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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98 호
단기 4340. 11. 7 (음력 9. 2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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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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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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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은 벌어들임으로써 가능하나, 삶은 베풂으로써가능하다. /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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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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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게으름이 가장 큰 죄악
공부는 뒤로 미루지 말고 순간순간 항상 정지해야 한다. 머뭇거리지 말고 어디에서나 힘써야 한다. 험심탄회하게 이치를 관찰할 뿐 선입견을 두지 말며, 꾸준히 배움을 쌓아 익힐 것이지 짧은 시간 내에 효과를 바라서는 안 된다. 완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내버려두지 말고 평생 노력해야 한다. 이치가 완전히 이해되고 하나로 되는 것은 모두 깊이 쌓은 후에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이다. 한순간에 문득 깨달았다는 사람들처럼, 어지럽고 아득한 가운데 그림자만 얼핏 보고서 큰일은 다 끝났다고 떠들어대면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궁리한 다음 실천으로 이를 몸소 체험해야 비로소 진짜가 되는 것이다. 지금 비록 진리를 깨쳤다 하더라도 겉핥기를 면치 못하거나, 지식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혹 일순간이라도 이를 잃어버리면 이에 따라 일상 생활은 한없이 문란해지기 쉽다. 처음 배울 때에는 이치를 보는 것이 진실되거나 절실하지 못하고, 지식을 유지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법으로 이 또한 우리 모두의 근심이다.
돌이켜 세상 사람들을 볼 때 훌륭한 재주와 뛰어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은 과거 공부에 얽매여 버리고 이미 벼슬을 얻은 사람은 이해 득실에 빠져 비록 뜻이 있어도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뜻은 이들과는 다르다. 그대가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린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실로 그러한 결단의 마음을 잘 확대하여 처세한다면 비록 과거 공부나 이해 득실 문제가 눈앞에 있더라도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임을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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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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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3장 사회 및 역사 철학
인간의 소외, 어디에서 오는가 - 서도식
인간이 로봇이 되는 현대 산업 사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가들은 자본주의라는 한 특수한 경제 질서가 아니라 이를 포함한 현대 문명 전반에 걸쳐 소외의 문제를 제기한다. 다시 말하면 소외라는 말로써 이들이 비판하는 대상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이른바 현대 산업 사회이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기본 특징을 인간 이성의 도구화로 본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원래 종교나 신화로부터 인간을 각성시키는 계몽의 역할을 담당했는데, 역사가 흐르면서 이성의 계몽적인 힘은 점차 약화되었고 상대적으로 도구적, 기술적 합리성이 강화되어 이성을 장악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도구적, 기술적 이성은 바람직한 목표를 반성하지 못하고 오로지 주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단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이성이다. 만일 인간이 이러한 도구적 이성에 매몰되면 인간의 삶은 모든 면에서 효율성만을 지향하며, 스스로는 자신의 이성이 만들어 낸 효율성의 제도적 수단에 종속되는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발달한 기계 장치와 거대한 관료 조직, 그리고 강력한 권위주의를 제도화한 현대 산업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라는 것이다.
현대 산업 사회 비판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들의 소외론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과학 기술의 발전과 관료 조직의 성장으로 인간이 일종의 로봇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계의 한 부속품 내지 조직의 일원으로 기계가 명령하고 조직이 움직이는 대로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거대한 기계 체계가 자신의 손을 떠나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면 어절 수 없이 거기에 봉사하는 종의 위치로 전락하며, 또 거대한 조직의 힘에 이끌려 일차원화, 획일화되는 가운데 마침내 주체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둘째로, 현대 사회는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혈연이나 자연과 같은 자연적인 유대를 상실한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에 자신을 돌봐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따라서 공포와 불안의 심리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보이지 않는 강력한 권위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어한다. 이들에 의하면 파시즘과 전체주의 국가는 바로 이러한 소외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이들은 루카치와는 달리 소외 극복의 수단으로 더 이상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각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기에 소외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막론한 현대 산업 사회의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되는 현상이며, 소외의 원천도 이성이 도구화된 현대 문명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소외 극복에 대해 대체로 비관적인 견해를 취하거나, 아니면 대중의 '위대한 거부'라는 모호한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를 하나의 객관적 상황으로, 다시 말해 하나의 역사적, 사회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즉, 이들이 소외를 객관적 사실로 인식하는 주된 근거는 그들의 역사 철학이었다. 오늘의 소외된 사회는 내일의 소외 없는 사회를 위해 마땅히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심리 상태
그러나 현대 사회의 소외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러한 역사 철학을 과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확인 가능한 현상들만 문제로 삼자는 것이다. 사물화니 비인간화니 하는 개념들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소외 현상을 분석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추상적이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시맨(M. Seeman) 등 오늘날의 경험적 사회 과학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다. 우선 이들은 소외라는 말을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한다. 이들이 바라보는 소외란 '환경에 동화 내지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의 주관적 심리 상태'를 가리킨다. 즉, 소외란 가치 중립적인 사실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느낌이라는 것이다. 소외는 소외감과 같은 말이다. 대체로 이들이 거론하고 있는 소외감은 무력감이니, 무의미성이니, 무규범성이니, 가치상의 고립이니, 자기 소원이니, 사회적 고립감이니 하는 대중 사회에서 가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느낌들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소외감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간략히 살펴보자.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하지만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력감은 개인이 현대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즉, 세상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므로 나같이 하찮은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느낌이다. 둘째, 무의미성은 개인이 현재의 사회적 상황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진행마저 예측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즉, 세상이 너무나 복잡하여 나로서는 그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느낌이다. 셋째, 무규범성은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이 붕괴되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즉,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일상적인 규범에 따를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다. 넷째, 가치상의 고립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인 가치를 거부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즉, 대중 문화를 낯선 것으로 느끼거나 그것에 대해 반대하고 분노하는 느낌이다. 다섯째, 자기 소원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타인으로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즐거워서가 아니라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자기 것이 아니라 마치 남의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여섯째, 사회적 고립은 개인이 집단으로부터 격리될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혈연이나 지연 등 자연적 연대감이 상실될 때 나타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주관적 감정을 강조하는 사회 과학자들은 소외를 현대 사회, 정확히 말하면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한 대중 사회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소외는 주관적 감정이기 때문에 동일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누구는 그것을 의식하고 누구는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설령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행동이 서로 다르게 표출될 수도 있다. 사회 과학자들마다 같은 소외감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러한 감정이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소외 극복에 대해서는 다같이 입을 다물어 버린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 하면 소외의 원천인 사회 자체는 잘잘못을 가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뭔가 잘못된 것이기에 뜯어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발상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항상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부터 출발하며 현실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가진다. 왜냐하면 과학은 가치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외의 극복
지금까지 우리는 현대 사회의 소외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거칠게나마 정리해 보았다. 하나는 역사 철학적 시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험 과학적 시각이었다. 이 두 입장은 결국 소외 현상을 객관적 상황으로 보느냐 주관적 심리 상태로 보느냐의 차이로 여겨졌다. 이 두 입장은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상대방의 장점이 나의 단점이고 나의 단점이 상대방의 장점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 철학적 논의는 다소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소외 극복의 당위성을 강하게 제시한다. 반면 경험 과학적 논의는 매우 구체적이기는 하지만 소외 극복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실 소외라는 말 자체가 이미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고, 우리 또한 소외 현상을 하나의 사회 병리 현상으로 간주한다면,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소외를 극복하는 방안일 것이다.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은 이런 점에서 분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의 이론 자체가 노동자의 계급 의식의 각성을 꾀하고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도 역사의 흐름에 무감각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겉으로 드러난 소외의 양상이나 소외의 원인만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사회는 비판 이론이 비판하는 산업 사회나 경험적 사회과학이 가정하는 대중 사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 이론의 경우 소외 극복의 당위성은 제시하지만 그 방안은 모호하다. 경험적 사회 과학은 아예 당위성마저도 언급하지 않는다. 소외와 소외 극복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소외론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이야기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과 과학이 진실로 융합된 거시라야 한다.
참고 문헌 K.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수고', 이론과실천사, 1987. G.루카치, '역사와 계급 의식', 거름, 1986. H.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삼성출판사, 1982. 정문길, '소외론 연구', 문화과지성사, 1981. 김종호, '소외 시대의 철학', 문음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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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초가
본뜻 : 초나라 항우가 한나라 유방과 싸울 때의 일이다. 항우가 유방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유방은 한나라 군사들에게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 오자 항우는 초나라 백성이 모두 붙잡혀 포로가 된 줄 알고, 전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졌음을 절감했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바뀐 뜻 : 주위가 온통 적과 반대자로 둘러싸여 있고 단 한 사람의 동조자도 없는 매우 어려운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보기글" -북한이 그렇게 고집을 부리다간 조만간 사면초가에 봉착하고 말 거야 -그 동안 도와주던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빚쟁이들만 득실거리니 이거야말로 사면초가지 뭡니까
는개와 느리
땅 위의 목숨이 모두 그렇듯 우리 겨레도 죽살이를 비와 눈에 걸어놓고 있었다. 요즘에는 상점·공장·회사·사무실 같이 집안에서 많이 살지만 지난날에는 농사짓고 고기잡으며 사시사철 집밖 한데서 눈비와 어우러져 살았다. 그만큼 눈비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 이름도 어지간히 많다.
‘는개’는 국어사전에도 올라서 꽤 널리 알려진 말이다.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풀이해 놓았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모자라는 풀이다. ‘는개’는 “늘어진 안개”라는 어구가 줄어진 낱말임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는개’는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안개 쪽에다 붙여놓은 이름인 셈인데, ‘는개’처럼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비라고 하지 않은 것에 ‘먼지잼’이 또 있다. ‘먼지잼’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를 땅으로 데려와서 잠재우는 것”이라는 뜻의 풀이를 그대로 줄여 만든 낱말이다.
‘느리’는 국어사전에 오르지도 못한 낱말이다. 농사짓고 고기잡는 일을 내버려 눈비에서 마음이 떠난 요즘은 들어볼 수도 없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쓰지 않아 잊어버렸나 싶은 낱말이다. 지난 겨울 어느 이른 아침 대전에서 수십 년 만에 ‘느리’를 만나 오래 잊고 살았던 이름을 새삼 떠올렸다. ‘느리’는 “늘어난 서리”라는 어구를 줄여서 만든 낱말이지만 뜻은 그보다 훨씬 겹겹이다. 모두 잠든 사이에 살짝 오다 그친 ‘도둑눈’이면서 마치 ‘서리’처럼 자디잔 ‘싸락눈’이라 햇볕이 나면 곧장 녹아버리는 눈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복수 표준어
사투리이던 ‘멍게’를 ‘우렁쉥이’와 함께 표준어로 선정한 것은 “방언이던 단어가 표준어보다 더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그것을 표준어로 삼는다”(표준어규정 23항)는 규정에 말미암는다. 또 “방언이던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표준어이던 단어가 안 쓰이게 된 것은, 방언이던 단어를 표준어로 삼는다”(24항)는 규정에 따라 ‘귀밑머리’를 표준말로 삼고 ‘귓머리’를 버렸다. 이처럼 표준어 규정은 많이 쓰이는 말을 표준어로 삼는 규정을 두고 있다.
표준어 규정에는 ‘복수 표준어’를 둘 수 있게 했다. 비슷한 형태를 모두 다 표준말로 인정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에도 방언이 복수 표준어로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부사 ‘얼렁뚱땅’과 ‘엄벙뗑’, 그 동사인 ‘얼렁뚱땅하다’와 ‘엄벙뗑하다’도 복수 표준어다. 문학 작품에 많이 쓰이는 ‘엄벙뗑하다’를 표준말로 삼은 것이다. ‘옥수수’도 사투리로 쓰이던 ‘강냉이’를 함께 표준어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단수 표준어’ 규정에서는 방언을 버리고 하나만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국물’을 표준어로 삼고 전국적으로 많이 쓰이는 ‘멀국, 말국’은 버렸다. 그 규정이 들쭉날쭉이다.
표준어 규정을 개정할 때, 복수 표준어를 확대하여 지역에서 많이 쓰이는 고장말을 표준어로 인정하고 국민이 다양한 어휘를 골라 쓸 수 있도록 선택할 여지를 열어줘야 한다. 1988년에 제정된 표준어 규정을 정보화 시대에 걸맞으면서 지역 문화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하루빨리 손질하기 바란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줄여 쓰는 말
‘급한 질문’을 ‘급질’, ‘즐거운 감상’을 ‘즐감’ 등으로 줄여 만든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 ‘미자’는 중고등학생들이 미성년자인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취뽀하다’는 ‘취직하다’와 같은 뜻이다. ‘취업 뽀개기’라는 인터넷 동아리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줄임말을 젊은이들만 쓰는 것은 아니다. ‘줌마렐라’처럼 삼사십대 기혼 여성 직장인을 이르는 말도 있고, ‘황빠’처럼 특정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도 있다. 부동산 거래와 관련한 비리를 신고해 보상금을 타는 ‘부파라치’나 신문 불공정 판매 행위를 신고해 보상금을 받는 ‘신파라치’와 같이 제도에서 비롯된 말들도 있다.
쓰던 말을 줄여서 새말을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유비쿼터스와 리포터가 합쳐진 ‘유포터’처럼 두 말이 녹아드는 융합형과 ‘미자’처럼 한 낱말이 줄여지는 축약형, 경제 활동 참가율에서 각 낱말의 첫글자만 살려쓰고 나머지는 버리는, ‘경활률’과 같은 탈락형이 있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이후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사오정’(사십오세 정년), ‘십장생’(10대도 장차 백수가 되는 것을 생각해야) 같은 말은 줄여 만든 말과 낯익은 말을 일치시켜 세태를 풍자한 유행어들이다. 말을 줄여서 쓰는 데는 언론도 한몫을 한다. 실제로 신문 제목이나 방송 자막 같은 데서 말수나 글자 수를 줄여 달 때가 잦은 까닭이다. 문제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줄여야 한다는 점이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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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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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4) 여인 천하의 종말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여후가 죽은 후, 하늘을 찌를 듯했던 여씨 일족의 권세도 차츰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여후가 죽었어도 여씨 일족이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켜 유씨네 한나라를 엎어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기도 했다. 다만 유방이 생존했을 때 뒷일을 부탁했던 주발이나 관영 등의 용맹스런 장군들이 아직도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선뜻 일으키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때 유장이라는 제후가 있었는데, 20세밖에 안되었으나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여후는 그에게도 역시 여씨네 집안의 딸을 시집 보냈으나, 그 딸이 유장에게 여씨 일족의 음모를 낱낱이 폭로해 버렸다. 그러자 격분한 유장은 자기 형인 유양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번 기회에 여씨 일족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전해받은 유양은 즉시 군대를 일으키는 한편, 모든 제후들에게 여씨 토벌의 격문을 띄웠다. 한편 조정에서는 유씨 제후들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급보를 접하고 상국이던 여산은 관영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물리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관영은 군대를 이끌고 궁궐 밖으로 나와서 병사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지금 여씨 일족은 방자하게도 천하의 권세를 쥐고 흔들고 있다. 이제 나는 역적 여씨 일족을 토벌하려고 하니, 그대들은 나를 따르라."
이에 병사들은 일제히 창과 칼을 높이 들고 환호하였다. 관영은 즉시 유양에게 사자를 보내 연합군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진평과 주발도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여록이 장군으로서 군대 지휘관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진평과 주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신인 역상의 아들 역기가 여록과 친했었다. 그래서 주발은 역상을 통해 역기에게 여록을 유인하도록 꾀를 냈다. 여록은 역기를 믿고 군대 본부를 나와 밖에서 놀았다. 이 틈에 주발이 군대 안으로 들어가 지휘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호통을 쳤다.
"장군이 군대를 버리다니, 이제 우리 집안은 망했구나."
그리고는 집안에 있는 모든 패물들을 마당에 내팽개쳤다.
"어차피 빼앗길텐데 이렇게 버리는 게 낫지."
과연 주발은 여록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자마자 전군을 소집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명령하였다.
"여씨에게 편들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에게 편들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벗어 유씨를 지지한다는 표시를 하였다.(이 일로부터 한쪽을 편드는 것을 좌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진평과 주발은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자 유장에게 병사를 주어 궁궐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때 상국 여산은 뜰을 거닐고 있다가 갑자기 기습을 받고 변소로 피했으나, 그곳까지 추격한 유장에게 목이 베어졌다. 유장은 계속 궁궐을 수식해 장락궁의 경호 책임자였던 여경시를 베었다. 이렇게 하여 여씨 일족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군사 지휘권을 주발에게 넘겨 주었던 여록도 칼에 맞아 죽었으며, 여수는 매를 맞고 죽었다. 그리고 여수가 낳은 번쾌의 아들 번항까지 살해되었다.
자리가 다르면 할 일도 다르다
여씨 일족이 멸망한 후 중신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가장 중요한 후계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중신들은 모두 여씨 외척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거사에 공훈이 컸던 유장과 유양도 추천되었지만, 그들 역시 회가가 매우 음흉하다고 소문난 집안이었으므로 기각되었다. 결국 옛날 박희의 아들이 추천되었다.
"그분은 현재 살아 있는 유방 폐하의 친자식 중에서 최연장자이며, 외가인 박씨는 조촐한 집안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중신들의 의견은 일치되었고, 급히 사자를 보냈다. 박희의 아들은 거듭 사양했지만, 중신 일동은 두 차례나 권유했다. 드디어 박희의 아들이 할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문제이다.
승상이라는 자리
새로 즉위한 문제는 주발 장군이 여씨 토벌에 가장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를 제1의 공로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평은 그것을 알고 우승상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하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사직을 청원했다.
"그대는 이제까지 건강하더니, 갑자기 아프다며 사임하겠다니 무슨 이유요?"
문제가 진평에게 물었다.
"예, 황공스러운 말씀이오나 옛날 고조 때는 저의 공적이 주발을 앞섰었습니다. 그러나 여씨 토벌에는 주발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진평은 좌승상으로 임명해 제2위의 서열로 내려놓았다. 그 뒤 문제가 어느 날 주발에게 물었다.
"우승상, 재판은 전국적으로 몇 건쯤 있는가?" 그러자 주발의 얼굴빛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미처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 국고는 연간 얼마나 되는가?" "그것도 모르겠나이다. 죄송합니다." 주발은 온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그러자 문제는 이번엔 진평에게 물었다. 하지만 진평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문제라면 각각 담당자에게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 "담당자라니 누굴 말하는가?" "재판은 정위가 있사오며, 국고에 대해서는 치속내사가 있사옵니다." "만사에 담당자가 있다면, 그대는 대체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가?"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모름지기 재상이라는 자리는 위로는 황제를 보좌하며 아래로는 모든 만물을 잘살게 할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바깥으로는 사방의 오랑캐와 제후들을 다스리고, 안으로는 만민을 다스리며 뭇 관리들에게 그 직책을 완수시키는 자리입니다." 문제가 그 말을 듣고는, "정말 훌륭한 답변이오." 하면서 진평을 칭찬했다. 이에 주발을 더욱 부끄러워졌다. 이윽고 밖으로 나오자 주발이 진평에게 불평을 했다. 그러자 진평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우승상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직책이 뭔지 몰랐단 말인가. 만일 폐하가 장안의 도난 건수를 물으시면, 그것까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주발은 자신이 진평을 따르지 못함을 재삼 깨달았다. 그 후 진평은 승상으로 재임용되어 2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옥리에게 목숨을 구걸한 장군
진평이 죽은 후 주발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10개월이 채 못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지금 제후들에게 각자 임명 지역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는데, 잘 지켜지지 않고 있소. 그러니 그대가 먼저 임명 지역으로 돌아가 모범을 보여줄 수 없겠소?"
주발은 할 수 없이 승상직을 사임하고 그의 임명 지역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주발은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누가 자기를 주살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스스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였으며, 손님들도 그런 상태로 맞았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주발은 급기야 반역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래서 주발은 옥리에게 넘겨져 취조받기 시작했다. 주발은 두려운 나머지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취조가 심해졌을 때 옥리에게 천금의 뇌물을 준 것이 효과를 보았다. 옥리가 조서 뒤에 '공주에게 증언을 시키라'고 써 준 것이다. 공주란 문제의 딸로서 주발의 큰며느리였다. 옥리가 주발에게 그 공주를 증인으로 세우라고 알려 준 것이었다. 마침내 공주가 증인으로 섰고, 그리하여 재판은 단번에 주발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문제도 주발의 조서를 읽고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발을 즉시 풀어 주었다. 감옥에서 나온 주발은 한탄하였다.
"일찍이 백만 대군을 이끌던 나였지만, 옥리 하나가 이렇게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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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31장. 유기합성에 있어서의 붕소와 인
알켄 합성.
1979년도의 노벨상을 브라운과 나누어 수상한 게오르그 비티히는 1897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그는 과학과 음악 양쪽에 흥미를 가지고 재능을 발휘했다. 마찬가지로 과학과 음악 사이에서 고민한 인물로서 러시아의 화학자이자 작곡자이기도 했던 알렉산더 보로딘이 유명하다. 보로딘은 많은 사람들에게 러시아 음악의 최초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어서, 그가 화학과 의학의 선생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다. 비티히가 음악을 직업으로 선택했다면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음악을 들려 주었을까는 알 수 없겠지만, 유기와 무기화학 양 분야에 있어서 그의 귀중한 공헌 덕을 입은 다수의 화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주된 관심이 음악이 아니었다는 점에 감사해도 될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비티히의 세 번째 취미는 등산이었다. 다행히도 그것을 취미로 즐겼는데, 그의 등산과 화학연구가 귀하고 높은 영역의 추구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비티히의 연구자로서의 경력은 1916년 튀빙겐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 병역으로 학업이 중단되었으나,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학부의 졸업연구를 마치고 이어서 192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2년까지 마르부르크에서 교편을 잡고 그 후 브라운슈바이크공업대학으로 갔으며 이어서 프라이부르크대학 그리고 1944년에 튀빙겐대학의 정교수 겸 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학과장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1956년에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79년에는 브라운과 노벨상을 나누어 수상하였다. 1987년 8월, 비티히는 90세로 사망했다.
그가 튀빙겐에 재직했었던 1953년에 노벨상으로의 첫걸음이 된 세렌디피티와 우연히 만났다. 비티히와 그의 제자 게오르그 가이슬러는 인원자 한 개가 다른 원자 5개와 결합한 듯한 화합물 즉, 5개의 인 화합물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어떤 실험에서 그들은 유기 인 화합물이 탄소-산소의 2중결합(알데히드와 케톤이라고 하는 중요한 종류의 화합물군에 특징적인 단위 구조)을 가진 화합물과 반응하여 탄소-산소의 2중결합이 탄소-탄소의 2중결함으로 치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이슬러와 공저인 최초의 연구논문 중에서 비티히는 "이 유기 인 화합물인 벤조페논(탄소-산소의 2중결합을 갖는 케톤)의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다"라고 썼다. 비록 이것은 그의 연구 논문 중 작은 한 부분이고, 분명히 예상 밖의 결과였으나 비티히가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다른 연구생 올리히 셸코프와의 공저에 의한 두 번째의 논문「올레핀 생성시약으로서의 트리페닐포스핀메틸렌」이 뒤이어 곧 발표된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분명하다. 이 논문 중에서는 우연히 발견된 이 반응이 온화한 조건으로 진행되어 다른 방법으로는 만들기가 쉽지 않는 다수의 '올레핀' 합성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비티히 반응ㅇ의 중요성은 어떤 분자 속의 특정한 장소에 탄소-탄소의 2중결합을 가진 올레핀을 자유롭게 합성할 수 있다는 점에 있으며, 1953년 당시(현재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비티히 반응의 또 하나의 장점은 온화한 반응조건에서도 고온이나 강력한 시약에 민감한 물질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곧, 뒤이어 다른 논문이 비티히의 연구소와 전세게의 화학연구실에서 연달아 발표되었다. 이들 연구보고는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였으나, 최근의 참고도서에 의하면 이 반응에 관한 단행본이 2권, 총설이 25권 있다고 한다. 노벨상 이외에 이 발견의 중요성의 증거로서는 비티히 반응에 의해서 비타민A가 톤 단위로 제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티히의 음악에 대한 애정은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국제심포지엄에서의 그의 강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953년에 발견되고 후에 자기 이름을 붙이게 된 이 합성법의 역사를 '슈타유딩거의 주제에 의한 변주'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자기가 우연히 접한 이 반응이 헤르만 슈타우딩거가 30년이나 전에 보고한 것과 비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슈타우딩거의 주제'에 의한 그의 화학적 '변주'와 이를테면 브람스(Brahms)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대한 변주곡처럼 클레식 음악의 작곡가가 선배 작곡가의 작품에 입각하여 작곡하는 것과 같은 유사성을 지적했던 것이다.그러나 비티히의 유기 인 화합물과 사용한 실용적 합성법은 옛 방법의 개량이 아닌 혁명적인 발견이며, 실제로 비티히는 그의 세렌디피적 발견 후에 문헌을 찾아볼 때까지 슈타우딩거의 일을 전혀 몰랐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노벨상에 의해서 인정된 브라운과 비티히의 공헌의 유사성은 그들의 방법이 분자구조의 명확한 유기화합물의 합성법으로써 탄소 이외의 원소를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어떤 발견도 행운스러운 우연과 그 우연을 멋지고 훌륭하게 발전시킨 브라운과 비티히의 충분히 준비된 마음에서 얻은 결과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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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이시애난 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신용개
신용개(1453-1519)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개지, 호는 이요정 또는 송계이며, 신숙주의 손자이다. 성종 14년(148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5년 뒤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연산군 때에 영광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형조 참판으로 불려 왔고, 대제학에 올랐다. 신용개는 타고난 자질과 인품이 너그러웠으나 언뜻 바라보면 범할 수 없는 의젓한 위엄을 지녔다. 이시애의 난리에 그의 아버지 신면이 함길도 관찰사로 갑자기 닥친 변고에 대응하지 못하여 대청 위의 후미진 다락 틈에 숨어 있었다. 적도들이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막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느 아전이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마침내 살해되고 말았다. 신용개가 장성하자 그 원수를 기어이 갚고야 말겠다고 하여 홍유손과 교유하면서 여러 차례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 생김새와 성명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전이 서울에 왔는데 신용개는 당시 의정부 사인이었다. 그래서 홍유손과 함께 어둠을 틈타 도끼를 끼고 그 아전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는 홍유손을 시켜 마치 관청의 일로 서로 알려야 할 사안이 있는 것처럼 하여 불러내게 하고는 뒤에서 도끼로 찍어 죽였다.
신용개는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가끔 늙은 여종을 불러 서로 큰 술잔을 기울이며 취하도록 마셨다. 국화 여덟 분을 길렀는데, 마침 가을철이어서 국화가 활짝 피었으므로 마루에 들여놓았더니 높이가 대들보에 닿을 듯하였다. 신용개가 그 향기를 사랑하고 완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집안 사람들에게 일렀다.
"오늘은 여덟 분의 훌륭한 손님이 찾아올 터이니 술과 안주를 장만해 두고 기다리라"
그러나 해가 지려고 하는데도 조용하기만 하고 손님은 오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자 신용개가 말하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그러는 사이 달이 떠서 빛이 방안으로 들어오니 꽃빛은 난만하고 달빛은 희고 깨끗하였다. 신용개가 그제야 술을 내오라 하였다.
"이것이 나의 아름다운 손님이다"
그가 여덟 개의 국화 화분을 가리키며, 각각 앞에다 좋은 안주를 놓았다.
"내가 마땅히 술을 권하리라"
그가 국화 앞에 은도배로 각기 두 잔씩 따라 주고 자신도 취하였다. 중종 11년에 정승으로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57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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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계일학
수많은 범인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써, '진서'의 소계천에서 나온 말이다. 계 소 (?-304년)는 죽림칠현 중의 일인으로 열 살 때 아버지가 무고한 죄로 사형을 당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쓸쓸히 지내던 중 선친의 친구인 칠현 중의 한 사람인 산도가 무제에게
"서경에 이르기를 부자간에는 죄를 나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계소는 계강의 자식이오나, 슬기롭기가 춘추 진나라의 대부 극결보다 나을 망정 못하진 않습니다. 아무쪼록 비서랑으로 기용토록 하소서" 하고 아뢰니 무제는 "경이 그토록 천거한다면 굳이 낭으로 쓸 것이 아니라 승으로 삼아도 좋겠소"
이리하여 계 소는 비서랑보다 한층 위인 비서승으로 등용되었다. 계소가 처음으로 낙양에 올 무렵 어떤 사람이 칠현 중의 한 사람인 왕 융에게 '어제 인파 속에서 계소를 처음 봤는데, 의기양양한 폼이 마치 무리진 닭 중의 학 같습디다 그려" 하자, 왕 융은 대답하기를 "자네는 아직 그 사람의 선친을 못봐서 그래" 그리하여 '군계일학'이란 말이 나왔거니와 그리고 보면 계소의 어버지 계강은 더욱 잘났던가보다. 아무튼 계소는 벼슬이 차츰 높아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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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청산(푸를 청, 메 산)을 지고 백운(흰 백, 구름 운)을 이고
검소유상 개시허망(버릇 범, 바 소, 있을 유, 서로 상, 같을 개, 이 시, 빌 허, 망녕될 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같을 약, 볼 견, 모들 제, 서로 상, 아닐 비, 서로 상, 곧 즉, 볼 견, 같을 여, 올 래)
있는 것을 있다고만 보지 말아야 한다 없는 것을 없다고만 생각해서는 잘못이다 모든 있는 것은 언제고 없어질 것이며 그 자성이 없다
금강경에 있는 말씀이다. 내가 00사에 갔을 때의 일이다. 관광객들은 단풍놀이로 북적거렸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었고 황금의 연휴 토요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입맛을 다셨다. 스님들이 수도하는 도량 입구에는 극장처럼 표를 팔고 있었다. 무엇 구경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드는지, 모두가 불자들인가? 그러나 나의 어리석은 질문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은연중 나는 절 입구에 무료로 배부하는 전도지라도 하나 있었음 했지만 길바닥에는 찢어지고 버려진 입장권이 내던져서 밟히고 있을 뿐이었다. 온 산중에 삼겹살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상에..." 살생을 금지하는 도량(불도를 수행하는 장소)에서 그렇게 산을 찾는 이들에게 절에서는 아예 내다보지도 않는다. 나는 안타까웠다. 스님네들이 포교, 포교하는데 공염불이구나, 아직도 우리 한국불교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짓 나는 한숨을 쉬며 못 본 척 외면하고 걸었다. 그러나 장구와 노랫소리는 내 가슴속을 뚫고 들어와 나를 몸살나게 만들고 있었다. 대웅전 앞에서 돼지고기를 지지고 볶지를 않나,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질 않나, 나는 속으로 부아가 끓기 시작했다. 한심하다. 하나 둘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중생이 세상을 사느라고 억눌리고 해서 그 스트레스를 풀 장소로 제공하는 것만도 큰 보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봐도, '아니야, 이래서는 안돼'하는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그때 아마 싸움이 붙었는가 보다.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두 사내가 경비원들에게 끌려 내려간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잠시 멈칫했던 행락객들은 내일 지구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다시 고래고래 악을 써대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누각 위에서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게 아닌가. 누각에는 법고가 매달려 있었는데 다행이 그건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치마를 걷어붙이고 속고쟁이만을 입은 채 장구를 치며 어절씨구 돌아가는 판이라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부끄러움을 잊은 듯한 나이들이었다. 걸망을 메고 누각으로 오르는 나를 보고 잠시 조용하더니 '스님, 한 잔 하이소'하는 게 아닌가. "두 잔도 좋고 세 잔도 좋습니다. 염불이나 한 가락 뽑죠." 나는 새벽 종성을 뽑아 제꼈다. 시끌벅적하던 판은 나의 등장으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염불을 끝낸 나는 조용히 타일렀다.
"제발 이젠 그만 하산하세요."
나의 말에 장구를 챙겨 산을 내려가는 행락객들의 뒷모습에서 나는 웬지 서글픈 감정에 코끝이 찡했다. 나는 청산(푸른 산)을 지고 백운(흰 구름)을 이고 법당을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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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1. 실패한 고려 르네상스 (성리학 이후의 동아시아 사회는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왕조교체와 문화변동
왕조의 흥망이 늘 문명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왕조가 교체되지 않으면서 문명사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문명사적 변화를 거의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주나라나 고조선처럼 유지기간이 길었던 시대가 대체로 앞의 경우에 해당된다면, 중국의 신나라나 후삼국처럼 존립기간이 매우 짧았던 나라의 흥망은 대체로 뒤의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길게 유지되었던 왕조, 예컨대 주나라의 경우 그 후반기를 춘추시대라고 하여 별도의 시기로 구분하게 되며, 신나라의 경우 시대 구분(또는 시기구분)의 측면에서 특별한 가치평가를 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고조선은 그처럼 나누어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후삼국의 경우는 하나의 시대로 간주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조건까지 감안하여 우리 겨레의 왕조사를 살펴본다면, 첫째 고조선의 전반기는 기마종족계의 문명이 성립되는 시기였으며, 후기는 기자계의 이주와 함께 갈등을 겪으면서 기마종족계의 문명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열국시대는 주로 이 같은 문명이 통합,체계화되는 시기였고, 열국시대의 휘기인 삼국시대는 불교적,중국적 문명이 도입되면서 다시 문명사적 발전이 촉진된 시기였다. 또 나진남북국시대는 세 갈래의 문명, 즉 기마종족적 문명과 불교적 문명과 중국적 문명이 주도권을 놓고 투쟁하는 시기였으며, 고려왕조는 이들이 외형상 통합되어 혼거상태에 들어간 시기였고,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대체적인 통합이 실제로 진행된 시기였다. 그러므로 고려왕조는 세워질 때부터 가장 분명한 멸망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왕건의 훈요십조는 바로 그런 위험성에 대한 예방책이자 나아가 지연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기마종족적인 흐름은 묘청 등을 내세워 그 위험성에 불을 지피려 하였고, 불교적인 흐름은 의천과 같은 인물을 내세워 사상치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였으며, 유학은 최승로와 같은 이론가를 앞세워 강력한 사상적 견제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모든 사건들이야말로 문명의 공존과 혼거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 단계가 문명사에서 과도기일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상의 근원적인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고려왕조를 위기와 불안에서 구해낼 수 없었으며, 통합 그 자체도 고려왕조의 폐허 위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고려시대의 지식인들, 특히 무신정권의 칼자루를 울타리로 삼아 새로운 통합사상을 찾아보려던 사람들은 고려왕조의 그런 위험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즉 전쟁과 같은 외부적 조건이 없는 한, 고려 후기사회를 위협하는 근본적일 요소는 사회경제사관에 의존하는 연구자들의 주장과 달리 백성들의 반란이 아니라 사상계의 불안정한 혼거였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기도 전에 나라의 바깥으로부터 성리학이라는 엄청난 결론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외부조건에 따라 사상의 혼거상태가 정리되는 순간, 고려왕조는 처음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운명 곧 문명의 과도기라는 제한된 운명을 벗어나면서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성계라는 야심가의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성리학 수입업자들은 단번에 고려왕조를 뒤엎고, 성리학을 내세워 다른 사상들을 '깨끗이' 정리해버렸다. 그리고 성리학이라는 수입된 통합문명의 깃발 아래 5백여 년의 근조선을 세웠다.
불완전한 사상통합의 말로
인류역사에서 자주 확인되는 것처럼, 수입된 사상과 무력을 동반한 문명사적 전환은 매우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수입된 통합사상인 성리학은 고려 내부에서 준비되고 있던 사상통합의 맹아들을 모질게 짓밟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적지 않은 사상사적 결점이었다. 성리학이 수입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지적 전통을 지키려는 불교 지성인과 기마종족적 지성인들은 끊임없이 사상적 이의를 제기했으며, 때로는 성리학 내부에서도 이 같은 반란에 대한 동조자가 생겨났다. 그럴 때마다 성리학자들은 권력과 지위를 내세워 그들을 탄압했으며, 마침내 자신들의 교과서인 "맹자"의 일부 내용과 "소학"까지 금서목록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뒤, 불교 승려 태고 보우와 청허당 휴정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사상통합안을 제시했으며, 서경덕이나 정렴 같은 기마종족적인 지성인들은 그들 중심의 사상통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박세당이나 윤휴 같은 지식인들은 성리학 내부에서 사상통합의 반란자로 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이라는 통합이론을 자체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그들은 주장했다. "현실에 근거해서 기존의 통합 사상인 성리학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자!" 실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근조선 후기의 사회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오늘날 우리 역사의 한계를 보여줄 따름이다. 사실 우리 역사는 여러 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시대사별 연구결과를 시간순으로 엮어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실학은 어디까지나 근조선의 범위에서만 연구될 뿐이다. 진정 모든 시대를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역사적 안목은 아직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모든 시대를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거시적 안목으로 우리 역사를 좀더 길게 볼 때, 실학자들의 주장은 고려 르네상스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었다. 고려사회 내부에서 진행되던 르네상스가 성리학이라는 수입사상에 의해 인위적으로 파괴된 두, 탄압과 함께 잠복해 있던 그 기운이 마침내 몇백 년 뒤에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학은 이승휴와 이규보 등이 주도했던 고려 르네상스의 계승과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실학 또한 외래 수입사상에 의해 주체적 발전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 과제는 새로운 조건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즉 우리의 시대에도 현대 르네상스가 진행되어야 할 당위가 존재하며, 따라서 현시기를 그 당위의 잠복기 또는 발현기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고려 르네상스의 실패는 우리 역사를 일정하게 공회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어떤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대응할 문화를 마련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에서 공회전이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고려 말기의 사상통합운동이 실패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문화적 핏줄기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사대주의란 정신적 자세만 가지고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성리학을 채택한 근조선이 비록 단군 왕검을 공식화시키고, 세종 임금이 우리글을 재창조해서 반포했다 해도, 그것은 오그라붙은 나라 문화가 만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대주의를 대신할 주체적 문화를 활짝 꽃피울 수도 없었다. 사상과 종교에 대한 탄압은 끝이 없었으며, 정신적인 폐쇄성은 정치적,사회적 폐쇄성을 불러왔고, 마침내 나라는 남의 강제력에 의해 세계무대로 나섰으니, 이어진 작은 나라의 뿌리가 깊지 않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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