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1장 인식론
경험은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 황희숙
과학에서의 경험-귀납주의의 비판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지식 형태는 (자연) 과학이다. 사실 우리의 현대 문명은 그 자체 자연 과학 및 연관된 공학의 발전에 의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이름인 '과학 기술 시대'는 그런 연유로 붙여진 것이다. 경험주의라는 철학적 주장은 자연 과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서 '귀납주의'란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있다. 이때의 귀납주의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과학적 탐구는 경험적 사실의 관찰, 수집으로부터 시작되며, 수집된 사실들에 대한 세밀한 분류, 분석을 통해 가설이 제시되고, 그 가설이 실험적 증거에 비추어 확인됨으로써 이론으로 확립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사실들로부터 가설에 이르는 과정이 귀납 추리의 과정이다. 이는 일견 설득력 있는 지식 탐구의 모델이다. 과학자라 모름지기 세심한 정신과 도구를 가지고 관련 사실을 관찰, 수집하며, 그 사실들로부터 일반적인 가설을 이끌어 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각 아닌가? 그러나 과학적 탐구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많이 철학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먼저 사실의 관찰, 수집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과학자는 어떤 사실을 관찰해야 하는가? 사실이란 세상에 너무 많지 않은가? 따라서 과학자는 '관심 있는' 사실을 관찰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사실이 관심을 끌 것인가? 그것은 기존 이론과 불일치하는 사실일 것이다. 1643년에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는 우물 펌프로부터 물을 퍼 올리던 중 물이 10미터 위로는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되었는데, 그것은 그 사실이 당대에 지배적이던 생각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교의 아래 진공 펌프가 물을 길어 올리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는 즉 지구상에 생겨나는 진공은 즉시 어떤 물질에 의해 메워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10.33미터 이상의 진공 펌프 관은 메워지지 않는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연구함으로써 대기압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되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이란 그 자체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이론적 선입관 없이는 관찰할 만한 사실을 만날 수 없다. 또한 관찰 사실이 가설을 제안해 주지도 않는다. 일군의 관찰 사실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설들은 여러 가지다. 앞서의 진공 펌프의 예에 대해서도 10.33미터 이상의 공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물질이 채워져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 또 신은 수면으로부터 10.33미터 이상의 높이에 있는 진공은 싫어하지 않는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이는 가설이란 사실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가 사실들의 집단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상상적으로 부과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가설이란 자연에 대해 제안된 상상적인 한 가지 해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경험이 어떤 가설의 참됨을 확인해 줄 수도 없다. 제안된 가설이 어떤 관찰 사실과 부합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관련 사실들과도 모두 부합한다고 예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관찰 사실들에 근거하여 '모든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고 하자. 많은 관찰 증거, 실험 증거들이 추가된다면 이 가설은 참으로 확인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열을 받았을 때 팽창하지 않는 금속이 세상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찰 경험은 가설의 거짓됨만은 분명하게 확인해 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열을 받았을 때 팽창하지 않는 금속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위의 가설이 거짓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이론을 경험에 비추어 검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방식이다.
이러한 논의는, 경험은 그 자체 지식 탐구의 출발점도 아니고, 올바른 가설을 제시해 주는 단서도 아니며, 또한 가설의 참을 확인해 주는 것도 아님을 알려 준다. 물론 우리의 지식 탐구는 경험과 무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 아니, 시작조차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경험 의존적이다. 그러나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은 의외로 미묘하며, 그것은 결코 과장이어선 안 된다. 이제 지식과 경험의 올바른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식의 탐구 : 경험, 이성의 이중주
최근 과학 철학자들은 과학의 역사가 무척 격렬히 변화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일반인들은 흔히 과학은 세심한 연구에 의해 발견된 진리들을 하나씩 축적해 가는 점진적인 과정이겠거니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 과학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혁의 역사라는 것이다. 과학은 기존의 이론과 그에 상충하는 새로운 사실간의 기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새로운 이론이 그 사실을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다투는 '투쟁'의 장이라는 것이다. 쿤(T. Kuhn)이라는 유능한 과학사가에 의해 실제의 과학사가 그런 것임이 이미 확인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학 이론들이란 언제라도 새로운 사실들의 발견에 의해 판결에 붙여질 수 있는 잠정적인 설명들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학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 무한히 풍요로운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발견된 사실이 기존 이론과 상충할 때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구성함으로써 과학적 이성이 답해야 할 문젯거리가 된다. 과학자들은 그 사실들을 수용해 낼 수 있는 참신한 가설을 새로이 고안해 내는 데 전념하며, 그 결과로서 과학은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과학의 실제 발전 과정이라면, 이 관점에 입각하여 지식에 있어서 이성과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여기서 경험은 단순한 관찰 자료가 아니라 탐구를 자극하는 문젯거리로서 나타난다. 이성은 그렇게 제시된 문젯거리를 해결함으로써 우리의 지적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역할을 맡는다. (앞서 지적되었지만, 경험은 제시된 새로운 이론이 거짓된 것일 때 그를 확인해 주는 기능 또한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은 이성 앞에 사실을 자료 또는 문제로서 제시하며, 이성은 그 경험 속에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의견을 가설로서 투사한다. 이때 투사된 가설의 신빙성에 힘입어 우리는 미래의 경험을 예측하는 힘을 얻게 된다. 공학이란 바로 이러한 예측력을 실용적으로 응용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경험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반면, 이성은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성 단독으로 이런 예측 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경험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제 우리의 논의를 철학사에 비추어 자리매김함으로써 마무리하도록 하자. 지금까지의 논의가 간단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사실 흄(D. Hume)이라는 철학자가 이르렀던 깨달음을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흄은 지식의 탐구가 경험적 자료의 수집, 그로부터의 귀납 추리에 의해서만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고 18세기에 이미 지적하였다. 우리는 태양이 아침마다 떠오르는 것을 계속 보아 왔다는 경험에 근거하여 '태양이 내일도 떠오를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추리 즉 귀납 추리는 그러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매일 아침 해가 떠올랐다는 사실이 오늘밤 태양이 폭발하여 내일 아침에는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흄은 이를 귀납 추리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귀납 추리는 미래에 관한 믿을 만한 진술을 단념해야 하며, 그것은 단순한 형태의 경험주의, 귀납주의가 지식에 대한 올바른 모델일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흄의 결론이 타당함을 다시 확인하고, 그에 대한 대안적 모델_이성과 경험의 역학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지식의 모델을 생각해 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지식, 과학은 단순한 이성의 사변이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요, 경험 사실의 조심스러운 수집, 분석도 아님을 알았다. 지식은 경험에 의해 촉발되고 이성의 합리적 상상력에 의해 살이 붙는 그런 것이다.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창민은 방학 동안에 유럽 배낭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에 대해 석규, 진실과 대화한 내용을 읽어보자.
창민 : 백문이 불여일견이야! 너희도 바깥 세상을 한번 구경해야 돼. 그래야 세계화 시대에 시야를 넓힐 수도 있고... 석규 : 문자 쓰네. 너희 부모처럼 우리 부모도 부자면야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니? 물론 외국에 나가 보면 안 나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말야. 창민 : 내가 뭐 부모에게 돈을 타서 간 줄 아는 모양인데, 사실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모은 돈으로 간 거야. 진실 : 그래도 넌 아르바이트 한 돈을 등록금으로 내지 않아도 되는 것만 해도 다른 사람에 비해 혜택받은 것 아냐? 창민 : 그건 그래! 그런데 사실 나는 유럽에 가면서 최근 신나치주의자들이 외국인들에게 테러를 한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은근히 걱정했거든. 그런데 막상 유럽에 가 보니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할 뿐 굉장히 조용하고 안정되어 있더라고... 석규 : 네 눈에만 그렇게 보였겠지. 네 눈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창민 : 넌 그럼 경험을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석규 : 경험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단편적인 지식은 얻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체계적인 지식은 얻기 힘들지 않을까?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은 말야, 개념적으로 보면 자연의 규칙이나 법칙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는데, 경험으로부터 이러한 규칙성을 알아낸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창민 : 너 또 내가 약한 철학적 논의로 끌고 가는데..., 말려드는 것 같아. 어쨌든 경험이 없는 지식이라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류가 시작되어 경험한 것을 일반화해 법칙을 만들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는 것 아니니?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식이 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석규 : 물론 인간의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결과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가령 무거운 것은 받쳐 주는 물체가 없다면 떨어진다든지 불은 뜨겁다든지 등과 같은 경우처럼...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지식에서는 경험주의가 그럴듯하지만, 조금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경험이 썩 신뢰할 만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어. 경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어. 가령 신기루와 같은 착각 현상이나, 물 속에 넣은 젓가락이 휘어 보이는 현상 등 자연적 현상에서도 경험을 믿을 수 없는 경우는 무수히 들 수 있어. 더욱이 사회적 현상에서는 주관적 편견에 따라 동일한 대상에 대한 경험도 천차만별일 수 있지. 창민 : 그럼 넌 경험이 아니면 인간의 지식의 원천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석규 : 나는 이성이야말로 물리적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의 진정한 원천이라 생각해. 예를 들면 S=1/2gt.t라는 낙하 법칙은 수많은 낙하의 경우를 일반화해서 만든 법칙이라기보다는 수학적 추론에 의해 만든 것이거든. 아마 다른 과학적 법칙도 대부분 수학적 추론에 의해 얻어졌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이성적 추리에 의해서만 지식의 개념에 합당한 보편 타당한 인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야. 반대로 경험에 의해서는 보편 타당한 지식을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해. 창민 : 너는 합리주의를 옹호하는 모양인데, 그러나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수학적 지식이나 이성적 지식은 보편 타당한 지식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는 거야. 삼단 논법의 전형으로 언급되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도 죽는다."라는 명제를 예로 들면,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 이상의 새로운 지식이 없다는 거지. 수학적 지식도 정리나 공리로부터 연역된 체계인데, 아무리 훌륭한 추론을 한다 하더라도 정리나 공리를 넘어선 새로운 지식을 얻지 못한다는 거야. 그럴 때 보편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은 내용이 없이 공허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진실 : 고대의 철학자들이 감각 경험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말의 이빨 숫자를 이성적 추리로 설명하려 했다고 하잖아? 간단히 세어 보면 될 텐데. 어쨌든 두 사람의 주장을 살펴보면, 경험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주는 대신, 이성은 보편 타당한 지식을 얻지만 공허하다는 것인데, 철학 시간에 배운 칸트의 말을 빌려 요약하면,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다."라고 할 수 있겠네? 창민 : 그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리지 말고 더 생각해 보자고. 모든 이론이 경험의 귀납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최소한 경험을 통해 검증되지 않고서는 과학적 지식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진실 : 그것은 조금 다른 수준의 문제인 것 같은데? 경험주의가 철학적 문제라면, 창민이가 지금 말한 귀납주의는 일종의 과학의 방법론으로 '경험적 사실을 관찰, 수집하고, 그것을 분류, 분석해 가설을 제시하며, 그 가설을 실험적 증거를 통해 확인해 이론으로 확립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석규 : 그래. 양자는 조금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귀납주의는 경험주의라는 철학적 원칙이 과학의 방법론으로 해석된 것이라 할 수 있어. 그런 점에서 같이 논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귀납주의라는 것도 여러 가지 한계가 있어. 우선 관찰이라는 경험이 믿을 수 있는지 여부는 별개로 치더라도, 사실을 관찰할 때 세계의 모든 사실을 관찰할 수는 없는 것이거든. 따라서 과학자의 이론적 선입관에 따라 선택될 수밖에 없어. 둘째로는, 관찰된 사실에 대해 하나의 가설만이 나오는 것은 아닐 거야. 가설이란 자연에 대해 제안된 상상적인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험이 가설의 참됨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거야. 경험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가설에 반하는 경험들이 언제나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지. 창민 : 그렇다면 넌 과학적 지식을 형성하는 데 경험이나 관찰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야? 석규 : 경험이 지식 탐구의 출발점도 아니고, 올바른 가설을 제시해 주지도 못하며, 또한 가설의 참을 확인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거야. '미인 박명'을 예로 들어 보자고, 과거에 미인이었다가 일찍 죽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못생긴 여자로 오랫동안 산 무수한 사람들을 예로 든다고 해도,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미인 박명'이라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확증될 수 없어. 진실 : 석규의 주장은 너무 강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인간 지식과 과학에서 경험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우리의 지식 탐구가 경험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경험 의존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경험은 이성 앞에 사실을 자료로 제시하고, 이성은 그 경험 속에서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의견을 가설로 투사한다는 거지. 모든 이론은 잠정적이라는 전제 아래 과학 이론은 새로운 경험에 의해 상충하게 될 때 새로운 가설을 고안하고, 이러는 과정에서 과학이 발전하는 것 아닐까? 창민 : 석규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진실의 결론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석규와 내가 진실이의 좋은 결론을 끌어내는 데 계기가 되었으니까 진실이가 저녁을 사는 것으로 하지. 어때? 석규 : 좋지!!!
토론해 봅시다. 1. 어떤 정보가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을 갖추어야 하는가? 2. 일반화된 지식(이론적 지식)의 예를 몇 가지 생각해 보자. 3. 관찰된 사실과 이론(가설)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는지 구체적 사례와 함께 생각해 보자. 4. 과학 이론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절차에 의해 폐기되는가?
주요 개념 지식, 경험, 이성, 경험주의, 합리주의, 귀납주의, 귀납, 연역
참고 문헌 H.라이헨바흐, '새로운 철학이 열리다', 새길 W.V.O.콰인, S.울리인, '인식론', 종로서적 C.G.헴펠, '자연 과학 철학', 박영사 K.R.포퍼, '과학적 발견의 논리', 고려원 T.쿤, '과학 혁명의 구조', 동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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