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8. 심설 논쟁
3. 심설 논쟁의 전재
화서 학파 내부의 심설 논쟁
이항로의 리기론에서 나타나는 리 일원의 지향은 "리는 존귀하고 기는 천하다"는 주장처럼 가치 의식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심성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주자학에서 인간의 본질 해명이라는 문제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직접적 연관을 갖는다는 점에서 퍽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좀더 강력한 형태로 제기될 때 세계에 대한 이해조차도 인간의 본질 해명이라는 영역에 흡수되고 만다. 이항로의 성리설은 이러한 이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이항로에게서는 심에 관한 주희의 논의 가운데 "심이 일신의 주재"라는 점과 심과 리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으며, 그것은 이항로의 심성론에서 가장 근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즉 심이 일신의 주재라는 면에서 리의 주재가 규정되고 있으며, 아울러 성인의 단계에서 상정되었던 심과 리의 일치가 오히려 보편성을 가지고 이해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항로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심설 논쟁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유중교가 스승의 심설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벌어진 화서 학파 내의 심설 논쟁은 신명과 명덕, 심성물칙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지만, 결국은 일반 사람의 심과 성인의 심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서 학파 내에서의 심설 논쟁은 1886년 겨울 유중교가 스승 이항로의 심설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유중교가 김평묵 및 동문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질정을 청하자 다음 해에 김평묵이 장문의 글을 지어 유중교의 논점을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유중교의 스승인 이항로는 심은 리기가 묘하게 합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심은 리의 측면과 기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항로가 심의 상대적 측면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심에 대한 상대적 이해는 자기 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논의의 기저에는 심의 리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항로의 심설은 심을 리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중교도 스승의 심설이 리로써 심을 단정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며, 이것은 후대에 스승의 뜻과는 상관없이 잘못 이해될 폐단이 있어 스승의 설을 '조보'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던 것이다. 여기서 유중교가 주장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심과 명덕은 분합해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명덕은 마땅히 형이상에 속한다는 것이며, 셋째 심은 마땅히 형이하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평묵은 유중교가 기를 주로 하는 입장에서 스승을 배척한다고 하여 장문의 글로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였다. 김평묵 역시 심을 리와 기의 측면으로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의 측면으로 심을 이해하는 것은 유가의 설이 아니며, 리의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심의 진정한 면목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심을 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지 때문이며, 스승 이항로가 리로써 심을 말한 것은 바로 이 예지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유중교가 스승의 심설에 이의를 제기한 이후 화서 학파의 문인들은 두 입장으로 나누어져 격렬한 서신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유중교와 김평묵 사이의 논쟁은 1888년 유중교가 김평묵에게 '화서심설정안'을 올려 질정을 구하면서 김평묵의 의견에 따라 2개조의 글을 덧붙이고, 1891년 유중교가 김평묵을 다시 방문하여 이견을 조정하여 귀일시킴으로써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논쟁은 두 사람의 제자들 사이로 이어졌고, 김평묵이 죽고 난 이후에도 계속 고조되어 심한 갈등과 분열의 조짐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에 유중교는 1893년 죽음을 하루 앞둔 자리에서 '화서심설정안'을 회수하여 소각시킬 것을 명하기까지 하였다.
화서 학파와 간재 학파의 심설 논쟁
앞에서 살펴본 화서 학파 내의 심설 논쟁에서 유중교가 스승의 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시기를 보면, 유중교가 전우와의 심설 논쟁을 마감한 시기와 일치한다. 유중교와 전우는 1873년부터 14년간에 걸쳐 서신을 통해 논변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유중교의 심설은 김평묵과 논쟁을 벌일 때의 입장하고는 차이를 보이는데, 이것은 유중교의 심설 정립에 전우와의 논쟁이 얼마간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전우는 심성론에서 기호 학파의 전통적인 논의에 따라 "성은 곧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논리를 고수하였다. 여기에서 이 명제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작용의 없음과 있음'이었다. "리는 작용이 없고 기는 작용이 있다"는 주장은 "성은 곧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명제와 결합되어 "성은 작용이 없고 심은 작용이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전우는 심에는 지각과 허령이 있으므로 기라고 하고, 성은 순선한 리이지만 심은 본선한 기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은 성의 절대성에 비해 심이 악으로 흐를 가변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각과 허령이라고 하는 의식의 작용과 가변성은 전우가 심을 기라고 규정하는 데 절대적 근거가 되었다. 심이 일신의 주재가 된다는 것은 이항로와 같이 심을 리와 연관시키는 입장에서는 중요한 입각접이 되었다. 주재라는 말은 리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므로 이항로의 입장에서 심은 리가 되고, 이 때 심과 리의 일치는 보편적 의미를 갖는다. 그 반면에 전우한테서는 심이 일신의 주재가 된다는 것이 성을 전제로 하여 말해졌다. 심이 일신의 주재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성을 따를 때이므로, 이 성을 근본으로 해서 기를 주재하는 것이 심이라고 한 것이다. 성인처럼 심이 리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성인의 경지에서나 가능하며, 그 경우에도 심이 리와 일치한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심이 곧 리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전우의 '심즉리' 혹은 '심성일리'에 대한 이해였다. 따라서 전우에게서 볼 때 심설 논쟁에서 주된 주제로 등장하는 신명, 명덕, 본심 등은 모두 다 리로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우는 신은 리의 묘용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정을 성의 용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곧바로 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명덕이 포함하는 것은 리이지만 곧바로 명덕을 리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여 명덕주리설을 비판하였다. 본심을 태극이라고 한다면 본심이 갖추고 있는 리는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중교는 전우와의 논변중에 자신의 설과 전우의 설에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첫째, 심을 기라고 하는 점에서는 자신도 전우와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다만 전우는 심을 기라고만 여기는 반면에, 자신은 심의 본체를 리라고 하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유중교가 이야기하는 심의 본체는 본심 혹은 명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전우는 리가 무위하다고 할 뿐이지만, 자신은 리를 유위의 주인이라고 보는 점이 다르다고 하였다. 곧 리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기의 작위는 리의 작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우가 작용이라는 점에서 기로 보았던 심은, 유중교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리의 측면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명, 명덕, 본심은 모두 리로 이해되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유중교는 체용, 본말, 능소, 경위 등의 논리를 동원하였다. 14년간에 걸친 유중교와 전우의 논쟁은 유중교가 이항로의 사후 스승으로 모셨던 김평묵의 제문과 관련해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런데 유중교가 전우와 논쟁을 벌이면서 취했던 입장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김평묵과 논쟁을 벌일 때의 입장하고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신명이나 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주 학파와 간재 학파의 심설 논쟁
전우는 이항로와 그 문하인 유중교, 김평묵 등의 심설을 비판한 이후 71세 되는 1911년에 '이씨심즉리설조변'을 지어 이진상의 심즉리설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전우는 '심즉성'을 내세운 불교의 견해와 육구연, 왕수인의 견해를 이진상의 심즉리설과 대비시켜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우의 비판은 곽종석과 그의 제자들로부터 다시 재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진상은 주희의 심에 대한 언급들을 이른바 초년설과 만년설로 구분하고, 심을 리로 인식한 것을 주희의 만년설이라고 보아 자기 설의 논거로 삼고 심즉리설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이진상이 심을 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거는, 심이 일신의 주재라고 하는 점과 심에 지각이 있다는 점이었다. 리는 주재하고 기는 작용하는 것인데 심을 기로 규정하면 기가 기를 주재한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은 심의 체이고 지각은 심의 용이며, 성과 지각을 합하여 심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여, 심의 지각을 리의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는 질이나 기로써 심을 말하는 것은 의가나 불교에서 말하는 심이지 유가에서 말하는 심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심을 리로 규정한 이진상은 심, 성, 정을 동정, 체용, 리일분수의 관계로 설명하고 심, 성, 정을 일리로 파악하였다. 심을 리라고 하는 것은 심의 본체를 두고 말하는 것인데, 성은 미발의 리이고 정은 이발의 리이므로 심, 성, 정은 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진상은 이황의 "심은 리기가 합해진 것"이라는 주장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심지어는 이이의 "심은 기이다"는 주장도 자신의 입장에서 재해석하였다.
전우는 이에 대해 심고 성을 일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군신이 일체가 되는 경우와 같으며, 이 하나가 된 것 안에서 둘을 보아야 한다고 하여 이진상의 관점을 비판하였다. 만약에 이진상의 경우처럼 심, 성이 일리라고 한다면 도, 기라든지 형, 리 역시 둘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심이 곧 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이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성이 곧 리라고 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진상이 비록 육구연이 말한 심은 기이고 리란 것도 진정한 리가 아니라고 한 것은 잘 지적한 것이긴 하지만, 영묘하게 깨닫고 신묘하게 아는 그러한 작용을 리라고 본 것은 역시 육구연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또 왕수인이 심의 본체가 곧 천리라고 주장하는 것 등의 논리에서 볼 때 그것과 이진상의 논의 사이에서 다른 점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역시 마찬가지라고 비판하였다.
곽종석은 이러한 전우의 비판에 맞서 스승 이진상의 설을 따라 심즉리를 주장하면서 전우를 재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우선 영남 학파와 기호 학파의 심설에 대해, 영남 학파는 이황이 "심은 리가 합해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리만을 가지고 심의 진면목을 삼았던 점을 살피지 않으며, 기호 학파는 이이가 "심은 기이다"라고 말하였지만 리기가 합해진 것으로 심을 말했던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심은 기라고 할 수도 있고 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심의 진면목은 바로 리였다. 또 성이 되기도 하고 정이 되기도 하면서 동정을 주재하는 것은 오직 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심의 진면목이라는 것이다. 심의 질적 측면(즉 혈육)은 의가에서 중시하는 것이고, 기적 측면(즉 정신)은 선가에서 중시하는 것이며, 유가에서는 리의 측면을 중시한다고 한다. 따라서 유가에서 심을 말할 때는 당연히 '심즉리'라고 하여야 본체가 서고 갖추어질 것이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곽종성 역시 심, 성, 정을 일리의 관계로 파악하며, 전우가 기라고 보았던 심의 측면은 반대로 심을 리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사려라고 하는 것은 지각의 용이며, 지각은 지의 적이 전일한 심이라고 한다. 이 때 기라고 하는 것은 사려의 도구가 될 뿐이다. 곽종석과 전우가 심설에 관해 직접 논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지만, 전우가 곽종석의 스승인 이진상의 심설을 비판하고, 곽종석이 전우를 비판했던 것은 또 그의 제자로 이어져 학파간의 대립 양상이 뚜렷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 학파간의 차이는 이 시기 심설 논쟁의 대표적인 한 예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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