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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66 호
단기 4340. 9. 26 (음력 8. 1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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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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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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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사람은 코미디언, 사람들로하여금 생각한 뒤에 웃게 만드는 사람은 유머리스트./ 조지 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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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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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가장 좋은 친구
여덟째는 벗을 선택하는 일이다. 옳게 사는 법과 공부의 의문을 해결하는 것은 비록 스승을 통해서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서로 은혜를 입고 돕는 것은 진실로 가장 좋은 친구에 의지하게 된다. 배우는 학생은 반드시 충성과 신의,, 효도와 우애가 중요하다. 품행을 단단하고바르게 해서 듬직하고 착실한 학생을 선택하여 벗으로 삼는다. 잘못이 있으면 서로 경계하고 서로 철차탁마(갈고 닦아서 가꾸는 일)하여 친구 사이의 의리를 가꾸고 지키라. 만약 뜻을 세움이 굳세지 못하고 어떤 일을 추진하며 정리하는 힘이 부족하거나 떠돌아다니면서 즐겁게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으면 그런 친구는 멀리하라. 말이나 기운만 숭상하는 자도 모두 벗으로 사귀지 말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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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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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6. 인물성동이 논쟁
2. 논쟁의 전개
성 개념의 다의성
주자학에서 성이란 인간 또는 사물 안에 내재된 리를 가리킨다. 성은 구성상으로는 '기 안의 리'인 셈이지만,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동론을 주장하는 측과 이론을 주장하는 측이 이용하는 논거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명은 영과 같고, 성은 곧 리이다. 천은 음양오행으로써 만물을 화생하게 하지만, 기로써 형태를 이룰 때에는 리 역시 부여되니 마치 명령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에는 각기 부여된 리를 얻어 가지고 건순오상의 덕을 삼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성이다.(주희, "중용장구", '천명지위성'의 주)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성이 없을 수도 없고 기가 없을 수도 없다. 그러나 기로써 말하면 지각 운동에서는 인간과 사물에 다름이 없는 듯할지라도, 이로써 말하면 사물이 어찌 인의예지를 온전하게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성이 선하며 만물의 영장이 된 까닭이다. 고자는 성이 리임을 알지 못하고서 이른바 기를 리에 해당시켰다.(주희, "맹자집주", '고자장구' 상, '견지성유우지성'의 주)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리를 얻은 다음에 건순오상의 성을 이루게 되고, 반드시 기를 얻은 다음에 혼백오장백해의 신체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그 리로 말하면 만물의 근원은 하나이므로 참으로 사람과 사물은 귀천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기로 말하면 기의 정하고 통한 것을 얻어 사람이 되고, 그 편하고 색한 것을 얻어 물이 된다. 그러므로 귀천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주희, "대학혹문", 4쪽)
"중용"의 주석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모두 천으로부터 리를 부여받아 성으로 삼고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의 성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맹자집주"에 의하면 부여받은 리의 차이에 의해서, "대학혹문"에 의하면 기의 차이에 의하여 인과 물이 달라진다. 성이란 리가 기와 결합되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므로 리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와 결합된 리는 다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와 성의 다중적 의미에 대한 주희의 혼용이 문제된다. 만물 생성과 변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리는 우주 전체에 관통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개체 내의 리인 성도 동일하다. 그러나 각종의 사물이 유적 특성을 이루게 하고, 또한 각각의 개체이도록 하는 원리를 성이라 할 때, 이 성은 사람과 사물에서, 나아가 각각의 개체에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차이의 원인을 기라고 하든 리라고 하든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이러한 두세 가지 의미가 내포된 성 개념을 사용하는 한 인물성동이 논쟁의 전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을 보는 관점에 따라 본원적인 리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각 종류의 유개념 또는 개별적 특성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는 것은 이 논쟁에 참여하는 주자학자들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그 중 어느 관점을 택하며, 굳이 그 관점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있다. 한원진은 성삼층설로 이를 해명하려 하였다. 기질을 초월하여 말할 때는 만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질과 같이 있는 것으로서의 리인 성을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며, 기질과 섞여 있는 것으로써 말하자면 모든 개체의 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이간은 '일원'과 '이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였다. 근원으로 말하자면 만물에 다름이 있을 수 없고, 기질에 구애됨으로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이 다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음을 인정하는 두 사람이므로 결국 논쟁의 쟁점은 어느 관점을 위주로 보아야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간은 '일원'의 관점을 택하였다. 성은 곧 리이므로 일원의 관점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원진은 성을 기와 결합된 리라고 보면서 '인기질'의 관점을 택하여 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름을 주장하였다. 리는 기와 상대되는 것이고 성은 기와 결합된 리이므로 우주의 보편 원리로서의 리와 개별성 또는 유개념으로서의 성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통기국
서로의 관점을 인정하면서도 의견 대립을 이루는 양측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또 하나의 논거가 있다 . 그것은 이이의 리통기국설이다. 이이로부터 비롯된 기호 학파의 권상하 문하에서 수학한 이들이 이이의 학설을 자신들의 논거로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같은 학설을 양측에서 똑같이 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은 이이의 리통기국설에 어떤 개념의 혼란이 내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들 사이의 논쟁의 쟁점을 파악하는 데에도 좋은 단서가 된다. 이이의 리통기국설은 리의 무형무위한 특성과 기의 유형유위한 특성에 기초하여 리기의 불상잡, 불상리한 구성 관계를 리일분수의 체계에 따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리통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국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사이의 성도 다르다. 따라서 리통에 따르면 인물성 동론이 지지되고 기국에 따르면 인물성 이론이 지지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리통기국은 인물성동이 논쟁을 야기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논쟁을 하나의 체계 속에서 포용할 수도 있는 상위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논쟁의 양측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서로 달랐다. 이간은 일원과 이체의 구분 가운데 일원의 입장에서 리통을 이해하였다. 성은 기와 결합된 리이지만 리의 온전한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기와 섞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원진은 통과 국을 각각 리와 성에 대비시켰다. 성을 리가 기와 결합되어 변화된 것으로 보는 한원진은 초형기로서의 리와 인기질로서의 성을 각각 리통과 기국에 대비시킨 것이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이해에서도 나타난다. 한원진은 현상계의 인간과 사물에서 리만을 가리킨 것을 본연지성, 리기를 함께 가리킨 것을 기질지성이라고 하고 인기질의 관점에서 기질지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한원진처럼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을 구분하여 기와 별개로서의 리를 따로 끄집어 내어 그것만을 본연지성이라 한다는 것은 이간이 보기에도 성이라고 하기가 곤란하였다. 이간은 기와 분리된 리를 성이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와 결합된 리로서의 성이 본래의 리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리와 기가 공존하고 있는 리기 동실, 심성 일치의 상태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본연의 심에 나아가서 리만을 가리키면 본연지성이고, 기질의 심에 나아가서 리와 기를 함께 가리키면 기질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원진의 격렬한 비판을 유발하였다. 물론 이간은 자신의 이야기가 심이 두 개 존재한다는 말은 아니라고 덧붙였지만, 한원진은 이러한 이간의 이론이 결국은 이심이성론이라고 비판하였다. 한원진은 하나의 물, 하나의 심에서 리만을 가리키느냐 아니면 리와 기를 함께 가리키느냐 하는 것으로써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고 기질지성의 관점을 택한 것이다. 이간은 자신의 일관된 리기의 불상리, 불상잡 및 리기 동실, 심성 일치의 원칙은 고수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인, 물 안에 두 개의 심과 두 개의 성이 존재하게 된다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오상론
이상에서 성에 대한 관점, 리통기국 개념에 대한 이해,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개념 규정 등에서 이들 둘의 입장 차이는 분명히 드러났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 따라, 이들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를 오상에서 찾았다. 한원진에 의하면 리는 기와의 결합에 의해 성이 되고 기의 청탁수박에 따라 오상을 가짐이 다르다. 사람만이 빼어난 기를 얻은 까닭에 오상도 온전히 갖춘 반면, 나머지 다른 사물들은 거친 기를 얻었으므로 다섯 가지 오상 중 일부만 갖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었고 그 근원을 세부적으로 지칭할 때 오상이라고 하는 것이니, 인간과 사물이 오상을 온전히 받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간에 따르면 오상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은 태극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건 사물이건 오상을 온전히 갖추고는 있지만, 다만 겉으로 드러남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간에 의하면 우주만물의 이치인 리가 기 속에서도 그대로 보존되므로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그 드러남에서 보일 뿐이다. 그러나 한원진의 경우 리가 기 안에 들어갔을 때는 그 원인이 기이든 리이든 이 때의 리는 이미 기와 결합하면서 리와는 다른 성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이 성이 온전한 오상을 갖추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발의 심체 문제
사람과 사물의 성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단지 존재론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은 가치론의 문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성에 윤리적 가치 실현 능력인 오상이 어떻게 갖추어져 있는가를 문제시하는 한편, 이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선악의 가치 실현 가능성을 미발, 심체의 문제에서 다루었다. 성을 기와 결합된 리로 보는 한원진은 심체도 성과 대비되는 기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리만을 가리키면 본연지성이고 리기를 함께 가리키면 기질지성이지만, 한원진이 사람과 사물의 성을 이야기할 때 택하는 관점은 기질지성이었다. 그러므로 심체에서 기가 발하지 않았을 때에도 기의 선악이 드러나지 않을 뿐 본체에 기의 청탁미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원진은 미발을 외물에 접촉하지 않은 고요한 상태에서 기가 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간은 일반적인 기와 심의 기를 구분하고 있다. "기는 하나이지만 그 거친 것을 마하면 혈기이고 그 섬세한 것을 말하면 신명"인데, "심이라는 것은 혈기가 아니고 신명"이라는 것이다. 한원진과는 달리 심체의 기와 일반적인 기질을 구분한 이간은 다시 진정한 미발을 혈기와 뒤섞여 있는 미발과 구별하였다. 이간에 따르면 한원진은 단지 발하지는 않았지만 혈기가 심에서 작용하는 것을 미발이라 하였다. 반면에 자신이 말하는 미발은 단지 외물에 접촉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을 따르는, 리의 순수한 실현 가능태를 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각각 '부중저미발'과 '중저미발'이라 하여 구분하였다. 이간 자신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미발 심체란 중저미발을 말하는 것이므로 미발 심체는 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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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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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
본뜻 : 글자 그대로 입에 풀칠을 한다는 뜻이다.
바뀐 뜻 :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일 또는 밥벌이를 이르는 말이다.
"보기글" -그 정도의 월급 가지고는 우리 다섯 식구의 호구를 잇기도 어렵습니다 -자네도 뭔가 호구지책이라도 하나 가져야 하지 않겠나?
언어의 가짓수
오늘날 세계에서 쓰이는 언어의 가짓수는 얼마나 될까? 언어학 책이나 백과사전을 살펴보면, 적게는 3천, 많게는 6천 언어로 들고 있어 제각각이다. 왜 이렇게 엄청난 숫자 차이가 날까? 그 까닭은 언어와 방언의 차이가 불분명한 데 있다.
방언이란 한 언어의 하위 부류로서 그 차이가 아무리 뚜렷하더라도 서로 뜻을 주고받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는 크지 않다. 그러나 영어와 우리말, 우리말과 일본말처럼 서로 다른 언어는 그 차이가 너무 커서 두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뜻을 주고받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방언과 언어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흔히 의사소통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꼽는다. 말 차이가 나는 두 지역 사람이 만나 의사소통이 되면 그 두 지역 말은 한 언어의 방언이며,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별개의 언어가 된다.
이런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때도 있다. 한 언어에 드는 방언이면서도 소통이 안 되는 때가 있고, 두 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자기 언어를 쓰면서도 소통이 되는 경우가 있다. 첫째 보기로는 중국어를 들 수 있다. 표준 중국어인 베이징 방언과 남쪽의 광둥 방언은 같은 중국말이면서도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다. 둘째 보기로는 북유럽의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언어를 들 수 있다. 독자적 특징을 가진 별개 언어들인데 이 세 나라 사람들은 서로 제나라 말을 쓰면서 자유롭게 의사를 통한다. 이런 사정으로 세계 언어의 가짓수를 정확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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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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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 오직 천명에 따를 뿐이다(강태공)
천하를 낚아올린 강태공
강태공은 동해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문을 좋아해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원래 가난한 집이었지만, 나중에는 끼니조차 이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몰래 도망쳐 버렸다. 그래도 그는 학문에만 매달렸다.
서백창과의 만남
한편 유폐되어 있던 서백창은 그 와중에서도 오히려 학문에 정진하여 드디어는 고금의 명저 "주역"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서백창의 부하들이 서백창을 구해내기 위해 주왕에게 미녀와 명마들을 뇌물로 바쳤다. 그러자 주왕의 입이 벌어졌다.
"뭘, 이런 선물을 가져오는가. 명마들에 미녀까지. 이제 서백창도 많이 뉘우쳤겠지."
그러면서 서백창의 유폐를 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서백창은 풀려나 자기 영지인 주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서백창은 정치를 훌륭히 펼쳐 주나라의 세력은 날로 커지게 되었다. 또한 서백창은 나라를 더욱 발전시키려면 인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고 천하의 인재를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강태공이 시장에 나갔다가 서백창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부터 강태공은 강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때 강태공의 나이는 이미 70세가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강태공은 하루 종일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강태공은 모자도 팽개치고 옷까지 벗어버리며 화를 터뜨렸다. 지나가다 이 모습을 본 어부가 다가오더니,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강태공이 시키는 대로 하니 과연 잉어가 걸려들었다. 그리고 그 잉어의 배를 갈라보니, "장차 큰 귀인이 될 것이니라."라는 글귀가 나왔다.
한편 서백창은 사냥을 즐겼다. 하루는 사냥에 나가기 전에 점을 쳐보니, "얻은 것은 용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며, 큰 곰도 아니다. 사냥에서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데 필요한 신하이로다."라는 점괘를 얻었다. 그날 따라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 그냥 돌아오려는데, 멀리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멀리 보기에도 풍채가 범상치 않았다. 서백창이 바로 달려가 그 사람과 몇 마디 얘기해 보니 과연 뛰어난 인물이었다. "선조들께서 우리 집안에 머지 않아 큰 성인이 나타나 나라를 일으킬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그 성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궁궐로 모셔서 스승으로 삼았다. 그 사람이 바로 강태공이었다. 서백창은 그에게 태공망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는데, 이 말은 서백창의 아버지인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이후 강태공은 서백창을 도와 주나라를 크게 융성하게 했으며, 특히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그래서 강태공이 썼다는 병법책은 오늘날까지 전설적인 병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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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13장. 합성연료와 합성안료를 둘러싸고
모브의 발견. 1856년 갓 18세가 된 윌리엄 퍼틴은 왕립대학(Royal College)의 부활절 휴가 동안에 자기집 실험실에서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키니네(quinine)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유명한 독일인 화학자 A.W. 호프만 교수의 조수를 하고 있었다. 영국의 왕자 앨버트는 호프만을 왕립대학의 초대장으로 독일의 본에서 초청했다. 호프만은 강의 중에 말라리아에 유일하게 효과적인 이 키니네가 동인도에서 자라는 킨키나나무 껍질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키니네를 인공적으로 합성시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천연 키니네가 어떻게 해서 우연히 발견되었는가는 제 3장을 참조할 것). 퍼킨은 제철공업의 값싼 부산물인 콜타르(coal tar)에서 나오는 톨루이딘(toluidine)을 원료로 해서 당시 유행했던 '가감법'에 의하여 키니네를 합성하려고 생각했다. '가감법'이란 출발원료와 목적원료의 단순한 분자식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알려져 있던 톨로이딘과 키니네의 분자식의 차이에서 퍼킨은 톨루이딘에 몇 개의 탄소원자와 수소원자를 가하고 그 후에 산소원자를 몇 개 가해서 원소의 형과 수를 키니네와 같게 하면 키니네를 합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원자가 모여서 분자의 3차원 구조가 형성된다는 오거스트 케클레의 이론이 발표되기 수년 전의 일이었다(케클레와 분자구조에 관해서는 제 14장을 참조할 것). 퍼킨의 계획이 얼마나 소박했는가는 키니네의 구조식 결정이 1908년에 있었으며 그 합성에 이르러서는 매우 우수한 화학자들의 도전을 1944년까지 받아 온 것만으로도 알만하다. 퍼킨은 계획한 대로 실험을 실시하여 처음에는 3개의 탄소와 4개의 수소를 아릴(allyl)기로 해서 톨로이딘에 가한 다음에 강력한 산화제인 2크롬산칼륨으로 처리했다. 그 결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적갈색의 진흙이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출발물을 좀더 간단한 아닐린(aniline)으로 바꾸어 보았다(실은 퍼킨이 사용한 아닐린은 소량의 톨루이딘을 함유하고 있으며 이것이 보라빛 염료의 합성에 필수였다). 이번에는 이전의 생성물보다도 더욱 가망성이 없을 것같은 새까만 고체였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기 전에 살펴보니 이것을 씻어내기 위해서 사용한 물이나 알콜이 보라빛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예상외의 결과에 흥미를 느낀 퍼킨이 이 보라색 용액을 조사해 보니 이것이 천을 물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퍼킨은 바로 흑색 혼합물에서 보라색 염료를 추출하는 실용적인 방법을 발견하여 이 합성 염료의 샘플을 영국의 유명한 염료공장으로 보내고 명주와 무명에 시험을 의뢰했다. 그 평가 결과, 명주에는 매우 유망하지만 무명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명에도 전 처리를 하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이와 같이 키니네를 합성하려던 소박한 시도가 우연히 인류 최초의 인공염료를 생산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젊은이다운 열의로 퍼킨은 자기가 만들어낸 염료의 특허를 취득하여 공장을 세우고 염료공업으로 나섰다. 염료업을 시작하는 것이 바보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던 그의 스승 호프만은 그가 학문의 세계에서 연구를 계속하길 희망했던 만큼 퍼킨을 전혀 응원하지 않았다. 대학교수인 본인(저자)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호프만이 잘못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도 퍼킨의 부친은 자산가였고 명석한 아들에게 크게 기대했다. 부친과 형제의 지원을 받으면서 퍼킨은 합성법을 공업적인 규모로까지 확대생산하는 동안에 산더미같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 확대생산의 처음 무렵에는 폭발 사건도 더러 있었으며, 주철로 된 반응용기의 내용물이 너무 심하게 비등을 시작하면 용기에 냉수를 끼얹으며 그 반응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때문에 공장직원이 수도호스를 손에 들고 지켜야하는 그런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료제조는 대성공이었다. 아닐린퍼플, 티리언퍼플, 모브(또는 모빙) 등으로 불리운 그의 염료는 퍽 널리 보급되었다. '모브'(mauve)란 프랑스에서 이 새로운 염료에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이름이 되었다. 퍼킨의 발명 이전에는 내구성이 있는 보라색, 연보라색의 염료는 매우 고가의 것이었다. 기원전 1600년부터 사용되어 온 천연염료는 원래 티리언퍼플이라고 했으며 지중해에서 채취되는 조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조개는 모으기가 어려워서 1그램의 염료를 만드는데 9,000개의 조개가 필요했다. 오직 왕가만이 이 염료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보라색과 왕족과의 연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퍼킨이 콜타르에서 내구성있는 아름다운 보라색 염료를 합성한 덕분에 누구라도 이 색을 사용할 수 있는 가격이 되었다. 게다가 이전의 보라색은 바래기가 매우 쉬워 여성이 아침에 모자에 연 보라색 리본을 달고 외출하면 저녁 때는 붉은 색깔로 변해버리는 형편이었다.
모브의 성공은 합성염료공업 탄생의 계기가 되었으나 실제로 그 가능성을 간파하고 대규모로 발전시킨 사람은 영국인이 아니고 독일인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퍼킨의 지도로 영국에서도 새로운 염료공업 발전이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최초의 공장이 건설되고 나서 겨우 6년만에 영국 화학회가 콜타르에서 만들어지는 염료에 관한 강의를 그에게 의뢰할 정도였다. 퍼킨의 그 후의 인생은 영예가 충만한 것이었다. 영국학사회 회원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이어서 데이비상, 호프만상, 라보이제상을 받았다. 그리고 1906년 콜타르염료공업 설립 50주년에는 전세계에서 다수의 저명한 과학자가 출석하는 기념식이 있었으며 또한 영국 화학공업회의 미국 지회에는 미국인 화학자의 최고의 영예로써 퍼킨상이 마련되었다. 퍼킨에 의한 모브의 발명은 세렌디피티의 좋은 예이다. 그는 어떤 목적을 향해서 출발하여 우연한 행운 덕분에 휠씬 중요한 다른 결과에 도달했던 것이다. 1856년에 키니네를 합성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설령 가능성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당시에 합성염료공업의 설립만큼 중요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드워드와 윌리엄 폰 E. 도에링 등에 의한 키니네의 합성은 천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실용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말라리아가 만연되어 있는 태평양지역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키니네 입수의 길은 단절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드워드와 도에링의 합성이 실용적으로 키니네를 생산하지는 못했다.
(해설) 퍼킨이 개발해 공업적으로 생산한 또하나의 중요한 콜타르염료는 몇 세기 동안 꼭두서니과의 식물 뿌리에서 채취한 적색염료인 알리자린이었다. 1868년에 독일의 칼 그레베와 칼 리베르만은 콜타르의 한 성분인 안트라센에서 알라자린 합성을 발표했다. 그레베와 리베르만의 이 합성법은 공업생산에는 비실용적이었으나 이 발표는 호프만 밑에서 연구하고 있을 때 안트라센을 취급한 적 있는 퍼킨의 흥미를 끌었다. 1년도 안 되어 퍼킨은 콜타르 안트라센에서 알리자린을 생산하여 1871년에는 연 생산 220톤에 이르렀다. 1874년에 퍼킨은 그의 공장을 매각했다. 36세에 그는 나머지 인생을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해도 될 정도의 재산가가 되어 있었다. 새로 집을 샀으나 모브를 발명했던 옛집은 연구실로 계속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콜타르에서 최초의 향료인 쿠마린(coumarin)의 합성을 완성시켰다. 계피산 합성 때에 그가 사용한 방법은 아주 유용하며 퍼킨반응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1882년 아돌프 폰 바이엘은 염료 역사상 또하나의 기념비적인 그의 유명한 인디고합성의 출발물질을 제조하는 데 변화된 퍼킨반응을 사용했다. 콜타르 염료의 가치는 섬유의 염색에 그치지 않고 미생물 연구의 매개물 염색에서도 중요하다. 결핵이나 콜레라의 병원균이 발견된 것도 염색기술로 이들 염료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퍼킨에 의한 모브의 발명은 19세기 후반, 특히 독일에서 유기화학의 눈부신 발전의 출발점으로 인정되어 왔다. 호프만이 독일로 귀국한 것이 으 급격한 발전에 분명히 관계가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케크레와 그의 화학구조론에 자극된 독일의 '방향족화학'의 발전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새로운 합성염료는 벤젠에 관련되는 방향족화합물이었다.
알리자린. 적색염료의 알리자린은 고대부터 알려져 왔으며 이집트인은 미이라를 싸는 천을 염색하는데 이를 사용했다. 알리자린은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꼭두서니과의 식물 뿌리에서 얻을 수 있다. 1886년에는 아직 알리자린의 화학구조도 알려져 있지 않고 베를린에 있는 바이엘의 연구실의 연구과제가 되었다. 수년 전 바이엘은 다른 천연염료인 인디고(다음 항을 참조)의 연구에 나섰다. 그 연구 중에는 바이엘는 복잡한 유기화합물에서 산소를 제거하여 이미 알려져있는 간단한 화합물로 변환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는 화합물을 아연분말과 함께 가열하는 이 방법이 알리자린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바이엘의 젊은 조수이던 칼 그레베와 칼 리베르만이 실험해 본 결과 생산된 것은 콜타르의 성분으로 잘 알려진 탄화수소 안트라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가 있기 몇 년 전에 이미 케클레가 벤젠분자의 환상구조를 설명했었으므로 그들은 안트라센에 대해서 벤젠 3개를 붙인 구조식을 만들 수 있었다. 케클레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의 회화적인 분자구조설은 많은 유기화합물, 특히 알리자린과 같은 방향족화합물의 구조결정에 넓은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 후 그레베와 리베르만은 이 과정이 역반응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즉 안트라센에 산소를 부가해서 알리자린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현재는 잘못 생각한 것으로 인정된 어떤 가능한 화학반응을 계획한 것이었는데, 여기서 유사 세렌디피티가 일어났다. 그들이 이론에 맞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천연의 알리자린과 일치되는 합성품을 만들 수가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천연염료를 실험실에서 최초로 합성한 것이었다(퍼킨의 모브는 천연의 조개에서 취한 티리언퍼플과 색은 비슷하지만 화학식이 다른 새로운 물지이다). 이 실험실에서의 합성은 학문적 성과로서는 훌륭한 것이었으나 알리자린의 공업적 생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바딧셰 아닐린과 소다공업회사(BASF)'의 기술자 하인리히 카로의 도움을 받아 그레베와 리베르만은 실용적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시도했다. 몇 번인가 실패한 후, 카로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실험에 의해 표준 알리자린을 양질의 수량으로 바꿀 수 있는 구조불명의 중간체를 발견했다. 그 유사 세렌디피티적 합성법은 영국에서 퍼킨이 거의 같은 무렵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합성 알리자린은 독일과 영국 두 나라에서 1871년에 시판이 시작되어 순식간에 천연염료를 대체하게 되었다.
망가진 온도계와 인디고. 청색염료인 인디고(Indigo)는 알리자린과 마찬가지로 고대문명시대부터 알려져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말경까지 이 염료는 '쪽'이라는 식물에서 채취했다. 1897년 인도에서 쪽의 재배면적은 200만 에이커(약 8,000평방킬로)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침 그 무렵 독일의 화학회사가 이 염료를 합성하는 과정을 개발하여 합성품을 천연품보다 염가로 팔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천연인디고를 생산하고 있던 인도나 기타 나라들에서는 경제적 대변동이 일어났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경제적 및 문화적 대변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험 중에 온도계가 파손되는 우연한 사건에 도달하게 된다. 아돌프 폰 바이엘이 베를린대학에서 인디고의 화학구조 연구를 시작한 것은 1865년이었다. 1883년까지 그는 옳다고 여겨지는 구조를 추론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보통 유기화학자가 하는 대로 어떤 구조의 화합물을 합성해서 이것이 천연염료와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가를 일일이 확인했다. 실제로 그는 몇 가지의 합성법을 연구하여 그중의 하나로 퍼킨방응도 써 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천연인디고와 가격 면에서 경쟁이 될 만한 합성염료의 공업적 생산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BASF의 칼 호이만이 처음으로 성공적인 공업용 합성을 개발시킨 것은 1893년의 일이었다. 이 합성이 성공한 것은 콜타르의 한 성분으로서 당시 제철공업의 페기물이나 다름없던 나프탈렌을 출발원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철광석으로 철을 빼내는 데 코크스가 사용되고 있다. 코크스를 만들기 위해 석탄을 가열하면 점성이 높고 심한 냄새가 나는 흑색 액체인 콜타르가 흘러나오는데 이것을 어딘가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합성염료와 합성안료가 발명되고 나서야 이것이 유기체 출발물질의 풍부한 원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디고를 성공적인 공업용 합성으로 이끈 우연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BASF의 사퍼라는 화학자가 나프탈렌을 발연황산과 함께 가열할 때 실수로 온도계를 망가뜨리면서 그 속의 수은이 반응용기 속에 흘러 들어갔다. 사퍼는 반응이 언제나처럼 진척되지 않고 나프탈렌이 무수프탈산으로 변화한 것을 알아차렸다. 잘 조사해 보니 황산이 수은을 황산수은으로 변화시키고 이 황산수은이 나프탈렌을 무수프탈산으로 산화하는 촉매였다는 것을 알았다. 무수프탈산을 인디고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쉬웠다. BASF는 1897년에 합성인디고를 천연품보다 싼값으로 팔기 시작했다. 합성인디고를 제조하는 과정은 그 이후 점차 개량되어 천연인디고가 염료시장에서 이전과 같은 지위를 되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나스트랄 블루. 염료와 역사 속에서는 세렌디피티의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모브나 알리자린, 또는 인디고 따위의 발견보다 훨씬 후인 1928년에 A.G. 댄드리지가 아름다운 청색안료를 발견했을 때에 일어났다. 안료라는 것은 다른 물질을 착색하는 데에 사용되는 불투명하고 불용성인 분말로서 염료하고는 구별된다. 안료는 주로 표면보호와 장식용 도료, 인쇄잉크, 프라스틱, 고무 등에 사용된다. 댄드리지는 스코틀랜드 염료회사의 화학자로 제철용기 속에서 용해된 무수프탈산에 암모니아를 첨가하여 프탈리미드(phthalimide)를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프탈리미드와 무수프탈산이라는 말은 모두 나프탈렌에서 유래되었다). 댄드리지는 용기벽이나 뚜껑에 청색 결정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껴 조사해 보기로 했다. 댄드리지 등이 연구한 결과 청색 결정은 용기인 철과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의 화학반응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과 철 대신에 니켈이나 동 등 다른 금속이 반응하면 다른 안료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1929년 스코틀랜드 염료회사의 모회사인 임페리얼화학 공업사는 런던의 임페리얼대학 린스테드 교수에게 이 안료의 샘플을 보냈으며 교수는 학문적으로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린스테드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이들 염료의 화학구조를 결정해서 프탈로시안이라는 이름을 붙여 1934년에 일련의 연구 논문으로 보고했다. 이 연구와 1935년 로버트슨에 의한 X선 결정 해석 결과, 동을 함유한 안료의 구조식이 정해졌다. 크론쇼우는 '프탈로시안 발견에 관한 총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프탈로시안류의 존재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아마도 예상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탈로시안류가 발견되어 분자구조도 확인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화합물의 필연성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이 물질의 생성은 얼마나 경탄스러운가! 적당한 반응온도에서 동과 같은 금속과 함께 꼭 필요한 4개의 성분이 제자리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프탈로시안의 구조는 혈액 중의 색소성분인 헤민[중심금속은 동(Cu)대신에 철(Fe)로 되어있다]이나 녹색 식물의 색소 성분인 클로필[중심금속은 마그네슘(Mg)]와 비슷하다. 이 안료는 학문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실용성도 높다. 린스테드와 공동연구자들은 1933년부터 1942년까지 26개의 특허를 얻었으며 그 후에도 많은 특허를 취득했다. 화합물 중 철 원자를 동으로 바꾸어 놓으면 더욱 좋은 청색안료를 얻게 되며 이 '모나스트랄 블루(monastral blue)'는 컬러 인쇄에 3원색 프로세스용 청색 안료로서는 현재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또한 프탈로시안 동속의 수소원자 몇 개를 염소원자로 바꾸면 훌륭한 녹색 안료가 된다. 프탈로시안 안료는 인쇄잉크, 그림물감, 페인트, 락카 등 색소 재료로서 고가인 것이 많다. 레이온이나 아세테이트의 염색에도 사용된다. 이와 같이 고가인 안료도 우연과 통찰력에 의한 발견 즉, 세렌디피티의 좋은 한 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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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신인에게 시를 받아 장원급제한 김안로
김안로(1481-1537)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이숙, 호는 보락당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원년(150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젊은 시절에 관동에 유람을 갔었는데, 어떤 신인이 나타나 시를 읊조렸다.
봄은 우임금 구주 산천 밖에 무르녹고 음악은 순임금 조정 금수 사이에 연주된다
신인은 이어서 말하였다.
"이것은 곧 네가 후일 출세할 길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듬해에 정시에 들어가니,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봄날에 이원의 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악보를 본다'란 제목으로, 압운은 '간'자였다" 김안로는 그 신인에게서 들은 시구가 합치된다고 생각하고 곧 그 글귀를 사용하여 써서 제출하였다. 고시관인 강혼이 대단히 칭찬하고 그를 뽑아 장원으로 삼았다. 모재 김안국이 시험관으로 참여하는 참시관이 되어 그 글을 보고 말하였다.
"이 시구는 귀신의 말이지 사람이 지은 시가 아니다"
김안로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사실대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김안국의 시를 보는 눈에 감탄하였다. 김안로가 소싯적에 중국 점쟁이에게 운명을 점쳐 보았다. 그 점쟁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주 귀하게 되기는 하나 다만 갈자 지명에서 죽게 될 것이다"
김안로는 중종 32년(1537)에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배척을 받아 진위현 갈현에 이르러 사사되었으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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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로
예루살렘의 사제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체포하고 싶었지만 예수는 민중들 사이에 인기가 있어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제자를 그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하고 묻게 했다. 당시 유태인들은 로마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고발할 것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면 독립을 원하는 유태인들과 예수의 사이를 이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음흉한 꾀를 알아차리고 간접적으로 교묘히 대답했다. "화폐에 새겨져 있는 초상은 누구의 것이냐" "카이저(로마황제)의 상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카이저의 것이니 카이저에게로 돌려 주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쳐라" (마태복음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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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스무번째 이야기 발가벗기운 채 쫓겨난 영주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이 그의 조언자 빠뜨로니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몇몇 사람들이 나에게 충고하기를 내 지위와 품위를 지켜주는 재산과 명성을 계속 키우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소. 당신은 항상 나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시니, 이런 경우에 그들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아닌지 가르쳐주시오." "백작님, 저에게 청하신 충고는 두 가지 이유에서 저에게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첫번째, 저는 백작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분들께서 이미 말씀하신 방법과는 반대로 백작님께 충고를 드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충실한 조언자라면 손해나 특정이익에 관계없이, 또 상대방의 기분에 관여치 말고 항상 더 좋은 방법을 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백작님께 오직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백작님 상황에 맞는 방법만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앞서 사람들이 해드린 조언들은 완벽하지 못했고, 백작님께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백작님께 알맞고 완벽한 조언으로 백작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어떤 큰 지역의 영주가 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그 지역에는 해마다 새로운 영주를 뽑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영주가 뽑히든지 통치기간 동안엔 그가 명령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 임기가 끝나면 모든 것을 빼앗고, 발가벗겨서 무인도에 홀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각있는 어떤 사람이 영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일 년이 지나면 앞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인도로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임기가 지나기 전에 자신이 가서 기거해야 할 그 섬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꾸미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편의시설과 생활필수품들을 갖추라고 은밀하게 명령했습니다. 그의 통치기간이 끝나자 사람들은 영지를 다시 거두어들이고, 그를 발가벗겨 섬으로 내쫓았습니다. 앞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지어놓은 좋은 집에 가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백작님께서 제게 더 좋은 충고를 원하시면 이걸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백작님께서 발가벗고 떠나시기 전에, 즉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백작님께서 떠나 살게 될 영원한 집을 찾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죠. 영혼의 삶은 정신적인 것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 실패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사시는 동안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에 좋은 집을 갖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명예나 지위 때문에 세상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확실한 것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으시대거나 자만심을 갖지 말고 좋은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삶에서 백작님께서 이루지 못한 것을 백작님의 영혼에 보탬이 되도록 대신해 줄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을 두십시오. 그리고 비록 알려지지 않더라도 선행을 계속하시면 백작님께서는 훌륭한 명예와 지위를 오래도록 지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 곧 사라질 이 세상을 위해 영원한 것을 잃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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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 출발점을 잃어버린 역사 - (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첫 출발점)
왕검은 치우의 후예
단군신화의 주인공이며 고조선의 첫 단군이었던 왕검은 바로 동아시아계 기마종족을 크게 통일시켰던 인물이며, 치우계로부터 정통성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실린 내용에서 왕검은 한님의 후예, 곧 환인(한님의 음차어)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표현된다. 즉 왕검은 하늘의 후예를 자처했다는 데서 치우계와 공통성을 가지며, 오늘날 발굴된 유물의 지역적 분포에서도 치우계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다만 그 사이에 몇백 년이라는 세월만이 가로 놓여 있을 따름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범의 이야기도 환웅의 시대, 곧 치우의 시대에 이루어진 종족분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연구결과에서도 산동성을 중간지대로 하여 그 동북부에서는 곰이 등장하는 종족 성립 신화가 많고, 서북부에서는 범과 관련된 종족 성립 신화가 많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환웅시대의 마지막 군주인 거불단의 형제)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로서, (왕검은) 신묘년(서기전 2370 년) 5월 이튿날 인시(동틀 무렵)에 박달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하늘사람과 같은 진리스러움이 있어 모두 존경하고 따랐다. 14세 되던 갑진년(서기전 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는 평을 듣고 그를 추대하여 '작은 임금'으로삼아 부족의 영역을 다스리게 했다. 무진년(서기전 2333 년)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한님의 아들'로 추대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아홉 환족이 통합되었고, 신과 같은 그의 가르침이 널리 퍼졌다.
이 기록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기록에서 왕검은 무력으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인품 때문에 지도자가 된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왕검의 건국이념과 관련해볼 때, 이런 이야기는 왕검을 중국의 요임금처럼 꾸미기 위한 겉치레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건국이념과 관련된 왕검의 정신세계를 통해 당시의 문화수준을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왕검의 정치구호는 "널리 사람을 두텁게 한다"는 것과 "세상에서 진리를 구현해낸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구호에는 '삶의 주체'와 '삶의 방향'이 보이고 있는데, '홍익인간'은 삶의 주체가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재세리화'는 삶의 방향이 진리(하늘의 이치)와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즉 서로가 이익 되는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사람이 하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왕검의 정치철학이었다. 조화를 중시한 것은 단군시대에서 종족 내부의 운영원리를 밝힌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 단군조선이 여러 기마종족들로 이루어진 다종족연맹체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세계의 모든 사물이 그렇듯 종족과 종족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연맹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왕검 이전의 시대는 분열과 갈등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분열에 대한 반성이 건국이념에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본질은 같으며 진리에 따라 조화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도 결국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종족과 종족 사이의 차별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연맹체 속에서 통일시켜내려는 원리였던 것이다. 물론 단군이 하늘의 후예를 자처한 이상 그 진리의 근거는 하늘의 뜻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왕건이 환인의 손자이고 환웅의 아들임을 밝힌 것은 단군조선이 전통을 존중하는 사회였음을 드러낸다. 즉 조상은 보다 하늘과 가까운 존재이며, 따라서 조상을 존중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받드는 중요한 행위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이처럼 왕검의 사고체계는 다종족연맹체라는 여건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과거의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회적 환경은 그의 사고체계를 더욱 빛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이런 원리, 곧 하늘(우주)과 인간의 동일성, 인간의 주체성, 인간과 인간의 조화, 현상보다는 당위를 향한 인간의 실천 등의 원리는 단군시대의 사회철학으로 계승되었고 그런 관점에서 고조선의 문명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단군시대와 가까운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먼 훗날까지 이런 사고방식은 면면히 우리들의 정신세계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곧한님'이라는 동학의 사고방식도 이런 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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