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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02 호
단기 4340. 12. 12 (음력 11. 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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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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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사정으로 인해 약 한 달간 독서편지발행을 못했습니다. 좋은 말씀과 격려에 감사함과 죄송함을 함께 전합니다. 저역시도 일기처럼 매일 발행하던 독서편지를 접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습니다. 편안한 독서가 되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2007.12.12 바람의 종 드림. --------------------------------------------------------------------------
제2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 공모개요 - 서울디지털대학교는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신인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제2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을 공모합니다. - 한국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참신한 상상력을 기다리며, 독자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접수기간 : 2007년 12월 1일 ~ 2008년 1월 30일
● 공모대상 :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전 국민
● 공모부문 - 시: 5편이상
● 접수처 - 주소: 서울 강남구 신사동 634-10윤당빌딩 2층 문예창작부 사이버문학상 담당자 (우편번호 135-895) - 이메일 : jjung@sdu.ac.kr
● 입상작 발표 - 2008년 2월 20일 서울디지털대학교 홈페이지
● 시상내역 - 당선작(1편) : 상금 5백만원+ 계간'시작'에 작품게재 등단시인으로 인정 - 가 작(1편) : 상금 2백만원 +계간'시작'에 작품게재 등단시인 인정 여부 작품 심사 후 결정
● 유의사항 - 이미 발표된 작품이나 표절로 밝혀진 작품은 입상 결정 후에도 취소됩니다. - 원고 첫 장에 주소, 성명(필명일 때는 본명을 필히 기입), 연락처(전화번호)등을 반드시 써야합니다. - 원고가 든 봉투에도 "사이버문학상 응모작"이라고 써주시기 바랍니다. - 이메일 역시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원고는 주소와 이메일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하여 보내주십시오. -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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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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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품위있고 정중하게 받는 것은 보답할 것이없더라도 보답하는 셈이 된다. / 리 헌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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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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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선과 악의 갈림길
주자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사람이란 하늘과 땅의 뜻을 받고 태어나므로 아무 느낌도 없을 때는 순수하고 깨끗하다. 온갖 원리를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본바탕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이 본바탕이 있게 되면 곧 형상이 생겨나고, 형상이 있게 되면 곧 마음이 생겨나 사물에 대한 느낌이 없을 수 없다. 사물에 감동되면 본능의 욕구가 나오고, 여기에서 선과 악이 갈리게 된다. 본능의 욕구가 곧 정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간략하지만, 이치만은 인간의 타고난 성품에 관한 것을 다 갖추어 모든 뜻을 남김없이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른바 정이란 '희 노 애 구 오 욕'이라는 것으로 "중용"의 '희 노 애 락'과 동일한 정의이다. 이미 마음이 있으면 사물에 대한 느낌이 없을 수 없으므로 정이 우주의 본체와 그 현상을 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물에 감동되면 선악이 여기서 나뉘므로, 정에 선악이 다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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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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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3장 사회 및 역사 철학
역사는 진보하는가 - 김창호
인간의 의식과 의지를 매개로 해서만 성립하는 역사에도 법칙이 있는 것인가? 근대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어 왔다. 앞으로도 역사는 진보해 나갈 것인가? 혹은 더 이상의 진보는 있을 수 없는가?
역사는 무한히 진보하는 것인가? 역사는 멸망하지 않고 무한히 발전하는 것인가? 역사는 과연 종말이 없을까? 있다면 언제일까? 이러한 의문은 늘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 수준과 생활 양식 자체가 바뀌고,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 따른 결과임을 인식하고, 또 사회의 변화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누구나 의문의 여지 없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과거의 역사적 기록과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과거에 비해 얼마나 발전된 사회인가를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상식에 비추어 본다면 역사가 멸망할지 모른다고 의심한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문제 제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역사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접해 볼 수 있었다.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전형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종교적인, 예언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종말론이 센세이셔널하게 유포되었던 것은, 몇 년 전에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휴거'가 도래했다는 일부 사이비 기독교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휴거를 서전하고 다녔던 목사는 구속된 이후 휴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또 인류 역사에서 나타난 비극적인 사건들, 가령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출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예언했던, 과학자이자 미래학자인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세계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도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말론이 종교나 예언서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역사 이론에서도 종말론은 나타난다. 종교에서의 종말론이 사회의 역동성이 감소되고 정체될 때 나타나듯이, 역사 이론에서의 종말론도 세기말적 시기에 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독일의 사학자 슈펭글러(O. Spengler)가 이야기한 '서구의 몰락'이다. 그는 각 문화를 관찰한 결과 모든 문화는 나름의 유기체적 순환 과정을 거친다는 유기체론적 역사관에 입각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서구의 역사 과정을 지켜보면서 서구 사회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통상 '종말론'은 역사의 종말을 가정하는 비관적인 이론 및 종교로 이해한다. 그러나 종말론은 단순히 비관적인 내용만을 말하지 않는다. 원래 기독교에서의 종말은 천년 왕국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이상 변화되어야 할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종말은 인류의 완성과 실현으로서 어느 시기가 되면 천년 왕국이 실현된다는 매우 난관주의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최근 역사 이론에서의 종말론은 일본인 사학자 후쿠야마가 쓴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나타났다. 이 책은 이념사적 발전 과정에서 볼 때 자본주의, 자유주의는 더 이상 새로운 이념으로 발전해 나갈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사회가 현실에서 다소 불충분할지 모르지만 이념적으로 역사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도 '종말'은 인류의 파멸이 아니라 역사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낙관적 관점이든 비관적 관점이든 종말론적 역사 이론은 더 이상 역사가 발전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는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낙관적 관점에서는 역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역사의 진보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비관적 관점에서는 인류가 파멸되기 때문에 역사의 진보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 두 가지 종말론은 역사의 더 이상의 진보를 부정한다.
필연성으로서 역사의 진보
그렇다면 앞으로 역사의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인간 이성에 의해 역사가 보다 완성된 사회로, 보다 진보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들은 오히려 이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에 의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은 '근대성'에 한계 지워진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 현재는 포스트모던의 시기이기 때문에 근대성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권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면 이성적 주체에 의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근대적인 사고는 역사에 일정한 목표가 있다고 보는 목적론이며, 이러한 목적론은 인간을 특정한 목적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으므로 비판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념은 근대 이후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왔으며, 지금도 그러한 신념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단지 어떻게 어디를 향해 진보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중세의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세계의 창조자로서 인격신의 섭리가 역사에 작용한다고 보고 세계를 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역사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지는데, 거기에서는 인격신으로서 창조자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같은 목적론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역사 철학의 주요한 주제는 이와 같은 창조신을 목적으로 파악하는 목적론을 배제하면서 어떻게 역사의 진보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되었다. 따라서 근대 이후 역사 이론가들은 신의 섭리 대신 인간 이성에 의해 이성적 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역사의 진보를 설명하려 하였다. 근대 사회 계약론자들은 이성적 주체의 계약에 의해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 이성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헤겔(G. W.F. Hegel)은 인간 이성에 의해 자유가 확장되는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려 하였다. 특히 그는 근대 사회에서 개인의 이기심과 이성적 사회, 개인의 주관적 욕망(개인의 자유)과 사회의 보편적 목적(이성적 국가)이 모순을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마르크스는 헤겔이 지적한 근대 사회의 모순, 즉 경제적 토대와 상부 구조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근대 시민 사회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고, 근대 사회와 구별되는 새로운 이성적 사회, 즉 사회주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 필연적 법칙이 있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역사에 적용되는 법칙은 자연 과학의 법칙과 같은 성격의 것일까? 다르다면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른가? 역사에도 자연 법칙과 같은 필연적 법칙이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령 홉스(T. Hobbes)나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사회나 역사도 물질적 사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여 결국 그 당시에 발견된 기계적 자연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 사회와 역사는 인간의 의식과 의지를 매개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자연과 사회가 구별되는 것은, 자연이 무의식적 물질의 기계적 운동을 통해 변화한다면, 사회는 의식과 의지를 지닌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실천에 의해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과정에 자연의 법칙과 똑같은 기계적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에도 법칙이 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사회나 역사가 인간의 의지나 의식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나 의식이 변경할 수 없는 구조적 필연성이 있기 때문에 사회나 역사도 역시 법칙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때의 법칙은 자연 법칙과는 구별되는 구조적 필연성, 혹은 역사적 필연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 필연성을 옹호하는 이론을 '결정론'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필연성과 인간의 자유
역사에 필연적 법칙이 있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을 진보적 방향으로 실천하도록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매우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필연성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 계급에 의해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이와 같은 역사 법칙은 많은 국가에서 노동 계급들의 실천의 지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것이 꼭 진보적인 역사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역사적 필연성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게 되면 역사가 필연적 법칙에 의해 발전하는 만큼 인간은 아무런 실천을 할 필요가 없게 되며, 인간의 실천이 없는 역사의 발전이라는 모순적인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역사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 법칙만을 주장하게 되면, 역사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의지와 의식에 의한 선택의 자유는 존립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포퍼(K. Popper)와 같은 사람은 역사에 필연적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틀림없이 전체주의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역사가 필연적 법칙에 의해 발전한다는 역사주의(가령,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는 '닫힌 사회'를 옹호하는 전체주의 이론이라 비판한다. 포퍼는 사회나 역사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과 의지에 의한 선택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의식적 선택, 자율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열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역사주의가 역사에 일정한 목적이 있고 역사는 그 목적을 향해 발전한다는 형이상학적 목적론이 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역사 과정에는 일정한 목적론을 향한 법칙적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들의 자율적이고 다양한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자율적 선택을 강조하는 경향을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와 같은 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명분상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보면 자유주의는 역사가 진보하는 방향을 제시할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니다. 왜냐 하면 개인의 자율적 선택만을 강조할 때 개인들의 무정부적인 자유에 따른 혼돈이 야기될 뿐 사회 전체의 변화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를 '전체주의'라는 이름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결코 사회 변화를 지지하지 않게 된다.
역사에서 결정론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들
결정론과 자유주의의 대립은 오늘날의 역사 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이다. 역사에서 필연성과 인간의 자유는 역사를 설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필연성을 옹호하는 결정론과 인간의 자율적 선택을 강조하는 자유주의는 그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면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이 양자를 조화시켜 보려는 이론적 시도들이 제시되었다. 정화하게 말하면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고려하여 결정론을 보다 약하게 해석함과 아울러 사회의 다양한 요소, 그 중에서도 특히 문화적 요소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의지적, 의식적 요소를 역사 과정의 중요한 범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 따르면 특정한 요소로 전 역사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수 있다. 중세는 종교가 지배적인 요소였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적 요소가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미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물질적 과정이라는 필연성 또한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 과정에 문화적 범주를 끌어들여 결정론적 성격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이론들은 미래 사회에서는 오히려 문화적 요소가 보다 중요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역사 과정에서 결정론을 약화시키면서 다양성과 다원성을 도입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화적 요소를 일면적으로 강조할 경우 문화 결정론이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나아가 과연 문화가 역사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최근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면서 자본의 직접적인 경쟁이 전면에 등장하는 지금 문화적인 요소가 지배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맹목적 문화주의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 제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참고 문헌 김창호, '마르크스주의 역사적 유물론과 인간의 문제', 죽산, 1991. W.F.헤겔, '역사 철학 강의', '서문', 세계사상대전집 16, 대양서적, 1971. K.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중원문화, 1989. O.슈뱅글러, '서구의 몰락', 범우사, 1994. F.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The Free Press, 1992. S.폴라드, '진보란 무엇인가', 한마당, 1983. K.포퍼, '역사주의의 빈곤', 지학사, 1975. 이진우 엮음,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서광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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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동자
본뜻 : 키가 석 자 정도 되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 한 자는 약 30센티미터이다. 5 - 6세정도 되는 어린아이에 해당한다.
바뀐 뜻 : 철 모르는 어린아이나 혹은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그 정도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걸 모르다니! -그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지
다방구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놀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마당이나 운동장에서 땅따먹기, 비석치기(비사치기), 자치기 등을 하면서 놀았다.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방안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보다는 운동장에서 여럿이 하는 놀이들이 갈수록 절실해진다. 전날 하던 아이들 놀이 가운데 ‘다방구’라는 게 있다.
“어린 시절, 동네 공터에서 같은 또래의 어깨동무들과 어울려서 딱지치기, 다방구, 팽이치기, 구슬치기, 땅뺏기 등을 하며 놀던 추억이 아련하다.”(한국일보) “공기놀이에서도, 술래잡기에서도, 다방구에서도 서로 편을 갈라 아이들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놀이를 하고 ….”(류승호 〈파라독스의 문화〉)
다방구는 술래잡기 놀이의 한가지다. 나무나 전봇대 같은 기둥을 중심으로 술래가 찾아낸 사람(포로)이 손을 잡고 길게 줄지어 서 있으면 술래가 찾아내지 못한 사람이 술래 몰래 ‘다방구’라고 소리치면서 잡은 손을 손으로 끊는 놀이다. 이때 잡고 있던 손이 끊긴 다음 사람부터 풀려나게 되는데, 손이 아닌 기둥을 치면서 ‘다방구!’ 하고 소리치면 기둥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풀려나게 된다. ‘다방구’를 외치기 전에 술래가 모든 사람을 찾아내면 술래가 바뀌게 된다.
말이란 언중, 곧 사람들이 쓰지 않으면 소멸하게 된다. ‘다방구’라는 말의 어원은 좀더 짚어볼 필요가 있겠으나, 그 놀이 자체는 이어졌으면 한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우리와 저희
‘우리’라는 낱말은 ‘나’를 싸잡아 여러 사람을 뜻하는 대이름씨다. 거기 여러 사람에는 ‘듣는 사람’이 싸잡힐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다. 이런 대이름씨는 다른 겨레들이 두루 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의 쓰임새가 남다른 것은 매김씨로 쓰일 때다. 매김씨라도 우리 마을, 우리 회사, 우리 어머니, 우리 아기 … 이런 것이면 남다를 것이 없다. 외동도 서슴없이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 하고, 마침내 ‘우리 아내’ ‘우리 남편’에 이르면 이것이야말로 남다르다. 그래서 그건 잘못 쓴 것이고 틀린 말이라고 하는 사람까지 있다. 그러나 매김씨 ‘우리’는 ‘나’를 싸잡은 여러 사람을 뜻하지도 않고, 듣는 사람을 싸잡지도 않고, 다만 나와 대상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이 하나를 이루는 깊은 사이임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 뿌리 깊게 얽혀 살아온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삶에서 빚어진 남다른 쓰임새다.
이런 ‘우리’의 낮춤말이 ‘저희’다. 그런데 ‘저희’를 쓰려면 마음을 써야 한다. 나를 낮추면 저절로 나와 함께 싸잡힌 ‘우리’ 모두가 낮추어지기 때문이다. 일테면, ‘저희 회사’라고 하려면 우선 말하는 사람이 회사에서 가장 손윗사람이라야 한다. 게다가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보다 더 손윗사람이라야 한다. 그러니 ‘저희 회사’ 같은 말도 쓸 사람과 쓸 자리가 아주 적다. 요즘 배웠다는 이들이 더러 ‘저희 나라’라고 하는데,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이런 말은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도 쓸 자리가 없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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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1. 돌아오지 않은 장군(경포, 팽월, 난포)
1) 고독한 올빼미(경포)
형벌을 받고 왕이 될 관상
경포의 원래 성은 영씨였다. 젊을 때 어떤 사람이 그를 보더니, "당신은 형벌을 받고 나서 왕이 될 관상이오."라고 말했다. 그 뒤 그가 남의 죄에 연루되어 얼굴에 문신형(경형:경포라는 이름도 경형을 받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전에 어떤 사람이 내 관상을 보고 형벌을 받은 다음에 왕이 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구나."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웃을 뿐이었다. 경포는 판결을 받은 다음 다른 죄수들과 함께 여산으로 보내졌다. 그곳에는 수십만 명의 죄수가 와 있었는데, 경포는 그 중 쓸 만한 사람들과 사귀었다. 얼마 뒤 경포는 친한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쳐 양자강 유역에서 도적이 되었으며, 물론 경포는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후 진승이 반란을 일으키자, 경포도 군대를 일으켜 수천 명을 모았다. 그래서 진승이 패한 후에도, 경포는 진나라 군대를 계속 격파하였다. 경포는 때마침 항량이 군사룰 일으켜 양자강을 건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항량의 군대에 가담했다. 항량의 군대는 계속 북상하여 진나라를 쳤는데, 경포의 공적이 항상 으뜸이었다. 그 뒤 항량이 죽자 항우의 지휘 아래에 들어간 경포는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특히 경포의 군대는 용맹스러워 적은 수로 많은 병력을 깨뜨렸기 때문에 항우의 큰 신임을 받았다. 경포는 진나라 주력 부대였던 장한의 군대까지 격파했으며, 항우가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이 되자, 경포는 구강 자방의 제후로 임명되었다.
경포를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
그 뒤 제나라 왕 전영이 항우를 배반한 사건이 일어났다. 항우는 가장 신임하는 경포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으나, 경포는 부하에게 적은 수의 군사만 주어 보냈을 뿐이었다. 또 유방이 초나라의 팽성을 공격했을 때도 경포는 병을 핑계삼아 출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항우는 경포를 몹시 원망하면서 서울로 자주 올라오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경포는 점점 두려워져 가지 않았다. 항우는 마음 같아서는 경포를 토벌해 혼내고 싶었으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또 경포의 재주를 아껴 참고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계속 수세에 몰린 유방은 경포를 어떻게든 끌어들이기로 하고 수하를 보내 경포를 설득하기로 했다. 수하의 능란한 설득과 공작에 넘어간 경포는 드디어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 편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 뒤 경포는 항우의 오른팔 격인 주은을 설득해 항우를 배반하게 했으며, 전쟁에 나가 자주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천하 통일이 된 후 경포는 회남왕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잔치가 벌어졌는데, 유방이 수하를 가리키면서,
"수하는 쓸모없는 선비에 불과하지, 저런 친구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수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아직 경포 장군이 초나라에 있을 때, 그를 보병 5만, 기병 5천으로 공격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그 정도면 할 수 있었겠지." "폐하께서는 그 때 저를 보내셔서 전쟁을 안하고도 경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보병 5만, 기병 5천의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폐하께서는 신을 쓸모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이에 유방은 할 말이 없었다. "좋소, 그대의 말이 맞소." 그러면서 수하에게 벼슬을 주었다.
여자와 질투
한 고조 11년에 한신이 처형되자 경포는 불안해졌다. 또 그해 여름에는 팽월이 처형되어 그 시체가 소금에 절여져 그릇에 담긴 채 모든 제후들에게 보내졌다. 그 인육자반을 본 경포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는 차라리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경포에게는 아끼는 미희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미희가 몸이 아파 의원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편 비혁이라는 관리도 그 의원의 맞은편 집에 살고 있었는데 예전에 경포의 부하였던 관계로 미희와도 안면이 있었다. 하루는 비혁이 의원 집에 놀러가서 미희에게 선물도 바치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그 뒤 미희가 경포와 이야기 하던 중에 비혁이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칭찬했다. 그러자 경포가 놀라면서 물었다.
"아니, 언제 그 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가?" 미희는 아무 생각없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경포는 두 사람이 수상한 관계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비혁이 두려워해 몸이 아프다며 바깥 출입을 삼가자 경포는 더욱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비혁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 비혁은 도망쳤다. 도망친 비혁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경포를 반역죄로 죽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을 달려 장안에 들어가 유방에게 투서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빨리 그를 잡아들이십시오." 유방이 이 글을 읽고 소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소하는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경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마 무슨 원한 때문에 무고했을 게 틀림없으니, 우선 비혁을 잡아들여 조사하고 은밀히 사람을 경포에게 보내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한편 경포는 비혁이 투서한 사실을 알고 불안해하고 있는데, 또 사람이 은밀히 내려와 조사하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유방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소?" 그러자 등공이 대답하였다. "저의 식객들 중에 설공이라는 자가 있는데, 매우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방이 설공을 불러 물었다. 그러자 설공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경포는 한신, 팽월과 함께 용맹스런 장군이었습니다. 이제 한신과 팽월이 처형되자 자기도 머지 않아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경포가 상책을 들고 나오면 회남 땅은 한나라 땅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중책으로 나오면 승패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하책을 들고 나오면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주무실 수 있습니다." "그럼 경포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그는 하책을 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오?" 그러자 설공이 대답했다. "경포는 원래 여산의 도적떼였습니다. 지금 그는 왕이 되었지만, 모든 일이 자기 일신을 위함이었지 후세의 백성 만대를 위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도 하책을 쓸 것입니다." 한편 경포는 반란을 일으키며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 유방은 나이가 많아 싸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반드시 친정하지 않고 부하들을 내보낼 것이다. 나는 이제껏 한신과 팽월만을 두려워했는데, 그 두 사람 모두 죽었으니 두려울 게 없다."
그 당시 유방은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기는 경포의 토벌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태자를 내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자를 염려한 여후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경포는 천하의 맹장입니다. 그 자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폐하밖에 없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나라의 운명을 건 이 싸움에 친히 출정하시옵소서."
이에 유방은 하는 수 없이 출정에 나섰다. 경포는 과연 설공의 예측대로 하책을 썼다. 즉 크게 제나라, 한나라, 연나라까지 생각을 못하고 겨우 자기의 땅만 지키려 했던 것이다. 유방이 가서 경포의 군대를 보니, 그 배치가 항우의 전법과 똑같았다. 유방이 경포에게,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하고 물으니 경포는, "황제가 되고 싶소."하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도 경포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던 유방이었지만 그 말에는 크게 노하여 공격에 나섰고 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경포는 크게 패해 겨우 백여 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강남으로 달아났다. 유방도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유시를 맞아 부상을 당했다. 경포는 그 후 번양 지방으로 달아났으나, 한 농가에서 농민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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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34장. 생명의 소용돌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DNA라는 문자가 어쩐지 중요하다는 막연한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디옥시리핵산(deoxyribonucleicacid)의 머리글자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과학자를 제외하고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지 이 물질의 중요성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것의 분자구조나 생물학적 기능에 관한 지식은 생명의 비밀로 알려져 왔다.
1962년 제임스 와트슨, 프란시스 크릭, 모오리스 윌킨스 이상 3인은 DNA의 구조 해명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나누어 수상했다. 와트슨은 생물학자이고 크릭은 물리학자 그리고 윌킨스는X선 결정학자였다. 그들이 연구했던 자세한 내용은 유기화학이나 생화학의 모든 교과서에 쓰여 있으나 한 사람의 화학자가 우연하게 휘말려 들어간 사건이 노벨상을 받게 한 비약적 발전의 열쇠가 되었다고 설명한 교과서는 단 한 권도 없다, 와트슨의 흥미로운 자전적 저서 '2중의 나선' 중에서 자신의 세렌디피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의 타이틀은 생명의 중요한 분자구조를 그래픽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임스 와트슨은 1950년, 그의 나이 22세 때에 인디아나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박사연구원으로서 유럽으로 가고 그 2년 후에는 케임브리지대학의 로렌스 브래그 경의 연구소에 있었다. 브래그는 1915년 X선을 사용해서 결정의 구조를 알아내어 노밸상을 수상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와트슨은 총명하면서도 약간 별난 물리학자 프란시스 크릭과의 공동연구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DNA의 신비를 해명하여 노벨상을 수상하자는 솔직한 의도하에 서로 다른 분야에서 얻은 지식을 갖다 모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라이너스 폴링이 단백질이 알파 헤릭스구조(거대분자에 있어서 원자가 시계방향의 나선형으로 배치된)를 발견했을 떄의 연구법을 참고로 했다. 폴링은 1954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그의 연구법은 거의 자기 자신이 발전시킨 구조 화학의 법칙을 기초로 한 것으로, 이들 법칙을 보면, 유치원 어린이용 장난감과 같은 피상적인 단백질의 모형을 적용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폴링의 모형은 결정의 X선 사진을 기본으로 하여 크기나 형태에 맞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DNA는 단백질과 닮은 거대분자라고 알려져 있었으며, 그 X선 자료도 나선 또는 소용돌이 구조와 맞지 않는 것을 아니었다. 와트슨과 크릭이 입수할 수 있었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X선 자료는 런던대학교 부설인 킹스대학의 모리스 윌킨스 연구실에서 나온 것으로써 그것은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윌킨스 연구실에서 나온 것으로써 그것은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윌킨스가 공동 연구한 것이었다. 단백질은 다수의 아미노산 단위(그리스어로 '단일 부분'을 의미하는 모노머)가 서로 결합하여 거대분자(그리스어로 '다수부분'을 의미하는 폴리머)를 형상히고 있다. 1952년까지 DNA는 한 종류 이상의 모노머로 된 폴리머라고 알고 있었다. 되풀이 사용되고 있는 모노머 단위는 디오기리보오스(당의 일종)와 인산 및 4종의 유기염기(구아닌, 시토신, 아데닌, 티민)였다. 와트슨과 크릭이 DNA의 퍼즐을 푸는 데 도움이 된 단서 중의 하나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콜롬비아대학 교수 어빈 샤르가프에 의하여 얻게 되었다. 샤르가프는 여러 생멸의 원천에서 얻은 DNA의 연구에서 구아닌과 시토신 사이와 아데닌과 티민 사이는 언제나 1대 1의 관계가 있다고 보고했다. 바구어 말하면, 구아닌은 언제나 시토신과 짝이 되어 있으며 아데닌은 언제나 티민과 짝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와트슨과 크릭은 디옥시리보오스와 인산의 단위를 바깥쪽으로 하여 두 개의 나선, 즉 소용돌이로 되어있으며, 이 이중나선의 안쪽에 있는 유기 염기에 의해서 서로 조합되어 있는 DNA의 모형을 고안했다. 그들은 케임브리지대학의 카벤디쉬연구소의 공작실에서 만든 각 구성 성분 단위의 모형을 조립할 것을 계획했다. 그리고 DNA결정의 X선 사진으로부터 얻은 치수를 참고로 하였다. 기계공작공이 금속제로 단위 모형을 만들고 있는 동안에 와트슨은 염기를 그려서 열심히 판지의 모형을 만들었다. 그는 점점 폴리머분자의 바깥쪽 나선에 규칙적인 반복 구성 부분으로 알려진 염기의 비슷한 것끼리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이 됨으로써(즉, 구아닌과 구아닌, 시토신과 시토신이라는 상태로) 두 개의 나선을 서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수소결합이라는 것은 원자간의 화학결합의 일종이다. DNA에 존재하는 염기에서와 같이 분자를 서로 묶어 놓을 수 있다고 알려진 물의 분자도 수소결합에 의해서 무리를 이루어 맞붙어 있다. 따라서 물분자의 실제 크기는 H2O의 1분자보다도 훨씬 크고 휘발성은 훨씬 낮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지구상에 액체인 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와트슨은 DNA 염기가 다른 여러 가지 토터머(tautomer) 형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결합을 이룰 수 있는 수소원자가 염기분자에 반드시 한 개의 장소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와트슨은 염기의 수소원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당시의 책으로부터 구조를 취해 사용하였고, 그 염기를 같은 종류의 조합끼리 수소결합한 나선의 일부에 붙여보았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모형은 유전자의 복제과정에 관한 지식을 설명해 줄 것 같이 생각되었으므로 X선의 자료에서 요구되는 분자의 치수와 그리고 구아닌과 시토신, 아데닌과 티민이 짝이 되어있다는 샤르가프의 법익을 만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와트슨의 마음에 들었다. 제출된 구조에 어느 정도 불만은 있었으나 라이너스 폴링이나 다른 사람을 이기고 노벨상을 수상해야 한다는 긴급성 때문에 와트슨은 "훌륭한 DNA의 구조를 고안했다"라는 편지를 동료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발송한지 1시간도 채 못되어서 와트슨은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결정학자이기도 한 테리 더너휴를 만나 그의 방에서 이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너휴는 당시 우연하게도 와트슨과 크릭과 같은 사무실을 사용했었다. 그는 곧 와트슨이 생각한 구조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와트슨이 나선형의 사슬을 붙이기 위해 수소결합시킨 염기의 토터머 형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와트슨은 자신이 참고로 한 책 이외에도 자기가 사용했던 토터머 형체로 염기를 그린 책은 얼마든지 있다고 반론했다. 그러나 도너휴는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도 거의 없이, 잘못된 토터머 형체를 쓴 책이 몇 년 동안 출판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너휴는 폴링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DNA염기와 유사한 분자의 X선에 의한 결정구조 연구를 해오고 있었으므로, 그가 와트슨에게 잘못된 토터머 형체를 사용했다는 그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와트슨은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서 도너휴가 옳다고 주장하는 별도의 토터머형을 새롭게 판지 모형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이 모형으로는 아무리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크릭에서 도너휴의 의견에 따라서 수정한 구조를 보이자 크릭은 그것이 X선에 의한 치수에도 잘 맞지 않으며 샤르가프 법칙에도 어긋날 것이라고 말했다. 와트슨은 그날 밤 매우 의기소침해서 돌아왔으며,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자기 책상으로 갔다. 그 후에 있었던 것을 그는 '이중나선'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튿날 아침,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방에 도착한 나는 책상 위에 서류를 재빨리 치우고 염기의 한 쌍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넓게 수소결합으로 조합된 평탄한 장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같은 염기끼리가 서로 짝이 된다는 선입관에 구애받고 있었으나 그렇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음이 너무나도 명백했다. 제리(도너휴)가 들어왔을 때 잠시 고개를 들었으나 프란시스(크릭)가 아니었으므로 그대로 염기를 여기저기로 움직여서 다른 여러 가지로 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험해 보았다. 갑자기 아데닌과 티민(A-T)의 쌍이 두 개의 수소결합으로 조합된 형태가 구아닌과 시토신(G-C)의 쌍이 적어도 두 개의 수소결합으로 조합된 형태와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든 수소결합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결합된 듯이 보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염기 한 쌍의 모양을 만드는 데 아무런 속임수도 필요하지 않았다. 급히 제리를 불러들여 나의 새로운 염기 구조에 이번에도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잘못된 점이 없다고 대답했을 때 이번에야말로 수수께끼가 풀린 것을 알고 나는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그 후 "우리의 아이디어는 심미적이고 우아했으며 ... 이와 같이 아름다운 구조를 본 적이 없다"고 부언했다. 와트슨이 조립한 염기 한 쌍의 구조는 그림 34-1을 참고바란다. 와트슨과 크릭은「Nature」지에 짤막한 논문을 투고했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으며 몹시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디옥시리보오스핵산(DNA)의 염의 구조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 구조는 적지 않은 생물학적 흥미를 부추기는 참신한 특색을 갖추고 있다." 이 두 번쨰의 문장은 활자로 된 조심스러운 표현으로서는 최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와트슨은 자기 저서의 끝머리에 "화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제리(도너휴)가 프란시스(크릭), 피터(폴링), 그리고 나와 같은 방이었기 때문에 생긴 뜻하지 않은 이익이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했다. 만일에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같은 것끼리의 염기 한 쌍을 가지고 아무 쓸데없는 노력만 계속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술회했다. 그래서 DNA의 사연에 얽힌 세렌디피티는 '제리가 프란시스와 피터 그리고 나와 같은 방이었기 때문에 생긴 뜻하지 않은 이익' 이었던 것이다. 노벨상을 획득한 발견에 얽힌 세렌디피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또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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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관찰사를 훈계한 뒤 군수 자리를 버리고 떠난 조언형
조언형(1469-152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형지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낭관을 역임하였다. 조언형의 성품은 악한 것을 미워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여 적당히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행동을 같이할 수 없어 이조 낭관을 거처 집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좌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다. 강혼과는 어려서부터 가까운 사이였는데, 자라서도 우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강혼이 연산군 때에 하는 짓을 보고는 분하게 여기며 미워하기를 마지않았다. 중종반정 초기에 단천군수로 있었는데, 강혼이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서 단천 고을에 순시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조언형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행장을 꾸리게 하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여 탁주 한 통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관찰사가 곧 오실 터인데 나가서 정중히 맞이하는 것이 예의에 걸맞습니다" 아전이 와서 아뢰었으나 조언형은 병을 핑계 대며 나가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조언형이 감색의 직령에다 분투를 끌고 종 하나를 시켜 술통을 메게 하고, 바로 상방으로 나아갔다. "혼지(강혼의 자) 어디 있는가?" 강혼이 그 목소리를 듣고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하였다. "나 여기 있네" "날씨가 차가운데 자네 한잔 마시려나?" 조언형이 자리에 앉아 안부도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는데 안주가 없었다. 강혼 역시 제 손으로 술을 부어 마셨다. 세 순배가 지났을 때에 조언형이 말문을 열었다.
"지난날 자네가 한 짓은 개나 돼지만도 못하니 자네가 남긴 것을 누가 먹겠나. 자네가 젊었을 적에는 총명하고 민첩하여 사귈 만하다고 여겼는데 어찌 조그마한 재주를 가지고 보잘것없이 처신하기가 이렇게 극도에 이른단 말인가.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겠기에 내가편지를 보내어 절교하려 하다가 한번 만나 나무라려고 하던 터였는데, 이제 이미 서로 만나 보았으니 나는 내일 당장 떠날 것이네"
다시 한잔 더 마시자고 하며 또 석 잔을 잇달아 주니 강혼은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튿날 조언형이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뒤에 벼슬이 판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이 바로 남명 조식이다. 조식의 의기가 격양하는 기풍은 대체로 물려받은 데가 있다고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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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슬상화
금은 거문고요, 슬은 큰 거문고니 그 두 가지 현악기를 함께 탐으로써 이루어지는 즐거운 분위기를 단란한 부부 사이에다 비유한 말이다. 시경의 소아 상체편과 주남 관휴편에 나오는 싯귀인 바 상체편의 경우에는 야릇한 곡절이 있다. 주 나라 무왕의 아우 주공단은 형인 관숙손과 아우인 체숙도가 주 나라에 반역하다 죽은 것을 애석해하며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잔치하며 즐기는 양을 노래하였다 한다. 혹은 주나라의 여왕 때 종족이 불화했기 때문에 소목공이 일동을 모아 놓고 지었다고도 하며 혹은 그 자리에서 주공이 지었다고도 한다. 소마란 주나라의 조정에서 잔치할 때 쓰이던 노래인 바 거기에는 상체편 따위처럼 순진한 궁정가가 있는 한편 연애나 군역의 애환을 노래한 민가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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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지범개치(가질 지, 범할 범, 열 개, 어긋날 치)는 핑계고
옛날 청신거사(청할 청, 믿을 신, 살 거, 선비 사)가 있었다. 품성이 인현(어질 인, 어질 현)하고 오계(다섯 오, 경계할 계)를 수지(받을 수, 가질 지)하여 청정자거(맑을 청, 맑을 정, 스스로 자, 살 거)했다. 그런데 하루는 목이 말라 내방(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큰 그릇에 물이 담겨져 있었다. 마셨더니 술이었다. 얼큰하게 취해 있노라니 옆집의 닭이 뛰어들었다. 거사는 그 닭을 잡아 마침 끓는 물에 잡아먹어 버렸다. 그때 닭주인인 여자가 뛰어들었다. 취해서 그런지 절색의 미인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보고 닭 이야기는 뒷전에 두고 별의별 거짓 이야기로 여자를 꼬드겼다. 그리고 옷을 벗기려 했으나 여자가 거절했다. 그러자 거사는 여자를 내방 바닥에 눕히고 강제로 범해 버렸다. 여자는 거사를 관가에 고발해 버렸다. 문초를 당하게 된 거사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었다. 불음주계를 파한 것으로 해서 오계를 단박에 깨는 순간이었다.
오계란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억압하거나 손상하거나 죽이지 말며(불살생: 아니 불, 죽일 살, 날 생), 아낌없이 베풀어 주고 결코 남의 물건을 빼앗지 말라는 것이며(불투분: 아니 불, 구차할 투, 물넘칠 분), 청정행을 할 것이요, 결코 사음하지 말며(불사음: 아니 불, 간사할 사, 간통할 음), 진실한 말을 하고 결코 망령된 말을 하지 말며(불망어: 아니 불, 망령될 망, 말씀 어), 바른 마음을 지키고 술에 취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불음주: 아니 불, 마실 음, 술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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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3. 훈민정음이 몰고 온 파도 (한글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1/2
한글은 어디에서부터
훈민정음은 오늘날 우리 겨레의 언어생활에 바탕이 되는 한글의 모태로서, 1443년 섣달에 반포된 문자체계다. 1940 년 안동에서 발견된 원본 "훈민정음"은 서문과 본문 및 해례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세종 임금이 쓴 것인데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문은 28자의 발음법을 한자로 풀이해놓았고, 해례는 다섯 가지 용례를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서문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자.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어긋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글자로서 표현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끝내 그 사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를 위해 가슴앓이를 하다가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모든 사람이 쉽게 익힘으로써 일상생활이 편리해졌으면 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훈민정음이 새로 만들어진 글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 만물 가운데 참으로 새로운 것이 있을까?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문제는 늘 창조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다. 훈민정음 역시 느닷없이 세상에 튀어나온 완전한 창조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대체 무엇을 참고해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어느 정도의 창조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창조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는, 첫째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글자를 만들었다는 견해, 둘째 성리학과 주역의 원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는 견해, 그리고 음악의 원리를 응용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견해까지 제시되어 있다. 훈민정음의 창조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것으로는 '고전'(고대문자)을 본떴다는 견해와 더불어 범어, 몽고글자, 서장문자, 여진문자, 거란문자, 팔리어, 일본 신대문자 등을 본떴다는 견해가 있다. 물론 이 가운데 대부분의 기원설(창문 상형설과 팔리어 기원설은 제외)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고 사실에 가까우며 문헌으로도 확인되는 것은 고대문자를 본떴다는 견해이다. 물론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거나 철학적 원리를 이용했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은 고대문자를 다시 체계화하고 재창조하는 원리를 이용했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은 고대문자를 다시 체계화하고 재창조하는 원리로서 훈민정음의 직접적인 자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기원이 된 고대문자가 이미 발음기관의 모양을 응용하고 있었다면, 발음기관 상형설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견해가 될 것이다.
일찍이 있었던 나라말씀
훈민정음의 기원과 관련지어 살펴볼 만한 몇 가지 명제부터 정리해 보기로 하자.
가. 임금께서 손수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는 '옛 시대의 전자'를 본뜨신 것이다("세종실록", "청장관전서"). 나. 훈민정음은 몽고글자와 같은 모양이다("성호사설", "언문지"). 다. 동방에는 옛날부터 일상생활에 쓰이던 문자가 있었다.("훈민정음운해") 라. 일본에서 발견된 비석의 신대문자와 한글은 체계가 거의 같다. 마. 서장족의 문자가 여진문자 및 거란문자도 훈민정음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명제들은 서로 상통하고 있다. 먼저 일본의 신대문자는(아직 완벽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백제의 문자'로부터 내려온 것이고, 서장족도 백제의 다물을 구성하던 종족의 하나로서 서장문자도 백제 문화라는 틀에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또 몽고족이나 거란 및 여진족도 동아시아 기마종족들로서 모두 고조선의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거란이나 여진족은 고구려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즉 이 명제에서 등장한 종족들이 모두 같은 문화를 가꾸어온 고조선의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시대의 전자나 일상생활에 쓰이던 동방의 옛 문자도 이 종족들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까지 선교의 도맥을 이어온 사람들은 이런 옛 문자를 '하늘문자'라고 하는데, "해동전도록" 등에서도 '천전'이라는 문자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전' 또는 '천전'이라고 하는 글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중국 한자의 전서체를 가리키는 것일까? "훈민정음"에서 중국 한자와 우리말이 다름을 밝혔고, 또 동방에 그런 문자가 있었다고 했으므로, 이 고대문자는 중국 한족의 문자와 다른 어떤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국 대륙의 옛 주인이었던 은나라가 이미 문자(갑골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들도 기마종족의 한 갈래였음을 감안할 때, 비교사적인 관점에서 고조선에도 그 나름의 문자체계가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물론 은나라 때 사용되던 문자는 은나라의 뒤를 이어 대륙의 주인이 된 한족에게 전수되었으며, 은나라 유민의 망명과 더불어 고조선에도 전수되었다. 즉 한자는 원래 한족의 문자가 아니라 중국계 기마종족이었던 은나라의 문자였으며, 은나라가 무너진 뒤 한족과 기마종족이 공통으로 사용하게 된 문자였던 것이다. 물론 은나라 멸망 이전부터 이 문자가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공용어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환단고기"에서도 고조선에 고유한 문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가림토'라는 이름을 가진 문자인데, 그 글자들은 우리 한글이나 일본의 신대문자와 아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이 문자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 증거들이 마땅치 않다. 만주에는 가림토로 된 비석이 있다면서 그 탁본까지 공개된 적이 있었지만, 그 탁본에 있는 문자와 "환단고기"의 가림토가 같은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남해군 양하리에서 고대 암각문자가 발견되어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이 역시 가림토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산청군에서도 풍화된 비석에 새겨진 가림토와 비슷한 옛 글자가 발견되었지만, 그 또한 가림토와의 관련성을 확인받지 못했다. 불교 이전의 가람이 있던 터라고 전해지는 천보산 달굼바위에도 암각문자가 남아 있지만, 아직 가림토와의 관련성 및 그것을 암각한 시기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환단고기"에서 말한 가림토의 존재를 정확하게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옛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옛 문자들은 세종이 손수 만든 글자와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비교언어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동아시아 여러 기마종족들의 문자는 나름대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문자가 아닌 말에서도 많은 공통점이 확인된다. 물론 일부 기마종족의 경우 한자를 뒤집어서 쓴 것과 비슷한 글자를 사용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공통의 문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의 뿌리는 어디일까?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알고는 있어도 증거가 없고 시간의 세월을 거슬러 살펴보기는 했으나 그런 방법이 아직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때이니 만큼, 주춤거리면서 다음과 같은 졸렬한 추론을 빌려 말을 매듭지을 수밖에 없다.
한글을 비롯한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언어들은 모두 고조선의 문자를 그 기원으로 삼고 있지만, 종족들 사이의 분화가 차츰 촉진되면서 문자 또한 분화되어갔다. 훈민정음이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고조선의 옛 문자를 기반으로 우리 겨레의 글자로 재창조된 언어체계를 가리킬 따름이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에는 알게 모르게 기마종족의 분열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역사의 아픔이 담겨 있는 한편, 고조선의 부활을 꿈꾸는 작은 겨레의 소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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