이 딱딱해지고, 나중에 그만 썩어 버리더라고요. 스님, 나가서 군밤 사 드릴께요."
여학생이 스님의 팔짱을 끼었다. 주위에 열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작년 그때 군밤장수는 바로 만행중이던 스님이었고, 그 스님은 리어카와 보시로 받아 모아 두었던 통장의 돈을 딱한 여학생의 등록금으로 주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죠, 뭐. 그런데 썩은 군밤은 아니겠죠?"
대학로에는 밤송이 같은 눈발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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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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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1장 제12대 인종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
야사는 어김없이 대비 문정왕후(1501-1565)윤씨의 인종독살설을 전하고 있다. 야사가 전하는 내용은 이렇다. "언제 우리 모자를 죽일 거냐?"고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띄면서 맞아주더니 다과를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맛있게 다과를 먹었는데, 그 후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인종이 죽은 후에는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재위:1545-1546)이 즉위하였고, 이어 곧바로 궁중 내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축출되고 죽어갔다. 그 죽어간 세력 중에는 인종의 친척뿐만 아니라 사회의 희생자인 사림파도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 사대부들이 인종 독살설을 널리 믿게 되는 구실이 되었다. 인종 독살설은 이렇듯 인종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고 죽어간 세력들이 제기한 의혹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문정왕후가 조선의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무시하며 불교를 숭상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명종때 편찬된 <인종실록>은 물론 인종 독살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인종실록>은 인종의 사인을 중종의 장례때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종실록>의 기록을 세밀히 검토해보면 이 기록도 인종 독살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인종은 정말 독살되었을까? 그 죽음의 상황에 접근해 보자.
페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인종의 아버지 중종은 맏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왕이 될 수 없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었고 성종의 맏아들은 폐주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유일한 임금이었다. 탁월한 시인이었던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거부했다. 그는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기생들의 유원지로 삼음으로써, 조선에서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던 공자마저 무시했다. 성균관에 모셨던 공자 이하 모든 선현들의 위패는 고산암으로 내쳐졌다가 다시 음악을 맡아보는 관청인 장악원에 방치되었다. 이렇듯 사대부들리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공자의 위패를 방치하고 제사까지 페지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의 지배이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아랑곳하지않고 국립 관료 양성소인 태학의 선비들을 쫓아내고 무당을 불러모아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만약 연산군이 자신의 쾌락과 유흥을 위해석가 아니라 성리학에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런 행위를 했다면 그는 오늘날 새로운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조의 이념과 가치 체계를 우숩게 여겼을 뿐,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이념이나 가치 체계를 수립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연산군이 성균관과 태학을 폐하자 사대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선은 임금 개인의 나라가 아니라 전체 사대부들의 나라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결국 사대부둘은 1506년 쿠데타를 일으며 연산군을 쫓아낸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신하들이 임금을 끌어내린 이 사건은, 중종의 이름을 따 '중종반정'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중종은 반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정 달일 반정군이 사저을 에워싸자 진성대군은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해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부인 신씨의 만류로 하인을 시켜 집 주변을 살펴보니 말 머리가 집 밖으로 향해 있어, 자신을 죽이려는 군사가 아님을 알고 자살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을 에워싼 군사가 자신을 죽이려는 연산군의 군사인지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반정군인지도 몰랐던 진성대군이 반정 초에 힘을 가질 수 없음은 분명했다. 즉위 초에 중종이 어떤 처지였는지는 부인 신씨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종의 장인은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이었는데, 그는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다. 즉 연산군의 부인 신씨가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결정한 반정세력에게 신수근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반정세력의 핵심 인물인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소중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곧 연산군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진성대군을 선택하겠는가 하는 물음이었고, 동시에 누이를 포기하고 딸을 선택하라는 권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연산군을 선택했다.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신수근은 반정군의 제의를 거부해, 결국 반정 당일 반정세력에게 처형되고 만다. 이렇게 되니 중종의 부인 신씨가 문제가 되었다. 반정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이 추살한 인물의 딸을 왕비로 받들 수 없었다. 중종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공신들이 신씨 폐출을 주청하자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고 주저했으나 이들은 강경했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종사의 대사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빨리 결단하십시오." 권력과 사랑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중종은 권력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신씨는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정 7일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숙의로 있던 윤여필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니, 그녀가 바로 장경왕후 윤씨였다. 윤씨는 중종 10년인 1515년 아들을 낳았지만 산후조리를 잘못해 7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낳은 아들이 인종이다. 장경왕후 윤씨가 죽은 지 2년이 지나 새로운 왕비 책봉 문제가 대두되면서 조정은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가 새왕비를 책봉하지 말고 반정 직후 사저로 쫓겨난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먼저 사림파인 순창 군수 김정과 담양 부사 박상이 중종의 구언을 이용해 문제의 상소를 올렸다. "원자가 강보 속에 있는데 친아들 복성군이 있는 숙의 박씨같은 후궁을 왕비로 책봉하면 원자의 처지가 어려워질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언사는 명분과 의리에 목숨을 거는 사림파답게 거침이 없었다.
"신씨를 폐한 것은 무슨 명분이 있습니까? 반정 때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신수근을 죽이고 나서 훗날 환난이 미칠 것을 두려워해 보전책으로 폐비시킨 것이니, 이 일은 본래 무고하고 또 명분도 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반정공신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비를 페위시켰다는 주장이었다. 이때는 반정공신들이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이런 상소를 올릴 수 있었지만, 이는 반정의 정당성 자체를 부인하는 발언이었다. 상소 내용에 놀란 중종은 파문을 우려해 상소문을 승정원에 두어 공론화시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반정이념 자체를 부인하는 엄청난 내용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사실 신씨가 복위되어도 문제였다. 대사간 이행이 대사헌 권민수에게 물은 내용은 이런 문제를 말해준다.
"만약 신씨를 왕위로 세웠다가 왕자가 태어나 가례의 순서를 따지게 되면 전하께서 잠저에 계실 때 혼인한 신씨가 먼저가 되니 이 경우 원자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씨는 중종과 연산군 5년인 1499년에 가례를 올렸고,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2년인 1507년에 가례를 올렸으니 신씨가 8년 먼저였다. 만약 신씨가 복위된 후 아들을 낳으면 신씨의 아들이 원자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신씨 복위를 주장한 김정과 박상의 상소는 사론으로 몰렸고, 중종도 비망기를 내려 이들을 질책했다. 반정세력은 이들의 상소를 옥사로 확대시키려 했으나 사림파인 정언 조광조가 무마하는 바람에 귀양으로 일단락되었다. 사림파의 신씨 복위 주장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고, 중종 재위12년인 1517년 윤지임의 딸이 계비로 간택되었다. 당시 중종의 나이 서른살이었으나 윤씨는 이팔청춘을 갓 지난 열일곱 살이었다. 이처럼 앳된 나이에 조선의 국모가 된 문정왕후 윤씨가 훗날 조선 사대부들의 표적이 될 줄을 가례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윤씨는 심지어 사대부들로부터 '여왕'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이보다 더한 소문, 즉 인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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