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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64 호
단기 4340. 9. 22 (음력 8. 1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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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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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총상금 1000만원대의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실시
* 행사내용 - 행사주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행사주관 :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 협 찬 사 : 동아제약(수석문화재단) - 행사일시 : 2007.10.17(수) 10:00~17:00 - 행사장소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 - 참가부문 : 시, 산문, 아동문학(동시/동화) - 글쓰기 시간 : 3시간(10:30~13:30) - 작품 분량 시, 동시 : 제한 없음 산문, 동화 : 200자 원고지 10매 이내 - 작품 제출 편수 : 1인당 1편 (장르 구분 없음) - 부대행사 : 문학강연 (조경란 소설가)
ㅇ 접 수 : 2007년 09월 17일~10월 16일까지 인터넷 접수(www.munjang.or.kr) 2007년 10월 17일(당일 오전9~10시 현장 접수) ㅇ 시상식 : 마로니에공원, 당일 오후 5시 ㅇ 문 의 :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Tel. 02-760-4695 ㅇ 시상 내용 - 장 원(3명) : 부문별 각 1명 (상금 150만원, 상패, 상품) - 우수상(3명) : 부문별 각 1명 (상금 70만원, 상패, 상품) - 장려상(9명) : 부문별 각 3명 (상금 40만원, 상장, 상품) - 입 선(15명) : 부문별 각 5명 (상금 없음, 상장, 상품) * 특전 : 각 부문별 장원 수상작품은 『시인시각』(운문), 『월간 에세이 플러스』(산문), 『아동문예』(아동) 게재되며, 정식 등단(추천)의 자격을 부여받아 전문 문인으로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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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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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한 잔 술에 귀여운 양이 되고, 두 잔에 질주하는 얼룩말이 되고, 석 잔에 포효하는 사자가되고, 넉 잔에 어리석은 나귀로 되돌아간다. / 터키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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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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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부모 섬기기, 미룰 일이 아니다
여섯째는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다. 자식의 온갖 행실 중에서 효도와 우애가 가장 중요한 근본이다. 그리고 죄목 3천 가지 중에서는 불효가 제일 큰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이는 반드시 그 공경심을 다하여 어른의 뜻을 순순히 따라야 하고 즐거움을 다하여 음식을 공양하라. 병환 중에는 극진한 근심으로 의약 처방을 다하여 모시고, 돌아가실 때에는 지극한 슬픔으로 마지막 이별의 도리를 다할 것이요, 제사 때에는 엄숙하게 추모의 성의를 다하여야 한다. 겨울에는 따스하게 대접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살펴 드리며, 아침저녁으로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문안 인사로 알리라. 외출에서 돌아와서도 반드시 인사 드린다. 만일에 잘못이 있을 때에는 성의를 다하여 그 잘못을 빌 것이며, 내 몸을 돌아보아 늘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라. 언제나 덕을 온전히 간직하여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아야 비로소 어버이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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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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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5. 인심도심 논쟁
5. 논쟁이 지는 의의
현대 산업 사회의 발전과 자본주의 체제의 과도한 경쟁으로 인간 소외라든지 도덕성의 타락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어서인지, 이와 같은 도덕심의 회복을 요구하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정 학교 사회에서 도덕 교육과 개인적 실천을 주장하는 소리가 요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공자가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이 크게 변한 상황에서 주자학자들의 주장과 똑같은 도덕적 엄격주의만을 곧이곧대로 강조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허균과 같은 사람의 인심도심에 대한 견해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와 같은 체제 내적 논의가 어떻게 변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인심도심 논쟁에 관한 연구 자체만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이황과 이이의 이론이 갖는 차이점을 비교한다든지, 이이와 성혼 사이에 수 차례에 걸쳐 오간 서신 논쟁을 문제삼는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과 아울러 이언적, 노수신, 조식, 허균, 윤휴 등 조선 시대를 통틀어 인심도심에 관한 논의가 지속되어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논의 속에 나타나는 견해들은 비단 주자학적 사고 속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흠순이라든지 양명학적인 경향도 적지 않아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에 관한 논의는 조선 시대 학자들의 주된 관심 대상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윤휴처럼 같은 성리학적 논의 구조이지만 이로부터 탈피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나, 허균과 같이 인심도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사변 논쟁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스런 심성의 발로를 강조한 사람의 논의는 이 논의의 변용 가능성과 관련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유명종, "송명철학" (형설출판사, 1979) 유명종, "한국사상사" (이문출판사, 1985) 이종술, "퇴계 율곡의 비교연구" (수덕출판사, 1985) 유명종, "조선후기 성리학" (이문출판사, 1988) 이병도, "한국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9) 유명종, "성리학과 양명학"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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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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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본뜻 : 원래는 고구려 시대의 벼슬 이름에 쓰이던 호칭이었다. 지금은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태대형, 장관급에 해당하는 대형, 차관급에 해당하는 소형 등이 있었다. 이밖에 호칭에 관한 문헌인 중국의 "칭위록"에 보면 '고려 땅에서는 장관을 형이라 부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바뀐 뜻 : 동기간이나 또는 같은 항렬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다. 요즘 들어서는 꼭 동기간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이가 비슷한 친구 사이에 상대방을 공대하여 부르는 호칭으로 널리 쓰인다.
"보기글" -형만한 아우 없다더니 너를 보니 그 말이 딱 맞는구나 -박 형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김치’와 ‘지’ - 고장말탐험
김치는 방언에서는 ‘짐치’ 또는 ‘지’라고 말한다. ‘짐치’는 한자어인 ‘짐 , 짐’에서 온 말이지만, ‘지’라는 말은 ‘디히>디>지’로 변한 아주 오래된 우리말이다. 표준어에서는 ‘배추지’의 ‘-지’를 명사로 보지 않고 ‘접미사’로 처리한다. ‘지’가 명사로 쓰일 때는 사투리로 처리한다.
‘지’에는 배추지·무수지(무지)·오이지·고들빼기지·파지·열무지 등이 있다. 배추나 열무로 김치를 처음 담글 때, 이 김치를 ‘쌩지’(생지)라고 말하고, 오래된 김치는 ‘묵은지’, 익은 김치는 ‘익은지’, 신 김치는 ‘신지’라 한다.
‘짓국’이란 반찬은 ‘김치 국물’이라는 뜻에다, ‘열무에 물을 많이 넣어 삼삼하게 담근 김치’를 말하기도 한다. 뒤쪽을 전라도에서는 ‘싱건지’라고 한다. 이는 ‘싱거운 김치’를 일컫는데, ‘싱겁다’에서 나온 것이다. ‘짓국’ 또는 ‘싱건지’를 ‘물김치’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표준어에는 없던 말로서 생긴 지 그리 오래된 말은 아니다.
‘짠지’는 ‘멸치짠지, 콩짠지’ 등을 말할 때 주로 쓰이는데, ‘짠 밑반찬’을 말한다. 때에 따라 ‘무가 흔할 때 소금에 절여두었다가 채를 썰어서 먹는 밑반찬’을 ‘짠지’라고도 한다. ‘멸치짠지, 콩짠지’는 고장말이고 표준어로는 ‘멸치조림, 콩조림’이라고 하는 줄 안다.
‘지’는 음절이 하나인 말이 갖는 불안정성 탓에 복합어에 주로 쓰이지만 온전한 말로 대접해야 한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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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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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인물로 본 변방의 역사 - 딜라이 라마, 간디, 에바 페론
에바 페론, 그 사후의 역사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명실상부한 `퍼스트` 레이디였다. 각 나라에 한 명씩은 있게 마련인 대통령의 아내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력을 행사한 권력자였다는 말이다. 그녀는 후안 페론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집권 후에도 아르헨티나의 사회 보장 분야와 노동 정책을 담당하였다. 에바 페론은 아직도 페로니즘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그녀의 정치적 업적은 특히 평등주의를 현실화했다는 데서 빛난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 계층이자 남편 후안 페론의 지지 세력인 하층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에바 재단을 세워 모금을 하고 그 기금으로 의료 사업과 장학 사업을 지원했으며, 하층민들이 전기나 수도등의 혜택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상류 계층을 위한 국가 보조금을 삭감하는 데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에바 페론은 하층 국민들의 우상이자 구원의 상징 또는 성녀였던 것이다. 페미니즘적 성과도 에바의 치적으로 거론된다. 1949년 페로니즘적 여성 정당을 창설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정치적 지위를 한 단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바 페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여러 비난 중 한 가지는 에바를 창녀로 몰아붙이는 것인데, 영화 <에비타>에서도 묘사되었듯이 그녀가 유럽을 순방할 때 스페인에서는 4만명 이상의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로마에서는 창녀라고 욕하며 계란 세례를 퍼붓는 군중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바를 천한 여자로 여기는 태도는 아르헨티나의 상류 계층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었다. 마르티네즈(<산타에비타>, 자작나무)가 소개하는 예를 보면 그 사실은 분명해진다. 암 치료를 위해 에바의 자궁을 들어내던 날 침묵하지는 못할망정 환호하던 무리들이 있었고, 길거리 담벼락에는 `암, 만세!`와 같이 병마를 응원하는 낙서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교양 있는 상류층의 입장에서는, 에바와 후안 페론이 펼친 하층 계급 중심의 정책은 별개로 하더라도, 천박한 사생아이며 바람둥이 3류 배우였던 에바를 국모로 모시는 일이 대단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에바가 출산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천박한 씨앗의 잉태를 영원히 막는 것이니 기뻐할 일이었다. 에바 자신도 과거의 이력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출생 증명서 등 과거 기록을 위조.폐기했으며,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는 엄하게 처벌했다. 이렇듯 에바의 과거를 문제삼아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입장들은 그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비판은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비판이 있다면 이것은 에바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이 비판은 실제로 후안 페론이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바는 독재 정권의 유지에 기여했던 인물이 되는 셈이다. 사실 후안 페론은 개발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을 번번히 훼손하였다. 후안 페론은 모든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그렇듯이 언론 탄압에 능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사의 문을 닫는 일은 예사였고 언론사 자산까지 몰수했다. 그리고 교육 과정에서 페론 부부의 숭배를 중요 커리큘럼으로 설정하여 정치적 이익을 도모한 것도 바로 후안 페론이었다. 후안 페론은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도 종종 심각한 지경까지 몰고 갔다. 1949년 헌법 개정을 통해 후안이 대통령 재임을 노리자, 정치권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그러나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페론 세력은 국가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는` 자들을 투옥할 수도 있도록 법률을 제정하고 많은 정치인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후안 페론이 맞는 두 번째 대통령 선거도 비정상적으로 치러졌다. 원래의 선거일보다 앞당겨 1951년 12월 선거를 실시했고, 이런 정치적 음모의 결과 후안 페론은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재선되었으며, 그의 정당은 149석 중에서 135석을 차지하는 놀라운 압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 모든 독재 행각이 에바가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기에, 그녀도 당연히 독재 정치에 한몫 한 인물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평가야 어떻든 후안 페론의 집권 기간 동안 음으로 양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에바는 1952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암세포는 그녀의 몸을 차근차근 잠식하였고 아무도 이를 막지 못했다. 35킬로그램에 불과한 몸으로 마지막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에바는 곧 사망했으며, 아르헨티나는 그녀의 죽음에 오열했다. 에바 사망 3년 후, 즉 1955년 후안 페론은 권좌에서 물러나 파라과이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한다, 이런 사태의 중요한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이 페론 정부와 카톨릭 사이의 알력이다. 1954년 겨울, 페론은 한 카톨릭 성직자 단체를 선동 혐의로 기소했고, 카톨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과 사생아 그리고 매춘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런 상황이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 간의 격렬한 불화를 초래해 후안 페론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페론 정부의 실각은 반민주적인 정치에 의해 민심이 이반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후안 페론의 하야에 즈음하여 발발한 쿠테타와 내전으로 약 4,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결국은 후안 페론과 에바의 정치적 일탈 행위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젊고 아름다운 권력자 에바, 그러나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그녀의 사후에까지 이어진다. 아니 어쩌면 더욱 슬픈 일들이 그녀가 죽은 후에 벌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에비타>의 주제가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영화에서 에바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져도 영원히 아르헨티나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여러분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의 말은 모두 진심이랍니다.” 에바의 유지처럼, 그녀가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지워 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남편 후안 페론도 그 부류에 속한다는 점은 개운치 않다. 페론 부부에 대단히 적대적인 논조의 책 <에비타>(P.S. 몽고메리 지음, 동천사)는 에바 사망 후 후안 페론이 노골적인 성적 방탕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안 페론이 국립 여자고등학교를 세우는데 2,000만 달러를 쏟아부은 것도 그 학교가 대통령 침소에 들 소녀들의 공급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불신하는 사람이라도 후안 페론이 또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맨틱한 기대가 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을 암으로 잃고 두 번째 부인인 에바도 암으로 잃고 난 후 이사벨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도 에바처럼 하층 출신으로 과거 무용수였다. 알려지기로는 그들이 1955년이나 56년에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마드리드로 망명을 떠났을 때 이사벨도 동행하여 1961년에 결혼한다. 이사벨은 1931년생이니 서른의 나이에 환갑이 훨씬 지난 남자와 커플을 이루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얻기는 했지만,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에바를 떠나 보낸 후안 페론은 고단한 정치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에바가 사망한 지 불과 수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고 또한 20년 가까이 기약없는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973년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다음 해 사망하고 만다. 당시 부통령이던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극심한 인플레이션, 노동 운동 그리고 정치적 쟁투 때문에 이사벨의 집권 기간은 내내 불안정했다. 결국 이사벨은 1975년 12월 쿠데타로 축출되었으며, 1981년에는 부패혐의가 확정되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에바의 남편도 남편의 새로운 아내도 모두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만 것이다. 마르티네즈에 따르면 에바의 죽음은 그녀의 친족들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에바가 퍼스트 레이디가 된 덕분에 가족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해 야자수가 늘어선 부촌에 저택을 짓고 살게 되었다. 어머니 도냐 후아나는 장관들과 도박을 하면 무조건 승리하는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들도 에바의 권력에 힘입어 꿈에도 소망하지 못했던 행복한 순간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에바의 사망 직후 후안 페론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에바의 가족을 철저히 외면했다. 어머니 도냐는 충격으로 병을 얻었고, 그들은 도청 장치 때문에 자기들 방에서도 대화를 글로 대신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비극적 가족사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에바의 남동생 후안시토였다. 그는 애인이 자신의 횡령을 폭로하자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에바 사망 후 몇 개월 만에 그 부유한 가족은 완전히 파멸하고 만 것이다.
가장 끔찍한 비극은 에바의 시신이 감당해야 했다. 후안 페론은 에바가 죽자 150미터 높이의 동상을 세울 계획도 했으나, 그보다는 에바의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이 에바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지 아니면 에바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인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그의 결정은 전대미문의 시신 쟁탈전을 야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방부 처리된 에바의 시신은 아르헨티나의 곡절 깊은 현대사 속에서 한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1955년 페론이 쫓겨난 뒤, 정적들은 그녀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옮겨가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그 사이 에바의 시신은 군인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1971년 그 유해는 아르헨티나 내의 페로니스트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마드리드의 후안에게로 옮겨진다. 후안 페론의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이사벨이 대중적 지지를 노려 대통령 궁에 에바를 묻었을 때, 이제 망자에게 평안이 찾아온 듯 보였다. 그러나 2년 뒤 반페로니즘 군대 일파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에바의 시신과 이사벨을 몰아 낸다. 이렇게 에바의 시신은 20년 이상을 떠돌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족들에게 인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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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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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11장. 천연고무와 합성고무.
16세기 초엽, 콜럼버스를 비롯한 스페인 탐험가들은 남미의 인디언들이 어떤 나무에서 배어나온 라텍스(latex)라는 식물성 유탁액으로 공을 만들어 그것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인디언이 라텍스로 사용한 것 중의 하나가 히비아(hevea)이며 라텍스를 주로 취한 나무는 히비아 고무나무(hevea brasiliensis)였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약간의 이 '인도고무'를 가지고 돌아왔으나 산소의 발견자인 조셉 프리스트리가 연필로 쓴 것을 이것으로 문지르면 지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적당한 사용처를 몰랐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무(rubber)는 문지르다(rub)에서 유래한 것이며, 대수롭지 않지만 아직도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고무는 온도가 높아지면 부드러워지면서 끈적끈적해지고 온도가 낮아지면 굳어지거나 잘 부서졌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2세기가 지나도록 중요한 사용처를 발견하지 못했다. 인도고무의 이용방법 중 하나로 스코틀랜드인 찰스 매킨토시가 알아낸 것은 두 장의 천에 고무를 칠하고 이것을 맛붙이는 방법이었다. 매킨토시는 이와 같이 해서 방수가 되는 이중의 천으로 레인코트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레인코트는 고안자의 이름을 따서 '매킨토시'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영국에서는 불려지고 있다. 고무나 고무피복으로 만들어진 장화나 단화는 처음에 영국에서 생산하여 미국으로 수출하였으나, 1830년대 이후는 미국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겨울에는 딱딱해지고 여름에는 흐물거리면서 망가지는 구두에 미국인은 손을 들고 말았다. 이때 찰스 굿이어가 등장하게 된다. 굿이어는 1800년 미국 코넥티커트 주 뉴헤븐에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상인 겸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굿이어는 고무를 온도변화에 둔감하게 하면 많은 용도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가능성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꿈에 사로잡힌 탓으로 그의 건강과 그의 가족이 소유했던 많지 않은 재산도 1830년부터 1839년 동안에 완전히 고갈되었다. 그동안에 그는 빚을 갚지 못해서 몇 번인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의식주를 친척에게 의지하면서도 그 꿈에 집착했다. 그의 대실패 중에는 고무를 주입시켜서 만든 방수용 우편가방을 정부에 납품하다는 거액의 계약을 했는데 우편가방은 공장에서 출고되기도 전에 열로 인해 녹아버려 모양이 망가지는 사건도 있었다. 비과학적인 방법까지 포함해서 온갖 방법으로 고무를 처리해 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우연히 고무와 유황의 혼합물을 뜨거운 난로에 가까이 대보았다. 그러자 놀럽게도 그 고무는 녹지않고 마치 가죽처럼 조금 탔을 뿐이었다. 그는 이 중대한 발견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딸이 나중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방안을 들락거리면서 저는 아버지가 고무의 한 조각을 불 가까이에 대고 있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동시에 저는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무척 생기가 넘치시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는 고무 조각을 아주 추운 부엌문 바깥에 못을 박아 붙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것을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아주 흐믓한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전날 밤 밖에 내걸기 전의 상태와 똑같은 유연성이 있었습니다(피어스 저 '찰스 굿이어의 생활과 발견들').
굿이어는 실험을 거듭하여 고무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최적 온도와 가열시간을 결정했다. 그는 이 방법의 특허를 신청하여 1844년에 인정을 받았다. 이 방법의 명칭은 로마신화에 나오는'불의 신 발칸(Vulcan)'에 연유시켜 발카니제이션(한국어로는 가황)이라고 명명했다. (해설) 고무를 유황과 함께 가열하면 유황의 원자는 고무의 고분자 사슬과 사슬을 연결시켜서 안정되게 하며, 고무의 매트릭스(matrix) 전체를 온도변화에 민감하지 않도록 한다.
윌폴의 정의를 엄밀히 분석하면 굿이어에 의한 가황법의 우연한 발견을 세렌디피티라고는 할 수 없다. 구하지도 않았던 무엇인가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는 필사적으로 추구하고 있던 해답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서문에서 내가 밝혔던 바로 같이 아무리 찾아도 구하지 못했던 것이 운좋게 발견으로 이어진 예는 많이 있다. 이러한 예는 윌폴이 세렌디피티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역시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으로써 유사 세렌디피티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황법을 발견한 후에도 굿이어의 인생은 행복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특허를 지키기 위한 분쟁에 말려들어 다니엘 웹스터가 특허침해 사건에서 그의 변호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1890년 사망할 때까지 거액의 부채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가황법은 공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어 고무의 사용량을 격증시켰다. 1858년까지 제조된 고무제품의 액수는 약 500만 달러에 달했다. 굿이어 사를 포함한 고무공업회사가 1870년 및 그 이후에 오하이오 주 애크론에 설립되었다. 더구나 이것은 타이어로서 오늘날 고무 사용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승용차, 트럭, 비행기가 나타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합성고무.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두 가지 합성 고무인 네오프렌(Neoprene)과 티오콜(Thiokol)은 둘 다 우연의 산물이었다. 네오프렌의 발견은 유사 세렌디피티적이었으며 티오콜의 발견은 세렌디피티라고 할 수 있다. 화학자들은 고무의 가열상태를 조절해 가면서 얻어진 단편들을 감정함으로써 고무분자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 단편의 하나는 이소프렌이라는 5개의 탄소화합물인데 그것은 이중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0년 헤르만 스타우딩거는 유명한 논문을 통해 고무, 셀룰로오스(섬유소), 단백질 등의 중요한 천연물질과 비슷한 성질이 있는 어떤 합성물질들의 구조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들 물질은 간단한 유기화합물과는 전혀 다른 고분자 즉, 폴리머(polymer)라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이것은 희랍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Poly는 다수를, meros는 부분을 뜻한다). 고분자는 간단한 화합물에서와 같은 종류의 화학결합으로 계속해서 구성단위를 되풀이하는 거대분자인 것이다. 예를 들면 고무의 분자구조의 경우 매우 많은 이소프렌의 단량체(monomer)가 고무나무 속에서 생합성에 의해 연결되어, 고무의 거대한 고분자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천연고무의 구조식이 제안된 후, 나무에서 채취한 고무의 분자구조와 똑같은 탄성을 가지고 있는 합성고무의 제조가 여러 가지로 시도되었다. 이소프렌을 여러 가지 촉매로 처리하여 이것이 중합 될 때, 고무와 비슷한 어떤 물질이 만들어지는지 연구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하여 스타우딩거의 이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엇으나, 분자구조의 미묘한 요인은 칼 지금러가 1953년에 입체규칙성 촉매를 발견할 때까지 완전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이 세렌디피티적 발견은 제 26장에서 설명했다). 천연고무는 이소프렌의 단량체 단위가 모두 'cis'형의 배열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 새로운 촉매를 사용하면 이것과 똑같은 cis형의 합성고무를 복제할 수가 있으나 이전의 촉매로는 시스(cis)형과 트란스(trans)형이 아무렇게나 섞여버렸다. 이 발견으로 비로소 천연고무와 거의 분별이 안되는 합성고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타이어나 기타제품에 천연고무를 사용하느냐 합성고무를 사용하느냐 하는 선택은 오로지 합성고무의 원료인 석유가격에 따라 결정된다.
뒤퐁 사의 잭슨연구소의 W.S. 캘콧트 박사는 니우랜드 신부가 노트르담대학에서 실시한 연구를 주목했다. 니우랜드는 카톨릭의 사제이자 노트르담대학의 학장이며 화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화학식 C2H2의 탄화수소인 아세틸렌은 그 자신이 한 번 또는 두 번 부가반응을 하여 비닐아세틸렌(C4H4)과 디비닐아세틸렌(C6H6)을 만든다고 한다. 캘콧트는 이들 이량체나 삼량체가 천연고무의 구성단위인 이소프렌을 닮아서 합성고무를 만드는 데에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는 뒤퐁 사의 몇몇 화학자들에게 이를 연구시켰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뒤퐁 사의 고분자연구의 중심이 되어있던 중앙연구소의 소장인, 윌러스 카로더스에게로 갔다. 카로더스는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화학자 아놀드 콜린즈에게 니우랜드 방식으로 아세틸렌에서 얻은 천연 그대로의 혼합물을 정제하도록 했다. 콜린즈가 정제했더니 비닐아세틸렌도 디비닐아세틸렌도 아닌 니우랜드의 논문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소량의 액체가 분리 되었다. 콜린즈는 이것을 버리지 않고 주말 동안 실험대의 한쪽 구석에 두었다. 그런데 월요일에 이 액채가 굳어 있어서 조사해 보았더니 이것은 고무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실험대 위에 떨어뜨리면 튕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캘콧트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고무제품을 분석해 보면 이것은 아세틸렌이 중합된 고분자탄화수소가 아니고 전혀 예상못한 염소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이 염소는 니우랜드법으로 아세틸렌에서 이량체나 삼량체를 만들 때에 사용된 염산에 의한 것으로써 염산은 비닐아세틸렌에 첨가되어 있었다. 이 부가생성물은 이소프렌과의 유사성에서 클로로프렌(chloroprene)이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의 단량체 차이는 이소프렌의 메틸기(탄소 1개가 수소 3개에 결합된 구성단위, CH3)가 염소원자와 바뀌었을 뿐이다. 콜린즈의 실험대 위에 주말동안 두었던 것만으로 클로로프렌이 자연히 중합되어 만들어진 고무제품을 뒤퐁 사는 '네오프렌'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새로운 합성고무는 천연고무와 달라서 기름이나 가솔린, 오존 등에 놀라울 정도로 내성이 강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천연고무보다 휠씬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뒤퐁 사에서는 1930년에 이를 제조하여 시판해도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네오프렌은 현재도 유익하게 사용되고 있고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 내구성을 살려서 공업용 호스, 구두창, 창문의 개스킷, 튼튼한 공업용 벨트, 전선케이블의 커버등에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 재미있는 용도로는 두 겹 가죽벨트용 접착제가 있으며 흑색과 갈색 가죽의 사이를 꿰매지 않고 영구적으로 접착해서 앞뒤로 쓸 수 있는 2색 벨트를 만들 수 있다.
1924년에 J.C. 패트릭은 다량의 에틸렌과 산업공정에서 생기는 부산물 염소가스를 이용해서 유용한 어떤 물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두 물질을 결합하면 2염화에틸렌이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패트릭은 수요성이 있는 에틸렌그리콜을 제조할 목적으로 2염화에틸렌과 여러 물질들과의 반응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가 조사한 물질 중에는 다황화나트륨이 있었다. 이것은 원하던 액체 글리콜 대신에 고무와 같은 반고체 물질을 얻게 되었다. 패트릭은 즉석에서 이 예상하지 못했던 고무물질의 잠재적인 가치를 깨닫고 대규모의 연구계획에 나섰다. 그 결과 바로 특허를 취득하였고 새로운 합성고무제조회사 설립으로 진전되었다. 패트릭이 설립한 티오콜화학회사는 1929년 티오콜A를 시장에 내 놓았다. 이것은 천연고무와는 분자구조가 전혀 달랐으나 탄성은 뛰어났다. 네오프렌과 마찬가지로 내유성이 있다는 점에서 천연고무보다 우수했다. 그러나 큰 결점이 나타났는데, 바로 악취가 심한 것이었다. 티오콜 사와 다른 회사는 많은 종류의 다황화 고무를 제조했다. 그것들의 용도는 석유제품에 대해서 내구성이 있다는 것과 밀봉성이 좋은 점을 살린 것으로써 자동차 앞유리의 이음매칠을 한다든가 비행기 날개 속의 연료탱크에 안감을 대는 것 등에 사용된다. 티오콜고무는 저온에서 내성이 강하므로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을 궤도로 쏘아올리는 고체 로켓 연료의 결합재나 성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2년에 모르톤솔트 사가 티오콜 사를 매수해서 모르톤 티오콜사가 되었다. 이 두 회사는 합병 전부터 특수화학제품을 제조했으며 합병 후에도 계속했다. 모르톤 티오콜 사는 불운한셔틀, 첼린저 우주 왕복선 제조의 주요계약자로서 제법 유명해졌다. 그러나 우주 왕복선 폭발의 원인이된 결함고무제 오링(O-ring)은 티오콜 다황화 고무제가 아니고 화학적으로는 테플론에 가까운 탄성체인 바이튼(Viton)제 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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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중국 사신을 경탄케 한 시단의 노장 이행
이행(1478-1534)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택지, 호는 용재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 26년(1530)에 좌상에 이르렀다. 이행은 신장이 10척이고 얼굴이 네모지고 얼굴에 수염이 더부룩하였는데 시문에 뛰어났다. 남산 아래 청학동에 집을 짓고 자호를 '청학도인'이라 하였다.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퇴청하고 나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니는데 그 쓸쓸한 모습이 마치 시골 늙은이와도 같았다. 어느 날 의정부의 아전인 녹사가 어둠을 이용하여 기별을 전할 적에 어떤 사람 하나가 짚신을 신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어린 동자를 거느리고 청학동 어귀에서 나오므로, 말을 타고 지나면서 물었다.
"정승이 있는가?" "기별을 전하려는 것이냐? 내가 여기에 왔노라"
녹사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졌다.
이행이 한번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가 되었다. 중국사신이 이행의 못생긴 모습을 보고 예를 잘 갖추지 않다가 그가 화답한 시를 보고서야 비로소 깊이 감복하였다. 그가 자기 부사에게 편지를 써서 주며 당부하였다.
"이 사람은 시단의 노장이니, 절대로 가벼이 시를 짓지 말라"
김안로가 모함하여 함종으로 귀양보내어 유배지에서 죽으니, 나이 57세였다. 시호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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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제레미 벤덤' (1748-1831)은 그의 저서 '도덕입법 원리서설'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야말로 도덕 및 입법의 기초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공리주의를 요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벤덤'은 공리주의적인 철학자로서 이름이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법률학, 윤리학, 경제학에도 밝았다. 그는 쾌락을 유일한 선, 고통을 유일한 악으로 보았으며 그 어느 것을 낳게 하는 힘의 계량에 의하여 각각 행위의 윤리적 가치를 정하려고 했다. 그 결과 그는 도덕 및 입법의 최고목적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얻는데 두었던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볼 때 이 말은 크게 활용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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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열여덟번째 이야기 일만 금덩이 지고 강 못 건너랴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은 큰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꼭 가고 싶다고 빠뜨로니오에게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혹시 그곳에서 무슨 불상사가 생겨 많은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빠뜨로니오는 백작에게 어떤 값진 물건을 무겁게 지고 강을 건너게 된 젊은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젊은이가 값지고 운반하기가 힘들 정도로 커다란 보석덩이를 가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큰 강을 만나자 그는 무거운 보석을 지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보석이 너무 무거워 자꾸만 가라앉더니 마침내 강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몸이 거의 잠기다시피 했습니다. 강가에 있던 한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는 보물을 포기하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소리쳐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불행한 젊은이는 보물을 포기하면 보물만 잃지만, 물에 빠지면 보석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잃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의 탐욕은 그를 익사하게 만들었고 목숨과 보석 모두를 잃게 되었습니다.
"백작님, 아무리 돈이나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일지라도 만일 위험한 일을 만나면,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신체뿐 아니라 명예에 손상이 되는 일에는 관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거나 탐심으로 가득한 사람을 스스로를 죽음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존경하도록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 존중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존경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일을 해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탐심이나 불명예로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모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스스로를 존중할 줄 아는 참된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하는 법입니다.
* 탐심으로 모험에 나서는 자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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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 출발점을 잃어버린 역사 - (우리 겨레가 작아지게 된 첫 출발점)
우리 겨레는 기마종족의 한 갈래
그렇다면 기마종족이란 어떤 종족을 말하는 것일까? 기마종족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해서, 각 개념들 사이에는 상당한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기마종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각개념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기마종족은 말을 교통수단으로이용함으로써 '교통혁명'을 일으킨 우수한 종족이며, 나아가 북반구의 고대세계를 설명하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주체였다는 점이다. 기마종족을 이해하는 개념이 매우 다양해진 데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다양한 관점도 한몫을 했을 터이지만, 체계적인 기록이나 자료가 부족한 형편도 그만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기마종족의 갈래가 원래부터 다양했고 그들의 생활양식 또한 너무 다양했다는 데 있다. 예컨대 어떤 갈래의 기마종족은 이동범위가 매우 넓은 유랑목축인이었던 반면, 이동범위가 거의 없는 목축인도 있었고, 또 주기적으로 이동을 하는 농경생활인이 있었는가 하면 거의 모든 지역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과연 누가 기마종족의 원류였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인간의 사회적 생활이 가족이나 씨족 등 혈연적인 작은 단위로부터 차츰 확대되어왔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예컨대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부족사회에서 다시 초기국가로, 초기국가에서 고대국가로, 그리고 고대국가에서 근대국가를 거쳐 세계사회로 확대,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은 기마문화가 없는 근,현대 원시종족들(특히 아프리카 종족들)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적 연구결과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상식을 뛰어넘어 교통혁명의 위대함을 이해해야만 기마종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식적 원리를 뛰어넘기 위해 먼저 현대적인 연방국가와는 다른 특이한 연방국가를 가상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적인 연방국가는 자율권(또는 준자율권)을 갖고 있는 지역국가들의 자율적인 합의에 의해 구성되고 운영되는 국가를 가리킨다. 예컨대 50개의 주로 구성된 미국이나 스위스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 연방국가는 결국 땅과 땅의 연방인 셈이며, 이 국가체계에서 영토는 거의 고정되어 있다. 이에 비해 기마종족들이 세웠던 고대세계의 연방은 고정된 영토를 가진 국가체계가 아니었다. 고대세계의 여러 기마종족들은 종족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끊임없이 이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연방은 특정한 지역이 아닌 특정한 종족을 중심단위로 이루어졌다. 기마종족의 연방은 땅과 땅의 연방이 아니라 종족과 종족의 연방으로서 이들의 영토는 늘 유동적이었던 셈이다. 동아시아의 고대세계는 이처럼 여러 기마종족들 사이의 공존과 갈등관계에 따라 크고 작은 연맹체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던 세계였으며, 교통혁명과 농업혁명의 혜택을 고루 받지 못한 여러 토착종족들이 그들의 손에 정복되고 동화되어가던 세계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기마종족들은 차츰 강해졌고 어떤 종족은 도태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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