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68 호
단기 4340. 9. 29 (음력 8. 1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발행지가 길어질 경우 하단부분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작가의 수명과 문학의 깊이/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
인간은 ‘시간의 벽’에 부딪히면서부터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에 눈뜨게 되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축제일이 되면 시간의 변화를 차단하는 가면을 쓰고 영육(靈肉)이 일치되는 춤을 추었으며, 사물의 영원한 현상에 대한 신화를 창조했다.
어찌 그것뿐이랴! 현대 철학자 베르그송은 시간의 흐름을 “바닥과 제방이 없는 강물”에 비유하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변하고 있지만, 지속적인 것이라고 주장했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시간을 초월하는 ‘추억’이란 경험 속에서 지속적인 자아(自我)와 직관의 힘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고 했다. 또 이러한 지속적인 시간 개념을 구체화하고 있는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소리와 분노’의 주인공 틴은 시간의 한계로부터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해 시계를 부숴버리지 않았던가. 시간의 한계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절실한 것이겠지만, 그것은 “삶과 죽음에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지나가는 마상(馬上)의 가인(街人)”과도 같이 자의식이 강한 시인들에게는 피부에 닿을 정도로 절박하고 심각한 문제이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일어난 일이지만 작금의 우리 문단의 일부에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출판계가 작가의 생명을 확대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왔다는 목소리가 높다. 비록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인간의 정신적 산물인 예술 작품을 취급하는 문화계만은 인간을 일회용 소비 상품으로 만들지 않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자제력을 잃은 상업주의 출판사들은 물론 문예지들마저 젊은 독자들을 의식해서 연륜이 쌓인 무게 있는 글보다 새롭지만 가볍고 감각적인 젊은 작가들의 글을 선택적으로 선호해 왔다. 그래서 아직도 가능성이 풍부한 수많은 작가들은 나이 때문에 폐품처리되듯 버림을 당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역사 속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시대’가 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영겁으로 흐르는 시간과 비교해 볼 때, 찰나적인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의 ‘시대’마저 젊음이나 혹은 설익은 ‘젊은 감수성’이 머무는 시간만으로 한정시켜, 인간 정신의 움직임마저 일회용 상품처럼 취하고 버린다는 것은 크나큰 낭비이고 비극이다. 물론 젊은 작가들에게서 일시적으로 참신하고 감각적인 느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원숙한 경험과 지혜는 얻기 힘들다. 세계 문학사에서 정전(正典)에 오른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가들이 원숙한 나이에 접어든 이후에 쓰인 것들이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60이 지난 후에 썼다는 것을 새삼스레 밝힐 필요도 없겠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작가들에게 연륜은 죽음의 자국이 아니라, 경험과 지혜를 축적하는 그릇이자 성숙을 의미한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창간된 계간 문학지 ‘문학의 문학’이 우리문단에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크다. 이 문예지는 새로운 숨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과감히 투자하는 한편, 대부분의 문예지들과는 달리 상업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듯, 젊은 작가들보다 연륜이 깊은 작가와 시인들에게 지면을 대폭 할애하고 있다. 원로와 중견 작가들에게 역점을 두는 것은 나이만 먹으면 경험이 풍부해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극을 부여하여 묻혀있는 창작 에너지를 잠깨워 쓸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을 분리하고 해체하는, 과학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산물은 물리적 현상과 같을 수 없다. 워즈워드가 “분해하기 위해 살해”하는 그 당시 현대인들을 두고 슬퍼한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
|
|
글터 → 명언 / 격언
|
사람은 꿈이 후회로 바뀔 때 비로소 늙는 법이다./ 존 배리모어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넉넉한 마음으로
열 번째는 사람을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하는 일이다. 배우는 학생이 이미 가정 생활을 잘 꾸려 가고 있으면 그것을 사람 대하는 데까지 연장시켜 한결같이 예의를 지켜 나가라. 어른을 극진히 섬기되(침식과 걸음을 모두 어른보다 뒤에 하며 나이가 10세 이상 위이면 형같이 모시고, 배 이상 위이면 더욱 공손하게 대우하여야 한다) 어린이는 자비로운 사랑으로써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가족들끼리 화목하고, 이웃들과는 잘 사귀어 즐거워하는 마음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덕과 학업을 서로 권장하고, 허물을 서로 고쳐 주며, 예의와 풍속을 서로 잘 지키고,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 항상 남을 이롭게 하라. 남에게 이로움이 있기를 생각하여야 하며, 남을 해칠 생각은 털끝만큼이라도 마음속에 품지 말아야 할 것이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7. 서학 논쟁
우리 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도 여느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문화를 소화하고 때로는 배척하면서 사회를 유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나름의 무속 신앙이 있었고 불교, 도교, 유교, 그리고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은, 유입에 실패한 숱한 문화들이 있었다. 어느 민족, 어느 사회든 독창적인 문화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여기에서 다룰 서학은 우리 나라에 유입된 외래 문화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른 문화 유입의 경우에는 우리 민족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수용 또는 배척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냈던 것과 달리, 서학은 당시 정권 담당자들과 민중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 강제적으로 유입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표면적 이유는 서학과 결부된 제국주의의 물리력에 있었다. 어느 봉건 사회와 마찬가지로 조선 사회도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조선 사회의 국가 종교라고도 할 수 있는 유교에 대한 다른 종교의 도전은 곧 정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한 대응은 종교 논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정치권의 세력 향배에 의해 큰 영향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서학 배후에 있던 서양 세력과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의 '서학'이라고 하면 넓은 의미에서는 서양 문물에 관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새로운 종교로서의 천주교를 뜻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많은 사람이 접하였던 천주교와 과학 기술은 그 전래 과정과 영향을 고려할 때 서로 분리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서양의 과학 기술 때문에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 문물에 관대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도 많았고, 또한 천주교를 받아들임은 곧 서양의 자연관, 우주관, 인간관의 수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동아시아에 전해진 천주교는 아직 중세 사회에 뿌리를 둔 것이었지만, 서양 근대 문명을 탄생시킨 문화의 토양이기도 했다. 따라서 천주교에 대한 대응은 곧 서양 근대 문명의 수용 양식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며, 종교로서의 서학과 서양 근대 과학 기술로서의 서학에 대한 차별화 및 그 수용 방식의 이질성에 따라, 조선, 중국, 일본은 그 이후의 역사를 달리하게 되었다.
1. 서학의 전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그의 선배인 루제리(Michael Ruggieri)가 중국에서 활동을 펼친 것은 1583년이었고,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신부들의 업적이 조선에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603년부터였다. 이들은 근대적 과학, 의학 지식과 중국 문화 및 언어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무기로 하여, 중국에 천주교를 이질감 없이 정착시키기 위해 여러 지식인들과 접촉하며 많은 서적들을 중국어로 저술, 번역하였다. 서학에 대한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관심은 1630년 경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 서학에 대한 관심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과학 기술에 대한 것과 종교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중국을 드나들며 천문, 역학, 무기제조술 등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직접 확인한 사람들이 그들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려 적극 노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천주교의 문제는 달랐다. 천주교에서는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유학과 배치되는 점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의 서학 유입은 중국이나 일본과 그 양상이 달랐다. 서양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들의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려고 하였고, 그 도구로서 서양의 발달한 과학 기술을 이용하였으며, 그들과의 경제적 교류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스스로 내부의 요구에 의해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서양인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끌 만한 문물이 조선에 별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에만 선교하면 조선은 저절로 따라오리라는 서양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선교사에 의한 이식이 아니라 독특한 선교 사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논쟁은 당쟁과 연결되어 비참한 교난으로 이어졌다. 그러고는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개방성마저도 닫혀 버린 채, 개항 이후 거의 강제적으로 천주교가 허용될 때까지 종교도 과학 기술도 모두 근대적 변혁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어야 했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호남
본뜻 : 전라남북도를 통틀어 가리키는 명칭으로 호남지방이란 말을 즐겨 쓴다. 말 그대로 보자면 호남은 호의 남쪽이란 뜻으로 금강 이남 지역을 가리킨다. 호남은 원래 공주, 부여 등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참고로 호서는 충청도를, 기호는 경기도와 황해도 남부 일부, 그리고 충남의 금강 이북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오날날에 이르러 호남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따라서 금강의 남쪽 지역인 공주, 부여 등 충남 일부 지역은 호남에 포함하지 않는다.
"보기글"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며 출신 지역을 따지는 사람들이야말로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호남 지방에 내린 소나기로 그 동안의 가뭄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습니다
‘기쁘다’와 ‘즐겁다’
국어사전에서 ‘기쁘다’를 찾으면 “마음에 즐거운 느낌이 나다.” ‘즐겁다’를 찾으면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쁘다.” 이렇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같은 뜻을 지녔다는 소리다. 같은 뜻이라면 무슨 까닭에 다른 낱말을 쓰겠는가? 둘 다 느낌을 뜻하는 말이다. 그냥 느낌일 뿐만 아니라 좋은 쪽의 느낌이다. 마음이, 기분이, 몸까지도 좋다는 느낌이라는 쪽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두 말은 느낌이 오는 뿌리에서 다르다. 좋다는 느낌의 뿌리가 마음 깊숙이 박혀서 몸으로 밀고 나오면 기쁜 것이다. 좋다는 느낌의 뿌리가 몸에 박혀서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면 즐거운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쁘다’는 느낌은 마음에서 오고 ‘즐겁다’는 느낌은 몸에서 온다.
일테면, 달고 향긋한 참외를 맛나게 먹으면 즐겁다. 눈으로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보거나 좋은 영화를 보아도 즐겁다. 이런 즐거움들은 모두 입·눈·귀와 같은 몸이 먼저 좋고 나서 마음으로 좋음이 번져 들어온다. 한편,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탈없이 집으로 돌아오면 어버이는 기쁘다. 몸져누우셨던 어버이가 깨끗이 나아 일어나시면 아들딸은 기쁘다. 이런 기쁨들은 어느 것이나 몸과는 상관없이 먼저 마음속에서 좋고 그런 다음 몸으로 좋음이 번져나간다. ‘기쁨’은 혼자 마음속에 간직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으나 ‘즐거움’은 홀로 가만히 감추고 있기 어렵다. 즐거운 것은 몸과 더불어 바깥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남들과 함께 나눠야 제격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
|
|
글터 → 세계사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 오직 천명에 따를 뿐이다(강태공)
궁팔십 달팔십
'궁팔십 달팔십'은 강태공이 80년을 가난하게 살다가 80년을 영광스럽게 살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가 천하를 평정하는 데 일등공신으로 인정되어, 고향인 상동 지방에 있는 제나라의 제후로 임명되었다. 강태공은 제나라로 가면서 서두르지 않은 채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길 가던 노인이 말했다.
"때란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쉽습니다. 이렇게 늑장만 부리시다니 큰 일을 하러 나선 분 같지 않소."
이 말을 들은 강태공은 한밤중임에 불구하고 부하들을 당장 깨워 출발 명령을 내려 서둘러 달려가도록 했다. 날이 밝을 무렵 강태공 일행은 제나라 땅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랑캐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양측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간신히 오랑캐들을 격퇴한 강태공은 그 고장의 풍습을 존중하면서 제도를 정비했다. 그리고 특산물인 소금생산과 수산업을 크게 장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어 번성을 자랑하게 되었다.
엎지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어느 날 강태공이 수레를 타고 시찰을 나갔다. 어떤 거리를 지나치고 있는데, 낯이 익은 노파의 초라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수레를 돌려 살펴보니 옛날 자기를 버리고 도망친 아내가 아닌가! 그녀는 다시 같이 살 수 없겠느냐고 애원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물을 한 그릇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물을 쏟은 후 그녀에게 그릇에 다시 주워 담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담을 수가 없었다.
"한번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오. 마찬가지로 한번 끊어진 인연도 다시 맺을 수 없소."
|
|
|
글터 → 과학/예술/교육
|
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15장. 노벨 : 그의 인생과 발견 그리고 상에 얽힌 이야기.
이 책에서 설명한 세렌디피티적인 발견자 중에는 대부분이 노벨상으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이 상을 설립한 노벨 자신도 세렌디피티덕을 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발명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나마이트의 발명은 노벨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으며 그 결과 노벨의 특별한 성격과 어울려서 상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매년 노벨상의 뉴스는 전세계를 휩쓸고, 그 수상자들은 매우 유명해짐에도 불구하고 정작 노벨이라는 인물과 그의 인생과 발명 그리고 그의 사상은 일반인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선구자적인 발명가로, 그리고 공업계의 거물로서도 줌더 잘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노벨은 생전에 이미 막대한 부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질병, 비극, 고독, 우울증의 각인이 찍혀져 있었다. 일찍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인명이나 재산을 파괴하는 폭발물을 개발한 그가 그 유산으로 후세를 위해서 과학, 의학, 문학, 평화 등의 분야에 인류의 귀중한 문화적 진가의 옹호자가 되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알프레드 베른하르트 노벨은 1833년 스톡홀름에서 출생했으며, 그해 부친인 임마뉴엘 노벨은 파산을 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허약했다.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모친이 특별히 소중하게 길렀던 은혜 덕분이었다. 네 명의 형제 중에서 알프레드는 모친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으므로 그 역시 특별한 사랑으로 모친에게 보답하였다. 그의 부친은 독학한 발명가이자 기술자였으나 자신의 권익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일도 있었다. 스톡홀름에서 사업에 실패했을 때 채무자로서 투옥될 것을 두려워한 부친은 아내와 세 아들을 두고 핀란드에서 러시아의 페테르브르크로 도망쳐 그곳에서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몇 년 후 러시아 정부의 군용 폭발물로 성공하여 공장의 공동소유자가 된 임마뉴엘은 가족을 페테르브르크로 불러들였다. 알프레드는 스톡홀름에서 정식 학교교육을 2년 정도 밖에 받지 않았으나 그래도 학급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었다. 러시아에서 성공한 부친의 경제력 덕분에 알프레드와 그의 형들은 가정교사까지 둘 수 있었으나 이와 같은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56년에 크리미아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정부는 해군의 수뢰를 제조하고 있었던 임마뉴엘 노벨의 공장에서 손을 뗏고, 임마뉴엘은 두 번째 파산을 했다. 이때 그는 알프레드와 두 형 로베르트와 루드비히를 러시아에 남기고 처와 막내아들 에밀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알프레드는 이미 러시아인 교수와 화학을 연구하였고, 실용적인 기계와 공학에 관해서는 이미 부친의 공장에서 배웠었다. 알프레드는 페테르브르크의 공장을 구하기 위한 자금조달을 위해 파리로 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1861년에 알프레드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몇 년 전에 이태리 화학자 아스타니오 소브레로에 의해서 처음 합성된 새로운 액체 폭발물 니트로 글리세린을 제조하는 부친의 일을 도왔다. 파리의 두 번째 여행에서는 스웨덴에서 소규모의 제품 생산을 다시 시작할 만한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그 2년 후 알프레드가 30세 때, 그의 중요한 발명 중에 하나인 니트로 글리세린 폭약 기폭용으로 뇌산수은의 뇌관을 발명하여 특허를 얻었다. 그 발명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스툭홀름 교외의 헬레네보그에 있는 부친의 낡아빠진 실험실과 공장에서 실시된 50회 이상이나 되는 피땀어린 실험의 성과였다. 비극은 1864년 9월에 일어났다. 폭발로 작은 공장이 망가지고 알프레드의 아우 에밀 노벨을 포함하여 5명이 숨졌다. 이 비극이 계기가 되었는지 부친 임마뉴엘 노벨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8년 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신체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것이 또 알프레드에게 니트로 글리세린을 안전하게 제조하고 수송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력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가업의 모든 책임은 그의 양 어깨에 얹어져 있었다. 그는 철도망을 넓히기 위해 산에 터널을 뚫을 때에 폭약에는 흑색 화약보다도 니트로 글리세린 쪽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스웨덴의 국철에 납득시킬 수가 있었다. 공장을 폭발 사고의 위험 때문에 니트로 글리세린 공장이 가깝게 오는 것을 모두 싫어하여, 실제로 스톡홀름시는 시내에 공장 만드는 것을 허가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굴하지 않고 호수에 정박한 거룻배 위에 공장을 만들었다. 얼마 후, 스톡홀름의 부유한 상인 J.W. 스미트의 원조로 스톡홀름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공장을 세워 그곳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을 50년 이상이나 제조하였다. 두 번째의 공장은 독일의 함부르크 근처에 있는 크륨멜에 세워졌다. 이것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이 널리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시에라 네바다 산지를 횡단하는 중태평양 철도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끔 사고가 발생했으나 광산과 터널공사에 소비되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절약되었다. 그 때눈에 매우 강력한 이 액체는 한동안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이 성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이유 중에는 니트로 글리세린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이 부족하였거나 설명을 무시하였기 때문이가도 하지만, 무엇보다 니트로 글리세린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안정성 때문에 전세계에서 비참한 폭발사간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폭발의 민감도 때문에 니트로 글리세린을 흔히 '변덕쟁이'라고도 했다. 깃털로 살짝 건들기만 해도 폭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함부로 굴리거나 부적당하게 사용해도 아무렇지도 않기도 했다. 그래서 가죽구두에 발라서 광을 낸다거나 마차의 굴대에 윤활유로 사용했다는 보고도 있다. 마지막 재난은 1866년의 폭발사고로, 이 사고로 말미암아 크륨멜 공장이 파괴되었다. 그 때문에 노벨은 더욱 열심히 니트로 글리세린을 안정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에 성공함과 동시에 다이나마이트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노벨이 이 '변덕쟁이' 니트로 글리세린을 얌전하게 길들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모색한 사실에는 다른 설은 없다. 그는 니트로그리세린에 메탄올을 발라 두었다가 폭약으로 사용하기 전에 물로 씻어서 메탄올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용적이지 못했다. 노벨은 다음 방법으로 톱밥이나 목탄, 종이, 심지어는 벽돌가루 등 분말상이나 섬유상의 물질을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 모두 불만족스러운 것뿐이었다.
가연성 물질은 니트로 글리세린과 섞어두면 발화되기 쉬웠고 벽돌가루와 같은 불연물은 폭발력이 떨어졌다. 어떤 설에 의한면 니트로 글리세린의 금속성 용기에 구멍이 뚫려 그 속에있던 액체가 새어나와 금속용기 주위의 패킹에 배어 있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고 한다. 이 패킹의 재료는 규조토로서 독일 북부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값이 싸고 가벼운 다공성 광물이었다. 노벨은 용기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이 새어나와 규조토와 밀가루 반죽처럼 혼합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그가 실험삼아 조사해 본 결과 이것을 압축하면 액체의 폭발력을 유지한 채 작은 덩어리로 만들 수 있으며, 더구나 뇌관으로 기폭시킬 때까지 안전하여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노벨은 열심히 추구하던 문제의 해답을 알아낸 셈이 되고 이것은 유사 세렌디피티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이나마이트가 우연히 탄생했다는 이 설에 대해 납득할 만한 반증이 있다. 노벨 자신이 소리 높여 부정하고 있으며, 신중한 과학적 실험 결과 이상적인 흡착제로서 규조토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된다. 욕심 많고 비양심적인 장사꾼을 상대로 많은 거래를 해 왔으나 노벨 자신은 누가 보더라도 완고할 정도로 정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벨은 다이나마이트 발명 후 수년간 또 새로운 발명을 했으며, 그의 폭약 젤라틴의 발명은 계획적이자 또 어느 정도는 우연이기도 했다. 폭약 젤라틴을 발명한 1875년에 있었던 사건을 노벨 자신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어느 날 나는 실험실에서 유리조각에 손을 벴다. 당시 일반적인 방법으로 다친 손가락에 콜로디온을 발랐다. 콜로디온이란 니트로 셀롤로오스를 에테르와 알콜의 혼합용액에 녹인 끈적끈적한 액체이다. 이 용액은 용매가 증발한 후 상처를 일시적으로 덮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매우 인화성이 강하여 실제로 셀롤로오스의 니트로화의 정도를 더 높이면 강력한 폭약이 되는데, 이것을 면화약이라고 한다. 그날 밤, 손가락의 통증으로 잠이 오지 않자 예전에 생각해 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현안 즉, 니트로 셀롤로오스와 니트로 글리셀린을 결합시켜 무엇보다 강력하고, 안전한 폭약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면화약을 실험해 보았으나 니트로 글리세린과 잘 섞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친 손가락의 콜로디온에서처럼 니트로화의 정도를 낮추면 니트로 글리세린과 잘 섞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새벽 4시에 급히 실험실로 가서 여러 비율의 콜로디온과 니트로 글리세린을 섞어서 실험을 시작했다. 조수가 실험실에 나타났을 때 노벨은 당시 알려졌던 매우 강력한 두 종류의 폭약으로 만든 투명한 젤리와 같은 혼합물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실험해 보았더니 실제로 이 결합물은 어느쪽 단일 성분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했던 실험을 주의 깊게 되풀이하여 강력하고 안전한 최적의 처방법을 결정한 노벨은 폭약 젤라틴의 특허를 1875년에는 영국에서, 또 다음해에는 미국에서 취득했다. 노벨 자신이 우연히 손가락을 다쳐 콜로디온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문제에 관련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폭약 젤라틴의 발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세렌디피티의 또 다른 일면으로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아이디어에 중요한 가능성이 있다고 깨달으면 노벨처럼 즉각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이나마이트나 폭약 젤라틴처럼 니트로 글리세린의 안전한 형을 발전시키고 더욱 개량을 거듭해서 특허를 취득하게 됨으로써 노벨의 폭약사업은 군사적 및 비군사적 이용의 양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스위스의 알프스와 고탈, 심프론, 알베르크 등을 관통하는 터널은 새로운 젤라틴 다이나마이트류의 강력한 폭발력 없이는 도저히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알프레드 노벨은 엄청난 대부호가 된 후에도 내내 고독했으며 괴팍한 성질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기로는 그가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그것이 내년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올린 사람들을 표창하는 상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독자 여러분은 왜 그 많은 재산이 그의 자손에게 넘겨지지 않고 이와같은 목적으로 쓰이게 되었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노벨은 일생동안 병약했다. 때로는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1896년에 사망할 때까지 모친 외에 친숙한 여성이 있었는지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때문에 그는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었다. 50년 이상 지난 후에야 그의 인생에 중요한 여성이 모친 외에 세 사람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그 중의 한 여성에 관한 정보는 관계자가 사망한 후인 1950년까지 노벨 재단의 문서철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최초의 여성은 노벨이 18세 때 파리에서 만난 소녀인 것 같다. 노벨은 젊었을 때 시를 쓰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그의 연인이 되어 그때까지 사막과 같이 황량했던 그의 인생에 크나큰 행복이 깃들었고 '둘이서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소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마도 그에게 최초의 고통스러운 절망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의 이 슬픈 사랑이 다정다감한 청년 노벨의 인생을 결정지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노벨은 43세 때 또다시 파리로 갔으나 비서 겸 가정부가 필요했다. 그의 광고에 베르타 킨스키라는 현명하고 매력 넘치는 젊은 여자 백작이 응모해 왔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가난하지만 고귀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가 파리에 와서 노벨한테서 일자리를 얻은 것은 그녀가 아더 폰 수트너라는 빈의 젊은 귀족과 연애 중이었는데 그의 가족이 그들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인인데다가 총명했고 음악과 어학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어 알프레드 노벨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노벨이 그녀를 비서로 고용했을 당시에는 연애 감정이 없었던 것은 틀림없었던 것 같은데 그는 금새 그녀의 포로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하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다"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에 의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생애를 통한 우정이 싹텄다. 베르타는 파리에 잠시 동안만 있다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가족의 동의를 얻은 폰 수트너와 결혼했다. 그 후 베르타 폰 수트너는 열렬한 국제평화운동의 제창자가 되었다. 노벨도 이에 관심을 같이 했으나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의견을 달리했다. 노벨은 그 후에도 베르타와 서신교환을 계속하였으며, 평화상을 제정하는 데 있어 그가 남긴 유언에 반영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녀가 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르타 폰 수트너는 1905년 이 노벨평화상의 다섯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베르타가 파리를 떠난 잠시 후에는 세 번째의 여성이 노벨 앞에 등장했다. 그녀는 아마도 노벨이 가장 정렬을 쏟았던 여성이었으며, 반면에 또 가장 실망을 안겨주었던 여성이기도 하다. 1876년 가을, 노벨이 43세 때 오스트리아의 휴양지에 체재중인 그를 도와주고 있는, 사업상 알고 지내는 사람의 부인에게 줄 꽃을 사기 위해 꽃집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소피 헤스라고 하는 유태인 노동자의 딸인 20세의 아담한 미인과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많은 편지나 서류는 1950년에 밝혀졌는데, 그것에 의해 친밀한 교재를 통해 가정에서의 평안과 휴식을 얻으려고 하는, 교양과 자제심과 부를 고루 갖춘 총명한 남성과 매력적이지만 인생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교양없고 자제심도 없는 젊은 미인과의 정상적이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폭로되었다. 노벨은 그녀를 처음에는 파리의 훌륭한 아파트에 살게 하다가, 나중에는 빈 가까이에 있는 이슐의 별장에서 하인을 두고 살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사업으로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은 혼자 내버려 두었다. 행복한 시기가 얼마만큼은 계속되었으나 운명이 정해져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18년 후에 예상했던 대로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피 노벨 부인(공식적인 결혼은 안했으나 알프레드에게 온 수백 통의 편지 겉봉에는 그와 같이 쓰여져 있다)은 유럽 주변의 좋은 휴양지에서 젊은 추종자들과 지내게 되었다. 노벨은 방자하고 놀러만 다니는 말괄량이를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성이 되게 하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그것마저 실패로 끝났다. 소피는 드디어 젊은 헝가리 장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그에게 고백했다. 노벨은 결국 소피의 교육을 체념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충분한 연금을 지불하였다. 소피는 그 헝가리인 장교와 결혼을 하기는 했으나 함께 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노벨이 18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로부터 돈을 빼앗아 갔다. 그 후에도 그녀는 유서에 정해졌던 금액보다도 더 많은 돈을 갈취하였고, 만일 그것이 안되면 노벨이 그녀에게 보낸 216통의 편지의 출판권을 매각한다고 협박했다. 오랜 교섭 후 소피는 편지를 모두 돌려주는 대신에 노벨 생전에 그에게 받아 왔던 연금을 계속해서 받는다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이탈리아의 산레모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1896년 사망했다. 노벨은 생의 후반기에 몇 번인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협심증으로 괴로워했다. 죽음 직전에 쓴 그의 편지에는 "니트로 글리세린을 내복하라는 지시를 받다니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약제사나 대중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트리니트린(Trinitrin)이라고 부르고 있지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벨은 사망하기 전 2년 동안은 우울증이 없어진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인 보장을 한다는 조건으로 소피와의 관계를 청산한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산레모의 별장이 마음에 들었으며, 스웨덴의 보폴스 공장을 사들였을 때 인접한 장원 영주관에 임시 숙소를 마련하고 실험을 위한 연구실을 만든 일도 있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젊은 조수 라그너 숄만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는 후에 노벨의 유언 집행인이 되었다. 1895년 가을, 노벨은 2개월간을 파리에서 보내고 노벨재단과 노벨상의 기초가 되는 유언을 세밀하게 작성했다. 그는 이것을 변호사의 도움없이 혼자서 스웨덴어로 썼다. 이 유언과 재산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 때문에 곧 화제의 선풍을 일으켰으며, 그의 유언이 실현되기 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그가 사망했을 때는 처도 자식도 없었으며 그의 모친과 형제도 모두 사망하고 아무도 없었다. 조카나 그의 가족에게는 타당한 금액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재산은 유언집행인에 의하여 안전하게 투자되어, 그 이자는 매년 그 전 해에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최대의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수상하기로 한다. 또한 이자는 5등분 하여 아래와 같이 분배할 것, 즉 일부는 물리학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또는 발명을 한 사람에게, 또 일부는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 또는 개량을 한 사람에게, 일부는 생리학 또는 의학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그리고 일부는 국가간 우애의 촉진이나 상비군의 폐지나 삭감 및 각종 평화회의의 개최나 진전에 가장 많은, 또는 가장 뛰어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할 것.
노벨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인 국가적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은 유서가 공개되자마자 비난을 받았다. 스웨덴의 언론은 스웨덴이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국제적 활동 쪽을 존중한다는 것은 애국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노벨이 평화상의 전형을 노르웨이 의회에 맡긴 것은 당시의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긴장된 관계 때문에 더욱 불쾌하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유언집행인과 가족과의 격심한 의논이 있은 후 상의 운영은 스웨덴 정부의 관리하에 두기로 하되 수상자의 지명과 전형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기로 한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뜻에 따른 형태로 노벨재단이 설립되었다. 최초의 수상은 1901년에 있었다. 노벨은 그의 막대한 재산을 사후 기증에 의해서 그가 자기 인생에서 할 수 없었던 것, 즉 '인류의 복지에 최대의 공헌'을 할 것과 특히 '국가간의 평화와 우애를 조장'할 것을 희망했다. 가장 강력한 군사용 폭발물을 발명하여 팔면서도 그는 그것들이 전쟁을 방지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1892년에 베르타 폰 수트너가 노벨에게 스위스에서의 평화회의에 참가하도록 요청했을 때 노벨은 이를 거절하면서 "나의 공장이 오히려 당신들의 회의보다도 빨리 전쟁을 종결시킬지도 모릅니다. 두 패의 군대가 서로가 서로를 한순간에 파괴시킬 수 있게 된다면 모든 문명국은 전쟁을 두려워하게 되어 군대를 해산시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것은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 노벨의 다이나마이트나 폭약 젠라틴의 강력성을 비교해 볼 때 그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원자폭탄이 발명되었으며, 그 후 개발계획에 관여한 사람들로 구성된 원자과학자협회는 미국과학자협회(FSA)로 발전했다. 그 주된 목적은 국제 군비 관리이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사람과 귀신의 길이 다르다"며 귀신을 물리친 성수침
성수침(1493-1564)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중옥, 호는 청송이다. 풍채와 자품이 화기롭고 순수하며 학문과 행실이 순진하고 모든 것을 두루 갖추었다. 대신이 세속을 떠나 고상하게 사는 그의 청덕을 천거하여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당세의 운둔한 현인인 일민(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파묻혀 사는 사람)을 논할 적에 성수침을 으뜸으로 삼았다. 벼슬은 적성현감에 이르렀다.
백악산 밑에 살 적에 황혼 무렵 혼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물체가 집의 한쪽 구석에 와 서 있었다. 그 물체는 몸에 검은 무명 이불을 둘렀는데 그 길이가 발꿈치에 이르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땅에 드리워서 바람에 따라 들쭉날쭉하고, 어지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옥고리 같은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나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성수침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묵묵히 있으며 대답하지 않자, 성수침이 다시 말하였다. "앞으로 오너라" 마침내 그 물체가 창 앞에 가까이 왔는데,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네가 만일 도적이라면 우리 집에는 물건이 없고 네가 만일 귀신이라면 사람과 귀신의 길이 다르니 속히 가거라" 그가 말을 마치자, 그 물체가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가 버렸다.
72세에 죽으니 좌상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
|
|
글터 → 이글저글
|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어떤 사태나 국면이 크게 그리고 극적으로 변동하는 것을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한다. 16세기 폴란드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를 충실히 관측한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이 지구도 천체의 하나로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는 소위 지동설이었다. 원래 지동설은 희랍의 철학자나 과학자에 의해서도 추정되어왔지만 기독교의 세력이 확고해짐에 따라 교회는 이를 이단시하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권위적으로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공표하지 않고 있다가 죽기 직전인 1543년 '천체의 운행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와 함께 당시의 교황 '바우로' 3세에게 자기 병명을 담은 헌사를 바쳤다. 그 헌사 덕분에 '코페르니쿠스'는 아무런 탄압도 받지 않고 평온한 인생을 마칠 수가 있었다. 교황은 이 논문의 발표와 동시에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인 효과로써 세계관의 180도 전회가 이루어졌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
|
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두번째 이야기 맡겨놓은 돈
스페인 남자 한 사람이 메카로 가던 도중 이집트에 들렀다. 그는 인적이 드문 마을이나 사막을 지나다가 도둑을 맞거나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여행 경비에 필요한 돈만 남겨놓고는 믿을 만한 이집트인에게 돈을 맡겨 놓기로 작정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이집트인이 정직하고 의리 있고 깨끗한 성격을 가졌다고 했다. 스페인 남자는 그 말을 믿고 은화 이십 마르코스를 그에게 맡기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는 메카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이집트 인을 찾아가 자기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집트인이 음흉한 마음을 먹고는, 이런 사람은 본 적도 없다면서 자기한테 돈을 맡기지 않았다며 잡아떼는 것이었다. 스페인 남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다가 동료들에게 돌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 남자가 얼마나 정직하고 덕이 많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인데 그런 짓을 하겠냐면서 오히려 그가 하는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인을 다시 찾아가 더욱 겸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사정을 했다. 그렇게 하면 자기 돈을 돌려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예를 갖췄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기꾼은 그가 사정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돈을 맡아두었다는 사실을 더 완강히 부인했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스페인 남자가 자기 명예를 더럽힌다며 그를 고소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스페인 남자는 기가 푹 죽어 돌아가다가 어느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수녀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있던 노파는 외국인이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하면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스페인 남자는 노파에게,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 이집트인과 자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마음씨 좋은 노파는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하늘이 도와줄 테니 희망을 가지라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사실을 밝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노파는 우선 남자에게 믿을 수 있는 고향 친구를 데려오도록 하고는 그에게 자기의 묘안을 일러주었다.
"당신은 상자 네 개를 고급스럽게 색칠한 다음에 안은 조약돌들로 채우고 위는 은과 비단으로 덮어서, 당신 돈을 가로채려 했던 그 사람 집으로 가져가도록 하세요. 당신 친구가 그 이집트인에게 보물로 가득 찬 상자를 맡기려고 한다는 것을 믿게 해야 해요. 그리고는 사람들이 상자를 다 운반했을 때 당신이 그 집에 나타나 돈을 요구하는 거예요. 하느님이 도우시면 당신은 돈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스페인 남자는 노파가 시킨 대로 일을 준비했다. 노파는 그의 친구와 함께 이집트인의 집으로 상자를 옮겨놓고 그 사기꾼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여기 이 사람들이 금은 보화를 잔뜩 가지고 온 스페인 상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메카로 가려던 차에, 어르신이 정직하고 의리 있으며 성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네가 돌아올 때까지 상자 네 개를 어르신께 맡기려고 합니다. 이 보물들을 가지고 사막을 통과하다가 도둑맞을까봐 두려운 거지요. 어르신께서 부디 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들만 아는 비밀로 했으면 합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네가 그렇게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상자를 방에 집어넣고 있는데 갑자기 먼저 돈을 맡겼던 스페인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노파가 시킨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자기 돈을 돌려달라고 공손히 요구했다. 돈을 맡긴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었던 이집트인은 그가 보물상자를 맡기러 온 사람들에게 자기 얘기를 나쁘게 하거나, 소동을 피울까봐 덜컥 겁이 나 이렇게 말했다.
"아이구, 나한테 은을 맡겨놓고 가서는 이제야 오시면 어떡합니까! 당신이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페인 남자에게 돈을 돌려주었다. 그는 스페인 남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보물 상자를 맡기러 온 사람들이 자기를 믿지 못해 보석을 맡기지 않고 그냥 돌아갈까봐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노파는 그 불쌍한 남자가 돈을 되찾는 걸 보고는 안심한 기색으로 사기꾼에게 보물 상자들을 맡겼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노파는 이렇게 재치와 속임수로 스페인 남자가 은을 되찾도록 도와주었다.
* 주위와 평판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늘 기대에 어긋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
|
|
글터 → 국사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2. 도둑맞은 역사와 기자 (기자증후군은 소중화, 사대주의에 눈먼 역사적 실수)
기자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배척하는 사람들
잘 알려진 대로 기자는 은나라 말기의 지성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역사에서도 한동안은 왕검 이후 천년의 세월을 감당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그런 평가는 대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의문을 풀어가기 위해 먼저 우리는 기자를 높이 평가한 중요한 문헌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근조선(고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1392 년에 세워진 왕조를 근조선으로 부르기로 한다.) 중기의 당파정치에서 동인의 지도자였으며, 임진전쟁 때 재상을 맡기도 했던 윤두수는 "기자지"를 지었다. 또 '주기론'을 주장한 근조선의 이름난 성리학자 이이도 "기자실기"를 지었다. 그밖에도 기자를 높이 평가한 옛 문헌은 상당히 많다. 직접적으로 기자를 다룬 문헌들 이외에도, 기자에 대한 이야기는 숱한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청주한씨와 행주기씨의 "세보"에서 41 대로 이어지는 기자조선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조상인 기자를 고조선의 정통 계승자로 설명하고 있다. 관찬 역사서인 "고려사"에도 1102 년 10월 기자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평양성 밖 기림리에 기자를 모시는 사당인 숭인전을 세웠다. 고려시대에는 그 사당에다 '유향전'이라는 이름으로 땅 50결에 대한 수조권(소작인으로부터 지대를 징수할 권리)을 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숭인전의 책임자를 숭인감이라 부르면서 기자의 후손인 선우씨 일가에게 그 벼슬을 대물림하도록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숭인전이 있는 자리가 기자의 묘터였다는 이야기를 마치 확실한 사실처럼 퍼뜨렸다.
이처럼 기자에 대한 숱한 찬양기록과 여러 가지 숭배현상들이 근조선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나타난 점과 그 배경을 확인한 뒤, 그것을 근조선의 '기자증후군'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증후군은 주로 성리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렇다고 몇몇 성리학자들만의 특별한 증상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만든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근조선의 통치자들은 앞장서서 이런 증후군을 부채질했으며, 마침내 기자를 왕검의 유일한 정통 계승자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를 왕검보다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즉 기자가 한반도로 이주한 덕분에 '동방예의지국'이 되었다고 하면서, 근조선이 '소중화'임을 자랑했던 것이다. 기자를 우상화하는 일은 성리학의 정치적 명분, 곧 중화사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겨레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소중화 의식, 그 소중화 의식은 단순한 사대주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혈연적 뿌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자기 합리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근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사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이다. 그는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 "조선경국전"을 지으면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까닭이 '기자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한편에서는 기자의 한반도 망명설을 부정하고 기자를 배척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 또한 기자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다. 나라가 위기를 맞이하여 겨레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을 때, 민족사학자들은 한결같이 기자를 거부했던 것이다. 예컨대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자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이 나라의 소중화적 정통성도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렸다.
그렇다면 기자를 끌어들여 소중화의 구호를 합리화하려던 성리학자들의 이야기는 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기자를 겨레역사에서 몰아내어 민족의 자주성을 일깨우고 정통성을 바로 세우려던 민족사학자들의 주장은 모두 타당한 것일까?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주장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